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北頂上會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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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北頂上會談
北南首腦相逢
板門店에서 만난 文在寅 大統領과 金正恩 國務委員長
當事國
場所 板門店, 平壤

南北頂上會談 ( 韓國 漢字 : 南北頂上會談, 文化語 : 北南首腦相逢( 韓國 漢字 : 北南首腦相逢))은 大韓民國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頂上 사이에서 開催하는 會談을 일컫는다.

歷史 [ 編輯 ]

전두환 政府 [ 編輯 ]

全斗煥 은 1981年 1月 國政演說을 하면서 金日成 의 서울 招請과 南北 最高指導者의 相互 訪問을 提案했다. 金日成이 서울을 訪問한다면 本人도 平壤을 "언제라도 訪問할 用意가 있다"고 하면서 '지난날의 일들을 굳이 是非함이없이'라는 表現까지 使用했다. [1] 當時 駐美 公使였던 손장래 는 金日成이 獨立運動을 한 點에 對해 全斗煥이 "그 點, 나는 尊敬한다"고 했다면서 김일성을 直接 만나 解決 方案을 찾길 願한다고 밝혔다. [2]

以後 손장래의 要請을 받은 임창영 前 UN 臺詞가 對北 密使로 活動했고 1988年 夏季 올림픽 共同開催와 頂上會談 議題도 檢討했는데 1983年 10月 아웅 산 墓域 테러 事件 이 發生하여 찬물을 끼얹었다. [3] 이를 契機로 南北 間에 危機가 高調되었는데 임창영은 오히려 "그럴수록 두 頂上이 만나야 한다"는 緊迫感을 느꼈다며 1984年 3月 北韓에 提議한 南北體育會談을 契機로 雰圍氣를 反轉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전두환은 南北頂上會談에 懷疑를 느꼈고 그 해 10月 北韓이 頂上會談 論議를 위해 孫將來를 招請한 것에 對해 赤十字會談과 體育會談이 進行 中이라는 理由로 이를 拒絶했다. [4]

하지만 1985年 9月에 虛談 等이 訪南하여 전두환을 豫防하는 等 물밑接觸은 繼續되었다. 다음 달에는 장세동 等이 訪北했는데 이때 會談의 主題에 變化가 있었다. 當初 頂上會談을 論議하기 위한 訪北이었는데 《 마이니치 新聞 》이 이를 事前에 報道하면서 日程이 延期되었고 그 사이에 "頂上會談을 推進하기보다 北側이 頂上會談에 關心을 보이는 속내를 正確히 把握해야 한다"는 主張이 擡頭되었기 때문이다. 김일성 亦是 相互 不可侵 協定 締結과 韓美合同軍事訓鍊 取消 等 旣存의 要求를 反復하여 論議는 進展되지 못했다. [5]

이러한 雰圍氣 속에서 10月 20日 北韓의 武裝間諜船이 釜山으로 浸透하다가 擊沈되면서 狀況은 完全히 反轉되었다. 전두환은 "一抹의 期待를 품어볼 수 있었다"고 여겼지만 以後 김일성에게 背信當했다며 전두환 政府에서의 頂上會談 推進은 事實上 끝나고 말았다. [6] [內容 1]

後날 박철언은 回顧錄 『바른 歷史를 위한 證言』을 쓰면서 當時 전두환이 서울올림픽 때 北韓이 敵對 行爲를 삼가게 하는 것이 目的이었을 뿐 굳이 頂上會談을 하겠다는 目標는 없었다고 言及했다. 特히 盧信永 國務總理, 이원경 外務長官, 이규호 大統領祕書室長, 허문도 定數制1首席祕書官 等을 向해 親美 一邊倒·極右的 흐름이라며 이들에 依해 全斗煥이 마음을 바꿔먹었다고 言及했다. 以後 北韓의 임남댐 公使와 '서울 물爆彈'說을 流布하면서 만든 平和의 댐 事件은 전두환 政府가 北韓을 바라보는 認識의 劇的인 變化를 잘 보여준다. [9]

노태우 政府 [ 編輯 ]

盧泰愚 는 就任하자마자 總理會談을 提議하고 7·7 宣言 을 發表하는 等 北韓과의 關係 改善에 나섰다. [10] 1988年 8·15 慶祝辭에서는 "民族 間의 分斷 障壁은 이제 開放과 交流 協力으로 허물어야 한다"면서 南北頂上會談을 提議했다. [11] 以後 김일성은 人民政權 創建日 을 하루 앞두고 統一 問題를 論議할 南北 間 委員會 設立을 위해 平壤에서 南北頂上會談을 開催해도 좋다는 뜻을 내비쳤다. 다만 이는 現在의 南北 間 政治·經濟 體制의 維持를 前提로 한 聯邦制 統一을 前提로 한 것이었으며, 駐韓 美軍 哲秀와 相互 不可侵 條約 締結도 反復하여 主張했다. [12]

以後 實務 接觸에서 議題 採擇 過程에서도 異見만 確認하는 等 순조롭게 進行되지 못했다. 1990年에는 노태우가 年頭 記者會見에서 다시 南北頂上會談 開催를 促求했지만 김일성은 當局·政黨首腦協商會議 召集으로 맞받아치면서 頂上會談에 否定的 態度를 보였다. [13] 그러다가 그 해 10月 김일성은 態度 變化를 보여 訪北한 강영훈 總理에게 "노태우 大統領과의 最高位級會談이 빨리 開催될 수 있도록 努力해 주길 바란다"는 立場을 傳했다. [14] 1991年 9月에는 南北韓이 유엔 에 同時 加入했으며, 그 다음 해 2月에는 南北 基本合意書 를 締結하였다.

하지만 노태우 政府에서 頂上會談은 끝내 成事되지 못했다. 當時 南北對話에 깊이 關與하고 있던 金宇中 은 頂上會談을 開催하자고 合意를 봤다고 證言했다. 南北 基本合意書 締結 以後 統一과 關聯해 政府 特使로 活動하던 金宇中은 金日成· 金正日 富者를 스무 番 以上 만났는데 頂上會談을 前提로 合意書 締結을 推進했다. 이때 "김일성은 眞摯했고 民族問題를 解決해 나가려는 積極的인 態度를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노태우는 軍部와 保守의 抵抗을 憂慮하여 끝내 實踐에 옮기지 못했다. [內容 2] [15] [16]

金永三 政府 [ 編輯 ]

韓國의 政權 交替 以後에도 頂上會談을 위한 물밑·實務接觸은 繼續 이어졌다. 김영삼은 核 問題를 優先的으로 다뤄야 한다고 內部的으로 意見을 모았으며, [17] 김일성 亦是 김광섭 株 오스트리아 大使를 통해 核 問題를 包含한 政治·經濟·軍事 問題를 論議하기를 希望한다고 밝혀왔다. [18] 하지만 韓國은 核 問題를 優先視하고 北韓은 頂上會談 特使 交換을 竝行할 것을 主張해 6月 末부터 異常 氣流가 돌았다. 강성산 北韓 總理는 김영삼이 戰爭熱을 鼓吹한다고 非難했으며 오인환 韓國 公報處 長官은 北韓 側의 誠意있는 態度 變化를 促求한다는 聲明戰을 주고 받으면서 頂上會談 論議가 漂流했다. [19]

1994年 2月 김영삼은 就任 1周年 記者會見에서 다시 한 番 核武器를 비롯해 統一 問題와 經濟 協力 等 모든 問題를 協議하기 위해 김일성과 會談할 用意가 있음을 闡明했다. [20] 하지만 김일성은 "核問題를 擧論하면서 北南關係를 解決하려는 것 自體가 性急하고 方向性도 없는 잘못된 思考 方式"이라며 會談을 拒否했다. [21] 또한 燃料病 交替時의 샘플 採取와 放射化學實驗室에 對한 追加 査察 許容과 關聯한 核 問題로 北美 사이가 멀어지면서 第1次 北核危機 가 일어났다. [22]

이때 지미 카터 前 美國 大統領이 6月 14日 김영삼과 會同을 한 後 다음 날 김일성과 만나 頂上會談을 受諾하도록 說得하는데 成功하면서 새로운 局面을 맞았다. 6月 28日에는 實務協商을 통해 7月 25日~27日에 平壤에서 南北頂上會談을 하기로 合意를 보았다. 當初 韓國은 8月에 김일성의 서울 訪問도 함께 이루고자 했지만 北韓 側의 미적지근한 態度로 이는 不發에 그쳤다. [23] 하지만 頂上會談을 2週假量 앞둔 7月 8日 김일성이 갑작스럽게 死亡하면서 頂上會談은 霧散되었다.

以後 韓國은 "南北關係를 對話를 통해 平和的으로 진전시킨다는 政府의 立場은 一貫되게 維持될 것"이라며 旣存의 合意 事項은 有效하다고 말했다. [24] 北韓 亦是 "南北頂上會談은 定해진 原則에 따라 變함없이 推進한다"고 밝혔지만 [25] 金永三 政府에서 頂上會談 論議는 더 以上의 有意味한 進陟을 보지 못했다. [內容 3]

金永三 政府에서 成事 直前이었던 頂上會談은 金日成이 羅津과 先鋒 을 제2의 싱가포르로 만드는 改革·開放을 擇했지만 느닷없이 죽었다며 "김영삼 大統領이 平壤에 갔더라면 北韓은 完全히 다른 길로 갔을 것이다"고 말한 자오후지 前 中國共産黨 중앙당교 敎授나 頂上會談이 이뤄졌다면 "桶 큰 決斷과 合意가 이뤄지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는다"고 했던 한승주 前 外務部 長官의 말처럼 큰 期待를 받았던 頂上會談이기도 했다. [27]

김대중 政府 [ 編輯 ]

合意文 發表 後의 김대중 大統領과 김정일 國防委員長

金大中 就任 以後 相對的으로 北韓에 好意的인 立場을 가진 민주당이 執權하면서 다시 한 番 頂上會談에 對한 雰圍氣가 무르익었다. 1998年 12月에는 世界 經濟 포럼 (WEF)에 김대중과 김정일이 함께 參席해 頂上會談을 推進하는 方案이 推進되었지만 失敗하기도 했다. 다만 當時 政府는 이 事實을 否認했다. [28] [內容 4]

以後에도 頂上會談에 對한 期待는 如前히 높았다. 1999年 9月에는 백남순 北韓 外務相이 只今의 南北 關係는 最惡 [內容 5] 이지만 7·4 聲明의 3大 原則을 尊重하고 自身들의 "協商 提議에 應한다면 頂上會談도 進行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30] 10月 1日에는 鄭周永 現代그룹 名譽會長이 訪北하여 김정일을 만나면서 南北輕俠事業에도 새 轉機를 마련했다. [31]

그리고 2000年 6月 12日에 頂上會談을 開催한다고 公式 發表했다. 이는 北韓의 態度 變化 때문에 이루어진 것인데 開放과 經濟發展을 이룩하는 것이 體制 維持가 容易하다고 判斷했기 때문이었다. [32] 以後 日程이 하루 延期되어 [內容 6] 6月 13日 김대중이 平壤國際飛行場 을 통해 平壤直轄市 를 訪問하여 김정일과 會談을 했다. 이는 1948年 韓半島 가 分斷된 以後로 두 政府의 代表가 처음으로 만난 것이었는데, 김정일이 空港의 트랩 밑까지 直接 나와 마중하였고, 朝鮮人民軍 儀仗隊의 査閱과 分裂까지 擧行되었다. [35]

訪北 마지막 날에는 6·15 南北 共同宣言 을 發表했는데 이 宣言은 南北이 戰爭을 抛棄하고 統一 問題를 對話로 解決한다는 原則을 세우면서 韓半島 平和體制 構築에 靑信號로 받아들여졌다. [36] G8 · 아시아 유럽 頂上會議 · 유엔 總會 等에서도 韓半島 平和에 對한 支持 決議案이 잇따라 採擇되었다. [37]

하지만 頂上會談 以後에는 南北 關係에 큰 進展이 없었다. 頂上會談과 이어진 長官級會談에서 發表된 無數한 合意 事項은 제대로 履行되지 않았으며 特히 頂上會談 直後 開催된 當國 間 會談이 決裂되면서 對話조차 쉽지 않아졌다. 2001年 1月 조지 W. 부시 가 새 美國 大統領 으로 就任하여 對北 强勁策을 펼치는 것도 南北 關係에 影響을 미쳤다. [38]

國民들의 反應도 미지근해졌다는 主張도 提起되었다. 《 中央日報 》 調査에 따르면 2000年 8月에는 "統一을 반드시 達成해야 한다"는 見解가 71.2%였지만 4個月 뒤에는 48.6%로 크게 減少했으며, 對北 政策 支持度에 對한 統一部와 國政弘報處의 輿論調査는 1998年 末 56%臺에서 1999年 6月 93.7%까지 增加했다가 2000年 12月 72.6%로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內容 7] [39]

노무현 政府 [ 編輯 ]

握手하는 盧武鉉 大統領과 김정일 國防委員長

2002年 6月 29日에 第2延坪海戰 이 勃發하여 김대중 政府 말부터 統一 問題는 크게 사그라들었다. 3年 前에 亡身當한 北韓 軍部의 挑發이나 軍部 內 强勁派가 主導했다는 主張도 나왔지만 北韓에서 '韓國의 先制 攻擊'이라고 主張하면서 南北 關係가 冷却되었기 때문이다. [40] [內容 8] 2000年 頂上會談과 關聯하여 對北送金 特檢 等 남남葛藤도 겹치면서 노무현 政府 出帆 當時 南北 關係는 冷却器와 다름없었다. 여기에 이라크 戰爭 을 둘러싸고 韓美 共助와 南北 關係 竝行 戰略이 兩側 모두로부터 不滿을 샀다. [42] [內容 9]

遲遲不進하던 南北 關係는 2004年 6月 開城工業地區 着工을 契機로 反轉의 機會를 맞이했다. [47] 이는 5月 15日 韓美頂上會談에서 北核 問題가 또 擧論되자 '對決 方向' 云云하면서 北韓이 反撥한 뒤의 일이었기 때문에 더욱 意味있는 일이었다. [48] 12月 末에는 徐薰 이 靑瓦臺에서 國家情報院 으로 復歸하면서 對北戰略局長으로 任命되었는데 김보현 第3次匠과 함께 1990年代부터 對北協商채널을 構築한 一圓이라서 물밑接觸이 本格化됐다는 根據로 提示되었다. [49] [內容 10] 하지만 靑瓦臺는 頂上會談에 對해 신중한 立場을 維持했다. 노무현은 頂上會談에는 贊成하지만 6者 會談 이 變數인 만큼 時間과 狀況을 좀 더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現實論을 提示한 것이다. [51]

2005年부터는 南北 關係의 解氷이 宛然해지는 듯 했다. 6月에 鄭東泳 統一部 長官이 訪北하여 김정일과 會談했는데 金正日은 '核 問題는 北美 間의 問題'라는 旣存의 態度를 거두면서 韓國의 仲裁者 役割을 認定하면서 [52] 2次 頂上會談에 對한 期待感이 달아올랐기 때문이었다. 이 會談에서 또 2次 頂上會談의 合意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9月 19日 6者 會談의 9·19 共同聲明 履行에 制動이 걸리면서 結局 頂上會談까지 漂流하고 말았다. [53] [內容 11]

2006年 7月에는 北韓이 미사일을 發射 하고 이것이 核實驗으로 이어질 憂慮로 인해 靑瓦臺가 祕密裏에 頂上會談을 推進했다. 이는 北韓의 6者 會談 復歸와 南北 關係를 통한 韓半島 危機 突破를 노린 것이었는데 北韓의 呼應이 없어 霧散되었다. [55] 그리고 10月에 北韓은 核實驗 을 强行했다.

以後에도 持續的인 물밑接觸이 이어져 2007年 8月 28日부터 頂上會談을 平壤에서 開催하기로 合意했다는 政府 發表가 나왔다. 靑瓦臺는 "非核化와 南北 間 平和體制 構築, 軍備 統制, 經濟協力 等에서 實質的인 進展이 이뤄지도록 創造的이고 包括的 方法으로 接近할 必要"를 强調했지만 4個月 밖에 남지 않은 17代 大選 에 影響力을 行使하려는 北韓의 意圖에 신중해야 한다는 指摘도 있었다. [56] 하지만 8月 7日부터 北韓에 集中豪雨로 인한 水害 때문에 頂上會談은 35日이나 延期되었다. [57]

마지막 날에는 10.4 南北頂上宣言 이 나왔다. 가장 比重 있는 部分은 平和體制 構築인데 終戰宣言과 平和協定을 包含해 南北이 論議의 主體가 될 것임을 明示하면서도 3者 또는 4字 頂上들이 締結 當事者가 될 수 있음도 明示해 美國과 中國을 의식했다. 北方限界線 (NLL)은 議題에 包含되지 않았는데 政府는 事實上 이 問題를 次期 政府로 넘겼고 野圈에서는 政府의 NLL 抛棄라고 批判했다. 拉北者와 國軍捕虜 問題 亦是 論議되지 않은 點은 아쉬운 대목이었으며, 各種 經濟協力에 들어가는 財源은 10兆 원을 넘을 것으로 推算되었는데 餘裕 財源이 不足하다는 點 亦是 批判點이었다. [58] 하지만 長官級會談을 總理級會談으로 格上하고 南北 頂上이 隨時로 만나 懸案 問題를 協議하기로 約束했다. [59]

李明博 政府 [ 編輯 ]

17代 大選에서 當選된 李明博 은 頂上會談의 定例化를 提案할 것이며 常駐代表部 設置도 推進할 計劃이라고 밝혔다. [60] 2008年 2月 就任式에서도 언제든지 南北 頂上이 만나자고 提案하면서 南北 關係를 理念의 잣대가 아닌 實用의 잣대로 풀자고 主張했다. [61]

하지만 《 뉴스위크 》와의 인터뷰에서 李明博은 "南北 頂上會談은 必要하지만 나는 但只 國內 政治를 위해 形式的인 頂上會談을 갖지는 않겠다"라고 밝히는 等 以前 政府와는 다른 對北觀을 보였다. [62] 3月 末 統一部의 大統領 業務報告에서는 開城工團 3通 問題 解決·山林分野 및 農水産 協力·資源開發 協力 等을 細部 課題로 包含시켰지만 西海 共同漁撈 問題·北韓 地域 鐵道 再保守 等 10·4 宣言의 核心 內容은 거의 包含되지 않았다. 이는 北韓을 對話의 相對로 考慮하지 않았다는 分析이다. [63]

北韓 亦是 "파쑈 獨裁", "南朝鮮 傀儡軍"과 같은 冷戰 時代의 非防禦를 다시 使用하면서 對南 非難에 나섰다. [64] 이때 統一部는 相互·實用主義를 앞세운 韓國의 對北 强勁策과 過去 南北 合意의 履行을 强調하는 北韓의 對南 强勁策 사이에서 제대로 된 役割을 하지 못해 批判을 받기도 했다. [65] 7月에는 金剛山 觀光客 被擊 死亡 事件 이 일어나면서 南北 關係의 梗塞 狀況은 長期 對峙 局面으로 접어들었고, [66] 2009年 1月 祖國平和統一委員會 는 南北 間 締結된 '政治·軍事的 對決 狀態 解消와 關聯한 모든 合意 事項들'의 無效化를 一方的으로 宣言했다. [67]

以後 8月 김대중의 死亡에 弔意를 표하기 위해 北韓 特使弔問團이 訪韓했는데 이명박과 만난 자리에서 "關係 改善이 進展되면 頂上 間 會談이 可能하다"고 傳하면서 和解 雰圍氣로 다시 접어들었다. 이미 그 해 初부터 中國 베이징市 상하이市 에서 祕密 接觸을 가져 北核 問題·食糧 支援·人道的 問題 等을 調律했으며, 10月 中旬에는 임태희 勞動部 長官과 김양건 統一戰線部長이 싱가포르 에서 만나 頂上會談에 對한 基本合意까지 이뤄졌다. [68] [內容 12]

하지만 11月 開城特級視 에서 이어진 會談에서 異見을 解消하지 못했다. 韓國은 國軍 捕虜 拉北者 의 送還을 要求했지만 北韓은 國軍 捕虜와 拉北者는 存在하지 않는다는 旣存의 立場을 되풀이했으며 大規模 쌀 支援에 對한 北韓의 要求에 對해 韓國은 南北 關係의 狀況 等과 連繫해야 이루어질 수 있다는 立場을 固守하면서 不發된 것이다. [70] [內容 13] 以後 大靑海戰 , 天安艦 沈沒 事件 , 延坪島 砲擊 等이 연달아 일어나면서 南北 關係는 急冷해졌다. 民主平和統一諮問會議 는 內部的으로 出口 戰略을 마련해야 한다는 建議를 하면서 電擊的인 南北頂上會談도 講究할 必要가 있다고 提案했고, [72] 訪北했던 카터도 "核 問題든 軍事 問題든 南韓 政府와 이야기할 準備가 돼 있다"고 北韓의 立場을 傳하며 頂上會談을 建議했지만 政府의 反應은 싸늘했다. [73]

以後 2011年 5月 南北이 祕密裏에 接觸했다는 事實을 北韓이 暴露하는 일이 일어났다. 김천식 統一部 政策室長·홍창화 國家情報院 國葬·김태효 祕書官 等이 祕密 接觸에 나섰으며 이 過程에서 돈 封套까지 件내고자 했다는 것이었다. 北韓은 接觸 當時의 狀況을 錄音하여 이를 公開했으며 追加 暴露까지 威脅했다. [74] [75] 이는 '政治的 考慮 없이, 代價 없이, 透明하게'라는 搜査를 내세우며 頂上會談을 推進하겠다던 政府의 信賴性을 무너뜨렸다. 2012年 3月에 頂上會談을 提議했다는 內容도 暴露되었는데 이는 19代 總選 을 겨냥한 이벤트라는 指摘도 나왔다. 이番의 暴露 事態로 韓國의 對北 政策에 對한 아마추어리즘度 指摘되었는데 30年 가까운 經歷을 가진 北韓 人士와는 달리 韓國은 經驗도 거의 없는 사람들이 나온다며 專門性이 不足하다는 것이었다. [76] 特히 對北 强勁派에 屬하는 김태효를 내보낸 點은 北韓으로 하여금 韓國의 眞情性을 疑心하게 만들기에 充分했다. [77]

雰圍氣 轉換을 위해 8月 末 政府는 류우익 을 統一部 長官으로 임명했다. 相對的으로 穩健派로 알려진 류우익은 李明博의 初代 大統領室長을 歷任하면서 "노무현 政府의 失敗에도 不拘하고 南北 間 물밑 對話채널은 維持해야 한다"고 主張했으며 南北의 架橋役割을 擔當하고 싶다고도 했다. [78] 12月에는 김정일이 急死하자 李姬鎬 女史와 현정은 現代그룹 會長이 訪北하여 弔問을 하고 왔는데 梗塞된 南北 關係에 어느 程度 肯定的인 影響을 미치기도 했다. [79] 2012年 2月 임태희가 베이징을 訪問해 北韓 大使館의 參事官 2名을 만났다는 얘기도 나돌면서 물밑接觸이 다시 始作되었다는 主張도 提起되었다. [80]

朴槿惠 政府 [ 編輯 ]

朴槿惠 는 就任 以後 南北對話와 關聯해 非線 라인을 活用하지 않겠다고 言及했다. 過去와 같이 公式 라인과 非線 라인이 同時에 稼動되는 투트랙 채널은 信賴 問題 等 危險性이 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南北 關係의 特殊性을 勘案해 對北 채널을 公式 라인으로 集中하겠다는 意味로도 받아들여졌다. [81]

하지만 이것과는 無關하게 李明博 政府 말부터 冷却되었던 南北 關係는 2007年 南北頂上會談 對話錄 論難 으로 더욱 더 惡化되었다. 盧武鉉이 2007年 頂上會談을 할 當時 NLL을 抛棄하겠다는 發言을 했다면서 새누리黨 民主黨 은 相互 間에 '眞實이다, 歪曲이다'하며 舌戰을 벌였다. [82] 北韓 亦是 祖平統 名義의 聲明을 통해 最高 尊嚴에 對한 愚弄이라며 剛하게 反撥했다. [83]

2014年 3月 獨逸 을 國賓訪問한 박근혜가 ARD 와의 인터뷰에서 南北頂上會談이 必要하다면 할 수 있다며 다만 이벤트性으로 活用되어선 안 된다는 立場을 分明히 했다. [84] 2014年 아시안 게임 閉幕式人 10月 4日에는 황병서 總政治局長· 최룡해 勞動黨 祕書· 김양건 統一戰線部長 等이 깜짝 訪問했다. 이들은 鄭烘原 國務總理· 김관진 國家安保室長· 류길재 統一部 長官 等과 짧은 面談도 가졌다. 여기서 황병서는 鄭烘原에게 "이番에 좁은 오솔길을 냈는데 앞으로 大通路로 열어가자"며 南北 關係 改善 意志도 드러냈다. [85] 하지만 韓國側이 "靑瓦臺 豫防 醫師가 있으면 準備할 用意가 있다"고 提案했지만 北韓側은 "時間 關係上 어렵다"며 拒絶했다. [86] [內容 14]

하지만 2016年 1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核 實驗 이 이루어지면서 南北 關係는 急冷했다. 다음 날에 韓國은 對北 擴聲器 放送을 再開하자 그 다음 날에 北韓은 核實驗 成功을 自祝하는 行事를 開催하는 等 '강 對 强' 對峙 狀態로 접어들었고 [88] 2月에는 開城工業地區 閉鎖 決定이 내려지면서 南北 輕俠도 不透明해졌다. [89]

文在寅 政府 [ 編輯 ]

1次 南北頂上會談 當時 두 頂上 內外의 모습

2017年 5月 就任한 文在寅 은 就任辭에서 "與件이 造成되면 平壤에도 가겠다"고 말하면서 頂上會談 意志를 나타냈다. 이날 國精院長으로 任命된 徐薰 亦是 '아직은 時機尙早'라면서도 必要하다는 立場을 强調했다. [90] 統一部 次官에는 淺海性 을 임명했는데 敍勳과 함께 南北會談 經驗이 豐富한 政策通으로 評價받는 人物이었다. [91]

7月 獨逸을 訪問해서 베를린 構想 을 밝혔다. "韓半島의 緊張과 對峙 局面을 전환시킬 契機가 된다면 北韓의 김정은 委員長과 만날 用意가 있다"는 것이었는데 不過 이틀 前 北韓이 火星 14號 를 發射한 直後라서 對北 政策에 速度 調節이 있을 것이라는 豫想을 깬 發言이었다. [92] 하지만 北韓은 27日 火星 14號를 다시 發射하고 9月에는 6次 核實驗 까지 强行하는 것으로 對應했다. [93] [94]

하지만 2018年 1月 金正恩 國務委員長이 新年辭를 통해 다가오는 2018年 冬季 올림픽 을 契機로 南北 間 對話 意志를 披瀝하면서 雰圍氣가 反轉되었다. 韓半島 平和를 위해 "누구에게도 對話와 接觸, 來往의 길을 열어놓을 것"이라고도 했는데 靑瓦臺 는 北韓의 眞意를 確認하겠다는 신중한 反應을 보이면서도 "歡迎한다"는 公式 立場을 내놨다. [95]

2月과 3月에는 南北이 各各 特使를 派遣했는데 먼저 北韓이 金與正 조선로동당 中央委員會 第1副部長 等을 特使로 派遣하여 문재인과 會談을 했으며, [96] 한 달 뒤에 정의용 國家安保室長 等이 訪北하여 김정은과 面談·晩餐을 가졌다. [97] 以後 4月 27日 板門店 平和의 집에서 頂上會談을 進行했으며 [98] 板門店 宣言 을 採擇했다. [99] 그後 5月 26日에 板門店 통일각에서 두 番째 頂上會談을 했고

以後 6月에 北美 間에 頂上會談이 進行될 豫定이었지만 5月 24日 도널드 트럼프 美國 大統領 이 北韓과의 葛藤 끝에 頂上會談 破棄를 宣言하자 이틀 뒤 電擊的으로 南北 間에 2次 頂上會談이 이루어졌다. 以前과는 달리 懸案의 緊急成果 當事國의 解決 意志가 고스란히 反映되어 頂上들이 直接 異見을 調律하고 膠着 局面을 打開하는 새로운 모습을 선보였는데 南北 頂上 間의 疏通이 奏效했다는 評價다. [100] 以後 6月 12日 北美頂上會談 싱가포르 에서 進行되었다.

1次 頂上會談에서 合意를 본 바에 따라 9月 문재인이 訪北하여 平壤에서 김정은과 세 番째 頂上會談을 進行했다. 2泊 3日 동안 문재인과 金正恩은 大部分의 日程을 함께 하여 親密感과 信賴를 보였으며, 文在寅은 릉라도5月1日競技腸 에서 北韓 國民을 相對로 大衆 演說도 했다. [101] 南北 頂上 間에 9月 平壤共同宣言 도 發表되었다. 頂上會談을 마치고 韓國으로 돌아온 當日 文在寅은 '對國民 報告'의 形式으로 平壤宣言의 意義를 밝혔는데 金正恩이 直接 非核化를 闡明한 것은 이番이 처음이라는 것을 强調했다. 또한 終戰 宣言의 可能性도 열어놓았다. 그 外에도 經濟·山林·保健 分野의 協力 强化, 離散家族 相逢, 國際競技 共同 進出 等을 合意했다. 附屬 合意書에서는 南北共同軍事委員會를 만들어 偶發的 衝動을 防止하기 위한 努力을 講究하기로 했다. [102] [103]

尹錫悅 政府 [ 編輯 ]

한 것이 없는 水準이다.

特使의 活動 [ 編輯 ]

頂上會談을 통틀어 南北 關係의 進展에는 特使의 活動이 컸다. 冷戰 統一 사이에서 密使의 性格이 컸던 特赦를 통해 祕密裏에 意思疏通을 하는 方式이 選好되었기 때문이다. 特使 交換 過程에서 相互 堪當 可能한 水準까지 共感帶를 이루어야 頂上會談이 成事되었고 그렇지 않으면 霧散되는 過程을 겪어온 셈이다. [104]

公式的으로 알려진 첫 特使는 1961年 9月에 北韓에서 내려온 황태성 이었다. 이는 韓國의 政治會談 提案을 받아들여 南派된 것이다. 황태성은 南北協商會議를 提案하는 한便, 外勢의 干涉 없는 統一論議 開催와 南北 祕密貿易代表部 設置를 提案했지만 間諜 陋名을 받아 逮捕되었다. [105]

1971年 8月에는 金日成 朴正熙 를 批判하면서도 南側의 團體 및 個別 人士들과 接觸할 用意가 있다는 뜻을 내비치면서 南北 關係는 다시 急물살을 탔다. 以後 南北赤十字會談이 進行되고 7·4 南北 共同 聲明 이 發表되었는데 이 過程 亦是 이후락 當時 中央情報部長이 北韓으로 特使로 가 活動한 結果였다. 以後 北韓은 박성철 副首相을 서울로 보내 朴正熙에게 頂上會談도 提議하지만 이는 모두 不發로 그쳤다. [106]

1985年부터 1991年까지 박철언 도 42次例에 걸쳐 北韓과 祕密會談을 했으며 이는 南北 基本合意書 締結을 이끌어냈다. [107] 金永三 도 頂上會談 推進을 위한 特使交換에 合意하고 實務接觸을 8次例 進行했지만 亦是 霧散됐다. [104]

金大中 朴智元 임동원 을 對北 特使로 活用해 첫 頂上會談에 成功했는데 이 때는 南北 特使의 往來가 가장 活潑했던 時期이기도 했다. [107] 盧武鉉 김만복 當時 國家情報院長의 두 次例 訪北의 結果로 頂上會談 調律에 成功했는데 特히 김만복은 「南北關係 發展에 關한 法律」 制定으로 任命된 形式上 最初의 對北特使이기도 했다. [104]

韓國側의 特使는 主로 情報機關 責任者가 많다는 點이 特徵이다. 職務 特性上 機密을 維持하기 容易하고 公式的인 交流가 遮斷된 南北關係의 特殊性이 影響을 미친 것인데 金大中·노무현· 文在寅 政府에서 各各 임동원·김만복· 徐薰 國精院長의 活躍도 그러한 脈絡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2018年 冬季 올림픽 金與正 等 特舍 構成과 日程이 公開된 채 進行되고 頂上 間 핫라인 構築이 이루어지면서 特使의 役割이 사라질 것이란 展望도 나왔다. [107] 實際로 文在寅 政府에서 이뤄진 頂上會談은 모두 特使의 活動에 힘입었지만 이들의 日程과 活動은 事前·事後에 公開되었다는 點에서도 그렇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內容主 [ 編輯 ]

  1. 이에 對한 박철언 의 證言은 좀 다르다. 自身이 장세동을 따라 平壤을 訪問할 當時만 해도 頂上會談은 成事된 듯 했는데 서울로 돌아와보니 頂上會談 無用論이 得勢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박철언은 全斗煥이 提案하고 김일성도 받아들였는데 韓國 內 保守主義者들이 制動을 걸어서 없던 일이 되었다고 말했으며, [7] 美國도 自身들에게 "情報를 주지 않아 여러 가지 誤解와 牽制"를 했다고 했다. [8]
  2. 金宇中은 金永三 政府에서도 지미 카터 前 美國 大統領의 仲裁로 頂上會談이 推進될 때 김일성을 說得하는 等 幕後 活動을 했다.
  3. 김일성 死後 南北頂上會談 合意가 有效하다는 김영삼의 立場은 며칠 만에 바뀌게 되는데 김정일의 權力 承繼가 不確實하고 이로 인해 北韓 政權이 崩壞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以後 朴弘 서강대학교 總長의 '主思派 發言'으로 韓國 社會는 新公安政局으로 들어섰고 이런 綜合的인 狀況 속에서 南北 關係는 急激히 梗塞되었다. [26]
  4. 이를 周旋한 것은 클라우스 슈바프 當時 WEF 會長이었다고 한다. 1998年까지 WEF에 參席한 김정일이 1999年에는 不參하면서 頂上會談이 霧散되었는데 WEF는 2014年에도 直接 北韓을 訪問하여 金正恩 에게 招請을 勸했다고 한다. [29]
  5. 6月 15日에 發生한 第1延坪海戰 을 言及한 것이다.
  6. 日程을 延期한 것은 10日 밤에 北韓이 一方的으로 通報한 것이었다. 公式的인 理由가 알려지지 않았지만 政府는 '南側 손님들을 보다 隆崇하게 맞기 위해서 날짜를 하루 늦췄을 뿐'이라는 反應을 보였으며 그 外에도 韓國 言論의 지나치게 詳細한 報道에 北韓이 銳敏한 反應을 보였다던가 寫眞 送出 等 技術的 問題 解決을 위한 時間벌이었다는 主張도 나왔다. [33] 한便, 한나라黨 은 "國家的 威信과 名譽가 無視된 屈辱的인 일"이라고 主張하며 南北 間에 裏面 合意가 있었는데 제대로 履行되지 않은 것 아니냐는 疑問까지 提起했다. [34]
  7. 이 資料들을 聚合하여 한준 한림大學校 敎授는 '統一에 對한 國民들의 熱望이 조금씩 식어가고 있으며 對北 政策에 對한 支持도 낮아지고 있다'고 主張했다. 하지만 各種 輿論調査 指標가 10%p 넘게 差異가 나는 點을 勘案해서 "現在의 資料를 가지고 쉽게 判斷할 수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8. 3年 前과 달리 韓國 政府가 아니라 軍部에게만 交戰의 責任을 떠넘기고 延坪海戰 다음 날 2002年 FIFA 월드컵 4强을 祝賀한다는 祝電을 보내는 等 擴戰을 避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等의 愼重論도 있다. [41]
  9. 하지만 물밑接觸은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노무현은 就任 前에 이미 임동원 을 北韓에 特使로 보내 就任式에 김정일을 招請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는 3年 前 頂上會談에서 김정일이 答訪을 爲해 서울을 訪問하겠다는 約束을 지키는 意味도 있었는데 金正日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日本 內閣總理大臣 의 就任式 不參이라는 뜻밖의 條件을 내세우며 '세련되지도 않고 格式도 차리지 않은 方法으로' 拒絶했다. [43] 노무현 政府 가 出帆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을 때에는 北韓이 먼저 頂上會談을 提議했다는 얘기도 나왔다. 김정일의 서울 答訪 形式으로 頂上會談을 하자는 것이었는데 高調되는 北核 問題 때문에 政府가 拒絶했다고 SBS 가 報道한 것이다. [44] 後날 朴智元 議員도 當時 具體的 合意를 위해 張成澤 조선로동당 行政府腸이 베이징을 갔지만 아무도 그를 만나주지 않아 頂上會談이 霧散됐다고 主張했다. [45] 이에 靑瓦臺 는 事實無根이라며 剛하게 反撥했다. [46]
  10. 그런데 不過 5日 뒤에 金輔鉉 次長이 更迭되면서 旣存의 金輔鉉 3次長-서영교 對北戰略局長으로 이어지는 對北 라인을 물갈이 한 것이라는 意見도 提起되었다. [50]
  11. 이종석 當時 統一部 長官은 다른 證言을 했는데 9月에 頂上會談 開催가 豫定되었으며 場所는 金剛山 이 有力했다고 한다. 하지만 北韓의 돈洗濯을 疑心한 美國이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 에 있는 北韓 計座를 凍結해버리면서 霧散되었다는 것이다. 以後 美國은 北韓의 僞造 紙幣와 돈洗濯 問題를 搜査했지만 證據를 찾지 못해 計座 凍結도 解除되었다. [54]
  12. 김숙 當時 國家情報院 第1次長도 가을에 平壤을 祕密裏에 訪問했다고 한다. 여기서 柳京 國家安全保衛部 副部長을 만나 천안함 事態 出口戰略을 論議했으며 12月에는 류경이 서울을 極祕裡에 訪問했다. 하지만 北韓으로 돌아간 류경은 '對南 戰略을 南側에 露出했다'는 非難을 받아 총살당했다. [69]
  13. 當時 靑瓦臺 안팎에서는 頂上會談을 둘러싸고 强勁派와 穩健派 間의 葛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大選 캠프 때부터 李明博에게 對北 政策 諮問을 했던 유명환 外交通商部 長官· 현인택 統一部 長官· 김태효 靑瓦臺 對外戰略祕書官은 强勁派에 屬했는데 이들이 韓半島를 너무 梗塞 局面으로 몰고 간다는 批判이 提起되면서 임태희 勞動部 長官· 金德龍 民族和解協力汎國民協議會 代表常任議長을 中心으로 한 穩健派가 活動했지만 强勁派를 이기지는 못했다. 穩健派가 主導한 싱가포르 會談 以後 南北 關係는 薰風이 불었지만 外交安保팀의 反撥은 컸고 强勁派가 主導한 開城 會談 以後 다시 冷却器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强勁派와 穩健派의 對立은 國家安全保障會議 의 機能이 弱化되어 兩者를 調律할 機構가 사라진 것도 原因으로 꼽혔다. [71]
  14. 2018年 4月에 放映된 MBC TV 의 《 PD手帖 》에 따르면 當初의 方針과 달리 韓國에서 먼저 積極的으로 北韓에 靑瓦臺 面談을 提案했다고 한다. 特히 류길재 統一部 長官조차 모르게 進行된 일이라고 本人이 證言했다. 朴槿惠와의 面談 不發도 다른 얘기가 있다고 報道했는데 會談의 물밑 作業이 이루어졌지만 정작 朴槿惠와는 連絡이 되지 않아 끝내 成事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87]

參照週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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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 文獻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