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라 株타로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고무라 株타로
小村壽太?
出生 1855年 10月 16日 ( 1855-10-16 )
死亡 1911年 11月 26日 ( 1911-11-26 ) (56歲)
性別 男性  위키데이터에서 편집하기
國籍 일본 제국의 기 日本 帝國
學歷 大學南郊(大?南校, 只今의 도쿄 大學 )
하버드 로스쿨 LL.B.
職業 外交官, 政治人
配偶者 마치
子女 긴이치 (長男), 쇼지 (次男), 사부리 後尾(長女, 사부리 사다오 의 男便)
賞勳 일본 제국 勳1等 旭日動畫臺數長
대한제국 大勳位 李花大首長

고무라 株타로 ( 日本語 : 小村壽太? , 1855年 10月 26日 ~ 1911年 11月 26日 )는 日本 帝國 ( 메이지 時代 )의 外務官僚이다. 外交官, 外務大臣 等을 歷任하였다.

略歷 [ 編輯 ]

休暇 誤秘番 (只今의 미야자키현 니치난視 ) 出身으로 오비 燔師 고무라 間페이의 長男으로 태어났다.

1870年 大學南郊(大?南校, 도쿄 大學 前身)에 入學했다. 第1回 문부성 海外留學生에 選拔되어 하버드 로스쿨 로 留學을 갔다. 그는 하버드에서 1877年에 法學 學事 學位를 取得하였다. [1]

사법성에 입들어가 대심원 判事를 거쳐 外務省에 轉出하였다. 무쓰 무네미쓰 에게 認定받아 淸나라 代理公使를 맡기도 하였다. 淸日戰爭 後 駐韓 辦理工事, 外務次官, 駐美, 駐러工事를 歷任하였다. 1900年 義和團 事件에서는 强化會議 全權으로서 事務處理를 맡았다.

1901年 第1次 가쓰라 內閣 의 外務大臣에 就任하였다. 1902年 締結한 영일同盟 을 積極的으로 主張한 공으로 男爵 位를 授與받아 華族 班列에 오른다. 1904年 러일戰爭 에서 展示外交를 擔當하고 1905年 포츠머스 會議에서 日本全權으로서 參席하여 러시아側 全權大使人 세르게이 비테 와 交涉하여 포츠머스 條約 을 調印한 공으로 伯爵 으로 陞爵하게 된다.

1908年 成立한 第2次 가쓰라 內閣 의 外務大臣을 다시 맡았다. 막말 以來 不平等條約을 解消하기 위하여 條約改正의 努力을 하여 1911年에 美日通商航海條約을 調印하여 關稅自主權의 回復을 이루었다. 러일協約 ( 日本語版 ) 을 締結하여 韓國을 倂合 하는데에도 關與하여 一貫된 日本의 大陸政策을 進行시키고 이러한 공으로 侯爵 으로 陞爵하게 된다.

그 해 外務大臣 辭任 後 死亡하였고 後爵位는 長男 긴이치 가 習作하였다.

各州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


第1代 고무라 (株타로) 後作家 堂主
1911年
後任
고무라 긴이치
고무라 (株타로) 百作家 堂主
1907年 ~ 1911年
後任
侯爵 으로 陞爵
고무라 (株타로) 남作家 堂主
1902年 ~ 1907年
後任
伯爵 으로 陞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