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파시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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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파시아누스
Titus Flavius Vespasianus
第9代 로마 皇帝
在位 69年 12月 22日 ~ 79年 6月 23日
前任 非텔리우스
後任 티투스
이름
Titus Flavius Vespasianus
尊號 Imperator Caesar Vespasianus Augustus
身上情報
出生日 9年 11月 17日
出生地 이탈리아 팔라크리나
死亡日 79年 6月 23日
死亡地 아쿠아이 쿠틸라이
父親 티투스 플라비우스 私費누스
母親 베스파시아 폴라
體니스
配偶者 플라비아 都彌틸라 마요르
갈레리아 푼다니아
子女 티투스
플라비아 都彌틸라 美노르
도미티아누스
宗敎 로마 異敎
墓所 로마

베스파시아누스 는 ( 9年 11月 17日 ~ 79年 6月 23日 ), 로마 帝國 의 아홉 番째 皇帝이다. 그는 非텔리우스 의 뒤를 이어 皇帝가 되었다.

家族關係와 初期 生涯 [ 編輯 ]

아버지는 아시아 속注意 徵稅請負人 티투스 플라비우스 私費누스, 어머니는 베스파시아 폴라이다. 두 兄弟의 次男으로 사비니地方의 레아테에서 태어났다. 아들은 로마 皇帝가 되는 타이스 도미티아누스를 두었고, 또 都彌틸라라는 딸을 두었다. 兄을 따라 公職에 入門하고, 36年 트라키아 地方에서 將校로 軍服務를 始作한다. 이듬해 會計 監査官으로 選出, 크레타 섬과 키레네에서 服務한다. 차근 차근 段階를 밟아, 39年 照映官職을 거친 後 이듬해인 40年 法務官에 選出되었다.

한便 그는 페렌티움 出身의 技士의 딸이었던 都彌틸라와 結婚한다. 그의 아내는 그가 皇帝가 되기 前에 죽었는데, 以後 그는 再婚하지 않고 집안의 解放 奴隸 出身인 체니스라는 女子를 곁에 두고 안主人처럼 待遇했다. 41年 클라우디우스 皇帝가 帝位에 올랐을 때, 클라우디우스의 家神이었던 解放奴隸 나르키소스의 薦擧로 그는 게르마니아에 있는 第2軍團 아우구스他意 軍團長에 任命되었다.

生涯 [ 編輯 ]

베스파시아누스는 세리 집안의 둘째 아들로서 로마 帝國 의 權府 最上層에 오르기 어려운 身分이었으나 緻密함과 부지런함으로 自身의 身分을 끌어 올린 卓越한 能力의 所有者였다.

네로時代에는 뛰어난 將軍으로 로마 域內의 叛亂을 鎭壓하는 데 많은 功을 세웠지만, 任期가 거의 끝나갈 무렵 로마 皇帝의 그리스 別宮에서 네로 皇帝가 베푸는 宴會에 參席하였다가 네로 皇帝의 詩를 들으며 졸았다는 理由로 [1] 流配되어 洋蜂을 하며 消日하게 된다.

2年餘의 歲月이 지나자 유다 地域에서 유대敎 民族主義 勢力인 熱心黨 에 依해 發生한 유대獨立戰爭 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서 이를 平定할 指揮官으로서 새로이 任命을 받고 유대 땅으로 派遣되는데 智略과 勇猛性으로 紐帶 北部 갈릴래아 地域을 占領하게 되고 요셉이라는 유다인 指導者를 捕虜로 잡게 된다. 後에 로마로 들어가 市民權을 얻게되는 요셉, 卽 로마인으로서의 요세푸스 는 로마와 유다 間의 折衷案을 提示하며 兩 쪽의 相生을 摸索하게 하고 베스파시아누스는 그의 도움으로 유다를 無理 없이 統治하였다. 勿論 베스파시아누스 皇帝는 自身의 政治를 도운 요세푸스를 保護하여, 便安하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었다. [2] 로마에서는 네로의 自殺로 말미암아 큰 混亂이 惹起되고 이를 收拾할 適任者로 베스파시아누스가 로마인에게 選擇되면서 로마에 入城하게 된다. 內戰 狀態의 로마를 平定하고 國家의 秩序를 회복시키면서 軍人 出身이었던 세 名의 皇帝의 뒤를 이어 새로 로마 皇帝의 자리에 오른다.

最初의 平民 出身 로마 皇帝이며 그 아들 티투스 가 뒤를 이어 皇帝가 되는 플라비우스 황조 를 이루게 되었다.

功績과 五點, 그리고 逸話 [ 編輯 ]

  • 招待 怨讐였던 아우구스투스 以來,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王朝의 皇帝들에게 주어졌던 것과 같은 權限을 베스파시아누스에도 附與하는 '베스파시아누스의 命令權에 關한 法律'을 元老院에게 制定하도록 했다. 이로써 베스파시아누스度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王朝의 여러 皇帝처럼 統治할 수 있는 法的 基盤이 整備되었다. 그런 한便으로 從來 元老院에 (慣習的으로) 附與되었던 皇帝彈劾權을 否定하여, 皇帝와 元老院 사이의 權力 均衡이 무너졌다. 이로써 政權 交替는 原則的으로 皇帝의 죽음에 依해서만 行해지게 되었고, 後代에까지 皇帝의 暗殺이 橫行하는 原因이 되었다.(군인 皇帝 時代를 包含해 콘스탄티노플 陷落에 依한 東로마 帝國 滅亡까지 皇帝의 殉職率이 約 過半數에 이른다)
  • 네로의 命令에 따라 66年부터 유대抗爭 鎭壓을 指揮했다. 70年 9月에는 아들 티투스가 2年에 걸친 戰爭으로 예루살렘 을 陷落시키고, 74年 봄에는 플라비우스 時르우 革命黨員 들이 抗爭한 마사다 요새까지 陷落시킴으로써 유대抗爭 鎭壓을 끝마칠 수 있었다. 新約聖書學者 정승우 가 쓴 예수, 神話인가. 歷史인가(책세상)에 따르면, 當時 革命黨員들은 自身들의 마지막이 가까움을 깨닫고는 自殺 함으로써 名譽 롭게 죽음을 맞았다.
  • 財政의 健全化를 위해 여러 가지 政策을 펼쳤는데 그 가운데 特히 有名한 것은 74年 에 有料公衆化粧室을 設置한 것이다. 이에 對해 反對派들의 嘲笑를 받았지만, 그에 對한 베스파시아누스의 "돈에서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Pecunia non olet)"라는 反論은 돈에는 貴賤이 없음을 말해주는 有名한 文句가 되었다(아들 티투스가 이 稅金에 對해 "냄새나는 化粧室에 稅金을 매기다니요"하고 反對했을 때에도, 化粧室歲로 거둔 金貨를 티투스의 코 끝에 들이대며 "이 金貨에서 어디, 냄새가 나느냐?"라 물었다고도 한다). 또 現在까지도 유럽의 公衆化粧室은 베스파시아누스의 이름(正確히는 그의 이름을 各國語로 飜譯한 單語)으로 불린다.(자주 誤解받는 點은, 베스파시아누스가 設置한 公衆化粧室이란 事實 볼일을 본 利用者에게 料金을 받는 것이 아니라 公衆化粧室에서 모은 오줌을 가죽加工業者들에게 돈을 받고 팔았다는 點이다. 當時에는 羊털의 기름 成分을 除去하기 위해 人間의 오줌을 使用했다)
  • 75年에는 콜로세움 의 建設을 始作했다. 8年이 걸려 만들어진 콜로세움은 로마建築의 革命이었다. 새로운 構造的 發想(아치)과 材料의 變化(大理石에서 콘크리트), 그 當時 最新 機械裝置인 起重機를 利用하여 콜로세움을 完成했다.
  • 유머 感覺이 뛰어났는데, 平素 共和政 復活을 主張하는 犬儒學派 의 哲學者들에게 "난 개가 짖는다고 그 개를 죽이지는 않소."라고 對答한 적도 있다. 病이 들어 죽음을 눈 앞에 두고도 "가엾게도 이 몸은 神이 되어가는 中이구나."라고 중얼거렸다고 말해진다.(당시의 로마 皇帝는 死後에 神格化되었다.) 그리고 最後의 瞬間에 "일어나 있자! 只今부터 나는 神이 될거야!"라 외치고는 선 채로 죽었다고 傳해진다. 이는 眞心으로 神이 된다고 믿은 것이 아니라 그의 마지막 유머 였다.
  • 財政 健全化에 힘쓴 그의 努力은 事後 '인색했다'는 評價를 받으며 揶揄의 對象이 되었다. 自身의 葬禮에 들어간 費用(藥 1千萬 세스테르티우스)을 듣고 놀란 베스파시아누스가 官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나한테 10萬 세스테르티우스만 줬으면 날 티베르 江가에 버릴 수도 있었는데"(그런 일로 돈 쓸 것 없이 그냥 自身의 死體를 江에 버려도 된다)고 했다는 內容의 喜劇이 上演된 적이 있다. 다만 皇帝이자 自身의 아버지를 侮辱하는 그러한 內容의 喜劇에 對해, 當時 皇帝였던 티투스는 어떤 責望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이는 티투스의 慈悲心을 나타내는 逸話로도 알려져 있다.)

읽어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第8卷 「危機와 克服」p.216
  2. 《예수, 神話인가?역사인가?》/정승우 지음/책세상
前任
非텔리우스
第9代 로마 帝國 皇帝
69年 - 79年
後任
티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