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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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未詳
朝鮮
忠淸道
(推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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死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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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年
日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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職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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工藝家, 陶藝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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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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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
→
日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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性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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男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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分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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工藝
,
陶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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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參平
(李參平, ?~
1655年
)은
朝鮮 時代
의 道公이다.
壬辰倭亂
때
日本
규슈
로 끌려가
아리타 自己
(또는
이마리 自己
)의 母胎를 만든 人物로 알려져 있다. 일본명은
가네가에 山베에
(金ヶ江三兵衛).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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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年
,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
壬辰倭亂
을 일으켰을 때 日本軍 中
나베緦麻 나오시게
(鍋島直茂) 軍에 잡혀 日本에 끌려 간 道公 中 한 名이다. 以後 가네가에 산베에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李參平은
나베緦麻 나오시게
의 家臣
다쿠 야스토視
에 依託하면서,
오기군
다쿠
에 살았다. 一般的으로 傳해져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李參平은 自己의 原料인
高嶺土
를 찾기 爲해 나베緦麻 家門의 英知人
賜暇番
내를 轉轉했고, 마침내
1616年
아리타 東部의 泉山에서 良質의 高嶺土를 發見하곤 덴구다니에
가마
를 지어 日本 첫
白瓷
를 구웠다. 이로써
아리타 自己
가 始作됐다고 한다. 아리타의 절인 류센地(龍泉寺)의 帳簿에
1655年
에 죽었다고 記錄되어 있다. 誡命은 月窓正心擧事(月窓?心居士)였다. 李參平의 墓所는 오랜 歲月 잊혀졌지만,
1959年
덴구다니 가마 附近에서 誡命이 새겨진 墓石의 下部 部分이 發見되어 詩로카와 墓地에 옮겨졌다. 墓石 上部 部分은 發見되지 않았다. 이 墓石은〈이삼평의 墓〉로서 아리타 情 指定 史跡으로 指定됐다.
事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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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參平은
사가縣
아리타 地域에서는 陶瓷器의 始祖라는 意味에서 賭租(陶祖)로 받들어지고 있다. 아리타의
度盞 神社
는
誤診 天皇
,
나베緦麻 나오시게
와 함께 李參平을 祭神으로 모시고 祭祀를 지내고 있다.
1917年
아리타 自己 創業 300年을 記念하여 道盞 神社에〈도조 李參平 비〉가 建立됐다. 每年
5月 4日
賭租 祝祭가 열린다. 또
1990年
에는 그의 故鄕으로 推定되는
忠淸南道
公州市
반포면에 韓日合同 記念碑가 세워졌다.
[1]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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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一般的으로 불리는 李參平이라는 이름은 가네가에 家門의 文書에 本來 性은 李氏라는 記錄과 산베에라는 이름이 三坪(參平) 或은 三坪(三平)으로 記錄된 일로부터 類推한 것이다.
- 아리타 自己의 歷史에 關한 調査 結果를 보면
1610年
代 前半부터 아리타 西部에서 이미 自己를 生産하기 始作했다는 記錄이 있는 만큼 李參平이 아리타 自己의 元祖라는 데 對해 疑問視하는 傾向도 있다. 하지만 아리타 自己의 誕生과 發展에 李參平을 비롯한 朝鮮 出身 陶工들의 役割이 컸다는 데에는 疑問의 餘地가 없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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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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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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