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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韓日 歷史의 터부를 부수는가|신동아

나는 왜 韓日 歷史의 터부를 부수는가

김옥균·광개토太王非 그리는 漫畫家 야스히코 요시카즈

  • 김영림 | 日本 通信員, 軍事評論家 c45acp@naver.com

    入力 2014-05-21 13: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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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運動圈 學生에서 漫畫家로 變身, 그리고 歷史를 보다
    • 韓日關係詞에서 金玉均과 安重根의 比重은?
    • 政治를 위해 歷史를 꾸민 日本의 아시아主義者들
    • “東北工程? 中國은 헛된 꿈에서 깨어나라”
    나는 왜 韓日 역사의 터부를 부수는가
    先覺者란 讚辭와 親日派란 批判을 同時에 받는 金玉均과 古代 韓日關係의 祕密이 숨은 광개토太王費를 素材로 漫畫를 그린 日本 作家가 있다. 漫畫王國 日本을 뜻하는 ‘者파니메이션(Japan+Animation)’이라는 用語를 탄생시킨 元老 漫畫家 中 하나인 야스히코 요시카즈(安彦良和·67)가 바로 그 사람.

    ‘機動戰士 건담’을 만든 이 中의 한 名이라고 하면 우리 젊은이들도 “아, 그 作家!”라고 할 程度로 韓國 팬도 많은 便이다. 1947年 홋카이도(北海道)에서 태어난 그가 歷史를 素材로 한 漫畫家의 길을 걷게 된 것은 1966年 아오모리(靑森)縣의 히로사키(弘前)大學 西洋史學科에 入學한 것과 關聯 있을 것이다.

    過激 運動圈 學生에서 漫畫家로

    日本에서‘전공투(全共鬪)’를 代表로 한 大學街 鬪爭이 한창이던 1968年 그는 美國의 베트남戰 參戰에 反對하는 ‘베트남의 平和를 지키는 모임’을 만들어 이끌다 1970年 大學에서 除籍됐다.

    그 後 도쿄로 上京한 그는 漫畫家의 길로 들어섰다. 漫畫映畫 ‘鐵腕(鐵腕) 아톰’(韓國에서는 ‘宇宙少年 아톰’으로 紹介됨)제작사로 有名한 ‘無視(?)프로덕션’의 2期生이 된 그는 애니메이션의 製作과 演出에 參與하면서 經驗을 쌓아가다, 1979年 그리스 神話를 再解釋한 ‘아리온’을 내놓으며 漫畫家로 正式 데뷔했다. 그리고 歷史와 神話를 素材로 한 漫畫 製作에 集中해, 1990年 日本漫畫家協會 優秀賞을 받게 되는 ‘나무지’를 내놓았다.



    日本 古代 歷史書인 ‘古事記(古事記)’와 ‘日本書紀(日本書紀)’에는 ‘誤쿠니누시(大國主)’라는 日本 創世記의 신이 한 名 나오는데, 그 神의 別名이 바로 ‘나무지’다. 日本 古代 司書에선 日本을 만든 3代 申 中 하나로 ‘戰鬪의 神’이자 ‘暴風의 神’인 스私奴를 꼽는다. 오쿠니누시의 匠人이 바로 스私奴다.

    그는 이 漫畫(나무지)에서 스私奴를 韓半島에서 건너온 ‘渡來人(渡來人)’으로 規定했는데, 이는 ‘日本을 만든 신은 日本에서 나왔다는’ 傳統的인 視角을 否定하는 것이라 注目을 받았다.

    이렇듯 禁忌視하는 近·現代史로도 領域을 넓혀, 1996年에는 日本이 세운 滿洲國의 群像(群像)을 다룬 ‘무지갯빛 트로츠키’, 2000年에는 朝鮮 出身의 風雲兒 金玉均의 最後를 素材로 한 ‘王都의 개(王道の狗)’를 出刊하고 只今은 광개토太王비의 碑文을 素材로 러일戰爭期를 다룬 ‘하늘의 血脈(天の血脈)’을 ‘月刊 애프터눈’에 連載한다. 터부를 건드린 이 세 作品은 ‘야스히코의 近代 3部作’으로 꼽힌다.

    日本은 日本人과 한족, 朝鮮人, 滿洲族, 몽골人의 다섯 民族이 協同하자는 ‘5足協和(五族協和)’와 孟子의 王道(王道)政治를 實現한 ‘王都樂土’를 만들자며 滿洲國을 세웠다. 그러나 滿洲國의 實體는 ‘日本의 傀儡國’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이 口號들이 現實 世界에서 屈折되고 歪曲돼가는 것을 ‘무지갯빛 트로츠키’에 淡淡히 그려 넣었다.

    近代 日本이 겪은 屈折과 汚辱의 根源을 밝히는 데에 集中한 그는 韓中日 3國 連帶를 主張하다 悲劇的 最後를 맞은 金玉均에 注目했다. 金玉均을 主人公으로 한 ‘王都의 개’ 趣旨에 對해 그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大體 日本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단 말인가. 日本人이라면 누구나 자랑스럽게 여기는 메이지(明治)維新 時代에 이룩한 成果는 언제부터 일그러져 日本을 霸權主義 國家로, 온 아시아에 對한 加害者로 만들었는가. ‘王都의 개’에서 다루는 테마는 바로 그 點이라고 할 수 있다.”(‘왕도의 개’ 4卷 後期에서)

    韓國은 金玉均을 甲申政變을 통해 閔氏(閔氏) 一族의 勢道政治를 打破하고 朝鮮의 近代化를 꾀했으나 그 過程에서 日本을 끌어들인 ‘元祖 親日派’라는 複雜한 視角으로 본다. 日本은 다르다. 日本 政府는 甲申政變 失敗 後 日本으로 亡命 한 그를 處置 困難한 食客으로 冷待했지만, 日本의 知識人들은 그를 朝鮮의 近代化를 위해 獻身한 革命家이자 憂國之士로 推仰했다.

    金玉均은 日本 近代思想의 巨物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日本 近代民主主義와 人本主義 思想의 아버지인 나카에 焦悶(中江兆民), 輾轉(戰前) 日本 右翼의 巨頭이자 국수主義者人 도야마 미쓰루(頭山滿)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사람을 만났다. 이들은 甲申政變 失敗 後 金玉均의 悲劇的인 죽음을 보며, 日本의 政策과 對外認識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波瀾萬丈했던 金玉均의 生涯가 近代 日本에 끼친 影響을 追跡한 作品이 바로 ‘王都의 개’다.

    金玉均과 후쿠자와 유키치

    메이지維新 10餘 年 뒤인 1880年代 日本에서는 西歐 侵略에 어떻게 對抗할 것인지를 놓고 2個 路線이 對立했다. 韓中日 3國이 共同 近代化를 통한 連帶를 해 對抗하자는 ‘흥아론(興亞論)’과 日本은 아시아와의 關係를 끊고 積極的인 西歐化를 推進해 西歐의 一員이 되자는 ‘脫亞論(脫亞論)’이 그것이다. 脫亞論은 後날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입구(脫亞入歐)’로 連結돼 近代 日本이 보여준 選民(選民)意識과 아시아 蔑視의 根據가 되기도 했다.

    여기서 留意할 것은, 후쿠자와度 처음에는 아시아와의 連帶에 積極的이었다는 事實이다. 契機는 金玉均과의 만남이었다. 甲申政變 3年 前인 1881年 첫 만남에서부터 이들은 서로에게 强烈히 끌렸다. 朝鮮의 近代化를 꿈꾸는 金玉均을 위해 후쿠자와는 物心兩面으로 協力했다. 開化派가 主導한 朝鮮 最初의 新聞 ‘漢城旬報’의 發刊이 準備되자, 그는 心腹을 技術顧問으로 派遣해주었다.

    나는 왜 韓日 역사의 터부를 부수는가
    ‘朝鮮人을 교육시키는 데 가장 有用한 道具는 한글’이라는 點을 看破한 후쿠자와는 當時로서는 破格인 ‘朝鮮은 國漢文 混用(混用)을 해야 한다’고 强力히 推薦했다. 私財를 털어 한글 活字 주조 費用도 支援했다. 國漢文 混用은 ‘漢城旬報’의 後身인 ‘漢城週報’에서 이루어졌다. 1884年의 甲申政變도 후쿠자와의 思想的·物質的 支援이 있었다는 事實을 否認하기 어렵다.

    그러나 甲申政變은 淸國의 介入으로 3日 만에 끝나고, 金玉均을 비롯한 少數의 亡命者를 除外한 主動者들은 滅族을 當했다. 이 慘狀으로 ‘큰 期待’가 ‘큰 失望’으로 바뀐 것일까. 후쿠자와의 아시아館(觀)은 一變했다. 甲申政變 失敗 後의 慘變을 “人間 娑婆世界의 地獄이 朝鮮의 京城에 出現했다”고 非難한 후쿠자와는 1885年 2月 ‘示唆新譜’에 ‘脫亞論’이란 題目의 社說을 寄稿했다. 野蠻的인 朝鮮·淸國과 絶交하고 西歐列强에 合流하자는 ‘탈아입구’의 論理를 내놓은 것이다. 나아가 그는 “朝鮮의 滅亡이야말로 朝鮮 國民을 위한 것이다”라는 極言까지 내뱉었다.

    이 主張에 對해 안티테제로서 存在한 것이 ‘흥아론(아시아主義)’이다. 흥아論에는 東洋文明의 高潔함을 내세우며 國粹主義 右翼團體인 ‘현양사’를 設立한 도야마 미쓰루와 도쿠가와 幕府에서 海軍奉行(長官), 메이지 政府에서 初代 海軍卿을 歷任해 ‘近代 日本海軍의 아버지’로 불리고, 메이지維新을 成事시킨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스승이기도 한 가쓰 가이슈(勝海舟)가 있었다.

    흥아論의 中心勢力인 ‘흥아회’(後날의 아시아협회, 金玉均, 朴泳孝도 關與) 後援者이기도 했던 街쓰는 近代化에 積極的이지만 日本 單獨으로 西歐에 對抗하는 것은 現實的으로 無理라고 判斷했다. 韓中日 3國의 連帶와 共助가 正答이라고 본 것이다.

    그는 甲申政變 失敗 後 日本에 蔓延한 朝鮮 蔑視 輿論에 對해 “朝鮮은 비록 只今은 弱小國이나 過去에는 日本에 文明의 種子를 傳播한 스승이었다”고 强調하고, 大院君을 淸의 李鴻章(李鴻章)과 同級의 人物로, 朝鮮을 日本과 어깨를 나란히 할 나라로 만들 人物로 評價했다.



    金玉均 暗殺로 觸發된 淸日戰爭

    日本 亡命 後 金玉均은, 후쿠자와와의 關係는 疏遠해지는 代身 아시아主義者들과의 關係는 깊어졌다. 그들은 韓中日 3國의 連帶와 近代化로 西歐에 對抗하자는 ‘三火注意(三和主義)’를 提唱했다. 그러나 金玉均과 가쓰 가이슈와의 接觸은 ‘王都의 個’에 描寫된 것처럼 1回로 끝나버린다.

    狀況을 打開하기 위해 金玉均은 決斷을 한다. 甲申政變을 鎭壓한 李鴻章과 談判해 淸國의 朝鮮 干涉을 中止시키고, 러시아의 南下에 對備해 韓中日이 對等한 聯合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는 그의 政治的 位相을 높이려는 努力이기도 했다.

    그동안 日本 政府는 金玉均을 韓日 關係의 障礙物로 보고, 홋카이도나 ‘太平洋의 高度(孤島)’인 오가사와라 制度 같은 壁紙로 流配 보내기에 汲汲했다. 閔妃가 보낸 刺客은 끊임없이 金玉均의 뒤를 밟았다. 그런 狀況에서 金玉均이 李鴻章과의 談判을 推進한 것은 목숨을 건 賭博이었다.

    1894年 3月 그는 周邊 挽留를 뿌리치고 洪鍾宇의 案內를 받아 상하이(上海)로 向했다. 그러한 그를 猛雨(盟友)인 나카에 焦悶과 도야마 미쓰루가 成功을 빌며 배웅해주었다. 상하이에 到着하자 洪鍾宇가 바로 刺客으로 突變해 金玉均을 暗殺했다. 淸國은 朝鮮 政府의 歡心을 사려고 金玉均의 屍身을 ‘外交的 膳物’로 提供했다. 閔妃는 閔氏 一族의 怨讐이기도 한 그의 屍身을 부관참시해 楊花津에 梟首했다.

    잊혀가던 亡命者의 悲劇的인 最後가 日本에서는 좋은 記事거리가 되었다. 日本 言論은 剖棺斬屍를 한 朝鮮王朝의 措處를 ‘前近代的인 野蠻’이라고 非難했다. 金玉均 暗殺을 幇助한 淸國도 한통속이라고 糾彈했다. 그 때문에 野蠻的인 朝鮮·淸國과의 關係를 끊고 西歐 帝國主義에 合流하자는 후쿠자와의 脫亞論이 힘을 얻게 되었다.

    흥아論을 支持하던 도야마 미쓰루의 현양사 같은 過激派 團體들도 “金玉均 復讐”를 외치며 朝鮮과 淸에 積極 介入할 것을 主張했다. 그리하여 일어난 事件이 ‘閔妃 弑害’다. 저들이 恣行한 ‘國權凌辱’的인 行爲 때문에 金玉均을 中心으로 한 韓日 關係史는 터부의 領域으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아시아主義는 變質돼 탈아입구(脫亞入歐)的 優越感과 融合되면서 後日 ‘大東亞 公營圈’이라는 畸形兒를 만들게 된다. 이러한 輿論 激變을 반기고 歡迎하며 劃策한 이가 當時의 外務大臣人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였다. 그는 西歐列强과 對等한 關係를 構築하는 길은 ‘軍事的으로 朝鮮과 請을 制壓해 그 힘을 인정받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몇 年 前부터 軍部와 結託해 朝鮮이란 먹이를 두고 競爭者인 廳과 싸울 準備를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金玉均이 상하이에 가게 된 것은 戰爭 빌미를 만들려는 그의 演出이었다는 疑惑이 提起됐다. 亡命者인 金玉均의 一擧手一投足을 外務大臣이 모를 理가 없기 때문이었다. 戰爭 輿論을 造成하려면 살아 있는 김옥균보다 無慘하게 살해당한 金玉均의 屍身이 더 價値 있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王都의 개’는 金玉均 等이 提唱한 三火注意를 王都의 象徵으로, 무쓰 무네미쓰의 行爲를 對外侵略路線, 卽 霸道(覇道)의 象徵으로 그렸다. 狀況은 무쓰의 意圖대로 흘러가는데 때마침 朝鮮에서 東學農民運動이 일어난다. 현양사의 過激派들은 ‘金玉均 復讐’와 ‘朝鮮 改革’을 외치며 東學軍 合勢를 試圖했다.

    東學農民運動 勢力이 擴大돼 鎭壓하는 데 힘이 부치자, 朝鮮 政府는 淸國에 支援을 要請했다. 그러자 日本이 災旱 居留民 保護를 名分으로 朝鮮으로 軍隊를 보내 靑軍과 衝突했다. 淸日戰爭이 일어난 것. 그때 가쓰 가이슈는 慨歎하며 戰爭에 反對했으나 力不足이었다. 戰爭은 日本의 大勝으로 끝났다. 日本에서는 淸國과 朝鮮은 勿論이고 東아시아 文明에 對한 敬畏感이 사라지고 ‘아시아에 對한 日本의 優越感’이 澎湃해졌다.

    그러나 기쁨은 暫時였다. 淸國이 過度하게 領土를 蠶食해 들어오는 日本을 막기 위해 毒·佛·러 3國에 仲裁를 要請해(3국 干涉), 러시아가 日本이 차지하려던 遼東半島를 占領했다. 日本은 幕府 時代부터 두려워하던 러시아의 南下를 自己 손으로 誘導한 셈이 된 것이다. 狀況을 打開하기 위해 日本은 더 큰 戰爭(러일戰爭)을 準備하게 됐다.

    광개토太王碑文 侵略 根據로 造作

    淸國으로부터 받은 莫大한 戰爭賠償金은 大部分 戰爭 準備에 充當됐는데, 이는 軍國主義 國家를 向한 始動이었다. 야스히코 요시카즈는 ‘王都의 개’에서 淸日戰爭의 막전幕後를 近代 日本의 屈折이 始作된 時點으로 본다. 그 絶頂이 金玉均의 悲劇的인 最後라는 것이다.

    ‘王都의 개’ 末尾에는 變質된 아시아主義를 代表할 새 人物이 登場한다. 東學農民運動 때 “金玉均 復讐”를 외치며 朝鮮에 上陸한 현양사 第一의 亂暴者이자 後날 흑룡회를 創設해 滿洲와 朝鮮을 넘나들며 朝鮮 植民地化에 앞장서는 ‘大陸浪人’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다.‘하늘의 血脈’에도 그를 이야기의 한 軸으로 삼아 變質된 아시아主義가 侵略 論理로 發展해가는 過程이 描寫된다.

    作品은 러일戰爭 直前 도쿄 第1高等學校와 도쿄帝國大學의 共同調査團이 광개토太王비의 碑文을 調査하기 위해 滿洲로 가는 것으로 始作된다. ‘日本書紀’에 나오는 대로 14代 重愛天王의 未亡人 神功王后가 삼한(百濟·伽倻·新羅)을 征伐했다는 ‘任那日本府說’에 對한 實證的 資料가 될 것이라는 期待에서였다.

    이 硏究를 後援한 우치다 료헤이의 目的은 다른 데 있었다. 그는 日本의 朝鮮에 對한 歷史的 緣故權, 나아가 大陸 侵略의 名分을 造作해내는 데 焦點을 맞추고 있었다. 이 作品에서 돋보이는 것은 광개토太王非 碑文의 毁損과 그 解釋 過程에 들어간 陰謀의 演出이다. 이 비에는 광개토太王이 5萬의 兵力을 動員해 韓半島 南部에 侵入한 倭軍을 鎭壓했다는 內容이 새겨져 있다. 問題는 그 部分을 描寫한 글句의 一部가 損傷돼 있는 것이다.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이왜이신묘년래도해파백잔□□□라이位臣民)’

    이것이 問題의 碑文인데 □로 標示한 部分은 判讀이 不可能한 글字다. 日本은 이 文句를 ‘倭가 神妙年(391年)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伽倻, 新羅를 擊破하고 臣民으로 삼았다’라고 類推 解釋하고 ‘任那日本府說’의 根據로 보았다.

    日本은 以前부터 任那日本府說을 통해 朝鮮에 對한 植民支配의 歷史的 正當性을 主張해왔기에, 러일戰爭 前 日本의 諜報機關이 碑文을 毁損해 日本의 韓半島 遠征記事를 造作했다는 主張이 있었다. 그러나 作品은 다르게 描寫한다. 中國人 拓本業者가 性急히 拓本을 하다 該當 글字를 毁損했고, 그것을 石膏로 덮었다고 해놓은 것.

    터부를 꺼내 興味를 만들다

    作品은 任那日本府說과 別個로, 倭軍이 古代 韓半島에 上陸한 것만큼은 事實이란 前提下에 展開된다. 作家는 古代 日本(왜)李 韓半島로 遠征했다는 主張의 眞僞와 日本이 意圖를 갖고 碑文을 毁損했다는 데에는 全혀 關心을 두지 않는다. 그는 歷史를 捏造해 侵略 論理로 利用한 것에만 焦點를 맞춘다.

    事實 ‘日本書紀’나 ‘古事記’ 等에 나오는 神功王后의 韓半島 遠征 記事는 神話的인 課長투성이다. 14代 天王의 遺腹子를 妊娠한 채 參戰한 神功王后가 遠征을 위해 人爲的으로 出産 時期를 늦추었다는 等 非論理的인 描寫가 많다. 神功王后의 妊娠에서부터 出産까지의 期間을 생각한다면, 15代 應身天王은 14代 天王의 아들이 될 수가 없다.

    그렇다면 應身天王은 누구의 後裔냐가 問題가 된다. 이는 天王가(家)의 純血城에 對한 물음이기에 터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對해 ‘잃어버린 王國’을 쓴 小說가 故(故) 최인호氏는 광개토太王이 보내준 高句麗軍이 擊退한 왜는 日本에 勢力을 構築한 伽倻 勢力이고, 應身天王은 비슷한 時期에 滅亡한 金官伽倻의 後孫이라는 大膽한 說을 提示했다.

    ‘하늘의 血脈’에 登場하는 우치다 료헤이는 千王家와 韓半島가 關聯된 수수께끼를 朝鮮 侵略 論理로 利用하려 한다. ‘神功王后는 遠征 中에 妊娠했다. 아이의 眞짜 아버지는 같이 參戰한 重臣 다케우치노 스쿠네일 것’이란 一般 硏究者들의 見解를 反駁하며 ‘應身天王 아버지로서 格에 맞는 人物을, 광개토太王鼻紋 硏究를 통해 날조해낼 것’을 要求한다.

    우치다는 어떻게 속였는가

    나는 왜 韓日 역사의 터부를 부수는가

    鼻紋 造作 是非가 있었던 광개토太王非. 中國 側 硏究에 따르면 鼻紋 毁損者는 이 碑石의 拓本을 떠서 팔아먹던 中國人 拓本業者라고 한다.

    格에 맞는 人物은 바로 倭軍을 擊破한 ‘東아시아의 霸王’ 광개토太王이다. 이러한 捏造가 眞實로 인정받는다면 天王가는 朝鮮뿐 아니라 滿洲에 對해서도 血統的 所有權을 主張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勿論 이것은 作家의 想像力이 더해진 創作이다.

    日本과 朝鮮이 한 뿌리라는 ‘日선同調론(日鮮同祖論)’은 에도(江戶) 時代부터 存在해왔고, 아시아主義에서도 日本과 韓國이 連帶해야 한다는 論理의 根據로 作用해왔다. 이 설을 信奉했던 우치다 료헤이는 이 설을 惡用해 朝鮮과 滿洲에 對한 日本의 支配權을 正當化하려 했다.

    이 漫畫에는 日선同調론에 同調해 韓國과 日本이 한 나라가 되어 러시아에 對抗하자고 하는 朝鮮人도 登場한다. 우리로서는 아주 不便한 描寫다. 그러나 實際로 흑룡회와 聯合해 朝鮮의 植民地化를 앞당긴 朝鮮人들이 있었다. 東學 出身의 李容九가 創設한 ‘一進會’가 그것이었다.

    ‘하늘의 血脈’은 現在 連載 中이다. ‘王都의 개’가 日本 近代史의 屈折과 侵略 國家로의 轉換을 描寫했다면, 이作品에선 그 屈折을 本格的으로 展開한다.

    야스히코 요시카즈는 ‘하늘의 血脈’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그는 “우치다 료헤이 같은 人物들이 ‘어떤 式으로 自身의 꿈을 말하고 어떤 사람들을 속였는지’를 直視해서, 克服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야스히코 요시카즈

    “日本은 日本隊로 韓國은 韓國대로 가면서 協力하자”

    ▼ 金玉均에 注目하게 된 契機는?

    나는 왜 韓日 역사의 터부를 부수는가

    터부의 歷史를 漫畫로 그리는 야스히코 요시카즈

    “나는 日本人이라 韓國人의 김옥균 評價에 對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學生 時節 閔妃 暗殺에 關한 논픽션 全集을 읽으면서 金玉均을 처음 알았다. 日本의 過激派가 閔妃를 殺害한 것은 큰 過誤였다고 생각하면서, 閔妃 勢力에게 殺害當한 金玉均은 日本에서 어떤 亡命生活을 했고, 왜 암살당했는가 하는 疑問을 갖게 됐다. 그가 내 故鄕인 홋카이도에 暫時 滯留했다는 것도 興味를 불러일으켰다.”

    ▼ ‘王都의 개’ 後期에 ‘金玉均의 以上이 朝鮮과 日本 關係를 王道로 이끄는 指標가 될 수 있었다’고 적어놓았다. 金玉均의 三火主義와 日本의 아시아主義는 어떤 關係가 있다고 보나.

    “韓中日 3國이 協力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기에 事實上 같았다고 본다. 只今 連載하는 ‘하늘의 血脈’에는 安重根이 登場할 豫定이다. 最近 하얼빈에 安重根 銅像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세우는 게 좋다고 본다. 그 銅像에는 安重根의 主張인 ‘東洋平和論’을 반드시 새겨 넣어야 한다.

    外交評論家人 오카모토 유키오는 ‘케네디 暗殺犯인 오스왈드의 銅像을 세운다면 美國人들이 憤怒하지 않겠냐’며 反對했지만, 그것과는 全혀 다른 問題라고 생각한다. 오스왈드는 이용당했으나 安重根은 確信犯이었다. 오스왈드에게는 哲學도 뭣도 없었지만, 安重根에게는 東洋平和論이란 哲學이 있었다.”

    ▼ 日本에서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죽인 것에 對해 ‘安重根이 標的을 잘못 잡았다’‘이토야말로 朝鮮을 倂合하는 것을 反對했다’라는 批判이 나오지 않았는가.

    “그래서 安重根이 틀린 部分도 함께 工夫해야 된다는 것이다. ‘왜 이토를 죽였는가’를 놓고…. 그가 죽였어야 할 이는 (日本의 이익선을 主張하며 朝鮮 掌握을 主張한)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나 乙巳條約 때 總理大臣을 한 가쓰라 다로(桂太郞)였다고 본다. 이토는 朝鮮倂合에 反對했다.”

    “安重根의 狙擊이 朝鮮倂合 加速化”

    ▼ 그것은 日本 實力者들만 아는 것이다. 安重根은 알 수 없지 않았는가.

    “그렇다. 하지만 이토를 죽인 것이 結果的으로 朝鮮倂合을 加速化했다.”

    ▼ 漫畫에 安重根을 등장시키는 것은 安重根과 金玉均의 思想에 共通點이 있다고 보기 때문인가.

    “多少 닮았다고 본다. 性味가 急한 面까지 두 사람은 비슷하다.”

    ▼ 아시아主義가 金玉均과 安重根 思想에도 連結됐다고 하지만, 韓國에서는 그에 對해 全혀 關心이 없다. 안다고 해도 터부로 여기는 이가 많을 것이다. 아시아主義가 大東亞共榮圈과 日本의 侵略을 正當化하는 論理와 連結됐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에 對해서는 日本도 韓國 以上으로 터부視한다. 아시아主義가 大東亞共榮圈 主張으로 連結됐다는 것을 日本人은 다 自覺하고 있기에 學校에서도 거의 言及하지 않는다. 도야마 미쓰루나 우치다 료헤이는 敎科書에 登場하지도 않는다. 反面 나카에 焦悶은 敎科書에 ‘民主主義의 先驅者’로 評價해놓았다. 脫亞論自家 西歐的 富國强兵을, 아시아主義自家 東洋의 高潔함을 强調했다면, 나카에 焦悶은 그 가운데에서 아슬아슬하게 均衡을 이뤘다.

    그런데 나카에와 함께 金玉均을 應援하고 그의 中國行을 배웅한 것이 도야마 미쓰루였다. 도야마는 여러모로 未審쩍은 人物이지만, 그냥 터부視하기만 해서는 日本의 近代를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 터부視되는 아시아主義의 意義는 무엇이었다고 보는가.

    “탈아입구論의 危險性을 確實히 指摘한 唯一한 對抗馬로서 意義가 있었다.”

    ▼ ‘하늘의 血脈’은 러일戰爭 무렵 우치다 료헤이에 依해 아시아主義가 朝鮮을 植民地로 倂合하는 論理가 되는 것을 보여준다.

    “우치다가 同等한 地位에서의 合邦을 믿었다고 볼 수는 없다. 러일戰爭에서 勝利한 日本이 瀕死(瀕死) 狀態의 朝鮮과 對等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朝鮮人에게는 對等한 合倂이라고 宣傳하면서 實際로는 植民地로 倂合한 것이다.”

    ▼ 그것이 바로 侵略임을 ‘하늘의 血脈’에서 보여줄 것인가.

    “當然히 그렇게 描寫해야 한다.”

    ▼ ‘하늘의 血脈’에서는 우치다 료헤이가 광개토太王 非文 解釋을 두고 學者에게 硏究 內容을 操作하라고 要求하는데, 이 대목은 實在를 根據로 한 것인가.

    “그 部分은 想像이다. 想像이라 해도, 日本과 韓國은 元來 같은 나라라는 論理가 韓日合邦論의 推進제가 된 것은 事實이다.”

    韓日 古代史는 兩날의 劍

    ▼ 광개토太王碑文의 一部가 毁損된 狀況을 性急한 拓本 作業 中에 일어난 것으로 描寫해 놓았던데, 韓國에서는 日本의 情報機關이 任那日本府說의 證據로 만들려고 일부러 지웠다는 意見이 많다.

    “日本에서도 그렇게 믿는 이가 많다. 韓國 出身의 在日史學者(이진희)가 죽는 瞬間까지 그 說을 믿었다. 그러나 日本 情報機關이 毁損했다는 說은 中立的인 中國 側 史學者의 調査로 否定되고 말았다. 中國 史學者는 鼻紋 毁損者가 中國人 拓本業者라는 事實도 밝혀냈다. 當時의 拓本業者들은 只今으로선 생각도 못할 거친 方法으로 拓本을 떴고, 途中에 毁損된 글字에 石膏를 덧댔다.

    日本으로서는 몇 글字 지우는 게 得이 될 수가 없다. 그 部分은 광개토太王이라는 高句麗의 英雄이 侵入해온 倭를 擊退했다는 內容을 담고 있어 日本 處地에선 屈辱的이다. 造作하려면 碑石을 쓰러뜨리고 땅에 묻는 게 나았을 것이다.

    이 問題에 對해서는 韓國人의 視野가 너무 좁다는 생각이 든다. 鼻紋 造作說은 ‘日本이 바다를 건너 원정해 왔을 理가 없다’ ‘이기든 지든, 어디까지 들어왔든, 倭가 바다를 건너왔다는 것 自體를 認定할 수 없다’는 態度에서 비롯한 것 아닌가 생각된다.

    (韓國人의 處地에서는) 日本의 植民支配 論理로 連結될 수 있으니까 認定할 수 없다는 생각도 있을 것이다. 저런 後進國(古代 日本)李 韓半島까지 건너왔을 理가 없다는 式의 論理도 있는 것 같고….”

    ▼ 韓國에서는 日本 千王家에 伽倻의 피가 흐른다는 主張이 있다.

    “그것은 터부임과 同時에 내가 아시아主義者들의 歷史觀에 注目한 點이기도 하다. 日선同調론이 右翼的인 學問이 돼버리는 것은 ‘故鄕이니까 韓國을 取하는 게 뭐가 나쁜가’ 式으로 連結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主張은 ‘兩날의 劍’李 된다.”

    ▼ ‘兩날의 劍’ 意味를 보여주는 것도 作品을 만드는 目的 中 하나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만, 日本에는 그 問題에 對해서는 아예 論議를 하지 않으려 하는 傾向이 있다. ‘아시아主義와 關聯된 것은 言及하는 것조차 좋지 않다’는 式이다. 그러나 그것은 냄새나는 것에 뚜껑을 덮는 行爲일 뿐 本質的인 解決策이 아니다. 中國 專門家인 다케우치 요시미는 ‘日本이 戰爭에 져서 民主主義 國家가 되었다 해도 이는 眞짜로 反省해서 된 것이 아니다. 아시아主義를 眞情으로 克服해야 民主主義가 된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어디가 잘못되었고 어디를 고쳐야 하는지를 直視해서 터부를 克服해야만 한다.”

    나는 왜 韓日 역사의 터부를 부수는가

    이토 히로부미를 射殺한 大韓國人 安重根 (오른쪽), 朝鮮倂合에 對한 諒解를 얻기 위해 러시아의 宰相과 會談次 하얼빈 驛에 到着한 이토 히로부미(가운데 帽子 벗으며 人事하는 이). 被殺되기 1分 前 모습이다.

    東北工程은 쓸데없는 짓

    ▼ 터부를 直視하고 克服하기 위해 作品을 그린다는 뜻인가?

    “고바야시 요시노리(極右 漫畫家)는 ‘도야마 미쓰루를 배우자’라는 題目의 冊을 냈지만 도야마는 克服해야 할 人物이다. 우치다 료헤이度 마찬가지다. 그들이 어떤 꿈을 이야기하면서, 어떤 이들을 속였는지 直視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魅力的인 人物이기에 더더욱 克服하는 데 애를 써야 한다.”

    ▼ 中國의 東北工程에 對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대단히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한다. 古代의 사람들은 只今의 中國과도, 韓國과도 관계없다고 생각한다. 中國이 眞情으로 矜持를 가질 領土라 할 수 있는 곳은 中院이다. 中華帝國을 復興하자고 하는 사람들이 淸國의 最大 領土를 中華帝國의 땅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矛盾이다. 淸 王朝는 中華民族이 아니었다.

    滿洲國 創設은 어느 程度까지는 正統性이 있었다고 본다. 淸國이 滅亡할 때 滿洲族이 中原을 中華民族에게 돌려주고 自己 領地로 돌아가는 것, 日本이 그것을 應援해서 眞正한 滿洲人의 나라를 만들어주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때의 滿洲人이 眞正한 滿洲人이었는지, 滿洲의 中國人 比率은 어느 程度였는지, 日本이 正말로 滿洲人의 나라를 만들어주려고 했는지 等을 疑心해본다면 다 부질없다는 생각도 든다. 죽은 아들 불알 만지기다.”

    ▼ 結局 日本은 滿洲國道 朝鮮처럼 植民地로 만들려 하지 않았나.

    “그래서 日本이 ‘좀 더 마음을 비우고 옆에서 應援만 하겠다는 式으로 했었다면…’ 하는 것이다. 朝鮮에 對해서도 倂合을 하지 않고 백업만 하고, 그 代身 ‘사이좋게 지내자’고 했다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있다.”

    矜持를 가진 小一本主義 必要

    ▼ 眞正 그것이 不可能했는지도 作品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인가.

    “美國과 英國은 日本에 ‘朝鮮을 차지하라’고 勸했다. 그때 日本人들이 ‘아니다. 宣祖는 같았는지 몰라도 只今은 全혀 다르다. 저 사람들은 自尊心이 매우 높아서 안 된다’라고 할 수 없었는가하는 생각이 든다.”

    ▼ 그것은 戰後 總理大臣을 지낸 이시바시 單盞(石橋湛山)의 ‘小一本主義’와 一脈相通하는 것 같다. ‘植民地 같은 것은 必要 없다. 日本列島 開發만으로도 充分하다. 조선도 臺灣도 元來 主人에게 돌려준다면 日本은 西歐 帝國主義에 對해 道德的 優位에 설 수 있다’고 했던….

    “나카에 焦悶처럼 탈아입구와 아시아主義 사이를 걸어가자는 것이 이시바시 單盞의 생각이었다. 그러한 方式은 正말로 現實化할 수 없었는가. 大國이 안 되어도 좋지 않았겠는가?”

    ▼ 그런 意味에서 敗戰 以來 60年間 日本이 걸어온 길은 小一本主義가 勝利한 것이 아닌가 싶다. 植民地 없이도 日本이 한때나마 世界 1位의 經濟大國이 되었던 것을 본다면 말이다.

    “그것은 矜持가 있는 小日本이 아니었다. 美國의 屬國인 狀況에서 어쩔 수 없이 한 選擇이었을 뿐이다.”

    ▼ 戰後의 日本도 올바른 狀態는 아니었다고 보는가.

    “그렇다. 只今 아베 總理가 過去 回歸的인 面을 보이고, 戰爭 前으로 돌아가자고 해서 批判받고 있다. 그러나 半數 以上의 日本人은 알고 있다. 最小限의 矜持가 必要하다는 것을.

    日本은 언제까지 美國에 기대며 살아야 하는가. (아베 總理가) ‘普通의 大國’을 目標로 하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는 自己 나라는 自己 힘으로 지키고 經濟的으로도 自立하자고 하는 것 같다. 그러니 (日本人들은) 그것을 支持할 수밖에 없다. 아베는 그러한 것을 主張해 터부의 領域을 좁혀간다. 터부의 領域을 건드리니까 밖에서 보기에는 過去回歸처럼 비친다. 그러나 거꾸로 보면 日本人이 터부의 領域에 對해 얼마나 부자연스럽게 눈감고 있었는지, 韓國은 잘 모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 하지만 韓國에서는 日本이 右傾化한다고 보는 이가 많다.

    “아베 政權은 確實히 支持率이 높다. 日本人이 아베를 支持하는 것은 軍事大國으로의 回歸보다는 歪曲된 小麴酒의, 軍隊 없는 富國이 얼마나 不完全했는지에 對한 反動이라고 생각한다.

    戰後 日本 敎育에는 많은 터부가 存在했다. 그렇다보니 戰爭 前 일에 對해 反省하는 게 아니라, 눈을 질끈 감고 아예 없었던 일처럼 여기면서 살게 되었다. 戰爭 直後의 日本 敎科書는 나름대로는 民族的 英雄이라 할 만한 怒氣 마레스케(러일戰爭 參戰 陸軍 將軍)나 도고 헤이하치로(러일戰爭에서 勝利한 海軍 提督)조차 싣지 않았다. 軍人이었던 사람은 다 削除해버리는 式이었다.”

    쿨하게 말하는 時代를 만들자

    ▼ 그러나 日本의 嫌韓論(嫌韓論)은 지나치다. 지난 1年 사이 日本의 한 夕刊新聞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韓國에 對한 나쁜 消息과 非難記事를 헤드라인으로 뽑아 올렸다.

    “只今의 嫌韓·혐中(嫌中) 輿論은 지나치다고 본다. 옛날의 日本을 닮았다.”

    ▼ 韓國에선 只今 東아시아 情勢가 淸日戰爭 前夜 같다는 視角도 있다.

    “只今의 韓國은 弱小國이 아니니 그때와 같을 수가 없다. 只今의 問題는 日本이 相對들로부터 ‘네가 싫다’라는 소릴 反復해서 듣게 되자, ‘그래 나도 네가 싫어’란 式으로 反應하게 된 것이다. 日本人은 김치를 좋아하고, 한류 드라마를 좋아하고, 中華料理를 좋아하면서 別생각 없이 살아오다가, 갑자기 相對(韓國, 中國)의 反日感情에 直面하게 되니 反射的으로 反感을 가질 수도 있다고 본다.”

    ▼ 큰 問題는 없다는 뜻인가.

    “日本人 觀點에서 無責任하게 말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日本人을 信賴해도 괜찮을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日本人은 이런저런 問題를 갖고 있지만, 基本的인 敎育을 받았고 情報도 自由롭게 求할 수 있기에, 敎科書에 씌어 있어도 ‘異常하다’ 싶으면 믿지 않으려 한다. 敎科書의 內容이 바뀐다고 해서 日本人의 생각이 一齊히 따라가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가끔씩 異常한 소리를 하는 日本人이 나온다 해도 그가 日本人 全部를 代辯한다고 생각할 必要는 없다고 본다.”

    ▼ 韓國에도 讀者가 많은데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日本 漫畫 文化는 幅이 넓고 다양한 스펙트럼을 이룬다. 政治思想, 性 風俗, 난센스, 개그에 이르기까지 統制 없이 자유롭게 그린다. 政府의 支援도, 統制도 없고 全部 自己 責任으로 이뤄진다. 日本人은 그러한 자유로움 속에 살고 있기에 異常한 時代가 오지 않는 限, 한 가지 思想으로 물드는 時代로 돌아가지 않을 것으로 본다. 그래도 모르니 터부를 더 줄여서, ‘千王家에 韓國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그렇다고 해서 뭐 나쁠 것은 없잖아’라고 쿨하게 말할 수 있는 時代를 만들면 괜찮지 않겠는가.(웃음) 그런 뜻에서 日本人을 좀 더 信賴해주시면 感謝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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