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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에 등 돌린 全斗煥, 歷史도 등 돌렸다|주간동아

週刊東亞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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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에 등 돌린 全斗煥, 歷史도 등 돌렸다

[李鍾勳의 政說] 享年 90歲, 謝過 않고 떠난 軍士獨裁者

  • 李宗勳 政治經營컨설팅 代表·政治學 博士

    入力 2021-11-27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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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두환 전 대통령(왼쪽)과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6년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12·12 군사반란, 5·18 민주항쟁 등에 대한 1차 공판에 참석했다. 전 전 대통령은 같은 해 8월 26일 1심 재판에서 반란·내란 수괴·내란목적 살인죄·상관살해미수죄·뇌물죄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동아DB]

    전두환 前 大統領(왼쪽)과 노태우 前 大統領이 1996年 서울中央地方法院에서 열린 12·12 軍事叛亂, 5·18 民主抗爭 等에 對한 1次 公判에 參席했다. 專 前 大統領은 같은 해 8月 26日 1審 裁判에서 叛亂·內亂 首魁·內亂目的 殺人罪·相關殺害未遂罪·賂物罪 嫌疑로 死刑을 宣告받았다. [東亞DB]

    ‘謝過도 없이 떠난 全斗煥.’

    전두환 前 大統領 死亡 後 많은 言論이 마치 墓碑銘처럼 뽑은 文句다. 11月 23日 專 前 大統領이 死亡했다. 享年 90歲. 人間 전두환은 죽어서도 如前히 宿題를 남겼다. 그는 왜 謝過하지 않았을까. 謝過하는 瞬間 自身이 이룩했다고 믿은 모든 것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前職 軍人답게 外見上 그는 언제나 堂堂한 모습이었다.

    1980年 大學街 “전두환은 물러가라!”

    1996年 8月 26日 서울中央地方法院 刑事合意 30部는 內亂 首魁 等 嫌疑로 1審에서 그에게 死刑을 宣告했다. 當時 그는 “本人은 1989年 12月 30日 當時 與野 4黨의 合意에 依해 國會 證言臺에 섰을 때 이미 過去에 있었던 모든 잘잘못에 對한 窮極的인 責任은 全的으로 本人 한 사람에게 있으며, 이를 爲해 國民이 願한다면 監獄이든 죽음이든 그 무엇이라도 달게 받겠다고 말씀드린 바 있다”고 最後陳述했다.

    그의 堂堂함은 餘地까지였다. 窮極的 責任이 自身에게 있다 생각했고, 죽음이라도 달게 받을 覺悟였다면 謝過 한마디 않고 無責任하게 떠나진 않았을 것이다. 死刑을 言渡받았음에도 1997年 12月 大選 直後 김대중 當選人의 要請으로 김영삼 前 大統領이 特別赦免을 해준 瞬間 그의 堂堂함은 뻔뻔함으로 突變했다. 免罪符를 받았다고 생각하거나, 더는 아무도 自身을 건드리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서가 아니었을까. 金大中 前 大統領은 特別赦免이라는 容恕에 對해 그가 謝過로 和答하리라 期待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왜 大統領이 되고자 했을까. 正말 救國의 決斷이었을까. 앞선 最後陳述에서 그는 “10·26 事件 以後 國家가 累卵 危機에 處했을 때 이를 打開하기 위해 나 나름대로 最善의 努力을 했다”고 强辯했지만, 同時代를 살았던 사람은? 大部分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 1980年 軍靴발에 짓밟힌 서울의 봄을 몸으로 겪은 사람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1979年 10月 26日 世上이 갑자기 變했다. 永遠히 繼續될 것 같던 ‘朴正熙 時代’가 끝났지만 채 2個月이 지나지 않은 12月 12日 世上은 原位置로 되돌아갔다. 12·12 軍事叛亂으로 전두환 當時 保安司令官이 實權을 쥐었기 때문이다. 言論이 徹底히 統制된 狀況이었지만 外信이라는 좁은 門을 통해 그가 大統領이 되려 한다는 消息이 傳해졌다. 1980年 서울의 봄 當時 大學街 話頭는 “전두환은 물러가라!”였다.

    5·18 民主抗爭으로 이어진 當時 學生 示威의 主目的은 그의 執權 意志를 꺾고 民主政權을 樹立하는 것이었다. 當時 民主化運動을 이끌었던 김대중, 김영삼 前 大統領도 그 뜨거운 熱望으로 그의 執權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을 테다.

    그가 眞正 善한 意志를 가진 軍人이었다면 救國의 決斷으로 民主化에 힘을 보탰어야 한다. 軍部의 役割을 危機管理에 限定해야 했지만 結局 線을 넘었고, 輿論몰이에 나섰다. 學生 示威로 나라가 混亂한 데다 光州에서 蜂起가 發生하니 自身이 나서 收拾해야 한다는 我田引水 格 論理였다. 그의 執權 意志를 꺾기 위해 벌인 大學生과 市民의 示威를 오히려 執權 名分으로 탈바꿈해버린 것이다.

    그는 매우 政治的 人物이었다. 郡內 私組織 ‘하나회’를 만든 瞬間부터 제2 朴正熙가 되려는 꿈을 꿨던 것으로 보인다. 朴 前 大統領 死亡으로 생각보다 빨리 때가 왔고, 그는 機會를 놓치지 않았다. 無理數가 따를 수밖에 없었고 이를 덮고 나가려면 5·18 民主抗爭 같은 狀況이 必要했다. 朴 前 大統領과 比較할 때 그에 對한 國民的 評價가 否定的 理由 亦是 여기에서 出發한다. 애初부터 執權 當爲性이 낮았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8월 9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열린 사자명예훼손 혐의 항소심 공판에 출석한 후 법원을 나서고 있다. [동아DB]

    전두환 前 大統領이 8月 9日 光州地方法院에서 열린 死者名譽毁損 嫌疑 抗訴審 公判에 出席한 後 法院을 나서고 있다. [東亞DB]

    歷代 大統領 中 不定 評價 1位

    1980年 서울의 봄 當時 그가 軍部獨裁를 終了하고 民主 政府를 樹立하는 데 寄與했다면 歷史의 評價도 180度 달랐을 것이다. 피로 얼룩진 5·18 民主抗爭度, 民主化가 遲滯되는 일도 없었을 테다. 나라가 先進化됐음에도 唯獨 政治 分野만 後進的인 現 狀況도 改善됐을 것이다. 그에게는 只今과 正反對 評價를 받을 機會가 있었다.

    輿論調査 專門機關 韓國갤럽이 光復 70周年을 맞아 2015年 7月 28∼30日, 8月 4∼6日 全國 成人 2003名을 對象으로 ‘解放 以後 우리나라를 가장 잘 이끈 大統領’을 調査한 結果 全 前 大統領은 3% 支持를 얻어 5位를 記錄했다. 歷代 大統領別로 ‘잘한 일’과 ‘잘못한 일’을 물은 質問에서도 ‘잘못한 일’ 60%, ‘잘한 일’ 16%라는 酷毒한 評價를 받았다. 韓國갤럽이 6年이 지난 올해 10月 26日부터 사흘間 全國 成人 1000名을 對象으로 前職 大統領 功過를 물은 輿論調査에서도 ‘잘못한 일이 많다’는 不定 評價가 73%로 가장 낮은 點數를 얻었다.

    全斗煥 政權 時節 經濟는 好況이었다. 一角에서 “그래도 全斗煥이 일을 잘했다”고 評價하는 까닭이다. 뛰어난 用人術을 祕訣로 꼽는 이도 적잖다. 김재익 博士를 大統領祕書室 經濟首席祕書官으로 임명하면서 “經濟는 當身이 大統領이야”라고 말한 것이 代表的 事例로 引用된다. 不幸히도 金 前 首席은 1983年 10月 9日 아웅산 테러로 他界했다.

    全斗煥 政權은 韓國 高度成長期 끝자락에 該當한다. 低달러·低油價·低金利 3低 效果가 더해지면서 高度成長을 이어갔다. 功은 朴正熙 前 大統領 執權 末期인 1970年代 後半 進行된 重工業 育成 政策에 돌아가야 한다. 全斗煥 政權 當時 外見上 高度成長을 謳歌했지만 한쪽에서는 버블이 끼고 祕資金 事件 等 非理가 急增한 點도 指摘해야 한다. 全斗煥 政權 내내 政經癒着이 極에 達한 탓이다. 國際通貨基金(IMF) 救濟金融 危機도 여기서 비롯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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