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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保守도 進步도 짐을 덜라 記憶하되 美化하지 말라”|신동아

“保守도 進步도 짐을 덜라 記憶하되 美化하지 말라”

이문열 作家

  • 김호기 | 연세대 社會學科 敎授

    入力 2015-06-23 15: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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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年 以前의 내게 4 · 19, 5 · 16은 ‘그들만의 리그’
    • 越北(越北) 父親의 記憶, 그리고 緣坐制 노이로제
    • 産業化-民主化 勢力 功過 따지는 作品 執筆 中
    • SNS 廣場民主主義를 憂慮한다
    “보수도 진보도 짐을 덜라 기억하되 미화하지 말라”
    作家 이문열은 우리 時代를 代表하는 小說家 中 한 사람이다. ‘사람의 아들’부터 ‘變更’까지, 평역한 ‘三國志’를 비롯해 그가 發表한 作品들은 韓國人이라면 누구나 한 卷쯤 읽어보았을 것이다. 오늘醫作家賞, 東人文學賞, 李箱文學賞, 現代文學賞, 大韓民國文化藝術賞, 대한민국예술원上, 그리고 프랑스 文化藝術功勞勳章 수勳章까지 이제까지 그가 받은 文學 및 藝術尙은 許多하다.

    이와 同時에 이문열은 論爭의 한가운데 있는 作家였다. 1990年代 中盤 以後 代表的인 保守 作家로 손꼽혀온 그는 進步的 知識人들과 크고 작은 論爭을 벌여왔다. 그는 作家의 創作 空間이자 作家 志望生을 위한 학숙(學塾)으로 京畿道 利川에 ‘副萼문원’을 열기도 했다. 光復 70年을 맞아 그에게 우리 社會의 歷史와 作家 個人의 歷史에 對해 물어봤다. 인터뷰는 5月 26日 그가 居住하는 副萼문원에서 進行됐다.

    김호기 1948年에 태어나셨습니다. 光復 70年과 거의 生을 같이해오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所懷가 어떻습니까.

    李文烈 제 生日이 1948年 5月 18日(陰曆)이에요. 陽曆으로는 國會에서 大統領을 뽑을 때 開票하던 瞬間이었다고 해요. 7月 17日 憲法이 制定됐고, 8月 15日에는 大韓民國 政府가 誕生했습니다. 나라가 세워지고 分斷되던 해에 태어났다는 點에서 光復 못지않은 意味가 있는 것 같아요.

    김호기 저는 1979年에 大學에 入學했습니다. 當時 話題作이던 先生의 ‘사람의 아들’을 印象的으로 읽었습니다. 先生은 서울대 師大 國語敎育科에 入學한 다음 이런저런 經驗을 하고 結局 作家가 되셨습니다. 小說家가 되기로 決心한 理由는 무엇이었는지요.



    李文烈 作家가 되고부터 40年 가까이 繼續 받는 質問 中 하나예요. 그런데 그 答이 자꾸 變해요. 우리가 무엇이 된다는 것은 自己가 되고자 해서 되는 境遇도 있고, 어떤 境遇에는 밀려 밀려 가다가 되는 事例도 있어요. 예전에는 作家가 되고자 해서가 아니라 어쩌다 됐다고 對答했다가,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는 그런 無責任한 對答이 마음에 안 들어서 마음속에 作家가 되고자 하는 그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라는 式으로 答을 하기도 했어요. 제 境遇는 積極的으로 되고자 選擇했다기보다는 生業을 가진 大多數 사람에게서 보듯이 살다보니 그게 第一 하기 쉬웠고 글 쓰는 일이 가깝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만의 리그

    “보수도 진보도 짐을 덜라 기억하되 미화하지 말라”

    自畫像 앞에 선 이문열 作家.

    김호기 ‘사람의 아들’ ‘金翅鳥’ ‘우리들의 일그러진 英雄’ ‘英雄時代’ ‘變更’ 等 그동안 많은 作品을 旺盛하게 發表했고, 文學賞도 많이 받으셨습니다. 그 가운데 ‘英雄時代’와 ‘變更’ 같은 小說은 激動의 우리 現代史를 바라보는 先生의 問題意識이 담긴 代表的인 作品입니다. 우리 現代史는 光復 以後 나라 세우기와 이를 具體化한 産業化 時代, 民主化 時代로 이어져왔습니다. 小說에서도 다뤘지만, 先生에게 李承晩 大統領과 朴正熙 大統領은 어떤 存在였는지요.

    李文烈 내가 中年에 접어들기 前까지 權力을 가진 그 사람들은 모두 다 한 발 떨어져 있는 이들이었어요. 4 · 19, 5 · 16, 10月 維新 等과 같은 政治的 變革은, 내 나이 40代 初盤까지 實感 나는 現實이 아니라 ‘그들만의 리그’였어요. 나는 局外者였지요. 그 까닭은 아마 아버지의 遺産 때문이었을 것이에요. 社會는 살아 있었지만, 나는 緣坐制 같은 것에 抑壓돼서 지냈어요. 어릴 적에 어머니나 내 周邊에 있던 사람들의 影響이 컸어요. 例를 들어 4 · 19 때 어머니가 勞心焦思 걱정하고 못마땅해하신 것은 兄님들이 그 속에 뛰어드는 것이었어요. 自由黨과 민주당이 싸울 때도 어머니는 그들만의 리그처럼 여기면서 우리가 介入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말씀하셨지요.

    김호기 우리 現代史에서 産業化를 연 朴正熙 時代만큼 論難이 큰 時期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先生은 10代에서 20代에 걸쳐 朴正熙 時代를 겪었는데, 이 時代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李文烈 朴正熙 大統領이 처음 大統領 候補였을 때의 公約 中 하나가 緣坐制를 푼다는 것이었어요. 아무도 그런 말을 못할 때였지요. 그 뒤 狀況이 異常하게 풀리면서 自己가 多急해지니까 못 풀었어요. 그래도 最初로 緣坐制를 푼다고 말한 사람이 朴 大統領이지요. 中學校 3學年 때였는데 그게 記憶에 鮮明히 남아 있어요. 個人的으로 朴正熙 時代에 惡感情이 많지는 않았어요. 3選改憲과 維新體制를 지켜보면서 疑心은 가졌지만 切實한 問題意識은 없던 셈입니다. 問題意識이 있었다면 示威나 데모에 參與했을 텐데, 그들만의 리그로 생각했어요. 내가 끼어들어야 할 理由도 없었지만, 그랬다가는 損害를 보게 되는 거니까.

    우리 같은 사람은 北韓으로 간 아버지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한때 ‘日本을 통해 密航해 몰래 아버지를 만나고 6個月 동안 敎育을 받고 와서 뭘 했다’는 嫌疑를 받은 적도 있는데, 내가 6個月 동안 韓國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證明하기가 어려웠어요. 食口들 外에는 證明받기가 어려웠지요. 술집도 한 달에 한 番은 갔지만 그 술집에서 나를 잘 모른다고 했어요. 참 漠漠했어요. 1982年 緣坐制가 풀리고 海外旅行이 자유로워진 後에도 北韓大使館이 있는 나라에 갈 때는 絶對 혼자 가지 않았어요. 내 알리바이를 證明해줄 수 있는 사람과 함께 갔어요. 무슨 指令을 받았다 하는 얘기가 나오지 않도록. 이런 狀態였으니 제게는 그들만의 리그로 보였던 겁니다.

    김호기 先生은 어느 時點부터 政治的 見解를 가졌다고 생각합니까. 우리 社會를 代表하는 作家 中 한 분이지만, 同時에 代表的으로 保守的 見解를 標榜해온 作家이기도 한데요.

    李文烈 1990年代 中盤 乃至 後半일 거예요. 그때 비로소 ‘敵(敵)’ 槪念이 確固해졌어요. 내가 結局 敵 槪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아, 그럼 내가 서 있을 곳은 여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現實’李 된 아버지

    김호기 先生을 뵈면 여쭤보고 싶었던 것 가운데 하나가 아버지에 關한 이야기입니다. ‘英雄時代’가 越北한 左派 知識人과 南韓에 남은 家族의 受難을 그렸다면, ‘變更’은 越北한 아버지를 둔 세 男妹의 成長 過程을 그렸습니다. 先生께 아버지는 어떤 存在였습니까.

    李文烈 아버지는 제게 現實的인 記憶이 全혀 없어요. 滿 두 살 때 헤어졌고, 아버지 寫眞도 남지 않았어요. 어릴 적 하나 있던 寫眞도 없어졌고 나중에 서른 살 때쯤 아버지 親舊 분한테 찾아가 처음 (寫眞을) 봤어요. 홀로 찍은 寫眞은 없었고, 卒業 앨범에 여러 名이 찍은 寫眞이 있었어요. 여덟 名이 찍은 寫眞인데, 親舊 분이 알려주지 않아도 한 番에 알아봤어요. 까까머리들 속에 “이 사람 맞지요?”라고 물어보니까 “알아보네”라고 했습니다.

    제게 全혀 現實的인 사람이 아니었고, ‘變更’에서 一旦의 感情을 表現했지만, 基本的인 感情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같은 게 많이 作用했어요. 아버지에 對해선 普通 兩價的 感情이 作用하잖아요. 한便으로는 그리워하고 다른 한便으로 그가 내게 附與한 나쁜 遺産 때문에 싫어도 하는 것 말이에요. 미워하는 것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아버지였고, 저 사람은 왜 그걸 選擇했을까, 하면서도 同時에 다가가게 되는 存在였어요. 그 사이를 왔다갔다 하던 記憶이 납니다.

    김호기 1990年代 後半 아버지를 만나러 中國에 가기도 하셨습니다. 그때 言論에 크게 報道됐던 것으로 記憶합니다.

    李文烈 1998年 5月 延吉에 가서 迂餘曲折 끝에 北韓에 사는 女同生을 만났어요. 아버지는 그해 3月 돌아가셨다고 하더라고요. 이렇게 1990年代 後半이 되어서야 아버지는 제게 現實的인 사람이 되었어요. 그前까지는 끊임없이 제 行動의 制約原理로 作用했지요.

    김호기 父親의 이야기를 들으니 分斷의 悲劇을 先驅的으로 다룬 최인훈 先生의 小說 ‘廣場’이 떠오릅니다. ‘廣場’을 어떻게 읽으셨는지요.

    李文烈 대단한 作品이지요. 아, 이렇게 이데올로기 얘기를 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以前에 이데올로기를 얘기하는 것은 反共小說밖에는 못 보았는데, 그때 처음으로 이데올로기 問題를 反共小說이 아니어도 다룰 수 있구나, 하는 感動을 받았어요.

    김호기 自身이 살아온 時代를 어떻게 볼 것인지는 作家에게 매우 重要한 課題입니다. 産業化 時代와 民主化 時代를 살아오면서 이 時代를 이끈 産業化 勢力과 民主化 勢力을 어떻게 評價합니까.

    두 勢力의 承認

    李文烈 妙하게도 두 勢力이 가장 큰 힘을 가졌을 때 오히려 相對便을 認定하는 狀態가 되더군요. 近代化 勢力 또는 産業化 勢力이라는 말을 들은 게 1990年代 中盤 以後일 거예요. 1990年代에 들어와 우리 社會는 民主化가 本格的으로 進行됐어요. 그들이 權力으로 나타난 것은 1998年이지만. 그때 近代化 勢力, 또는 産業化 勢力이라는 말이 생겨나더군요. 또 1980年代에 그렇게 苛酷하게 抑壓했는데 民主化라는 말이 저절로 社會的인 勢力으로 登場했어요. 그前에도 많은 사람이 示威도 하고 데모도 했지만 그때에는 民主化라는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거든요. 이런 것을 보면서 近代社會의 ‘非同時性의 同時性’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것을 느꼈어요. 相對方에 對한 承認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個人的으로 妙한 氣分이 들었어요.

    김호기 先生이 보시기에, 民主化 勢力이 먼저 登場하고 그 다음에 産業化 勢力이 나타났다는 것인지요.

    李文烈 1980年代에 近代化 勢力 또는 産業化 勢力도 原形을 가지고 安着했고, 그때 民主化 勢力도 그前까지 불리던 이름과는 달리 民主化 勢力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어요. 그 社會的 承認은 民主化 勢力에 對해 먼저 이뤄졌고, 그들이 먼저 主導權을 잡은 뒤에 産業化 勢力의 承認이 이뤄졌어요. 내가 꼭 쓰고자 하는 게 있는데, 이 두 勢力이 自己 자리를 잡아가는 過程이에요. 그過程이 1980年代에 이뤄졌다고 봅니다.

    김호기 ‘英雄時代’의 續篇이라고 할 수 있는 ‘變更’은 題目부터 印象的이었습니다. 1986年에 執筆을 始作해 1998年에 12卷을 完刊하셨습니다. 世界的으로 보면 韓半島는 美國과 蘇聯의 變更입니다. 光復 70年인 現在의 時點에서 우리 現代史를 돌아보면 날카로운 問題意識이라 할 수 있습니다. ‘變更’에 담으려 한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李文烈 美國과 蘇聯이라는 두 帝國의 變更이 우리 韓半島에서 만난 셈이지요. 變更이 만났을 뿐 아니라 韓半島는 相對方에게 自己 世界를 보여주는, 美國과 蘇聯의 쇼윈도가 됐어요. 普通 帝國은 變更에 搾取를 加하기보다 오히려 쇼윈도를 가꾸게 돼요. 쇼윈도를 통해 自己 制度의 優秀性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지요. 이러한 變更에서 살아가는 삶의 모습들을 담고 싶었습니다.

    김호기 우리 現代史의 社會變動에는 外人(外因)의 影響力이 컸습니다. 하지만 外人 못지않게 內인(內因)도 重要했습니다. 波瀾萬丈한 激動의 現代史를 생각해보면, 내인, 다시 말씀드리면 內部의 責任도 크지 않았을까요.

    “보수도 진보도 짐을 덜라 기억하되 미화하지 말라”

    京畿道 利川의 副萼문원에서 만난 이문열 作家와 김호기 敎授.

    ‘冊 葬禮式’을 돌아보며

    李文烈 只今이야 東西對立이 重要하지만, 1945年까지만 해도 注目할 것은 南北對立이었어요. 서울-平壤 蹴球大會가 가장 흥미로웠고, 또 對立이 甚했어요. ‘變更’에도 그런 것이 나와요. 內人과 關聯해서는 統一에 對해 말하고 싶어요. 統一을 생각할 때 外部의 에너지만 얘기하면 計算이 잘 안 나와요. 內部의 에너지도 얘기해야지요. 分斷 狀態를 解消하기 위해서는 分斷 狀態를 만든 에너지 以上이 투여돼야 하는데, 우리가 어디까지 에너지를 들여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內部의 에너지를 잘 計算해야 한다는 말을 한 적도 있어요.

    김호기 2000年代 中盤 ‘變更’을 絶版했습니다. 2001年 先生의 冊들에 對해 不買運動을 벌이고 불태운 이른바 ‘冊 葬禮式’ 事件이 있었습니다. 如前히 鮮明히 記憶되는 事件입니다. 表現의 自由를 重視해야 할 民主主義 社會에서 冊을 불태우는 行爲는 容納하기 어렵습니다. 돌아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李文烈 ‘變更’을 絶版한 건 冊 葬禮式 事件 때문만은 아니고 나름대로 다른 理由가 있었어요. 어떤 內容에 對해서는 不確實한 것들을 얘기한 게 있어서 時間을 갖고 싶었어요. 지난해 改訂版을 냈어요. 冊 葬禮式에는 이데올로기보다 地域色이 더 많이 作用했다고 생각해요. 以後 나를 除外시킨 勢力을 보면, 그때 葬禮式 當時 發動된 에너지의 連續인 境遇가 많았어요. 내가 地域主義자라는 메시지였어요. 只今은 이데올로기 問題인지, 地域感情 問題인지 잘 區分되지 않지만, 冊 葬禮式은 이데올로기的으로만 얘기하기 어려운 部分이 있었어요.

    김호기 ‘變更’에 이은 새 作品을 構想 中인 것으로 압니다. ‘變更’에서 1960年代 前後를 다뤘으니 以後의 時代를 注目하는 건가요.

    李文烈 앞서 얘기했듯이 제가 쓰고자 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民主化 勢力과 産業化 勢力에 關한 것이에요. 1980年代 狀況으로 한番 說明해보려고 해요. 元來는 길게 쓰려 했는데, 요즘은 긴 게 잘 안 읽히니까 3500~4500枚로 3卷 程度 생각하고 있어요. 거기서 第一 공들이는 게 産業化 勢力과 民主化 勢力의 問題예요. 두 勢力에 對해 現在 客觀的이고 공정하게 評價하느냐, 그것을 따져볼까 해요. 달리 말하면, 不當利得을 取한 적이 없느냐, 어느 쪽의 價格이 不當하게 引下되느냐, 그런 것들을 다뤄볼까 해요.

    김호기 1980年代는 뜨거운 時代였습니다. 産業化 勢力과 民主化 勢力이 本格的으로 부딪치고 競爭限 時期로 記憶됩니다. 저는 20代였는데, 只今은 제 생각이 적잖이 바뀌었지만, 一種의 思考의 原形으로 存在하는 時代였습니다.

    李文烈 方今 말한 作品에서 社會的 記憶의 公正性이나 穩當함에 對한 診斷도 해보고 싶어요. 只今 내가 느끼는 것은 槪念에 對한 評價나 理解에 큰 偏差가 있는 것 같다는 點이에요. 過去에 對한 社會的 記憶이 여러 要素와 함께 作動하면서 만들어지는 게 바로 現在이지요. 그것에 對해 檢討하려고 해요. 이 問題를 다루다보면 民主化 勢力과 産業化 勢力의 原形과 正體를 다시 한 番 살펴볼 수 있겠고요.

    김호기 産業化 勢力과 民主化 勢力을 代表하는 政治家는 朴正熙 大統領과 김대중 大統領입니다. 어떻게 評價합니까.

    李文烈 朴正熙 大統領한테는,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든 것이 있어요. 김대중 大統領은 있던 것을 活用하고 綜合한 셈이고요.

    김호기 先生의 小說들을 보면 自然스레 ‘儒敎的 敎養主義’가 떠오릅니다. 先生의 事由를 支撐하는 價値의 하나는 ‘嶺南 南人’에 起源을 둔 兩班意識 같기도 합니다. 敎養主義는 西歐에서 볼 수 있듯 近代的 德目이지만, 儒敎는 아무래도 傳統的 價値입니다. 小說 ‘選擇’을 놓고 페미니스트들과 論爭한 적도 있는데, 先生에게 傳統이란 무엇인지요.

    다 안고 가려 해선 안돼

    李文烈 普通 사람들이 가진 父性(父性)에 對한 基本的인 依存을 저 亦是 갖고 있어요. 故鄕의 傳統이나 文化는 아버지의 文化지요. 現實的인 아버지가 아니었고, 일찍부터 父性이 차지하는 자리를 故鄕과 故鄕의 價値 및 傳統, 이런 것들이 代身해준 것 같아요. 故鄕의 傳統과 文化를 얘기할 때 늘 아버지를 떠올려요. 아버지가 했어야 한 일을 故鄕이 代身해준 것 아닌가 하는.

    김호기 제 故鄕은 京畿道 洋酒입니다. 初等學校 때 洋酒를 떠났지만 어릴 적 體驗은 나이가 들어서도 繼續 影響을 미쳤습니다. 돌아갈 수 있는 故鄕이 있다는 事實이 幸福한 것 같습니다.

    李文烈 故鄕인 慶北 營養에 다시 간 것은 初等學校 5學年 때였어요. 그 以前의 故鄕은 記憶을 못했어요. 7歲 때 떠나서 오랜만에 갔어요. 故鄕에 가자마자 옛날에 살던 집을 찾아갔는데 못 찾았어요. 나는 故鄕집을 큰 것으로 記憶했어요. 나중에 보니 그 ‘性(城)’은 없고 다 쓰러져가는 집이 있었어요. 누가 집을 바꿨나 해서 물어보니 저 집이 맞다는 거였어요. 어머니가 若干 誇張해서 알려준 理由도 있었겠지만, 살림이나 兩班的 傳統 같은 것을 엄청 키워서 알고 있었던 거예요. 故鄕의 다른 것들, 例를 들어 文化的 傳統 等은 다 誇張된 것 아닌가요. 그런 것들이 나를 떠받치고 志向을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보수도 진보도 짐을 덜라 기억하되 미화하지 말라”

    ‘나는 누구인가?’ 自身의 頭像을 바라보는 이문열 作家.

    김호기 理念論爭에 對해 여쭤보고 싶습니다. 民主化 時代가 열린 以後 保守와 進步 間의 理念論爭이 熾烈하게 벌어졌습니다. 우리 社會 進步左派의 問題點은 뭐라고 생각하시는지요.

    李文烈 나는 保守派를 自處하지만, 進步左派는 너무 많은 짐을 실은 배 같아요. 全혀 다른 反對 소리를 내는 境遇가 많지요. 그런데 保守右派든 進步左派든, 定義부터 確定하고 論爭을 하면 좋겠어요. 自己가 左派인 줄 모르는 이도 많고, 自己가 右派인 줄 모르는 이도 많아요.

    김호기 2003年 한나라당 總選 公薦審査委員을 맡기도 했습니다. 保守右派들에게 忠告를 한다면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는지요.

    李文烈 짐을 좀 덜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짐을 다 들고 갈 必要는 없어요. 親日派, 李承晩 等을 包含해서 얘기하면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어요. 어떤 部分에서는 李承晩 大統領이 復權되는 데 同意해요. 하지만 그를 둘도 없는 國富(國父)로 만드는 데는 反對해요. 保守는 지나간 歲月과 죽은 사람들의 行跡 및 수고에 對해 記憶하는 것으로 充分해요. 그것을 美化해서 잘못까지 바꾸는 것은 問題예요. 保守도 짐을 좀 덜고 整理할 것은 좀 整理해야 해요. 다 안고 가려 하지 말고요. 앞의 사람들이 苦生해서 만든 것이라고 해서 모두 좋을 수는 없어요. 좀 덜어야 하는데 保守派들이 그걸 잘 못하는 것 같아요.

    걱정스러운 集團知性

    김호기 어떤 小說을 最高의 作品이라고 생각합니까. ‘우리들의 일그러진 英雄’은 제가 工夫하는 社會學의 視角에서 볼 때 權力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番 생각하게 해줬습니다.

    李文烈 ‘詩人’이라는 作品이 있는데, 이 小說을 最高로 꼽고 싶어요. 이番에 체코語版이 나와서 다녀왔는데 外國에서 많이 팔리기도 했고 評價도 좋았어요. 12~13個國에서 出刊됐어요. 金삿갓으로 알려진 金炳淵을 다룬 이 作品은 제 自傳的인 얘기와 비슷해서 그런지 愛着이 가요. ‘우리들의 일그러진 英雄’도 外國에서 좋은 評價를 받았습니다.

    김호기 평역하신 ‘三國志’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只今까지 1800萬 部 팔린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李文烈 ‘三國志’는 내게 孝子 같은 冊이에요. 否定的 人物로 그려지던 曹操를 再評價하기도 했고요.

    김호기 作家가 된 지 어느덧 40年이 가까워옵니다. 個人的인 所望과 社會的인 所望을 한 가지씩 말씀해주시지요.

    李文烈 個人的으로는 當然한 얘기이겠지만, 作家 生活을 제대로 마감하는 것이에요. 社會的으로는 우리 社會의 意識的 狀況에 對해 작지 않은 憂慮를 갖고 있어요. 特히 우리 社會가 過度하게 直接民主主義의 廣場으로 끌려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많아요. 代議民主主義는 우리에게 오래 익숙한 옷과 같은 것이에요. 人口가 이렇게 많으니 重要한 決定은 國會와 裁判에서 하는 거지요. 個人的인 計定이 없지만 어떤 때는 일부러 SNS에 들어가 보기도 하는데, 集團知性이 걱정스러울 때가 있어요. 제가 過敏하게 反應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社會의 많은 意思決定이 SNS를 통해서 이뤄져요. 이런 意思決定은 檢證이 안 된 것이고, 多數라고 해도 그게 多數가 맞는지 모르겠어요. 이런 直接民主主義 意思決定이 우리의 앞날을 잘 이끌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보수도 진보도 짐을 덜라 기억하되 미화하지 말라”
    김호기 社會學 硏究者로서 21世紀는 代議民主主義와 參與民主主義가 生産的으로 結合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特히 情報社會의 進展은 大衆이 意思決定에 直接 參與하는 參與民主主義의 要求를 强化해온 셈입니다.

    李文烈 둘 사이의 適切한 分業이 必要해요. 한쪽에는 能力과 專門性의 領域이 있고, 다른 쪽에는 廣場民主主義가 存在해요. 問題는 廣場民主主義가 너무 커지고, 境遇에 따라서는 大衆을 煽動할 수도 있다는 거지요. 게다가 SNS로 대표되는 廣場民主主義는 文化가 가져야 할 熟慮(熟慮)의 要素를 빼앗고 있어요. 文化에는 깊은 熟慮가 必要한 法이에요. 한 時間 程度는 생각해보고 얘기해야 하는데, 5分 以內로 빨리 말해버리는 거지요. 이렇게 熟慮 過程을 省略하는 버릇에 對해 큰 憂慮를 갖고 있어요.

    김호기 긴 時間 感謝드립니다. 여기 副萼문원에 와보니 周圍 風光이 아주 좋습니다. 내내 健康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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