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泰山에 올라 天下가 작음을 알다|신동아

泰山에 올라 天下가 작음을 알다

魯 - 豪放하고 義理 있는 이웃

  • 글 · 寫眞 김용한 | 中國硏究가 yonghankim789@gmail.com

    入力 2015-06-26 11: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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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天惠資源이 豐富한 산둥은 예부터 孔子, 姜太公, 諸葛亮 等 傑出한 人材를 많이 輩出했다. 산둥人은 豪放하고 義理가 있어 ‘親舊 삼기 좋은 사람’으로 통한다. 이런 산둥과 韓國은 古朝鮮 때부터 오랜 因緣을 맺어왔다.
    태산에 올라 천하가 작음을 알다
    “바닷물이 짜다는 말이 事實이네!”산둥성 칭다오의 바닷가에서 中國 少女들은 바닷물을 맛보며 즐거워했다. 바닷물이 짜다고 배웠어도 內陸에 사는 中國人들은 바다 볼 일이 없으니 그 말이 眞짜인지 아닌지 直接 確認할 道理가 없다. 저 少女들은 世上이 얼마나 넓고 神奇함으로 가득 차 있는지를 깨달았기에 저토록 즐거워하는 거겠지. 오늘의 첫 經驗을 平生 간직하며 더 넓은 世上을 꿈꾸겠지.

    어린 少女들뿐만이 아니다. 칭다오에 놀러온 中國人들은 男女老少 가리지 않고 바닷물을 발로 차고, 바닷가에서 조개를 캐며 一生에 하기 드문 바다 體驗을 즐기고 있었다. 內陸國家 中國의 特性을 엿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바닷가에 사는 中國人들은 산둥이 別로 안 神奇할까. 2泊3日間 汽車를 타고 푸젠에서 산둥까지 온 親舊는 “산둥은 온통 平野구나!”라며 感歎했다. 장저우 山골에서 태어나 山이 많은 푸젠에서 자랐기에 산둥의 넓은 平野가 마냥 색다르게 느껴진다고 한다.

    中院 平野와 黃海 바다가 만나는 곳. 산둥省은 땅과 물의 利點을 活用해 일찍부터 富强함을 자랑하던 곳이다.

    東夷의 땅



    산둥省의 略稱은 ‘魯나라 盧(程子는 魯)’ 자다. 우리에겐 孔子의 故鄕으로 친숙한 곳이다. ‘산둥(山東)省’은 태행산(太行山)의 東쪽이라는 意味로 붙은 이름이다. 한족들이 黃河 中流, 태행산 西쪽의 中原에 살 때 東쪽에 사는 오랑캐들을 뭉뚱그려 ‘東夷(東夷)’라고 불렀다. 산둥 地域은 內耳(萊夷) 等 여러 異民族이 살던 東夷의 땅이다.

    산둥은 周나라 初期 때 中國에 包攝됐다. 朱武王(周武王)은 一等功臣 姜太公을 齊나라의 諸侯로, 조카를 魯나라의 諸侯로 봉했다. 才能이 뛰어나지만 한 핏줄이 아니라 王室에 威脅이 될지도 모를 姜太公을 邊方으로 보내 새 領土를 開拓하게 하고, 그 中間에 親戚을 둬 祭를 牽制하게 했다.

    當時 제 地域은 한족의 未開拓地였고 內耳의 勢力이 剛해 基盤 닦기가 만만찮았다. 그러나 軍略과 內政에 모두 뛰어난 姜太公은 成功했다. 司馬遷이 經濟를 論하며 제나라를 첫 事例로 꼽을 만큼 提議 成長은 눈부셨다.

    以前에 太公望이 永久(營丘)에 封해졌을 때, 그곳 땅은 소금氣가 많고 百姓이 적었다. 그래서 太公望은 婦女子들의 길쌈을 奬勵해 技術을 높이고, 또한 各地로 生鮮과 소금을 流通시켰다. 그러자 사람과 物件이 줄을 지어 잇달아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齊나라는 天下에 管, 띠, 옷, 神을 供給하였고, 東海와 泰山 사이의 諸侯들은 옷과 棺을 바로하고 齊나라로 가서 照會하였다.

    -司馬遷 ‘詐欺’ 中 ‘貨殖列傳’

    齊나라는 名宰相 觀衆을 만나 全盛期를 맞았다. 商人 出身으로 經濟에 밝은 觀衆은 富國强兵의 計策을 묻는 제환공에게 明快하게 答한다. “農民들의 일할 時間을 빼앗지 않으면 그들은 富裕해질 것입니다. 家畜을 빼앗지 않으면 소와 羊이 蕃盛할 것입니다.” 觀衆은 日常 領域은 自由放任하고, 當時의 核心 戰略産業인 鐵과 소금은 國有化해 短時間에 제나라를 天下의 霸者로 만들었다. 齊나라는 春秋時代 140餘 나라 中 ‘베스트 5’인 春秋五霸(春秋五覇)였고, 戰國時代 戰國七雄(戰國七雄) 中에서도 富强한 나라에 屬했다.

    한便 魯나라는 株王室과 가장 가까운 親戚으로서 正統性이 强했다. 魯나라는 王室과 密接한 關係를 維持하며 周邊 强大國들의 力學關係를 살폈다. 뛰어난 情報力과 大義名分에 立脚한 外交로 名分과 實利를 모두 챙겨 國力 以上의 實力을 發揮했다. 孔子는 魯나라의 力量을 學問的으로 體系化했다. 孔子의 六藝(六藝)인 예(禮), 악(樂), 社(射), 어(御), 서(書), 數(數)는 政治外交, 文化藝術, 國防, 行政, 經濟 等을 總括하는 實用學問이었다.

    태산에 올라 천하가 작음을 알다

    우리 귀에 익은 泰山(泰山)은 산둥省에 자리하고 있다. 높이는 1532m로 白頭山, 漢拏山보다 한참 낮다.



    泰山, 黃河, 孔子

    산둥省은 ‘제노의 땅(齊魯之地)’으로서 齊나라의 하드 파워와 魯나라의 소프트 파워가 調和를 이룬 곳이다. 드넓은 平野에 黃河와 祭需(濟水)가 흐르고, 三面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豐富한 物産을 바탕으로 農水産業이 中國 內 1位, 人口가 9637萬 名으로 2位다. 地下資源도 豐富해 金, 은, 硫黃, 石膏 埋藏量이 中國 1位, 石油는 2位다. 豐富한 資源 德에 예부터 基礎産業과 交易이 發達했다. 地理的 要衝이기도 해서 內陸으로는 中國의 兩大 都市 베이징과 상하이를 잇고, 海外로는 韓國, 日本과 通한다.

    人才도 많다. 800年 周나라의 歷史를 연 姜太公, 齊나라를 春秋時代 첫 番째 敗者로 만든 觀衆, 智略의 代名詞 諸葛亮은 中國史 最高의 名宰相이다. 뛰어난 思想家도 많아 儒家의 孔子와 孟子, 墨家의 北字, 病暇의 孫武 · 孫臏 · 誤記 等 諸子百家의 代表的인 人物들이 산둥에서 活躍했다. 山과 바다를 끼고 있는 神祕한 自然은 道敎와 文學에도 影響을 줬다. 全眞敎를 발전시킨 丘處機 等 前震七子(全眞七者), 中國 最高의 才談家로 손꼽히는 東方朔, 판타지 小說 ‘聊齋志異(聊齋志異)’를 쓴 蒲松齡度 산둥人이다.

    태산에 올라 천하가 작음을 알다

    바닷물을 맛보며 즐거워하는 中國 어린이들(危). 아래는 中國 傳統 建築物과 近代 獨逸 建物들이 어우러져 獨特한 個性을 發散하는 칭다오.

    大丈夫의 風貌

    이처럼 산둥은 자랑거리가 많다. 그러나 豪放한 산둥人은 한마디만 한다. “하나의 산, 하나의 江, 하나의 사람!” 하나의 山이란 山의 代名詞 泰山이요, 하나의 江이란 中華 文明의 젖줄인 黃河요, 하나의 사람이란 至高無常의 聖人 孔子를 가리킨다. 中華의 精髓가 모두 산둥에 있다는 말이다.

    ‘갈수록 泰山’ ‘걱정이 泰山’ ‘티끌 모아 泰山.’

    泰山에 對한 말은 너무나 많아서 마치 옆 洞네 山처럼 親近하다. 높은 山의 代名詞인 泰山은 얼마나 높을까. ‘泰山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라는 말이 생길 만큼 높다면 海拔 3000m? 5000m? 意外로 泰山의 頂上 높이는 1532m에 不過하다. 白頭山, 漢拏山은 고사하고 德裕山, 太白山보다도 낮다. 北韓을 除外하고 南韓의 山만 따져도 10位圈 안에도 들지 못하는 높이다.

    그렇다면 왜 泰山이 山의 代名詞가 됐을까. 東쪽은 太陽이 떠오르고 萬物이 始作되는 곳이다. 中院人에게 黃海가 始作되는 산둥半島는 世上의 끝이었다. 泰山은 華北平野에 우뚝 서서 太陽이 솟구치는 바다를 바라본다. 森羅萬象을 기르는 太陽에 所願을 빌기에 完璧한, 天然의 祭壇이다. 秦始皇이 泰山에서 天下統一을 完遂했음을 하늘에 告하고(封) 땅에 알리는(禪) 封禪儀式을 行한 以來 韓武帝, 光武帝, 唐高宗, 康熙 · 乾隆帝 等 傑出한 皇帝들이 泰山에서 天下의 安寧을 빌었다.

    게다가 孔子는 泰山에 올라 “天下가 작다”고 말한 바 있다. 또한 儒學이 東아시아의 支配思想이 되자 泰山은 中華文明의 精髓가 깃든 곳으로 昇華한다. 女眞族의 淸나라가 中國을 征服한 後 康熙帝는 “泰山의 脈이 長白山에서 온다(泰山山脈自長白山來)”고 主張했다. 泰山은 한족의 山이고 長白山은 女眞族의 山이지만 本來 한 뿌리에서 나온 것처럼, 한족과 女眞族은 한집안이나 다름없다는 論理다. 그러면서도 根本은 長白山이듯 女眞族이 優越하다는 것을 暗示했다. 泰山은 그냥 山이 아니라 高度의 政治的 · 文化的 象徵이 된 ‘中國의 올림푸스’다.

    “孔子가 泰山에 올라 天下가 작다고 했듯이, 바다를 보면 웬만한 물은 물로 보이지 않고, 聖人을 만나면 웬만한 말이 말로 들리지 않는다.”

    이러한 孟子의 말은 산둥人의 豪放함을 代辯한다. 산둥人은 泰山에 올라 天下가 작음을 알고, 바다를 봐서 큰물을 알며, 孔孟의 가르침을 받아 의로움을 안다. 浩然之氣 가득한 大丈夫가 되지 않을 수 없는 노릇. 中國에서 산둥人은 “豪放하고 義理가 있어 親舊로 사귀기에 좋다”고 定評 나 있다. “南方人은 한 푼의 돈을 지키기 위해 싸우지만, 산둥人은 한 마디의 말을 지키기 爲해 싸운다”고 한다.

    산둥人은 體格이 커서 大丈夫다운 風貌가 더욱 돋보인다. ‘산동大寒(山東大漢)’답게 孔子는 9隻6寸, 諸葛亮은 8隻의 長身이었다. 튼튼한 體力에 强靭한 生活力을 갖춘 산둥人은 亂世에는 亂離를 일으키는 盜賊이 되기도 으뜸이고, 亂離를 平定하는 軍人이 되기도 으뜸이다. 평화로울 때는 瘠薄한 땅을 앞장서 일구는 開拓者이자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일꾼이 된다.

    後漢末 淸州(靑州 · 當時의 산둥)에서는 黃巾賊이 크게 활개쳤다. 曹操는 討伐한 黃巾賊을 淸酒甁(靑州兵)으로 組織해 麾下에 거느렸다. 淸酒甁은 曹操의 最精銳 部隊로 曹操가 三國時代 最大의 勢力이 되도록 도왔다. 松末 산둥의 梁山泊에서는 松江 等 36人의 盜賊이 날뛰었다. 송 調整은 盜賊 討伐에 成功했지만, 金나라에 밀려 康男으로 쫓겨난다. 그리고 산둥의 殘存 官軍과 盜賊을 충의군(忠義軍)이라는 遊擊部隊로 만들어 金나라의 後方을 攪亂케 한다. 後날 이들의 이야기는 小說 ‘水滸誌’의 모티프가 됐다.

    底力이 된 植民 遺産

    淸末에는 義和團運動이 산둥에서 始作됐고, 中國 人民解放軍에 산둥 出身 將軍이 많아 軍內 산둥 人脈이 산둥房(山東幇)이라고 불렸다. 산둥人은 평화로울 땐 성실한 일꾼이었다. 淸代 베이징은 級數 施設이 좋지 않아 물장수가 많았는데, 大部分이 산둥人이어서 “산둥人이 장사 안 하면 베이징 우물물 모두 마르里”라는 노래가 있었다. 東北3星 開發 前에는 많은 산둥人이 그곳으로 移住해 荒蕪地를 開墾했다. 英國은 홍콩을 統治할 때 南部 中國人보다 體格 좋고 規律이 잘 잡힌 산둥人을 홍콩 警察로 많이 採用했다.

    칭다오 旅行 中에 만난 항저우 사람은 “칭다오가 항저우보다 더 아름다운 것 같다”고 했다. 中國人은 自己 故鄕에 對한 自負心이 剛하고, 特히 항저우는 “하늘엔 天堂, 地上엔 항저우가 있다”고 할 만큼 아름답기로 有名한 곳이다. 그런 항저우에서 온 사람이 이토록 칭다오를 稱讚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작은 漁村 마을 칭다오가 항저우 사람들을 感歎시킬 만큼 變한 것은 獨逸 德分이다. 빌헬름 2世는 中國으로부터 칭다오를 99年間 割讓받고 大大的으로 開發했다. 中國 攻掠을 위한 核心 軍港이자 貿易港으로 만들려는 野心 찬 計劃에서였다. 붉은 지붕, 花崗巖 壁의 獨逸 古典 建築物이 櫛比하게 들어섰다. 칭다오에 온 캉유웨이는 “붉은 기와에 푸른 나무, 파란 바다에 쪽빛 하늘, 中國 第一이로다(紅瓦綠樹,碧海藍天,中國第一)”라고 讚辭를 보냈다.

    칭다오와 獨逸의 因緣은 뿌리 깊다. 獨逸이 1903年 세운 칭다오 釀造場은 中國의 代表 麥酒 ‘칭다오 麥酒’가 됐고, 비스마르크 兵營은 中國海洋大學校가 됐다. 改革 · 開放 時期 칭다오의 한 中小企業은 獨逸 립헤르(Liebherr)社와 合作해 冷藏庫를 만들었고, 後날 립헤르의 中國式 發音으로 이름을 고쳤다. 오늘날 世界 最大의 白色家電 會社 하이얼이다.

    “칭다오에선 洪水 날 念慮가 없어요. 아무리 暴雨가 쏟아져도 금세 빠져나가죠. 옛날에 獨逸人들이 지어놓은 下水道는 車가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넓답니다. 獨逸人들이 100年 前에 지은 建物도 如前히 튼튼해요. 그런데 中國人이 지은 建物은 入住하기도 前에 금이 가고 무너진다니까요.”

    臺灣 知識人 禹샹後이는 칭다오 女性에게서 이런 말을 듣고 “칭다오 사람이 獨逸에 느끼는 親近함은, 臺灣人이 日本에 느끼는 親近함에 決코 뒤지지 않을 것”이라고 評價했다. 屈辱的인 歷史로 植民地가 됐지만, 植民 遺産은 後날 底力이 됐다. 强制 開港된 中國 阼階 港口의 特性을 칭다오 亦是 갖고 있었다. 世上萬事 塞翁之馬인가.

    노태우 前 大統領은 산둥省을 訪問해 이곳이 自己 祖上의 故鄕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노(盧)氏가 姜太公의 江(姜)氏에서 나온 姓氏라는 意味였지만, 中國 言論은 “나무의 키가 1000隻을 넘어도 잎사귀는 떨어져 뿌리로 돌아간다(樹高千尺落葉歸根)”라며 큰 關心을 보였다. 산둥과 韓國의 因緣을 喜劇的으로 보여준 逸話다.



    태산에 올라 천하가 작음을 알다

    門前成市를 이루는 산둥 술집들, 고풍스러운 建物과 現代化된 商店이 婚材하는 칭다오, 1970年 中國에서 設計·乾燥한 最初의 驅逐艦인 至難함(중국해군박물관), 칭다오 바닷가(왼쪽부터).

    ‘仁川廣域市 칭다오區’

    태산에 올라 천하가 작음을 알다

    獨逸人들이 1934年 세운 性 미카엘 聖堂. 칭다오 舊市街地의 랜드마크다.

    산둥과 韓半島는 歷史의 첫 段階부터 질긴 因緣을 맺었다. 古朝鮮이 紀元前 2333年에 建國됐다고 하지만 事實 歷史的 根據가 不足하다. 그런데 古朝鮮의 存在를 歷史的으로 證明해준 것이 바로 산둥이다. 紀元前 7~6世紀에 쓰인 ‘管子(管子)’에 齊나라가 古朝鮮과 交易했다는 記錄이 있다. 古朝鮮이 最小限 紀元前 7~6世紀에는 外國과 交易하는 勢力으로 成長했음을 보여준다. 同時에 養子 交易의 歷史가 얼마나 뿌리 깊은 지도 보여준다.

    그럴 수밖에. 白翎島와 산둥 淸算터우(成山頭)의 距離는 不過 180km다. 서울~全州 간 直線距離와 비슷하다. “仁川에서 닭이 울면 산둥人이 잠에서 깬다”는 俗談이 있을 程度다. 산둥과 韓國은 서로의 痕跡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全 世界에 퍼진 華僑의 相當數는 푸젠과 광둥 出身이지만, 韓國의 化敎는 산둥 出身이 많다. 1944年 統計에 따르면 朝鮮 華僑의 約 90%가 산둥 出身이다.

    산둥은 우리 食生活에도 큰 影響을 미쳤다. 韓國人이 사랑하는 배추김치와 짜장면은 산둥에 빚을 지고 있다. 배추는 산둥이 原産地이고, 單語 自體도 中國語 ‘바이差異(白菜)’에서 派生됐다. 짜장면이 仁川埠頭에서 일하던 산둥 勞動者의 끼니였던 것은 널리 알려진 事實.

    逆으로 韓國人도 산둥에 많이 산다. 칭다오에서 偶然히 韓國人 한 사람을 만났다. 10年째 칭다오에서 살고 있는 컴퓨터 프로그래머였다. “칭다오에선 韓國人 만나기도 쉽고 韓國 看板도 많이 볼 수 있네요”라고 말하자, 그는 말했다. “仁川廣域市 칭다오區죠”

    산둥은 中國에서 韓國人이 가장 많이 살고, 東北3城을 除外하면 가장 많은 朝鮮族이 사는 地域이다. 2013年 現在 中國에 居住하는 35萬 名의 韓國人 中 8萬 名(23.8%), 朝鮮族 222萬 名 中 20萬 名(9.2%)李 산둥에 산다. 그만큼 交易도 活潑하다. 2012年 基準, 韓國의 中國 星 · 市別 直接投資 累計額 比重에서 산둥은 22.1%를 차지해 1位인 장쑤(22.3%)와 거의 差異가 없었다.

    가까운 만큼 다투기도 쉽다. 한 武帝가 古朝鮮을 치기 위해 滄海郡을 設置할 때 산둥 百姓들이 들고일어났다. 滄海郡을 設置하기 위한 인프라를 마련하려면 隣近 地域인 산둥의 人力과 物資를 크게 消耗해야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산둥은 韓半島 危機管理를 爲한 核心 地域이다. 中國은 全國을 總 7個의 郡區(軍區)로 나눠 管理한다. 郡區別 戰鬪力 順位는 首都인 베이징 郡區가 1位, 北韓 · 러시아와 國境을 맞댄 선양軍區가 2位, 산둥의 지난군구가 3位다. 特히 至難郡區엔 中國의 最强 海軍人 北海艦隊 本部가 있다. 地圖를 보자. 首都 베이징이 中國의 목구멍이라면, 그 목구멍을 감싸며 保護하는 이빨은 산둥 · 랴오둥 半島이고, 입술은 黃海와 渤海(渤海)다. 산둥半島는 베이징을 防禦하는 海洋 沮止線인 同時에, 밖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前進 基地다. 反對로 占領軍의 處地에서는 中國의 숨筒을 조일 수 있는 要衝地다.



    산둥人은 ‘술 바다’ 船員

    산둥과 韓國은 너무나도 가까워 平和的이든 敵對的이든 交流를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關係다. 모쪼록 언제나 和睦하게 술盞을 나누는 사이이기를 바란다. 事實 산둥과 韓國의 共通點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술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孔子는 엄청난 大酒家였다. ‘論語’에서 孔子는 “술의 量에 制限이 없지만 取하지 않았다(唯酒無量 不及亂)”는 證言이 나올 程度다. 三國時代 曹操가 穀物 不足 때문에 禁酒令을 내리려 할 때, 孔子의 20代孫인 共融은 금주령에 反對했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술의 德을 讚揚해야 할 것이오. 요 임금께서 1000盞의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태평천하를 세울 수 없었을 것이고, 孔子도 10말의 술을 들지 않았다면 聖賢으로 불리지 못했을 것이오. 홍문의 會合에서 한 高祖를 求한 繁噲가 돼지고기와 1000盞의 술이 없었다면 어찌 勇猛함을 떨칠 수 있었겠소. 漢 高祖가 술에 醉해 百事를 베지 않았다면 어찌 큰 뜻을 펼칠 수 있었겠소. 이로 보건대, 술이 어찌 政治를 저버린단 말이오?”

    태산에 올라 천하가 작음을 알다
    金 龍 한

    1976年 서울 出生

    연세대 物理學科, 카이스트 Techno-MBA 專攻

    前 하이닉스반도체, 國防技術品質院 硏究員


    그 後孫답게 오늘날의 산둥人度 술을 사랑한다. 오죽하면 “산둥의 經濟는 술의 바다 위에 떠 있고, 산둥 사람은 이 바다의 船員”이라는 말이 있겠는가? 每年 8月 칭다오에서는 麥酒祝祭가 열린다. 豪放한 산둥人과 술을 마시며 親舊가 돼보자. 中國의 엄청난 人波는 堪當해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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