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즈키 데이理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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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데이理致

스즈키 데이理致 ( 日本語 : 鈴木 貞一 , 1888年 12月 16日 ~ 1989年 7月 15日 )는 지바縣 出身의 日本帝國 陸軍 軍人으로, 統稱은 "紳士服을 입은 軍人"이었다. "三間祠宇" (三奸四愚) 라고 불렸던 度祖 히데키 (東條英機) 側近의 3間 中 하나로 여겨지는 人物이다.

人物과 經歷 [ 編輯 ]

스즈키 데이理致는 1888年 , 只今의 지바縣 에서 地主의 長男으로 태어나 1910年 日本 陸軍士官學校 , 1917年 에 日本 陸軍大學校를 卒業하였다. 元來는 滿洲의 森林 開發에 從事하는 것을 志望해 卒業 後에도 中國 問題에 關한 硏究를 繼續하였고, 參謀 本部의 지나半 作戰과 勤務를 命令 받아 상하이 , 北京 , 우한 等에 主宰하였다.

1929年 5月 19日 에는 이시와라 干支 (石原莞爾), 나가타 데쓰盞 (永田?山), 度祖 히데키 , 이타가키 세이시로 (板垣征四?) 等 日本 陸軍 中堅 將校들이 結成한 日石灰 (一夕?)에 參加하였고, 1931年 에는 三月 事件 (三月事件)에 加擔하였다.

스즈키 데이理致는 通稱이 "紳士服을 입은 軍人"이었던 것처럼 實戰 部隊에서의 經驗은 別로 없고, 主로 對外的·官僚的인 일에 從事하는 人物이었다. 1931年 , 滿洲事變 勃發에 隨伴해 軍務局에서 勤務함과 同時에, 스스로가 獨斷的으로 滿洲 政策을 推進하였다. 그 때, 시라토리 도시오 (白鳥敏夫)나 모리 가쿠 와 提携해 國際 聯盟 脫退論을 主張했고, 軍部에서 國際 聯盟 脫退 推進派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36年 에 일어난 2·26 事件 當時에는 야마시타 도모유키 (山下奉文)와 함께 靑年 將校들의 說得에 臨하였다. 1940年 8月 1日 에 中將으로 昇進하였고, 1941年 4月 4日 에 豫備役으로 編入되었다. 그와 同時에 第2次 고노에 內閣에서 國務 代身 兼 企劃院 總裁로 就任하였고, 以後 第3字 고노에 內閣과 賭租 內閣에서 各各 國務 大臣을 맡았다. 賭租 內閣에선 英國의 印度 植民性을 본따 帶同牙城 을 設立하였고, 日本 外務省 의 아시아 關係 權限을 모두 陸軍이 强奪해 스스로가 事實上 外務 大臣이 되려고 했지만, 計劃은 失敗로 끝났다.

그 後에는 大東亞 建設 審議會 幹事長, 貴族院 議員, 內閣 拷問, 日本 産業輔國會 會長 等을 지냈다.

第2次 世界 大戰 以後 [ 編輯 ]

스즈키 데이理致는 第2次 世界 大戰 以後인 1945年 12月 3日 , A級 戰犯으로 起訴되었다. 그는 極東 國際 軍事 裁判 에서 終身刑 判決을 받았으며, 1955年 9月 17日 하시모토 긴고로 (橋本欣五?), 伽倻 오키노리 (賀屋興宣)와 함께 假釋放돼 1958年 에 赦免되었다.

赦免 後에는 産業 計劃 會議 委員으로 한 番 從事했지만, 기시 노부스케 (岸信介) 內閣 成立 後인 1959年 自由民主黨 으로부터 參議院 選擧 出馬 要請을 받자 强하게 拒否하였고, 以後 公職에 오르지 않았다.

그 다음에는 지바縣 의 生家에서 조용히 餘生을 보내면서 1989年 7月 15日 에 100歲의 나이로 死亡했는데, A級 戰犯으로선 唯一하게 헤이세이 時代 까지 生存한 人物이었다. [1]

各州 [ 編輯 ]

  1. 야후 재팬의 스즈키 데이理致에 對한 說明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