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티니아누스 1歲
(Flavius Valentinianus,
321年
-
375年
11月 17日
)는
364年
부터
375年
죽을 때까지
로마 帝國
의 皇帝였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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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티니아누스는
판노니아
의 밧줄 만드는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軍隊에 들어가 아버지와 함께 아프리카에서 服務했다. 발렌티니아누스는 一介 兵士에서 始作해 혼자 힘으로 相當한 階級까지 昇進한 立志傳的인 人物이었다. 一說에 依하면 율리아누스 麾下에서 副官으로 있을 때 基督敎 信仰을 固執해 율리아누스의 눈밖에 났다고 한다. 그는 363年 율리아누스의 페르시아 遠征에 參與했으며, 율리아누스의 戰死 以後 皇帝가 된
要非我누스
는 발렌티니아누스를 進級시킨 直後 世上을 떠났다.
要非我누스가 죽은 지 10日 만에 그는
니케아
(只今의
터키
이즈니크)에서 皇帝로 宣布되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
로 돌아와서 3月 28日에 그는 동생
발렌스
를 共同 皇帝로 任命하고 帝國의 東部를 맡게 하고 自身은 西部를 다스렸다. 皇帝가 된 以後 발렌티니아누스는 繼續된 野蠻族의 侵入과 맞서 싸워야 했다. 365年
갈리아
에서
알레摩尼族
의 侵入으로 로마軍이 敗하자 그는
파리
에 根據地를 마련하여 繼續 그 곳에서 머물면서 野蠻族과 싸웠다. 동생 발렌스가
프로코피우스
의 叛亂으로 도움을 要請했을 때 그는 알레만니族과의 싸움으로 兵力을 빼 수 없다고 그 도움을 拒絶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프로코피우스는 우리 兄弟만의 敵이지만, 알레摩尼族은 로마 世界 全體의 敵이다."
[1]
발렌티니아누스의 將軍인 요費누스는 알레摩尼族을 相對로 3次例 勝利하고 그 後 여러 해 동안 갈리아 地方을 安全하게 했으나 발렌티니아누스는 367年
브리타니아
에서
피트族
과
스코트族
의 侵入을 받았다. 自身은 갈리아에 있어야 했으므로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
(皇帝
테오도시우스
의 아버지)에게 브리타니아 遠征을 맡겼는데 테오도시우스는 成功的으로 遠征을 마쳤다. 以後 발렌티니아누스는 아들의 王位繼承權을 强化하기 위해 當時 9歲인 아들
그라티아누스
를 共同 皇帝로 임명했다. 그는
트리어
에서 7年 동안 머물면서, 帝國의 國境을 安定化시키고 373年 갈리아에서 돌아왔다.
374年 판노니아의
도나우江
건너便에 살던
콰디족
이 로마가 要塞를 세운 데 不滿을 품고 帝國의 國境을 侵入하였다. 이듬해 발렌티니아누스는 콰디족의 使節을 만난 자리에서 갑자기
腦卒中
으로 쓰러졌고 憤怒한 채로 죽고 말았다.
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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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존 줄리어스 노리치, 남경태 驛 《비잔티움 年代記:第1卷 創建과 混亂》 바다출판사, 2007. 16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