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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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수연 (羅壽淵, 1861年 陰曆 10月 20日 ~ 1926年 陽曆 6月 16日 )은 大韓帝國 末期의 開化派 武官으로 日帝强占期 에는 朝鮮總督府 中樞院 參議를 지냈다. 號는 소봉(小蓬)이다.

生涯 [ 編輯 ]

1890年 武科 에 及第하여 訓鍊院 判官 等으로 勤務한 武官이었다. 1898年 에는 남궁억 , 장지연 , 幼根 等과 함께 《 皇城新聞 》을 創刊해 運營했다. 皇城新聞 總務를 맡았던 나수연은 社長 南宮檍과 함께 1902年 拘束된 일이 있는데, 이들이 拘束된 理由는 明確하지 않다. 當時 日本 에 亡命해 있던 박영효 와 內通하여 謀反하기로 했다는 陰害가 接受되었기 때문이라는 說이 있다. [1]

1905年 漢城法學校 의 交感을 거쳐 江原道 鐵原郡 軍需에 任命되며 官職에 復歸했다. 같은 해 大寒俱樂部 總務院, 이듬해에는 大韓自彊會 總務를 맡는 等 愛國啓蒙運動으로 活潑한 社會 活動도 繼續했다. 이 무렵 乙巳條約 締結에 抗議하며 自決한 민영환 에 對한 祭文을 大寒俱樂部 代表 資格으로 發表한 바 있다. 以後 內部의 管理와 太極學會 , 大韓學會 等에서 活動했다. 나수연이 官職 復歸 後 얻은 鐵圓郡守나 內部 參書官 等의 職責은 一進會 의 한석진에게 請託하여 얻었다는 설이 精巧 의 《 大韓季年史 》에 記錄되어 있다.

皇城新聞이나 大韓自彊會 系列의 開化派 知識人들은 日本의 勢力 擴大와 함께 親日派 에 吸收되었고, 1910年 에는 韓日 倂合 條約 이 締結되었다. 나수연은 韓日 倂合 直後 朝鮮總督府 가 新設한 諮問機關 中樞院의 副贊儀로 任命되었고, 1921年 에는 中樞院 改編 後 參議가 되었다. 中樞院에 在職 中이던 1912年 日本 政府로부터 韓國倂合記念章 을 授與받았다.

1914年 에는 日本軍과 家族을 後援하는 鏡城郡人後援會에 寄附金 2원을 納付했고, 1915年 韓日 倂合 5周年 記念으로 열린 朝鮮物産공진회에 京城協贊回 部位원으로 參加하여 10원을 寄附한 일도 있다. 1916年 부터는 半島社編纂事業의 調査主任度 맡았다. 朝鮮總督府가 主管한 半島社編纂事業은 "日本人과 朝鮮人이 한 뿌리에서 나왔음"을 分明히 하고 "不幸에 빠진 朝鮮人을 韓日合邦이 救援해 주었음"을 밝히는 것이 事業 目的으로 明示되어 있으며, 1925年 設置된 朝鮮史編修會 의 前身 格이다.

한便 東洋畫 에 關心이 많아 1918年 書畫協會 가 發足할 때 發起人으로 參加했고, 1922年 열린 第1回 朝鮮美術展覽會 에서는 入選한 바 있다.

2002年 發表된 親日派 708人 名單 2008年 公開된 民族問題硏究所의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에 모두 包含되었고, 2007年 大韓民國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가 發表한 親日反民族行爲 195人 名單 에도 選定되었다.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資料 [ 編輯 ]

  •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2007年 12月). 〈나수연〉 (PDF) . 《2007年度 調査報告書 II - 親日反民族行爲決定理由서》. 서울. 578~585쪽쪽. 發刊登錄番號 11-1560010-0000002-10.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各州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