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고 시게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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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고 시게노리
出生 1882年 12月 10日 ( 1882-12-10 )
日本 사쓰마번 나에시로가와 寸
死亡 1950年 7月 23日 ( 1950-07-23 ) (67歲)
스가모 刑務所
性別 男性  위키데이터에서 편집하기
國籍 일본 제국의 기 日本 帝國
學歷 도쿄 帝國 大學 卒業
職業 外交官
配偶者 에디타 데 랄란데

도고 시게노리 ( 日本語 : 東? 茂?, とうごう しげのり , 1882年 12月 10日 ~ 1950年 7月 23日 )는 日本 帝國 의 外交官이자 政治人 으로, 太平洋 戰爭 當時 日本 의 外務 大臣이었다. A級 戰犯 中 唯一한 朝鮮系 日本人이다. [1]

朝鮮人 血統이라는 핸디캡에도 不拘하고 獨逸 大使, 蘇聯 大使를 거쳐 外務大臣을 두 番 지냈다. [2] 第1次 世界 大戰 直前 征韓論을 主張하였고, 1943年 포츠담 會談 때는 天皇 히로히토 에게 會談 內容을 受容할 것을 建議하기도 했다. 太平洋 戰爭 敗戰 後 戰犯으로 獄살이를 하던 中 病死했다.

生涯 [ 編輯 ]

初期 履歷 [ 編輯 ]

日本의 歷史가 下氣하라 노부토視 (萩原延壽)의 記錄에 따르면 도고 시게노리는 1882年 12月 10日 사쓰마번 나에시로가와村 (苗代川村)에서 朝鮮系 日本人인 박수승(朴壽勝)과 亦是 朝鮮系 日本人인 朴토메 사이에서 태어났다. 도고 시게노리는 壬辰倭亂 當時 시마즈 요시히로 (島津義弘)의 部隊에 連行되어 日本에 끌려온 道公 박평의 의 後裔이다. 이들은 사쓰마 番 (現在 가고시마縣 )의 나에시로가와(苗代川)에 定着하여 代代로 陶瓷企業에 從事했으며, 朝鮮人의 正體性을 잃지 않고, 에도 幕府 末期까지 朝鮮語를 使用했다고 한다. 도고 시게노리의 아버지 박수승(朴壽勝)은 家業을 産業化하여 陶瓷器를 外國에 輸出하는 等 事業家로도 成功했다. 어머니 薄土메는 朝鮮系 日本人으로 壬辰倭亂 때 끌려온 道公 朴氏의 後孫이지만 獨逸人 의 피가 섞인 混血人이었다.

少年期 [ 編輯 ]

父親 박수승 臺까지 陶瓷器 奴隸 後裔로서 모진 삶을 이어갔다. 그런데 메이지 維新 으로 差別이 深化됐다. [3] 以後 박수승은 사무라이 집안인 도고(東?)氏의 戶籍을 購入하여 이름을 日本式으로 바꾸었다. 시게노리가 5살 때이다. 도고 시게노리는 1889年 시모이슈인 村立心象(下伊集院村立尋常) 小學校에 入學하였다. 시게노리는 小學校에 다니며 別途로 ‘課外 指導’도 받았다. 司稤(私塾)의 先生님에게서 讀書 指導를 받았다. 先生님이 冊을 큰 소리로 읽게 하거나 冊의 內容을 把握했는지 質問하는 式이었다. [4] 시게노리는 이 時節 孔子 論語 (論語) 等도 課外로 배웠다. [4] 그의 外조카딸인 야마구치 都市는 後日 '대단한 工夫벌레였다고, 옷자락이 닳도록 冊床 앞에만 앉아 冊을 넘기는 少年이었다고 어머니가 늘 말씀했어요. [4] '라 回顧하기도 했다.

비슷한 處地의 同級生으로 農夫 아들인 사키모토 요시오가 있었다. 그는 자라서 醫師가 되었다. 요시오의 아들인 유키오는 아버지가 다음과 같이 말하곤 했다고 傳한다. [5]

시게노리와 特히 親하게 지낸 것은 어떤 同類意識이 있었기 때문이다. 士族의 子弟들에 對한 對抗意識이랄까, 抵抗感이 있었고 그 反動으로 우리 둘은 工夫에만 매달렸다. 士族 아이들은 우리가 工夫하는 것조차 싫어하고 이지메를 했으므로 우리는 데루拘泥(照國) 紳士 境內같이 조용한 데 가서 豫習과 復習에 熱을 올렸다. [5]

사키모토 요시오가 아들 유키오에게 傳한 바에 따르면, 시게노리는 포켓用 英語辭典을 늘 주머니에 넣어 다니며 單語를 외웠다고 한다. 한 페이지를 全部 暗記했다 싶으면 그 페이지를 찢어 삼키는 式이었다. [5]

靑少年期 [ 編輯 ]

비가 갑자기 억수같이 퍼붓던 어느 날, 小學校 學生 시게노리가 뛰지도 않고 천천히 빗속을 걷고 있었다. 처마 밑에서 비를 避하던 洞네 어른들이 안타까워 빨리 뛰라고 소리를 쳤다. 그러나 시게노리는 천천히 걸으며 對答했다. '아니, 앞에도 오는 걸요.' 뛰더라도 앞에 비는 앞에 내린다며 그는 천연덕스럽게 걸어갔다 [6] 한다. 그러나 그는 自身이 朝鮮人의 血統이란 것에 무척 苦悶했는데 이는 그에게 콤플렉스로 作用하게 된다.

日本人 同級生들에게 따돌림을 當하던 시게노리의 唯一한 親舊는 農夫의 子弟인 사키모토뿐이었다. 恒常 寡默했고 弄談 한마디 한 적도 없었다. 必要한 것 外에는 말하지 않았다. [5]

都賈는 제7 高等學校調査官(現在 가고시마 大學 )을 거쳐, 도쿄帝國大學 의 獨文科에 進學하였다. 아버지 殊勝의 希望과는 全혀 다른 選擇이었다. 아버지는 自身이 現議會 議員을 꿈꾼 적도 있었기 때문에 秀才인 아들이 법과대를 나와 內務省 管理를 하고 知事(知事)라도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아들과 後孫을 出世시키고자 돈으로 姓까지 사고 蛇足으로 끼어들어갔던 것이다. [7] 아들 시게노리는 아버지 殊勝의 꿈을 알고 있었기에 한동안 獨文科 進學 事實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大學 在學 時節 [ 編輯 ]

아버지의 期待와는 相關없이 擇한 獨文科였으나 選擇 後 學校生活은 順坦치 않았고, 主任敎授와 呼吸이 맞지 않았다. 主任은 獨逸 文獻을 中心으로 가르치고 發表形式은 會話體를 强調했다. 시게노리는 獨逸語 答辯에 能하지도 못했고, 元來의 꿈이 文學이었으므로 訓詁學(訓?學)에 매달리는 主任의 方式은 그의 學習 스타일과 맞지 않아 授業 成績은 안좋았다.

그래서 講義 內容도 理解되지 않았고 結局 授業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으며 그저 圖書館에 틀어박혀 冊을 읽었다. 그럭저럭 獨文科를 卒業했으나 成跡은 同級生 6名 가운데 꼴찌. 病으로 工夫를 제대로 못하기도 했고 그나마 다른 이들보다 한해 늦게 卒業했는데 그로서는 처음 겪는 屈辱이었다. 게다가 下宿집에 불이 나 冊이란 冊은 모두 불에 타버리는 事件을 겪는다. [7] 元來는 도쿄大 獨文科 敎授, 文藝評論, 그리고 獨逸語 小說 쓰기가 꿈이었으나 이 事件을 契機로 꿈을 버리고 만다.

도쿄帝國大學 在學 中 外交官 試驗에 合格하였다. 아버지 殊勝은 相當히 기뻐했다 한다. 비록 內務官僚의 길은 아닐지라도 그야말로 身分과 八字를 바꾸는 큰일을 해낸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을 불러 一週日間이나 宴會를 베풀었다. [7] 잔치가 끝나고 官報에 合格者 發表가 나자 殊勝은 나에시로가와 마을과 因緣을 끊었다. 아버지 殊勝은 바로 住所 移轉을 하여 本籍地를 ‘가고시마視 니시센고쿠初(西千石町) 82番地의 2’로 옮겼다. 300年 가까이 지켜온 朝鮮 血統과 完全하게 訣別한 것이다. [7] 卒業 後 1912年에 外務省에 들어가서 本格的으로 外交官으로 데뷔하였다.

外交官 生活 [ 編輯 ]

外交官 生活 初期 [ 編輯 ]

外務省에 任用되었으나 바로 腎臟炎에 걸리는 바람에 病院에 入院, 待機發令措置 되었다가 政務局과 通商局에서 7個月間 勤務하였다. 當時는 公文書를 모두 붓으로 쓰던 時節이었다. 시게노리는 漢文 , 中國語 , 英語 , 라틴語 , 獨逸語 等에 두루 能했으며 特히 古典을 배워 漢文 實力이 대단하였다. 在職 初期 그는 ' 漢字 驅使나 筆力에서 뛰어나고 問題를 把握해 對應하는 能力이 銳利하다'는 評을 듣기도 했다. 固執이 세지 않고 寡默하였으므로 오히려 高位職 商社들이 그를 便하게 생각해 늘 불러다 일을 시켰다. 그러나 그는 不平不滿 하나 드러내지 않았다.

任官 同期生인 其他다 마사모토(北田正元)는 後날 回顧에서 '西歐的인 思想을 갖고 있으면서도 東洋的인 人格修養, 儒敎的인 鍛鍊도 되어 있는, 거기에 文學的인 素養까지 갖춘 親舊였다'고 한다. 1913年 中國의 선양(瀋陽) 總領事館 領事館步(補)로 發令되었다. 이어 스위스 3等 書記官을 거쳐 1919年 베를린領事館으로 赴任하였다.

獨逸 勤務 [ 編輯 ]

1919年부터 1921年까지 베를린 駐在 外交官으로 일하였다. 이때 建築家 게오르그 데 랄란데의 寡婦였던 에디타 데 랄란데를 만나 歸國 後 1922年 日本에서 結婚하였다. 아이가 다섯 있던 그女의 死別한 男便 게오르그는 朝鮮總督府 建物을 基本 設計한 建築技士다. [3]

그는 일찍부터 朝鮮人 의 피가 흐르는 것을 무척 苦悶하였고 日本人 의 差別 待遇와 사귀던 女性들과 結婚하려 할 때 日本人 父母의 甚한 反對에 부딛쳐 挫折됐다. 結局 日本人과 結婚하기 힘들어 30이 넘어서 獨逸 大使 在職時 大使館의 獨逸 女子 職員이던 寡婦 에디타 데 랄란테와 結婚, 딸 하나를 얻었다. 그리고 딸이 成長하자 사위를 壻養子(壻養子)로 삼아 도고 후미히코(東鄕文彦)라 하고 自身의 戶籍에 入籍시킨다.

週 獨逸 大使 [ 編輯 ]

1923年 舊美國(歐美局) 第1課長으로 赴任했다가 다시 州 獨逸 駐在 日本大使館으로 되돌아왔다. 1926年 다시 워싱턴 總領事館으로 赴任 1等書記官으로 있다가 1929年에는 獨逸駐在大使館의 參事官으로 되돌아왔다. 1933年 日本 外務省 龜尾國葬을 거쳐 유럽아프리카局長이 되었다가 1937年 獨逸 大使가 되어 다시 獨逸 大使館으로 갔다.

以後 1937年-1938年까지 大使로 赴任하여 獨逸에서 다시 勤務했다. 이때 獨逸 에서는 나치가 執權하고 있었다. 都賈는 나치를 싫어했고, 나치 獨逸과의 同盟에 消極的이었기 때문에, 獨逸과 同盟을 맺고 싶어하는 陸軍과 摩擦을 빚어 獨逸 臺詞에서 更迭되었다.

週 蘇聯 大使 [ 編輯 ]

1938年 都賈는 蘇聯 大使로 赴任하였다. 當時 日本 帝國은 나치 獨逸 , 이탈리아 王國 과 함께 防空 協定 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蘇聯과 關係가 極히 나빴다. 都賈는 當時 蘇聯 외상이었던 몰로토프 을 相對로, 蘇聯-日本 漁業協定 을 맺고, 日本軍과 蘇聯軍이 衝突한 노몬한 事件 의 停戰協商을 맺었다. 또한 蘇聯-日本 不可侵條約 의 協商을 開始하였다. 여기서 蘇聯의 中國 國民黨 支援을 中斷하는 代身, 日本이 사할린의 權益을 抛棄하는 것을 協商 對象으로 삼아 거의 妥結 直前까지 갔다.

그러나 當時 제2차 고노에 內閣이 들어서고 外相이 된 마쓰오카 요스케 (松岡洋右)가 이를 反對하여 都賈에게 歸還命令을 내렸다. 마쓰오카는 몰래 都賈에게 自進 辭退를 勸했으나, 都賈는 逆으로 正式으로 懲戒 節次를 밟아달라고 하면서 이를 拒否하였다.이후 마쓰오카가 主導하여 蘇聯-日本 不可侵條約 과 毒-李-日 三國同盟度 맺어졌다.

生涯 後半 [ 編輯 ]

外務 代身 [ 編輯 ]

1941年 都賈는 度祖 히데키 (東條英機) 內閣에 外務大臣으로 立脚하였고, 美國과의 戰爭을 避하려고 努力했다. 그리하여 占領地에서의 撤兵을 基礎로 한 協商案을 마련했으나, 軍部의 强한 反對와 美國側의 强勁한 態度로 이는 霧散되었다. 以後 眞珠灣 攻擊 을 始作으로 太平洋 戰爭은 開始되었다. 이때 都賈와 海軍 首腦部는 攻擊戰에 宣戰布告를 美國側에 傳達하려는 計劃을 세웠으나, 駐美 日本 大使館에서 攻擊 以後에야 宣戰布告를 傳達했고, 이것은 都賈가 極東 國際 軍事 裁判 에서 起訴되는 理由가 되었다.

都賈는 開戰 後에도 외상 자리에 남아 早期 强化를 摸索하였으나, 外務省과 機能이 重複되는 帶同牙城(大東亞省)을 設置하려던 首相인 賭租와 摩擦을 빚어 辭任하였다.

終戰 交涉 [ 編輯 ]

1944年 사이판 이 陷落되어 敗色이 짙어지자, 都賈는 各國의 牌戰死를 硏究하면서 天皇制를 維持하는 條件의 降伏을 摸索했다. 그리하여 太平洋 戰爭에서 中立國이었던 蘇聯의 仲裁로 聯合國과 協商을 하려고 했다.

1945年 오키나와 가 陷落된 以後, 스즈키 肝타로 (鈴木貫太?) 內閣이 成立하자 그해 4月 9日 그는 다시 외상에 就任하였다. 이미 敗戰 宣言은 豫定되어 있었고 그는 就任을 拒絶했으나 스즈키 肝타로 의 繼續된 付託을 이기지 못했다. 受賞 스즈키는 戰爭 終結處理야말로 도고 밖에 할 수 없는 일이라고 判斷했다.

그러나 그해 7月末 聯合國은 베를린 郊外 포츠담에서 美國 英國 蘇聯 3國 頂上이 모여 日本의 無條件 降伏을 要求하는 포츠담 宣言 을 發表했고, 日本은 이를 "無視"한다는 立場을 밝혔다. 그러자 美國은 히로시마 나가사키 原子爆彈 을 投下했고, 이어 蘇聯이 太平洋 戰爭이 參戰하여 日本에 큰 衝擊을 주었다.

結局 都賈는 포츠담 宣言 의 受諾을 主張하였고, 軍部는 이에 强力히 反撥했으나, 스즈키 肝타로 首相과 쇼와 天皇 은 이를 받아들여 日本은 降伏하게 되었다.

敗戰 直前 [ 編輯 ]

1945年 8月 6日 히로시마 더글러스 맥아더 의 名으로 新型 原子爆彈이 投下되어 30萬名이 死亡했다. 日本 軍部에서는 强勁論이 擡頭되었고 그는 事態를 지켜보자며 軍部를 挽留하였다. 8月 8日 蘇聯이 聯合國에 加擔해 參戰을 宣言한다. 이미 戰況은 기울었고 獨逸마저 降伏해버린 터라 日本의 降伏은 말 그대로 時間 問題였다. 蘇聯이 參戰을 宣言했다는 情報를 接한 도고 시게노리는 8月 9日 最高戰爭指導會의 席上에서 '迅速히 戰爭 終結을 斷行해야 한다. 포츠담宣言을 卽時 水落瑕疵'며 軍部 指導者들 앞에서 降伏을 主張했다. 憤怒한 軍部 指導者들은 卽刻 反論을 펼쳤고 場內는 騷亂해졌는데, '徹底 抗戰'을 외쳐온 强勁派의 先頭 陸軍大臣 아나미 고레値가 가 卽刻 反論을 편다.

將來에 對한 確實한 樂觀이 서지 않은 狀態에서 降伏한다면, 야마토(大和) 民族은 精神的으로 죽는 것과 마찬가지다!

軍部 人士들은 全部 强勁論을 主張했지만 그는 홀로 降伏을 主張했고 繼續된 論爭 끝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被害가 深刻해짐으로서 一旦 降伏을 前提로 會議를 하기로 했다. 海軍代身 요나이 미쓰마사 가 '그렇다면 無條件 降伏인지 條件을 달아 降伏할 것인지를 定하자'고 묻자 都賈는 天皇을 지키고 天皇制를 維持하기 위해서라도 降伏하자고 主張했다. 또한 “國體胡地 하나만 남기고 다 버려야 한다”고 하였다. 氣勢騰騰한 聯合國이 日本의 提案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는 天皇制 維持 하나만 主張해야 한다는 判斷이었다.

陸軍大臣 아나미와 參謀總長 禹메즈 요시地로 , 軍司令總長 도요다 小에무 가 “徹底 抗戰”을 主張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會議 雰圍氣는 强勁派가 主導했다. 天皇制 維持는 勿論 ‘戰場에 있는 日本軍의 自主的 撤收’ ‘戰爭 責任者를 日本이 處理하는 것’까지 聯合國에 要求하자는 다(多)條件 降伏論이 大勢를 이룬다. 都賈의 일(一)條件 降伏論은 少數로 몰렸다. 이 論議는 8月9日 午後 臨時 閣僚會議에 넘겨졌으나 結局 會議는 決裂되고 만다.

그 무렵 天皇을 움직이던 側近 祈禱 고이치 宮內大臣은 首相을 지낸 고노에 후미마로 等이 다條件 降伏論에도 懷疑的인 點을 把握, 天皇制 維持를 美國이 들어주겠냐는 것이었다. 이어 國際 情勢에 밝고 首相과 外務大臣을 經驗한 시게미쓰 마모루 가 重要한 助言을 해줬다. 그날 8月 9日 나가사키에 두 番째 原子爆彈이 떨어져 15萬名이 넘는 死傷者가 發生했다.

그는 '이제는 미쳐 날뛰는 軍部를 누를 수 있는 힘은 政府 內閣에 없다. 天皇 陛下가 直接 決斷을 내리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다.'며 天皇 히로히토 에게 星團(聖斷)에 依한 降伏을 主張했다. 그러자 그를 糾彈하는 右翼 人士들의 抗議가 繼續되었고 그가 賣國奴라는 聲討 示威도 發生했다. 그날 저녁 11時 50分부터 天皇 앞에서 御前會議가 열렸다. 會議는 '天皇의 降伏이 아닌 어디까지나 스즈키 首相이 도고 外相의 '天皇制 維持라는 條件附 降伏'을 提案하고 天皇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形態'로 決定되었다.

敗戰과 戰犯 裁判 [ 編輯 ]

都賈는 次期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東久邇宮稔彦王) 內閣에서도 외상으로 留任할 것을 要請받았으나, 固辭하였다. 1946年 5月 1日 도쿄 스가모 刑務所 에 戰犯 嫌疑로 拘束되어 "眞珠灣 攻擊 前夜에 聯合國을 欺瞞하기 위해 거짓協商을 벌였다"는 嫌疑로 集中調査를 받았다.

다음 해부터 열린 戰犯裁判 에서 都賈는 "局長時節부터 戰爭 謀議에 參與하고, 外交 交涉을 통해 戰爭 開始를 돕는 欺瞞 工作을 했으며, 開戰 後에도 자리에서 戰爭 遂行에 힘썼다."고 有罪 判決을 받고 20年 禁錮刑을 받았다. 都賈는 後에 "敗戰國에 對한 勝戰國의 裁判"을 强하게 批判하였다.

都賈는 監獄에서 《時代의 一面》(時代の一面)이라고 이름붙은 回顧錄을 執筆하던 中 7月 23日 스가모 刑務所 에서 病死하였다.

事後 [ 編輯 ]

事後 도쿄 아오야마 墓地 에 安葬되었다. 시게노리는 事後 야스쿠니 神社 에 合祀됐고, 무덤은 도쿄 市內 아오야마 墓地에 있다. [3]

著書 [ 編輯 ]

  • 《時代의 一面》(時代の一面)(未完)

家族 [ 編輯 ]

그의 아버지 박수승의 世代에까지 朴氏 姓을 使用하였고, 그는 性을 朴氏에서 度高氏로 改名하였다. 以後 獨逸 女性과 婚姻 後, 딸 하나를 얻어 데릴사위를 들여 도고 후미히코(東鄕文彦)로 自身의 戶籍에 入籍시킨다.

  • 할아버지 : 박이구(朴伊駒)
  • 아버지 : 박수승(朴壽勝, 1855年 - 1936年 )
  • 어머니 : 朴토메( 1859年 - )
    • 누나 :
      • 外조카딸 : 야마구치 都市
  • 妻 : 에티打 데 랄란데

評價 [ 編輯 ]

가고시마 第1中學校 出身의 歷史硏究家人 하라구치 도라오 가고시마臺 名譽敎授는 '시게노리는 그 마을 出身이기 때문에 自己의 出身 背景을 내세울 수도, 누군가에게 기댈 수도 없었다. 그래서 恒常 눈을 크게 뜨고 世界를 쳐다보며, 周邊의 속坪에 戀戀해하거나 휘둘리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驕慢을 떨지 않았다. 阿諂도 하지 않고, 다른 이에게 違和感이나 威脅을 주는 일도 없었다. 漸漸 스스로의 地力과 氣力(氣力), 信念만을 믿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보면 差別받고 서러움 當하는 가고시마의 나에시로가와 出身이라는 事實이 시게노리에게는 오히려 (代性으로 이어진) 幸運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5] '라 評하였다.

高等學校 同期生인 기시모토 하지메 (岸本肇素稼·後날 海軍中將)은 '한 班에서 시게노리는 人格이나 人品 面에서 斷然 빛나는 存在였다. [5] '고 評하였다.

기타 [ 編輯 ]

  • 어머니 薄土메는 언제 누가 와서 무슨 소리를 하고 갔는지 죄다 記憶했다고 한다. 男便이 물으면 “그때는 이랬고 저랬다”고 確實하게 對答해주었다. 돈 去來에 關해서도 아주 작은 額數까지 完璧하게 記憶하고 處理해 박수승 陶瓷器房의 會計 兼 記錄 擔當이었다. 시집올 때까지만 해도 읽고 쓸 줄 몰랐지만 타고난 智力(知力)과 努力으로 글을 배우고 깨친 터였다. [4]
  • 도고 시게노리보다 3年 前에 누나가 태어났다. 朝鮮 血統과 傳統을 이어가는 固陋한 朴氏 집안의 첫아이가 사내가 아닌 딸이라 해서 武德의 曾祖母가 무척 서운해했다는 이야기가 傳한다. [6] 그의 曾祖母는 첫아들을 낳지 못한 어린 孫子며느리 도메에게 露骨的으로 서운한 내色을 했다고 한다. 나중에 사내아이 무덕이 태어나자 어찌나 뛸 듯이 기뻐했는지 洞네 사람들이 흉을 볼 程度였다. [6]
  • 도고 시게노리가 태어나기 直前인 1880年 村民 男子 364名이 延命해 가고시마 縣廳에 私的(士籍)에 編入시키라는 歎願書를 내기도 했다. 이 歎願에 署名한 이들의 名單에 殊勝의 아버지 박이구의 이름이 들어있었다. 그러나 이 歎願은 끝내 無視되었다. [4]
  • 도고 시게노리는 겉으로는 道公 朴氏의 後孫이라는 것을 숨겼지만 가보지 못한 朝鮮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3] 局長 時節 朝鮮에서 最初로 外交官 試驗에 合格, 日本 外務省 課長으로 赴任했던 職員에게 自身도 朝鮮人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吐露하며 激勵하기도 했다. [3] 그는 慶州市 出身인 이 外交官에게 獨立된 韓國을 위해 奉仕하려면 熱心히 배우라고 忠告를 해주기도 했다는 것이다.
  • 사위이자 養子인 도고 후미히코 亦是 外交官이다. 후미히코는 김대중 拉致 事件 문세광 事件 當時 韓國 內의 反日 感情과 日本內의 反韓 感情 擴散을 막고 事態 調節에 힘썼다. 1973年 韓日 閣僚會議 때 外務省 審議官으로 韓國을 訪問, 김대중拉致事件을 處理했다. 문세광의 74年 陸英修 女史 狙擊事件 뒤 韓國을 再訪問, 事件收拾에 盡力했다고 한다. [3]
  • 도고 시게노리의 故鄕인 나에시로가와의 道公 심수관 14代인 심혜길 (沈惠吉)은 아버지의 付託으로 當時 와세다 大學 在學 中 아홉 次例나 시게노리를 面會하러 다녔다고 한다. 심혜길의 回顧에 依하면 시게노리는 故鄕의 菓子조각을 싸들고 가면 반갑게 맞아줬다고 한다. [8]

[9]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前任
도요다 데이지로
日本 外務大臣
1941年 10月- 1942年 9月
後任
度祖 히데키
前任
스즈키 肝타로
日本 外務大臣
1945年 4月 - 1945年 8月
後任
시게미쓰 마모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