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라 株타로
(
日本語
:
小村壽太?
,
1855年
10月 26日
~
1911年
11月 26日
)는
日本 帝國
(
메이지 時代
)의 外務官僚이다. 外交官, 外務大臣 等을 歷任하였다.
略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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休暇
誤秘番
(只今의
미야자키현
니치난視
) 出身으로 오비
燔師
고무라 間페이의 長男으로 태어났다.
1870年 大學南郊(大?南校,
도쿄 大學
前身)에 入學했다. 第1回 문부성 海外留學生에 選拔되어
하버드 로스쿨
로 留學을 갔다. 그는 하버드에서 1877年에 法學 學事 學位를 取得하였다.
[1]
사법성에 입들어가 대심원 判事를 거쳐 外務省에 轉出하였다.
무쓰 무네미쓰
에게 認定받아
淸나라
代理公使를 맡기도 하였다.
淸日戰爭
後 駐韓 辦理工事, 外務次官, 駐美, 駐러工事를 歷任하였다. 1900年
義和團
事件에서는 强化會議 全權으로서 事務處理를 맡았다.
1901年
第1次 가쓰라 內閣
의 外務大臣에 就任하였다. 1902年 締結한
영일同盟
을 積極的으로 主張한 공으로
男爵
位를 授與받아
華族
班列에 오른다. 1904年
러일戰爭
에서 展示外交를 擔當하고 1905年 포츠머스 會議에서 日本全權으로서 參席하여 러시아側 全權大使人
세르게이 비테
와 交涉하여
포츠머스 條約
을 調印한 공으로
伯爵
으로 陞爵하게 된다.
1908年 成立한
第2次 가쓰라 內閣
의 外務大臣을 다시 맡았다. 막말 以來 不平等條約을 解消하기 위하여 條約改正의 努力을 하여 1911年에 美日通商航海條約을 調印하여 關稅自主權의 回復을 이루었다.
러일協約
(
日本語版
)
을 締結하여
韓國을 倂合
하는데에도 關與하여 一貫된 日本의 大陸政策을 進行시키고 이러한 공으로
侯爵
으로 陞爵하게 된다.
그 해 外務大臣 辭任 後 死亡하였고 後爵位는 長男
긴이치
가 習作하였다.
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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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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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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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務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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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務大臣
| 태정官달 第69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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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務省 管制(1898年 勅令 第258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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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務省 設置法(1949年 法律 第135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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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務省 設置法(1951年 法律 第283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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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務省 設置法(1999年 法律 第94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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