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刻 (後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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離角과 곽사

二刻 (李?, ? ~ 198年 )은 中國 後漢 末期의 軍人으로, 齒緣 (稚然) [1] 이며 北地群 사람이다. [2]

生涯 [ 編輯 ]

童濯 政權 時節 [ 編輯 ]

離角의 이름은 草平 2年( 191年 ) 火雄 이 孫堅에 依해 死亡하자마자 孫堅 에게 强化를 要請하는 獅子로 처음 登場한다(강화는 決裂되었다).

後에 孫堅이 洛陽 으로 들어오자, 童濯 의 사위 右輔 를 따라 섬縣(陝縣)에 남았다. 怨讐 에게 배반한 酒樽 형주 에서 軍隊를 이끌고 洛陽을 攻擊했기 때문에, 곽사 와 함께 騎兵을 이끌고 酒樽의 軍隊를 擊退하였다. 離角은 進擊하여 진류 · 永川 의 모든 屬縣의 男子들을 죽이고 女子들을 끌고 가, 그가 지나가는 곳에서 목숨을 扶持한 者가 없었다고 한다.

소제 의 婦人인 黨희 (唐姬)는 塑劑가 理由 에게 살해당한 後 故鄕인 永川으로 돌아가던 中 永川으로 쳐들어온 離角에게 잡혔고, 離角이 아내가 될 것을 勸하자 이를 拒絶했다.

또한, 永川의 순욱 은 離角의 侵略을 두려워하여 하루速히 避難을 갈 것을 長老들에게 付託하였다. 長老들이 應하지 않아서, 순욱은 自身의 一族들만을 데리고 寄主 로 避難을 갔다. 結局 永川은 離角의 攻擊을 받아 住民 大部分이 죽임을 當하였다.

王胤의 叛亂 [ 編輯 ]

草平 3年( 192年 ) 4月, 呂布 · 王胤 等은 童濯을 暗殺하였고, 王胤은 동탁의 部下의 大部分이 楊州 出身임을 알고 軍隊 解散을 計劃하는 한便 이숙 에게 섬玄의 牛步를 攻擊하게 하였다. 勿論 이각도 例外는 아니었다. 牛步는 反擊하여 이숙君을 물리쳤지만, 部下 復戶赤蛾 의 背信으로 죽고 말았다. 離角은 王胤에게 赦免을 請願하였지만 거절당하였고, 長安 에서는 永川 사람들을 모두 죽인다는 所聞이 돌아 離角은 身邊에 萬全을 期하였다. 그래서 離角은 夜半逃走를 準備하고 있었으나 駕後 가 兵力이 많은데 도망치지 말고 싸우라 進言했으며 離角은 王胤 을 攻擊하라는 駕後 의 進言을 받아들여 곽사와 함께 10萬 名의 兵士를 모아 長安을 奇襲하기로 하였다. 이와 同時에 自己 麾下의 倂奏 出身 部下들을 모두 죽였다(이는 王胤과 濾胞가 倂奏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離角의 奇襲 計劃을 알아챈 王胤은 동탁의 部下였던 호진 · 西營 · 楊汀 等에게 離角을 永隔할 것을 命하였다. 그러나 慘敗하여 서영은 離角에게 討伐당하였고, 胡塵과 糧政은 王胤의 放漫한 態度와 꾸중에 不滿을 품고 신풍(新豊)까지 進軍하다가 離角에게 배반하였다.

같은 해 5月, 長安은 離角軍에게 包圍되어 長安城 戰鬪 에서 敗北해 8日 만에 함락당하였다. 이들은 王胤에게 동탁이 무슨 罪를 지었느냐면서 꾸짖고, 王胤의 刑으로 外地에서 벼슬하던 王굉 송익 을 長安으로 불러들여 6月 7日 王胤과 함께 處刑했다. 離角은 王胤을 여덟 갈래로 찢어 죽였고, 呂布 日當을 長安에서 내쫓았다.

같은 해 9月, 거機張郡 ·個部(開府)·英 사예敎委 (領司隷校尉) · 佳節(假節)·止揚後(池陽侯)에 封해졌다.

二刻 政權 [ 編輯 ]

興坪 元年( 194年 ), 情緖將軍 馬등 이 離角과 關係를 맺으려 瑕疵 離角은 이를 拒絶하여 關係가 도리어 惡化되었다. 마等이 雙方의 仲裁에 들어간 한手 와 共謀하여 長安을 攻擊하자 이를 물리쳤고, 마等에 呼應하여 익주 에서 쳐들어온 遺言 의 軍歲도 물리쳤다. 離角을 暗殺하려 한 柔範 은 逃亡을 가던 中 殺害當하였고, 次男 榴彈 은 처형당하였다.

離角은 馬등 等과 싸우는 한便, 東쪽에서 勢力을 키우고 있던 元素 曹操 에 危機를 느껴 그들과 對立 關係에 있던 怨讐 · 공손찬 · 道兼 等에게 獻帝 의 이름으로 爵位를 授與하여 連帶를 圖謀하였다.

離角과 곽사는 城內를 分割하여 統治하였으나 統治力은 全無하다고 말해도 좋을 程度였고, 盜賊을 잡기는커녕 部下들이 맘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어 部下들이 百姓들에게 亂暴하게 굴었다. 그 때문에 食糧 價格이 急騰하였고, 父母 子息이 서로 잡아먹었으며 白骨과 썩은 屍體가 길거리에 가득하였고 곳곳마다 惡臭가 蔓延하였다. 또한 同僚 番組 를 馬등과의 戰鬪에서 生捕한 韓脩를 놓아주었다는 理由로 죽여 洋酒에 對抗할 수 있는 人材를 잃고 勢力이 弱化되었다.

內紛 [ 編輯 ]

百姓들이 苦痛을 받는 한便, 離角과 곽사는 날마다 잔치를 열며 豪華로운 生活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곽사가 離角의 집을 자주 드나들자 곽사의 아내는 男便이 離角의 妾과 놀아나는 것으로 疑心하여 離角과 곽사의 사이를 갈라놓으려 하였다. 곽사는 아내의 計略에 빠져 離角을 疑心하였고, 以後 離角과 다투게 되었다.

離角은 憲制를 奪取하였고, 곽사와 攻防을 거듭하여 거리에는 굶주린 百姓과 屍體가 蔓延하였다.

沒落 [ 編輯 ]

그 後 同僚 章帝 가 둘을 화해시켰고, 憲制를 東쪽으로 歸還시키려 하였다. 둘은 이에 同意하여 楊汀· 養蜂 · 同乘 에게 同行하도록 하였으나, 途中에 곽사가 變節하여 憲制를 長安으로 데려오려고 하였다. 그러나 童僧의 抵抗으로 實行에 옮길 수 없게 되자, 軍士들을 버리고 離角의 밑으로 들어갔다.

離角과 곽사는 官軍을 攻擊하였고, 童僧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장제도 이에 따랐다.

홍농 에서 官軍을 壞滅 狀態에까지 이르게 하나, 元來 部下였던 洋蜂과 和解하여 追擊을 그만두었다. 이로 인하여 獻帝는 黃河 를 건너 洛陽으로 歸還하게 되었다. 結局 獻帝와 함께 求心力을 잃은 離角의 軍勢는 漸次 衰退하였고, 198年 4月 曹操의 部下 單外 背舞 에게 討伐당하여 自身과 三族 모두 죽임을 當하였다.

離角을 섬긴 사람들 [ 編輯 ]

離角의 親族關係 [ 編輯 ]

이리 이섬 이응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遺愛(劉艾), 《獻帝機》(獻帝紀)[ 범엽 , 《 後漢書 》 卷72 童濯列傳 耳峴 週(李賢注)에 主席으로 引用]
  2. 王粲 , 《 英雄機 (英雄記)》[ 진수 , 《 三國志 》 卷6 동이원유전(董二袁劉傳) 配送地 週(裴松之注)에 認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