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北統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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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北統一의 象徵인 韓半島旗

南北統一 ( 韓國 漢字 : 南北統一, 文化語 : 北南統一)은 韓半島 에 存在하는 두 國家인 大韓民國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 하나의 國家로 統一하는 것을 意味한다. 英語로는 韓國 의 再統一 ( 英語 : Korean reunification )로 表現한다.

韓半島는 地政學的 特殊性으로 인해 世界의 經濟, 政治 安保的으로 주는 影響이 크다. 統一된 韓半島 는 國家 經濟의 對外 貿易 依存度가 國民 總生産 GNP 의 90% 程度 以上을 차지하는 지나치게 높은 輸出 主導型 脆弱한 經濟 構造를 가진 大韓民國 經濟 에 새로운 希望을 줄 수 있다. 또한 閉鎖經濟 및 開發道上國 水準의 社會主義 經濟 構造를 가진 北韓의 經濟 에도 南韓의 經濟 構造에 編入되어 自由貿易, 市場開放 및 經濟民主化의 利益을 얻을 수 있게 된다.

背景 [ 編輯 ]

以前 歷史 [ 編輯 ]

韓半島는 南北國時代 , 後三國時代 , 南北國 時代 以後 統一 國家를 維持하고 있었다. 676年에 統一新羅 는 唐나라 軍隊를 大同江 北쪽으로 逐出하여 韓半島 以南에 統一을 達成하였다. 以後 登場한 高麗 朝鮮 은 眞正한 意味의 韓半島 統一을 達成하였다. 이로써 約 1,300年 동안 韓半島 地域에서 韓民族 은 統一된 國家를 이루었다.

分斷의 過程 [ 編輯 ]

1945年 9月 2日 第2次 世界大戰 이 마무리된 뒤, 國際聯合 信託統治 할 計劃을 樹立했고 北緯 38度 를 境界로 하는 2個의 區域으로 朝鮮을 分割했다. 그리고 南쪽에는 美軍政 이, 北쪽에는 蘇聯軍政 이 들어섰고 各自 地域에서 軍政 을 開始했다. 그러나 南쪽의 民族主義 者들과 一部 共産黨員들이 信託統治 反對 運動을 벌이자 美·蘇는 信託統治의 實施를 둘러싸고 對立이 깊어졌고, 最終的으로 韓半島는 大韓民國 政府 樹立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樹立으로 分裂된 狀態가 固着化되었다.

그 後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은 韓半島 赤化統一 을 目標로 1950年 6月 25日 南侵하여 韓國 戰爭 을 일으켰지만, 美軍 을 中心으로 한 國際聯合軍 의 反擊으로 退却했고, 休戰 에 依해서 韓半島는 軍事 分界線 으로 分斷이 固着化되었다. 南韓은 分斷 以後 軍事獨裁와 民主主義의 復活 等을 겪었으며, 北韓은 分斷 以後 일당獨裁의 길을 걷게 된다. 아직도 南北은 休戰 狀態로 對峙 中이다.

聯邦制와 吸收統一 方式 [ 編輯 ]

統一의 方式은 聯邦制와 吸收統一에 依한 方式으로 區分할 수 있다. 聯邦制에 依한 統一 方式은 大韓民國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間에 2體制 2政府를 認定하면서, 相互 交流 協力을 통해 共同의 利益을 增進시키면서, 分斷의 障壁을 克服하고, 長期的·最終的으로는 單一 國家 및 單一 政府에 이르는 것을 意味한다. 그러나 이런 方式으로 統一을 이룰 境遇 結局 無意味한 統一이 될 수 있고, 예멘 처럼 侵略 및 再 吸收統一 可能性이 있다는 批判이 있다. [1]

吸收統一 方式은 獨逸과 같이 平和統一을 이루거나 한 쪽의 體制를 스스로 무너지게 만들어 占領하여 吸收統一하는 方式이다. 이 方式은 한 쪽에서 天文學的인 統一에 따른 經濟的인 費用을 負擔하면서, 한 쪽의 政府를 吸收하는 統一 方式이다. 冷戰 時期의 西獨 이 吸收統一을 實現한 國家이며, 東獨 은 西獨에게 吸收되어 統一獨逸이 完成되었다. 그러나 吸收統一에는 한가지 분명한 短點이 있는데 바로 經濟的 費用이다. 랜드 硏究所 에 依하면, 獨逸의 境遇 1,800兆 원 以上이 消耗되었으며, 每年 1,000億 유로 以上이 消耗되고 있다고 한다.

다른 吸收 統一 方式은 非平和的인 方式으로, 戰爭에 依한 統一이다. 卽, 武力 侵攻에 依한 征服으로, 國際的으로 侵略 戰爭이라고 規定된 6.25 戰爭 의 境遇,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것을 '祖國統一戰爭'이라고 부른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戰爭을 통해 統一하는 것을 赤化統一 이라고 한다. 現代社會에 들어서는 國際 關係와 戰爭에 因한 被害 發生으로 인해 現實的으로 일어나기 쉽지 않다. 國際法이 普遍化되고 있는 오늘날, 유엔 憲章에서는 유엔 憲章 第2條 4項은 모든 會員國이 다른 國家의 領土 保全이나 政治的 獨立에 對해 武力의 威脅이나 武力行使를 삼가야 한다고 規定하고 있다. [2]

統一에 對한 贊成과 反對 [ 編輯 ]

過去에는 大韓民國의 境遇, 1940年代부터 統一의 重要性을 强調했으나, 2010年代 들어 繼續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挑發, 統一의 必要性에 加해지는 疑問 等의 增加로 統一은 찬·반이 對立하는 論題로 바뀌었다.

統一을 贊成하는 立場 [ 編輯 ]

  • 같은 民族이고, 歷史가 같다. 歷史的으로 只今까지 繼續 한 國家로 存在한 時期가 길다. 또한, 우리의 分斷은 우리의 決定에 依한 것이 아니라 蘇聯과 美國의 依해 決定된 것이므로 統一을 해야 한다. 韓半島 分斷은 地球 上 얼마 남지 않은 克服해야 할 冷戰의 産物이다.
  • 두 나라가 統一이 되면 큰 시너지 效果가 發生한다. 面積이 커지고, 人口가 增加할 뿐만 아니라, 兩國의 不足한 點을 서로 補完하여 産業의 非對稱性을 改善할 수 있다. 例를 들어, 大韓民國에 不足한 鑛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不足한 서비스業이 補完될 수 있다. 北韓의 非武裝은 莫大한 勞動力을 다양한 産業 分野에 바로 利用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이는 産業의 補完性과 더불어 不足한 內需 市場을 活性化시킬 수 있는 肯定的인 與件이 된다.
  • 半도 國家지만 事實上 陸路가 막힌 大韓民國의 交流 問題를 解決하여 陸路 上 國外 進入이 可能해진다. 倍·飛行機로만 可能했던 國外 人的·經濟的 交流 費用이 크게 節減되고 交流 規模도 커진다. 中國, 러시아와의 陸路連結로 인해 發生하는 시너지와 飛行機를 타지 않아도 高速 列車 를 타고 中國과 러시아를 旅行할 수 있는 時代가 올 것이다. 韓半島 縱斷 鐵道 를 活用한 物流 事業 또한 期待해볼 만하다.
  • 2024年 基準으로 大韓民國의 經濟 規模가 11位인데, 10位圈 以內로 進入하여 最上位圈 國家들과 隔差를 줄일 수 있다. 또한, 周邊 東北아시아 國家들과 經濟的 隔差를 어느 程度 解消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G20, 더 나아가 G7+에서 强化된 影響力을 行使할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繼續된 大韓民國의 挑發 可能性을 削除하고 東北아시아의 戰爭 可能性을 크게 낮추어 東北아시아 및 世界 平和에 큰 寄與를 할 수 있다. 東아시아 內 武力 紛爭에 對한 可能性이 緩和된다면 東아시아 國家들 間 協力이 더욱 수월해지게 된다.
  • 韓半島 內 緊張 解消 및 東北아시아 內 緊張 解消로 인해 徵兵制인 大韓民國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軍隊 維持 方法을 募兵制로 바꿔 國民 또는 人民들이 義務的으로 服務해야 하는 期間이 除去되어 社會的 安定을 誘導할 수 있다. 國民 個個人 立場에서는 該當 期間에 自己啓發을 하거나 期間동안의 社會的 斷絶을 없애 더 能率的인 生産性을 確保할 수 있으며, 徵兵制로 인한 社會 不安·論難을 없앨 수 있다.
  • 統一을 하면 戰爭이 일어날 危險性이 적어지며, 海外에서 韓國을 分斷國家 라고 認識하고 있는 것이 사라질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經濟效果를 불러올것이 틀림없다. 코리아 디스카운트 만 봐도, 韓國의 株式이 저평가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旣存의 韓國에 對한 否定的인 視角이 없어지면서 以北 地域에 對한 韓國의 觀光 産業이 過去에 비해서 더욱 커질 것으로 豫想된다. 그리고 戰爭 威脅이 解消된 韓半島 全域에 外國의 企業과 個人 投資者들이 關心을 갖게 될 것이다.
  • 低出産으로 인한 人口減少를 統一로 인해 어느 程度 解消할 수 있다. 單, 韓半島 自體의 高齡化는 持續될 것으로 보이나, 統一 以後 勞動力에 對한 需要가 增加된다면 低出産 問題 또한 漸進的으로 解決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 大韓民國이 자랑하는 文化를 더욱 豐富하고 넓은 視角으로 볼 수 있게 된다. 韓半島 分斷으로 인해서 南韓에서는 高句麗, 渤海, 高麗, 朝鮮(韓半島 以北 地域)에 對한 硏究家 限定的으로 이뤄지고 있다. 統一 以後 韓國史와 韓國 文化에 對한 硏究가 體系的으로 發展될 可能性이 높다. 또한 이러한 遺跡들은 追後 유네스코 文化財에 登錄될 것이다.
  • 南北 統一을 完遂하여 韓半島 以北 地域에서 發生하고 있는 多量의 人權 蹂躪을 豫防하고, 現在 中國 및 러시아 內 暗暗裏에 居住하는 北韓離脫住民에 對한 人權 侵害를 防止하고 人權 保障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다.

統一을 反對하는 立場 [ 編輯 ]

  • 1990年代 以後로 南北韓의 經濟 水準을 비롯한 絶對多數의 體系는 너무 極端的으로 벌어졌으며, 이 差異는 努力으로 克服하지 못할 것이라는 立場이다.
  • 같은 民族이고 歷史가 같지만 交流가 끊긴지 71年이 넘었다. 當時 平均 壽命을 考慮했을 때 한 사람의 生涯 以上의 時間이 지났다는 것이다. 離散家族 또한 死亡으로 크게 줄고 있다. 統一의 必要性을 느끼는 個個人의 數가 크게 줄고 있고, 두 國家間 分斷으로 인한 文化的 差異도 크게 發生했다.
  • 큰 시너지 效果가 發生하더라도 統一 直後에 큰 社會的 混亂을 惹起할 수 있고, 언제 끝날지 모른다. (꽤 오랜 時間이 必要할 수도 있다.) 大部分의 費用이 大韓民國을 改善하기보다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基礎 인프라 工事에 들어갈 것이고, 그 莫大한 豫算은 經濟 10位의 大韓民國 일지라도 매우 어려우니 當分間 經濟가 逆成長할 可能性이 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 人民들이 獨裁政·社會主義 計劃經濟 體制에 큰 厭症을 느낀다 해도, 갑작스런 民主政·資本主義 市場經濟 體制의 導入은 큰 混亂을 불러올 수 있으며, 이에 쉽게 同質되지 못하고 犯罪 組織이 發生할 수 있다.
  • 法이 다른 두 나라는 統一된 法을 만들거나 地域別로 다른 法을 執行해야 하는데, 그 過程에서 社會的 混亂이 發生할 수 있다. 또한, 大韓民國人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人에게 저지르는 犯罪가 크게 增加할 수 있다.
  • 陸路上의 國內 流入이 可能해져 韓中·韓러 國境사이의 密入國者 및 不法滯留者가 增加할 수 있으며, 相對的으로 市民意識이 낮은 北韓人 및 朝鮮族이 저지르는 犯罪가 크게 增加할 수 있다.
  • 統一이 된다고 해서 東北아시아의 平和가 完全히 왔다고 보기 힘들다. 中國은 美國과 霸權 競爭을 하고 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抛棄한 白頭山 天池 내 一部 領有權과 間島 協約 等의 問題가 다시 水面 위로 올라갈 수 있으며, 이는 새로운 東北亞 내 緊張과 戰爭 可能性의 增加를 불러올 수 있다.
  • 統一이 된다고 해서 募兵制로 바꾸기 쉽지 않다. 東北아시아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없이도 中國, 大韓民國 및 日本에 依해 中東같이 '世界의 火藥庫'라고 불리고 있으며, 潛在的으로 홍콩, 臺灣, 마카오도 이에 큰 불씨로 作用할 수 있다. 美軍이 駐屯해있는 國家가 美國의 最大 敵性國人 中華人民共和國·러시아와 同時에 國境을 接하는 狀況에 놓이게 되며, 軍事的으로 더 不安定해질 수 있다. 이런 緊張 속에서 軍事 數를 크게 줄이는 募兵制 導入은 쉽지 않을 것이다.
  • 平和統一이 不可能해 北進(滅共)統一을 한다면, 人權蹂躪國家이자 最貧國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除去하지만, 國際社會的으로 큰 批判을 받을 수 있다. 또한, 韓半島의 戰爭에 周邊 强大國들까지 介入을 하게 되면 이것이 3次 世界大戰으로 擴散되지 않을것이라고 壯談하기 힘들다. 더불어 統一 韓國 國內에서도 區 南韓 地域에서는 北進 過程에서 戰死 또는 부상당한 將兵 等의 處遇 問題가 不可避하며, 區 北韓 地域에서도 統一 以後 發生할 問題 및 旣存의 社會 問題에 더불어 戰爭으로 인한 各種 戰後 問題 等으로 인해 舊 南韓과의 葛藤이 深化되어 社會的으로도 不安定해질 수 있다.
  • 獨逸이 統一할때에 費用은 3000兆 以上이 統一費用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두 國家가 統一한다면 비슷하거나 그 以上의 費用이 들게 되어 統一費用을 堪當하지 못할 수 있다.

統一 可能性에 對한 懷疑論 [ 編輯 ]

統一을 贊成·反對하기보다는, 統一 自體가 일어나기 힘들거나, 統一되더라도 한참 뒤에 可能하다는 立場이다. 1990年代 以後로 南北 關係 改善 및 2000年代 南北頂上會談 等으로 크게 改善되었지만 2000年代 末부터 惡化된 南北 關係로 인해 2010年代 들어 크게 增加했다.

  • 金正恩의 健康 이상설, 쿠데타說 等이 있지만, 김일성이 죽었을 때와 김정일이 죽었을 때도 그랬듯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큰 混亂에 빠지지 않은 채로 이어갈 것이다.
  • 閉鎖的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社會로 因한 SNS 上의 交流 不可 및 苛酷한 刑罰, 祕密警察의 監視, 낮은 經濟力으로 인해 祕密裏에 쿠데타를 일으키기도 힘들고, 諦念하는 人民들이 많다. 제아무리 世界 技術이 發展하고 疏通이 빨라져도, 이는 갑작스레 바뀌지 않을 것이다.
  • 繼續된 大韓民國 內 政權 交替 및 旣存 政權 路線의 廢棄 等으로 旣存 政策이 繼續 밀어붙여지기 힘들고, 大韓民國 內에서도 贊反 論難이 거세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政府는 金氏 一家의 世襲 政權 維持를 願하지 統一을 願하지 않고 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大韓民國 또는 他 國家를 侵略하여 戰爭이 發生한다면, 國際戰으로 갈 可能性이 매우 높고, 이렇게 되면 前後 大韓民國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모든 領土를 收復하지 못할 可能性이 있다.

政府·時期 別 統一運動 및 統一政策 [ 編輯 ]

軍政期 [ 編輯 ]

左右合作運動 [ 編輯 ]

左右合作運動 은 1946年 統一 臨時政府를 樹立하기 위해 左派·右派勢力이 合作을 하여 連帶를 推進하였던 運動을 말한다. 이 運動에는 中道派 勢力 人士들이 主軸으로 構成되어 展開되었다.

南北 連席會議 [ 編輯 ]

南北 連席會議 는 南側만의 單獨政府 樹立을 反對하는 南北의 政黨·社會團體 代表들이 5·10 總選거 를 沮止하고 統一民主國家 樹立을 위해 對策을 論議한 會談을 말한다. 1948年 4月 19日 부터 始作된 이 會議는, 金九 , 김규식 金日成 , 김두봉 과 같은 南北의 名望家들이 多數 參席하여 그 所期의 目的을 이루는 듯하였으나 結局 아무런 成果도 없이 끝나고 말았다.

大韓民國 [ 編輯 ]

韓民族共同體統一方案 [ 編輯 ]

韓民族共同體統一方案 1989年 9月 11日 國會 에서 盧泰愚 大統領의 特別宣言을 통해 發表됐다. 1982年 發表된 '民族和合民族民主統一方案'을 補强한 것이다. 自主, 平和, 民主를 3大 原則으로 한다. 發表 當時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聯邦制 統一案에 가장 近接시켰다는 評價를 받았다.

다음의 3段階로 統一을 이룬다.

  • 民族共同體憲章 採擇

統一이 될 때까지 南北關係를 이끌어갈 수 있는 規則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

  • 南北聯合

民族共同體憲章에 기초하여, 南北頂上會議와 實行機構人 南北閣僚會議, 南北評議會 等의 過渡機構를 設置

  • 統一憲法 制定으로 統一民主共和國 建設

南北評議會에서 마련한 統一憲法을 바탕으로 總選擧를 實施해 統一國會와 統一政府를 構成

民族共同體統一方案 [ 編輯 ]

金永三 이 採擇한 統一方案이다. 노태우 政府의 韓民族共同體 統一方案을 若干 修正하였다. "韓民族共同體 建設을 위한 3段階 統一方案" 이라고도 한다.

"禪 交流 後 統一"의 原則下에, 다음의 3段階를 거쳐서 統一을 이룬다는 構想이다.

  • 和解協力段階
  • 南北聯合段階
  • 統一國家 完成段階

햇볕政策 [ 編輯 ]

햇볕政策 은 南北韓 間의 緊張關係를 緩和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을 改革·開放으로 誘導하기 위해 김대중 政府 가 推進하던 對北 政策이다. 大韓民國의 민주당系 正當 은 햇볕政策을 支持하거나 追求하고 있고, 大韓民國의 進步政黨 도 이 政策에 好意的인 立場을 보이고 있으나, 大韓民國의 保守政黨 은 이 政策을 警戒·批判하거나 反對하는 傾向이 있다. 민주당系 政黨이 政權을 잡았던 김대중 政府 노무현 政府 時節 햇볕政策에 依해 金剛山 觀光 開城工團 事業 等이 이루어졌고, 文在寅 政府 도 이 政策을 繼承하고 있다. 그러나 햇볕 政策 때문에 천안함 事態 , 延坪島 砲擊 事件 等이 일어났다고 主張하고 있다. 햇볕政策의 3大 原則은 아래와 같다.

  • 첫째, 北側의 武力 挑發을 許容하지 않는다.
  • 둘째, 南側은 吸收 統一을 試圖하지 않는다.
  • 셋째, 南側은 和解와 協力을 推進한다.

相互主義 政策 [ 編輯 ]

大韓民國의 민주당系 正當 이 追求하는 햇볕政策 을 警戒·批判하거나 反對를 表하는 大韓民國의 保守政黨 이 追求하는 政策으로, 保守政府人 李明博 政府 朴槿惠 政府 에서 이 政策이 施行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의 對話나 貿易이 平和的인 韓半島 統一의 展望을 改善하는 것에 寄與하고 있지 않다고 主張하고, 햇볕政策은 非民主的으로 全體主義 敵人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政府의 體制 强化를 돕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未來統合黨 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對한 經濟援助와 兩國間의 交流에 對해 相互主義的 立場을 堅持하고 있다. 大部分의 脫北者 들 亦是 햇볕政策에 對해 反對를 하고 있다.

休戰線 以北 領土 管理 [ 編輯 ]

以北 5道廳은 서울特別市 鍾路區 구기동에 位置하고 있다. 大韓民國 憲法 에 依據, 休戰線 以北 地域(現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管轄 地域, 中華人民共和國 의 一部地域 包含)을 自國 領土로 規定하고 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實體를 形式的으로 否定하고 있다. 이러한 立場에 따라 1962年 에 《以北 5度에 關한 特別措置法》을, 1970年 에 《以北5度職制》(以北五道職制)를 制定하여 統一 政策을 뒷받침하고 있다.

統一 方案 [ 編輯 ]

自由統一 方案

大韓民國 의 憲法, 法律을 바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의 統治 地域에 導入하는 吸收統一 方案이다. 大韓民國은 韓半島 北部 地域에서 大韓民國 主導의 吸收統一을 願하게 될 境遇에는 이에 應할 計劃이나, 김대중 政府는 먼저 試圖하지 않겠다는 意思를 밝혔다.

中立化 統一 方案

地政學的 位置나 戰略的 價値로 말미암아 周邊 强大國들의 利害關係가 尖銳하게 交叉되는 地域이나 또는 그 地域에 位置한 國家에게 理解 當事國들 共同의 協約으로 永世 中立 의 地位를 附與함으로써 그 地域(또는 國家)을 國際紛爭의 對象에서 制度的으로 隔離시키려는 國際的 勢力管理 方案이다. 曖昧한 正體性으로 社會 混亂이 커질 確率이 相當히 높고 色彩도 없어 支持를 받지 못 하는 意見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編輯 ]

아래는 文化語 로 表記한 內容이다.

高麗民主連放共和國안 [ 編輯 ]

  • 國家活動의 모든 分野에서 自主性을 確固히 堅持하며 自主的인 政策을 實施하여야 한다.
  • 나라의 前 地域과 社會의 모든 分野에 걸쳐 民主主義를 實施하며 民族의 大團結을 圖謀하여야 한다.
  • 北과 南사이의 經濟的 合作과 交流를 實施하며 民族經濟의 自立的發展을 保障하여야 한다.
  • 科學, 文化, 敎育分野에서 北과 南사이의 交流와 協調를 實現하며 나라의 科學技術과 民族文化藝術, 民族敎育을 統一的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 北과 南사이에 끊어졌던 交通과 遞信을 련결하며 全國的範圍에서 交通, 遞信 手段의 自由로운 리용을 保障하여야 한다.
  • 勞動者, 農民을 비롯한 勤勞大衆과 全體 人民들의 生活安定을 圖謀하며 그들의 福利를 系統的으로 增進시켜야 한다.
  • 北과 南사이의 軍事的對峙狀態를 解消하고 民族聯合軍을 組織하며 外來侵略으로부터 民族을 保衛하여야 한다.
  • 海外에 있는 모든 朝鮮同胞들의 民族的權利와 利益을 擁護하고 保護하여야 한다.
  • 北과 남이 統一以前에 다른 나라들과 맺은 對外關係를 올바르게 處理하며 두 地域 政府의 對外活動을 統一的으로 調節하여야 한다.
  • 全民族을 代表하는 統一國家로서 世界 모든 나라들과 友好關係를 발전시키며 平和愛好的인 對外政策을 實施하여야 한다.

祖國統一을 위한 全民族大團結 10代 綱領 [ 編輯 ]

  • 全民族의 大團結로 自主的이고 平和的이며 中立的인 統一國家를 創立하여야 한다.
  • 民族愛와 民族自主精神에 기초하여 團結하여야 한다.
  • 共存, 共營, 公理를 圖謀하고 祖國統一偉業에 모든것을 服屬시키는 原則에서 團結하여야 한다.
  • 同族사이에 分렬과 對決을 助長시키는 一切 政爭을 中止하고 團結하여야 한다.
  • 北侵과 南侵, 勝共과 赤化의 危懼를 다같이 가시고 서로 信賴하고 團合하여야 한다.
  • 民主主義를 貴重히 여기며 主義主張이 다르다고 하여 排斥하지 말고 祖國統一의 길에서 함께 손잡고 나가야 한다.
  • 個人과 團體가 所有한 物質的, 精神的 財富를 保護하여야 하며 그것을 民族大團結을 圖謀하는데 利롭게 利用하는 것을 奬勵하여야 한다.
  • 接觸, 往來, 對話를 통하여 全民族이 서로 理解하고 信賴하며 團合하여야 한다.
  • 祖國統一을 위한 길에서 北과 男, 海外의 全民族이 서로 連帶性을 强化하여야 한다.
  • 民族大團結과 祖國統一偉業에 貢獻한 사람들을 높이 評價하여야 한다.

民族大團結 5代 方針 [ 編輯 ]

  • 民族의 大團結은 徹底히 民族自主의 原則에 기초하여야 한다.
  • 愛國愛族의 旗幟,祖國統一의 旗幟밑에 온 民族이 團結하여야 한다.
  • 우리 民族의 大團結을 이룩하자면 北과 남 사이의 關係를 改善하여야 한다.
  • 우리 民族의 大團結을 위하여서는 外勢의 支配와 干涉을 反對하고 外勢와 結託한 民族反逆者들, 反統一勢力을 反對하여 鬪爭하여야 한다.
  • 民族의 大團結을 이룩하기 위하여서는 北과 男, 海外의 온 民族이 서로 往來하고 接觸하며 對話를 發展시키고 聯隊聯合을 强化하여야 한다.

祖國統一 3大 原則 [ 編輯 ]

  • 自主統一
  • 平和統一
  • 民族大團結

南北韓 政府의 統一 政策 比較 [ 編輯 ]

南北 區分 統一 政策 要約 [3] [4]
  • 統一은 하나의 過程으로 보며 中長期的 視角에서 接近
  • 政策의 決定 過程을 民主的으로 하여 漸進的 段階的 進行
  • 聯合制를 통한 南北韓 各各의 國家를 認定하며, 相互 間에 對話와 協力을 통한 統一 志向
  • 大韓民國 主導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非核化 統一 政策과 北韓 政權이 核을 抛棄하도록 說得하고 壓迫하는 同時에 이를 强制하는 方向의 推進
  • 聯邦制를 통한 統一 方案
  • 守令과 黨이 決定하면 人民 大衆은 따르는 統一
  • 外勢의 干涉 없이 民族끼리 決斷力을 發揮하여 統一
  • 김정은 執權 6年 동안 對北 國際 經濟 및 貿易 壓迫에도 不拘하고 政權의 安定을 維持하여 왔고, 中國을 통한 北美 間의 平和 協定 推進

大韓民國 政府의 統一 政策 [ 編輯 ]

政府 區分 (任期) 統一 政策 및 實績 [5] [6]
尹錫悅 政府 (2022/05/10 ~ 現在)
文在寅 政府 (2017/05/10 ~ 2022/05/09)
  • 北韓의 非核化 原則을 固守하면서, 北韓과의 交流와 協力을 통한 北韓 核武器의 根本的인 廢棄를 推進
  • 韓半島의 신경제 地圖의 構想을 實行하여, 大韓民國 經濟의 新 成長 動力 稼動
  • 南北韓의 市場을 하나로 統合하여, 漸進的 段階的 統一(急激한 統一을 通한 副作用 豫防)
  • 南北 間의 基本 協定을 締結하고 實行하여 南北 間의 關係를 正立
  • 南北 間의 社會, 文化, 體育 交流를 活性化하며, 接境 地域의 經濟를 發展 [7]
朴槿惠 政府 (2013/02/25 ~ 2017/03/10)
  • 韓半島 統一 大박論을 통해 統一 談論과 論議를 提示함.
  • 2014年 2月 南北 高位級 接觸, 相互 誹謗 中止, 離散 家族 相逢 進行에 南側을 믿고 한番 해보겠다고 對答: 實際로는 NLL 隣近 射擊 訓鍊 및 無人機, 미사일 等 北韓 軍事側의 挑發 發生함. - 北韓 김정은 政府의 統一 意志에 對한 北韓의 軍部에서의 反撥이었는지, 직접的인 김정은 政府의 指示에 依한 것인지는 檢證되지 못함. - 南韓側에서는 北韓과의 對話를 中斷함.
  • 2014年 8月 7日 大統領 直屬 統一準備委員會(드레스덴 構想 司令塔) - 北韓 民生인프라 構築을 위한 南北韓의 協力方案 마련과 文化·藝術 및 스포츠 分野의 交流 協力, 緊張緩和를 위한 DMZ 平和 公園의 造成 等.
  • 統一이 國民의 共感帶나 周邊國의 理解 乃至는 同意없이 單獨的으로 이뤄질 수 없다는 冷嚴한 對外 現實을 바탕으로 統一을 위한 나라 안팎의 公論을 모으고 靑寫眞을 提示함으로써 統一이 韓半島 뿐 아니라 周邊 各國에도 利益이 되는 이벤트가 될 수 있도록 與件 造成.
  • 韓半島 統一이 "東北亞에 相當한 經濟的 波長을 줄 것으로 豫想되고 世界 企業도 注目하게 될 것"이라며 "獨逸 統一이 없으면 유럽 統合이 不可能했듯 東北亞 平和와 새로운 유라시아 時代가 韓半島 統一의 土臺가 돼야 可能하다는 비전”을 目標函
  • 落後된 北韓의 인프라를 再建하고 住民들에게 福祉를 提供해야하므로 莫大한 돈이 들어가는 것을 念慮하는 境遇가 있었지만 實際 韓國의 經濟力과 國力, 國際 協力 等을 통한 統一이라면 實現 可能性이 높다.
  • 大韓民國 大統領에 對한 北韓의 感情的인 誹謗과 甚한 人身 攻擊에 對해서 北韓을 批判하면서 北側이 信賴있는 行動을 한다면 南韓에서도 信賴있게 對應을 하겠다고 條件附的인 對應.
李明博 政府 (2008/02/25 ~ 2013/02/24)
  • 앞서 南北韓 政府에서 合意된 統一 政策인 10.4 頂上 會談과 6.15 共同宣言을 除外하고, 南北 關係의 出發點을 10年前으로 되돌려 1991年 노태우 政權때의 南北基本合意書를 强調함.
  • 核 問題를 從屬 變數로 核의 抛棄를 위한 進展 狀況에 따라 南北關係 發展을 推進하겠다고 하였다.
노무현 政府 (2003/02/25 ~ 2008/02/24)
  • 南北韓 間의 戰爭狀態를 끝내 緊張을 緩和하며 相互間의 平和를 정착시키며, 이를 通해서 南韓과 北韓 모두가 發展을 이루며 統一의 터전을 마련한다.
  • 南北韓 經濟的인 差異가 너무 크고 政治·社會的 隔差가 크므로 北韓 經濟를 어느程度 끌어올린 後에 自然스럽게 統一이 이루어지도록 北韓의 經濟的인 支援을 强化함.
  • 延坪海戰 을 南韓만의 被害者가 아니라 南北韓間 一觸卽發의 緊張 속에서 南韓과 北韓 모두 被害者로 認識하고 相互 緊張 緩和 努力. - 2007年 10月 4日 北韓의 김정일을 만나 西海上 武力 衝突의 防止를 위해 “西海 平和 協力 特別 地帶”에 合意함.
  • 南과 北은 軍事的 敵對 關係를 終熄하고, 韓半島의 緊張 緩和와 平和를 保障하기 위해 緊密히 協力한다.
  • 南과 北은 서로 敵對視 하지 않고 軍事的 緊張을 緩和하며 紛爭 問題를 對話와 協商을 통해 解決하기로 하였다.
  • 南과 北은 韓半島에 어떤 戰爭도 反對하며, 不可侵 義務를 確固히 遵守하기로 하였다.
  • 南과 北은 偶發的 衝突 防止를 위하여 共同 漁撈 水域을 指定하고 이 水域을 平和 水域으로 만들기 爲한 方案과 各種 協力 事業과 軍事 保障 問題 等 軍事的 信賴 構築을 위하여 北側 人民武力部長과 南側 國防部 長官 사이의 會談을 合意.
  • 南과 北은 民族 經濟의 均衡的 發展과 共同의 飜譯을 위해 牽制 協力 事業을 公理 公營과 有無相通(有無相通: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融通한다.)의 原則에 依해 積極 活性化하고 持續 發展해나간다.
김대중 政府 (1998/02/25 ~ 2003/02/24)
  • 南北韓 間의 戰爭 狀態를 永續的으로 緊張을 緩和한다.
  • 統一 政策은 閉鎖 戰爭 志向에서 積極 平和 志向으로 가자는 것.
  • 以後 平和共存, 平和交流, 平和統一에 立脚해 聯合制에 依한 國家聯合制 段階→聯邦制 段階→完全 統一 等의 段階를 거치는 漸進的 統一 方式인 '3原則 3段階 統一 方向'을 構想하고 大統領으로 當選된 直後 김정일과의 頂上會談을 公式 提案函.
  • 햇볕政策은 北韓 에 對한 大韓民國의 對外 政策으로, 北韓에 協力과 支援을 함으로써 平和的인 統一을 目的으로 하는 政策.
  • 햇볕政策은 比喩法으로 使用된 象徵語로 對北包容政策 또는 包容政策으로도 불리고, 公式的인 名稱은 對北和解協力政策.
  • 對北外交 政策 中 햇볕政策으로 始作된 對北包容政策은 김대중 政府 主要 政策 中 하나로 當時의 政府 以前에는 北韓과의 關係는 形式的이고 交流가 이루어지지 않은 狀態로 軍事的 對峙關係에 놓여있었으나, "善平和 後統一"을 統一의 基本 原則으로 繼承해 김대중 政府에 들어서 交流를 基盤으로 한 和解, 協力 等을 强調한 包容政策으로 轉換됨.
  • 햇볕政策을 통해 南北頂上會談과 開城工團 設立 等의 可視的 成果를 만듬.
  • 1998年 6月 金剛山 觀光, 開發 事業에 合意했고 單獨 事業者로 選定된 鄭周永 現代그룹 會長은 소떼를 몰고 板門店을 經由해 訪北하여 金正日 國防委員長과 南北 經濟 協力에 對해 懷疑를 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政府의 統一 政策 [ 編輯 ]

政府 區分 (任期) 統一 政策 等 [8] , [9]
金正恩 時代 (2011/12/17 ~ 2024/05/26)
  • 金正恩은 3次 核 實驗 等을 통해서 攻勢的인 態度와 核武器를 갖고 있음을 表現함.
  • 2014年 3月 김일성 主席, 김정일 委員長 等에 依해 南韓의 頂上과 合意된 낮은 段階 聯邦制 方案을 繼承하여 推進하기를 提案.
  • 2014年 8月 10日 의 李洙墉 外部賞은 , 아세안安保포럼서 "高麗聯邦制"를 公式的으로 言及함.
  • 김정은 第1 委員長은 公開 發言:
    • 첫째, 統一의 主體는 北과 男, 海外의 全體 朝鮮 民族이며, ‘우리民族끼리’ 立場을 堅持해야 한다는 것.
    • 둘째, 統一을 바라는 누구와도 對話를 하겠다는 것 “우리 黨과 共和國 政府는 眞情으로 나라의 統一을 願하고 民族의 平和繁榮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손잡고 나갈 것”
    • 셋째, 南北共同宣言을 尊重하고 履行하자는 것 “北南共同宣言을 尊重하고 리행하는 것은 北南關係를 전진시키고 統一을 앞당기기 위한 根本前提”
  • 北韓은 6.15 共同宣言을 비롯한 南北 合意가 相對方의 體制를 尊重한다는 精神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點을 强調하면서 南韓이 이를 지키지 않고 있다고 하며 南側이 南北 共同宣言의 精神에 따라 體制 批判을 中斷하면 南北關係 梗塞이 풀릴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關係 改善은 쉽지 않다는 메시지를 던짐.
  • 實際로 北韓이 지난 1月 ‘中隊 提案’에서 相互 誹謗 中斷을 提案했고, 2月 南北高位級接觸에서도 誹謗 重傷 中斷을 가장 重要한 議題로 提起함.
金正日 時代 (1991/12/24 ~ 2011/12/17)
  • 김정일은 北韓의 最惡의 食糧難人 “ 苦難의 行軍”을 겪은 後 2000年 에 낮은 段階의 聯邦制를 提起 하였으며, 南北 政府가 各各 政治, 軍事, 外交權을 認定하면서, 相互 間에 體制를 認定함.
  • 1997年 김정일 國防委員長은 〈偉大한 首領 김일성 同志의 祖國統一 遺訓을 徹底히 貫徹하자〉라는 談話에서 體制 認定의 立場을 分明히 했다.
  • 우리는 北과 남이 思想과 制度의 差異를 超越하여 共存, 共營, 公理를 圖謀하고 祖國統一大業을 이룩하기 위하여 힘을 합쳐 나갈 것을 主張한다.
  • 北과 남 사이의 關係를 改善하는 것은 祖國의 自主的 平和統一을 實現하기 위한 切迫한 要求이다. 北과 남의 關係를 不信과 對決의 關係로부터 信賴와 和解의 關係를 전환시켜야 온 民族의 團合된 힘으로 祖國의 自主的 平和統一을 實現해나갈 수 있다.
  • 南쪽의 ‘思想과 制度’를 認定하고, 北韓은 김대중 政府가 和解協力 政策을 펴자 이에 呼應해 2000年 南北頂上會談에 合意했다.
  • 南과 北은 2000年 첫 南北頂上會談에서 “나라의 統一을 위한 南側의 聯合提案과 北側의 낮은 段階의 聯邦制案이 서로 共通性이 있다고 認定하고 앞으로 이 方向에서 統一을 志向”시켜 나가기로 合意.
  • 共通點은 ‘平和共存’의 段階를 둔다는 點, - 差異點은 北韓의 낮은 段階 聯邦制는 民族 統一 機構를 두어 하나의 聯邦 國家가 되는것, 南韓의 聯合制는 各各 主權을 가진 獨立 國으로 協力關係를 發展케 하는 國家 聯合.
  • 北韓은 1990~92年에 進行된 南北高位級會談에서 駐韓美軍의 役割 變更을 條件으로 旣存에는 駐韓 美軍 撤收主張을 바꾸어, 駐韓美軍의 駐屯을 認定할 수도 있다는 公式發言: 駐韓美軍의 役割이 對北(對北) 抑制로부터 韓半島 全體의 安定者와 均衡者로 變形되어야 한다”고 主張함
  • 金正日은 김대중 大統領에게, “하루라도 빨리 停戰協定을 平和協定으로 轉換하자는 겁니다. ...駐韓美軍은 共和國에 對한 敵對的 軍隊가 아니라 朝鮮半島의 平和를 維持하는 軍隊로서 駐屯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等의 發言을 函.
  • 2007年 2次 南北 頂上 會談에서, 낮은 段階 聯邦制 核心인 “民族統一機構”를 除外하여 “南北 聯合 段階”의 必要性을 認定함.
金日成 時代 (1948 ~ 1994/07/08)
  • 1945年 8月 15日 光復 以後 25年 동안 1970年 臺까지 韓半島 赤化 統一 戰略을 維持함.
  • 1970年代 以後 蘇聯 및 中央유럽 共産圈의 沒落 및 經濟難 속에서 安定을 위하여, 南北 2體制를 鞏固化함.
  • 韓國 戰爭 (1950年 6月 25日 ? 1953年 7月까지) 前까지 北韓은 民主 基地론(民族 解放論)에 依한 武力 赤化統一이었으며, 美 帝國主義 强占 下에 있는 南韓을 北韓 地域의 “민주 基地”로 삼아서 共産化하는 것이었음.
  • 김일성은 1960年 8.15 記念 演說에서 南朝鮮이 南北 總選擧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過渡期的 對策으로 南北 聯邦制를 主張한다 라고 하여, 처음 南北 聯邦制를 提示하였고, 北韓이 武力 統一論 代身 聯邦制를 主張함. - 政治,軍事的으로 南韓에 對한 自信感이 있었음. 當時 北韓 國民 所得 1日當 137달러이므로, 南韓 國民의 150%였음.
  • 1971年 4月 다시 提案한 南北 聯邦制에서는 “南北 總選擧”를 除外 하였음, 當時 韓國 經濟의 急速한 成長으로 總選擧를 實施하면, 北韓이 不利 할 것으로 判斷.
  • 1972年 6月 7.4 南北 共同 聲明을 合意함. 中國과 蘇聯의 支援을 바탕으로 高麗 聯邦制 統一 方案을 내놓았고 南北間의 軍事 對峙 解消와 合作 交流, 大民族會議 召集 等을 거쳐 高麗 聯邦 共和國을 樹立하자고 提議하였다.
  • 1980年 10月에 “高麗 民主 聯邦制”를 提案하여 南北 1國家 2體制를 公式化하였다고 이때는 中國의 改革 開放, 美中間 修交로 冷戰의 終熄, 蘇聯의 支援 縮小 및 韓國의 國力 伸張에 따른 北韓 內部 體制를 强化하는 비전을 提示함.
  • 1991年 道에는 1民族, 1國家, 2體制, 2政府에 기초한 聯邦制를 提案하여 1980年 提案하였던 聯邦制에 2政府를 追加하여 分斷 體制에서의 各各의 政府를 鞏固化함.
  • “北과 남이 서로 相對方의 存在를 認定하는 基礎 우에서” 統一할 것을 强調했다. 이러한 立場 變化는 1993年 4月 發表된 ‘全民族大團結 10大綱領’으로 公式化.
  • ‘先 南朝鮮 革命 後 合作統一’에서 ‘先 南北共存 後 聯邦統一’로 變化. 特히, 1991年 南과 北의 유엔 同時 加入과 ‘南北基本合意書’ 採擇은 南韓 政府를 公式的으로 認定하는 새로운 對南政策이 始作.

大韓民國의 統一 政策의 흐름 [ 編輯 ]

[10] [11]

獨逸의 統一 및 韓半島 統一 및 政策에 對한 視角 [ 編輯 ]

[12] [13] [14]

  • 獨逸의 統一은 東獨 人民會議에 決定에 따른 相互 合意에 依한 聯邦 編入方式에 依한 統一이며, 一部 否定的인 統一論者들이 言及한 一方的인 吸收 統一이 아니었다.
  • 獨逸 統一 當時 7,700億 달러의 貿易 規模가 3兆 달러로 4倍가 增加하고, 貿易 黑字가 2,500億 달러가 되며 東獨에 작센, 튀링겐 州 等 光學電池 等 最尖端 産業으로, 旣存 英國과 프랑스가 主導하던 유럽 最尖端 産業을 獨逸이 主導하게 되었다.
  • 韓半島의 統一은 地政學的 位置 等으로 인해서 長期的으로 東北亞 經濟 發展에 中國, 日本과 함께 主導하는 役割을 할 것이다.
  • 大韓民國의 30倍가 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地下資源 價値와 大韓民國의 資本과 技術,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勞動力이 만들어내는 시너지에 對한 골드만삭스의 肯定的인 統一 强國論이 있다.
  • 世界的인 投資者 짐 로저스 는 "戰爭 危險이 없어진, 統一된 韓半島의 北韓 地域에 全 財産을 投資하겠다."고 했다.
  • 1991年부터 南北 關係를 硏究해온 獨逸의 블륨 敎授와 오스트리아의 프랑크 敎授의 主張에 따르면 韓半島 統一은 獨逸 統一보다 쉽게 이루어질 수도 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主體思想 體制와 軍事 政權의 健在函 等으로, 獨逸과는 다르게 統一을 準備할 時間的 餘裕가 있으며, 人民의 95% 以上이 統一을 希望하고 있다.
  • 統一이 되었을 때 推進해야 할 主要 4가지 事項은

첫째, 財産權 返還보다 補償에 主眼點. 둘째, 인프라 開發 特別法으로 빠른 時間에 인프라를 開發. 셋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앞선 航空·宇宙技術(人工衛星 및 미사일 開發)을 保護 및 增進. 넷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對한 直接 投資를 促進. 다섯째, 朝鮮人民軍을 인프라 建設 事業에 活用.

  • 韓半島 統一은 제로 베이스 狀態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最適의 時點이며, 經濟가 回復된 後에 해야 한다는 主張은 오히려 危險하다.
  • 過去 南北 交流 協力 基金의 一部分異 미사일과 核 開發의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더 支援 資金을 投入한다고 해도, 軍事力 增强 또는 非效率的인 旣存 施設의 維持·保守에 쓰일 것이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大規模 資金支援을 통해, 선 統一 後 開發이 效果的이다.

統一 過程의 解決 課題들 [ 編輯 ]

經濟, 統一 費用, 이념적 性向 [ 編輯 ]

南北 間의 經濟 差異는 크다. 所得, 産業 構造·經濟 制度에서 큰 差異를 보이는데, 所得으로는, 1人當 國民所得은 約 40倍 差異가 나며, 産業 構造로는 脫工業化 및 知識經濟 社會로 進入 中인 大韓民國과는 다르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製造業 基盤 經濟의 失敗로 一次 産業의 比重이 높아지는 退行的 過剩 工業化 經濟이고, 經濟 制度로는 市場經濟制度를 維持 中인 大韓民國과 달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計劃 經濟를 基盤으로 하고 있다. 統一 費用은 統一 直後부터 急激히 發生하지만, 統一 效果는 長期的 및 漸進的으로 發生하므로 短期的인 過渡期에서의 큰 統一 費用을 考慮해야 한다. [15]

  • 統一 費用에 對한 區分

1) 初期 安定化 費用 2) 分野別 統合 費用 3) 社會福祉 費用 4) 經濟的 인프라에 對한 投資 費用

  • 이념적 性向과 社會的 矛盾 및 政治的 利害關係 解消: 分斷 70年 동안 大韓民國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람들은 서로 다른 文化를 가지게 되었으며, 相互 統一 以後에도 서로를 外國人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16]
  • 大韓民國人들은 굶주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人들에 對한 最小限의 生計를 위한 福祉 費用과 原始的인 水準의 工業·道路·電氣·鐵道 等의 基礎 인프라 建設 費用을 支拂해야 하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人들은 大韓民國의 經濟的 支援으로 生活이 좀 더 좋아지더라도, 70年 동안 익숙해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內 注入된 主體思想에 對한 混亂을 막을 수 있도록, 聯邦制에 依한 統一 以後, 두 政府 間의 緊密한 協力과 各自의 役割 遂行이 必要하다.

統一 直後의 過渡期가 끝난 다음, 統一 韓國은 各 分野에서 큰 利益을 얻을 수 있지만, 徹底한 準備가 必要 하다. [17]

  • 統一 以後 混亂으로 인한 國家 安保와 國民의 生命을 直接的으로 威脅하는 行爲(反政府·테러)에 對한, 政府의 積極的인 對處와 追加 發生 防止 對策이 必要하다.

南北統一 以後 行政區域 改編 [ 編輯 ]

統一 直前이나 以後로 行政區域도 改編부터 해야 한다. 統一의 主體와 形態가 어찌 될지에 따라서 統一 以後 行政區域 또한 큰 影響을 받을 것이다.

萬一 남베트남 共和國처럼 北韓에 臨時 自治團體가 세워질 境遇 旣存에 이에 對備 次 設立해놓은 以北5道委員會를 昇格시켜 北韓 全體에 "大韓民國 以北5度" 같은 이름의 臨時 國家의 地自體가 될 可能性도 있다. 이 境遇에는 北韓 地域의 行政 區域 改編은 暫定 保留될 것이다.

南韓 主導의 統一이 될 境遇에는 以北 5度의 行政區分이 大部分 그대로 施行될 수도 있지만, 北韓이 變更한 行政區域을 受容하되 몇 가지 例外를 둘 수도 있다. 一旦 北韓 住民의 經濟活動이 活性化되면 우리나라의 邑·面·洞 住民센터에서 보는 事務가 자주 必要하게 될 것이니 '特別市·廣域市·道'-'市·郡·區'-'邑·麵·桐'의 南韓 行政 區域 體系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度를 어떻게 할 지가 論難이 되고 있으나 兩江道, 慈江道를 認定하지 않는 境遇, 적어도 혜산시와 강계시에 盜聽 出張所를 設置하는 것은 必要해 보인다. 단천시와 같이 畸形的으로 생긴 詩의 境遇 洞 地域이 宏壯히 떨어져서 分布하고 있기 때문에 洞 住民센터에서는 處理하지 않는 事務를 處理하기 위해 市廳 出張所의 設置도 必要할 것이다.

生活圈을 考慮하여 君을 再編할 때, 몇 個 軍은 北韓에서 바꾸기 以前으로 되돌리거나 面積이 過疏한 市, 軍은 北韓에서 新設된 軍끼리 합쳐질 可能性이 높다. 例를 들어 內陸地域이 分離되고 海岸平野 地帶만 남은 高原郡과 金野郡이 高原始로 昇格 統合되는 式이다. 特히 평성시처럼 오로지 道 所在地로서 建設된 都市나 신포시처럼 漁業 基地로 造成된 小規模 都市가 院 行政區域에 再編入될 可能性이 높다.

그리고 이에 對한 延長線으로, 行政區域 改編 效率을 위해 歷史的 淵源이 같지만 日帝强占期 때 富(都市部)와 軍(外郭部)으로 나뉜 地域들은 都農統合時로 새로 出帆할 것으로 豫想된다. 해주시·碧城郡, 사리원시·봉산군, 송림시·黃州郡, 신의주시·義州郡, 함흥시·흥남시·咸州郡, 淸津市·富寧郡, 성진시·鶴城郡, 나진시·경흥군 等 그 外 多數의 圍繞地와 월경지 問題를 解決할 것으로 보인다.

南韓의 行政 體系에 맞추어 改編을 한다면 北韓의 邑은 大體로 周邊 里를 編入하여 解放 直後의 元來 警戒대로 邑이 되고, 勞動者區度 마찬가지로 周邊의 里를 합쳐 代替로 元來 解放 直後의 警戒에 맞추어 邑으로 昇格될 것으로 보인다.

參考로 北韓은 이미 1960年代부터 道路名住所를 使用하고 있다. 따라서 千里馬距離, 勝戰거리 같은 體制 宣傳用 道路 名만 適當히 손 보면 된다. 하지만 이건 平壤 市內 一部 地域 基準이고 實際로 大部分 地域에서 住所는 '○○洞·里 ○○人民班' 等의 住所를 使用한다. 애初에 平壤부터 道路가 不足한 都市다.

地方 選擧의 境遇 暫定的으로 北韓의 桐-里 體系를 바탕으로 市·郡 內에서 選擧區를 劃定해도 人口 比例에 맞으면 相關이 없기 때문에 民主主義에 對한 敎育이 이뤄진 以後 몇 年 內로 다시 實施될 것으로 豫測된다.

北韓 行政區域의 存置 vs 還元 [ 編輯 ]

統一 以後 北韓 地域 行政區域에 對해 獨逸의 前例를 따라 光復 當時 行政區域으로 還元하자는 意見이 흔히 提示된다. 하지만, 두 政權이 對等한 位置에서 成事된다면 그러한 一方通行 式의 改編은 힘들 것이다. 大韓民國도 行政區域이 꽤나 많이 바뀌었기 때문에 特히 首都圈을 中心으로 行政的인 努力이 많이 들 것이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南北聯邦制 統一이란?” . 2018年 10月 18日. 2020年 9月 23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9年 8月 11日에 確認함 .  
  2. 外交部. “[基本規範]國際聯合 憲章(UN Charter) 詳細보기|인권관련자료 | 主要動向 및 資料 外交部” . 2024年 3月 28日에 確認함 .  
  3. “保管된 寫本” . 2018年 4月 1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7年 6月 29日에 確認함 .  
  4. http://www.konas.net/article/article.asp?idx=48982
  5. “保管된 寫本” . 2014年 10月 13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4年 11月 20日에 確認함 .  
  6. “保管된 寫本” . 2014年 10月 13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4年 11月 20日에 確認함 .  
  7. http://www.dihur.co.kr/1441
  8.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2/03/2014020300190.html
  9.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2/03/2014020300213.html
  10. http://www.kinu.or.kr/upload/neoboard/DATA05/1116-%C5%EB%C0%CF%B1%B3%C0%B0%C0%DA%B7%E1%C1%FD%28%C3%D6%C1%BEOK%29.pdf統一敎育(過去?現在?未來) ? 統一 敎育院
  11. dae7292.com.ne.kr/7st%20moral/72222.htm 南北韓의 統一 政策 比較
  12. 韓半島 統一 獨逸 보다 쉽다 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758
  13. 韓半島 統一, 제로베이스 狀態의 北韓이 낫다 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1412&num=102773
  14. 統一大舶'을 위한 獨逸의 統一 訓手가 期待된다 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1412&num=103047
  15. 이 席, 2010.
  16. 란코프, 2014.
  17. 란코프, 2014.

參考 文獻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