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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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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라 石佛立像 ( Standing Buddha of Gandhara : 1世紀 - 2世紀): 고타마 붓다 를 表現한 最初의 佛像들 中 하나이다.
마투라 佛像 : 고타마 붓다
菩薩像 (2世紀)
紀元前 600年 京義 印度 : 간다라 ( Gandhara )는 現在의 파키스탄 北部와 아프가니스탄 東部에 자리하였다
大韓民國 國寶 第 83號 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6世紀 - 7世紀).
大韓民國 國寶 第 83號 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6世紀 - 7世紀).

佛像 (佛像, 산스크리트語 : ???????? Buddhar?pa 붓다壘派 )은 部處 菩薩 의 形象(形象  · 形像)을 가리킨다. [1] 산스크리트語 낱말 붓다壘派(Buddhar?pa)는 깨달은 者를 뜻하는 붓다 ( Buddha   · 部處 )와 形象을 뜻하는 壘派 ( R?pa )의 合成語로 文字 그대로의 뜻은 " 깨달은 者 의 形象" 또는 " 部處 의 形象"이다. 元來는 部處 의 形象, 卽 부처像 만을 뜻하나 只今은 佛像이라고 하면 菩薩 의 形象도 包含한다. [1] 한便, 菩薩 의 形象은 菩薩像 (菩薩像)이라고 하여 부처上과 區分하여 使用하는 境遇도 흔하다.

佛像은 使用된 材質에 따라 石佛像(石佛像)  · 木佛像(木佛像)  · 住商(鑄像)  · 畫像(畵像)  · 吐賞(土像)으로 나뉜다. [1] 取하고 있는 姿勢에 따라 立像(立像)  · 半跏像(半跏像)  · 坐像(坐像)  · 瓦商(臥像)으로 나뉜다.

起源 [ 編輯 ]

引渡의 佛像 [ 編輯 ]

佛敎 고타마 붓다 의 事後에 主로 모든 都市의 王后(王侯)와 商工業者의 귀의 (歸依)를 받아서 中部 印度 를 中心으로 한 東部 印度 에 傳播되고 있었으나, 아소카王 (在位 紀元前 268~232)의 絶對的인 援助와 保護를 받음으로써 前 印度에 普及되었다. 고타마 붓다 는 當時의 印度人 一般이 바라는 理想的 위인(偉人)으로서 갖추어야 할 特徵을 모두 갖추었고, 特히 그가 不可思議(不可思議)韓 힘을 具備하고 있다고 一般人들은 믿었다. 이에 따라 現實의 歷史的 存在가 神格化(神格化)되었다. [2]

當時에 佛敎 의 蕃盛과 함께 고타마 붓다 나 或은 그의 弟子들, 그리고 다른 佛敎 聖者(聖者) 等의 遺骨(遺骨)과 遺品(遺品)에 對한 崇拜가 盛行하게 되어 그것들을 埋藏하고 있는 場所에는 壯大한 (塔: 스투파 )이 建立되었다. 그러나 佛像崇拜 (佛像崇拜)는 아직 일어나지 않아 當時의 많은 彫刻을 보아도 고타마 붓다 의 賞은 아직 彫刻되지 않았다. [2]

그 後 紀元後 1 ~ 2世紀 의 佛敎界에 있어서는 傳統的 保守的 佛敎 가 壓倒的으로 優勢한 社會的 勢力을 維持하고 있었으나, 一般民衆과 더불어 그 指導者였던 說敎師 (說敎師)의 사이에서는 새로운 宗敎運動인 大乘佛敎 가 일어나고 있었다. [3]

大乘佛敎 에서는 남을 이롭게 하는 利他行 (利他行)을 强調하였으며 慈悲精神 (慈悲精神)에 立脚하여 生命을 가진 生物 모든 것을 (苦)에서 救出할 것을 希望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利他行 (利他行)을 實踐하는 사람을 菩薩 (菩薩)이라고 하였다. 出家 比丘 이거나 裁可 (在家)의 國王  · 商人  · 職印(職人)이거나 衆生濟度(衆生濟度)의 서원(誓願  · 悲願)을 세워서 그것을 實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菩薩 이 되었다. [3]

그러나 이와 같은 自費 에 根本하는 菩薩行 (菩薩行)은 理想으로서는 어느 사람이라도 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지만 一般 凡夫 에게는 좀처럼 實踐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諸佛 (諸佛)  · 第菩薩 (諸菩薩)에 귀의 하여 그 힘에 依하여 救濟하고 誓願을 實行할 것을 말하게 되었다. 諸佛中에서도 特히 아촉불   · 阿彌陀佛 (阿彌陀佛)  · 彌勒佛 (彌勒佛)  · 藥師如來 (藥師如來) 等이 熱烈한 信仰을 받았다. 또한 菩薩 超人和 (超人化)되어서 그 救濟力이 强調되었다. 觀世音菩薩 (觀世音菩薩)  · 文殊菩薩 (文殊菩薩)  · 普賢菩薩 (普賢菩薩) 等이 많은 信者들의 念佛 對象이었다. [3]

이와 같이 諸佛 (諸佛)  · 第菩薩 (諸菩薩)에 對한 信仰이 高調됨에 따라 그들의 身體(身體)를 具體的인 形態로 表現하여 그것을 崇拜하고 싶은 熱望이 일어나 마침내 많은 佛像(佛像)과 菩薩像 (菩薩像)李 製作되었다. [3]

中部 印度 마투라 ( Mathura )와 西北 印度 간다라 地方 ( Gandhara )이 佛像 製作의 中心地였다. 前者는 아소카王 (在位 紀元前 268~232) 以來의 印度 美術 固有의 傳統을 좇았으나 後者는 그리스 美術 의 影響을 많이 받았다. [3]

韓國의 佛像 [ 編輯 ]

三國 時代의 佛像 [ 編輯 ]

韓國 佛敎 가 傳來된 上限(上限)은 大體로 4世紀 後半의 三國 時代 로 잡는다. 三國 中에 最初로 佛像을 傳해 받은 나라는 高句麗 이며, 高句麗 소수림왕 (小獸林王) 3年(372年)에 前震 苻堅 (符堅)이 中 純度 (順道)로 하여금 佛像을 傳達하게 했다. 百濟 는 이보다 12年 늦게 침류왕 (枕流王) 元年(384年)에 東進 (東晋)으로부터 호승(胡僧) 摩羅難陀 (摩羅難陀)에 依해 不法을 받고 佛像을 만들기 始作했으며, 新羅 는 이들 兩國보다 約 1世紀 半이나 늦은 법흥왕 (法興王) 15年(528年)에 이르러 主로 凉나라 (梁)를 통하여 佛敎의 公認(公認)을 이루었으나, 그보다 約 1世紀 앞선 訥祗王 (訥祗王) 때부터 그 領土의 北方에서 이미 高句麗 를 통해 散發的으로 들어와 民間에 普及되었던 痕跡이 보인다. [4]

高句麗는 地理的인 條件 때문에 第一 먼저 佛敎 를 받아들여 佛像을 製作했는데 오늘날 알려진 가장 오랜 것은 6世紀 京義 佛像이다. 따라서 高句麗 의 本格的인 祖上活動(造像活動)은 장수왕 (長壽王) 15年(427年)의 平壤 遷都(平壤遷都) 以後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이 같은 佛像 傳來 以後의 오랜 空白期는 中國의 境遇도 그렇지만 高句麗의 多難했던 國政(國情)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現存하는 佛像의 數가 三國 가운데서 第一 적기는 하나, 高句麗 의 佛像으로 보이는 3  · 4點의 金銅佛이나 사지(寺地)에서 發掘된 이불(泥佛: 진흙으로 만든 佛像)을 통하여 어느 程度 性格을 把握할 수 있다. [4]

高麗의 佛像 [ 編輯 ]

高麗의 佛敎는 新羅와는 달리 道敎的(道敎的)인 要素가 섞여서 參尉지리(讖緯地理)의 風水說(風水說)李 加味되어 크게 人心을 支配하였다. 禮拜 對象으로서의 佛像에 關心을 두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輕視하는 腺腫(禪宗) 佛敎의 流行과 死境(寫經)李 盛行하여 僧侶들은 坐禪(座禪)과 念佛에 沒頭하고 大藏經(大藏經)을 刊行한다든지 大法會(大法會)를 여는 일이 잦았다. 이 때문에 佛像의 需要(需要)가 줄어들게 되고 그에 따라 造形(造形)精神의 解弛를 招來하게 된다. 卽 圓熟한 人體의 事實과 高調된 佛敎 以上이 調和되어 崇高한 神格美(神格美)를 이루었던 新羅 彫刻의 境遇와는 달리 그 精神을 저버린 채 事實 技法만을 追從하고 從來에는 그 事實 能力마저 單純한 되풀이 속에서 佛像은 人形的(人形的)인 속된 것으로 되어 버린다. 全般的으로 彫刻 技術이 떨어지는 同時에 特히 大型 조각에서 退化의 모습이 顯著하다. 材料上으로 보면 初期에는 新羅 末의 傾向을 繼承하여 鐵불(鐵佛)이 많이 만들어지고 大型의 石佛·磨崖佛(磨崖佛)들이 製作되었으며, 따로 電氣(全期)를 통해서 小佛(塑佛)·木佛·小型의 洞불들도 만들어졌다. 材料가 貴한 탓인지 동불의 製作이 新羅에 비해 顯著히 줄어들고 極히 少數이기는 하나 協저七佛(夾紵漆佛)이 만들어진 것도 하나의 特色이라 할 수 있다. [5]

高麗 佛像의 樣式的인 變遷은 大槪 3期로 나눌 수 있다. 第1基의 佛像은 新羅의 傳統을 이으면서 同時에 새로운 自然主義가 中部地域에서 일어나고, 新羅의 故土(故土)인 嶺南地方에서는 新羅 以來로 潛在해 온 抽象的인 傾向이 新羅 末의 技術退化와 합쳐 새로 경화(硬化)된 모습으로 나타난다든지 하여 이같이 相反된 流派(流派)의 竝行, 또는 共存으로 특징지워진다. 種類는 新羅와 마찬가지로 如來形(如來形), 菩薩形(菩薩形)이 가장 많고 材料는 琴童·石造·小組 等이 包含된다. 特히 石造에 있어서 擧上(巨像)의 早着(造鑿)을 볼 수 있는 點, 新羅 末期의 延長으로 보이는 鐵불의 주조, 조각形態에서 入賞보다 座上이 많이 만들어진 點 等이 注目된다. 第2期는 송(宋) 彫刻의 影響이 보이는 時期로 當時의 宋나라 使臣 徐兢(徐兢)의 《 高麗圖經 》이나 《 高麗史 》의 記錄에도 宋의 佛像樣式이 高麗의 조각에 깊이 關與했음이 나타나고 있다. 第3期는 蒙古(蒙古=元)가 侵入한 13世紀 初葉을 起點으로 展開되는데 自然主義가 後退하고 元의 影響 아래 小型 佛像들이 새로운 活力을 가지고 流行하는 것이 눈에 띈다. [6]

種類 [ 編輯 ]

佛像은 使用된 材質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뉜다. [1]

  • 石佛像(石佛像): 을 彫刻하여 만든 부처와 菩薩의 形象
  • 磨崖佛像(摩崖佛像): 바위 를 새겨 만든 부처와 菩薩의 形象
  • 木佛像(木佛像): 나무 를 彫刻하여 만든 부처와 菩薩의 形象
  • 住商(鑄像): 金屬 을 부어 만든 부처와 菩薩의 形象
    • 金銅佛(金銅佛): 을 부어 만든 後 鍍金 을 한 部處와 菩薩의 形象
    • 鐵불(鐵佛): 을 부어 만든 부처와 菩薩의 形象
  • 畫像(畵像): 이나 종이 에 그린 부처와 菩薩의 形象
  • 吐賞(土像): 으로 빚어 만든 부처와 菩薩의 形象
    • 이불(泥佛): 진흙 으로 빚어 만든 부처와 菩薩의 形象

各州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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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 文獻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