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荒唐한, 그러나 미워하기 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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荒唐한, 그러나 미워하기 힘든…

登錄 2002-11-06 15:00  修正 2020-05-02 19:23

左右翼을 넘나든 抗日英雄의 아들 김두한, 그의 舞臺가 鍾路가 아닌 만주벌이었다면…

드라마 가 몰고온 話題 때문에 가는 데마다 金斗漢에 對해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럴 때면 나는 얼마 前 次世代 戰鬪機 導入을 둘러싸고 인터넷에서 數百萬件의 照會數를 올리며 長安의 話題가 된 김대중 大統領과 부시 間의 電話 이야기를 꺼낸다. 實際로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김대중 大統領이 美國 大統領에게 “그렇게 해주었으면” 하는 國民의 바람을 담아 暫時만이라도 우리에게 웃음을 안겨준 그 動映像을….

金斗漢은 正말 金佐鎭의 아들인가

를 거의 보지 못했기에 그 內容에 對해 曰可曰否할 수 없는 處地지만, 드라마는 그냥 드라마로 보았으면 한다. 그 動映像에서 김대중 大統領이 부시에게 펀치를 날리는 것을 보고 김대중을 反美鬪士로 생각한다면 웃음거리이듯이, 나 映畫 을 보고 金斗漢을 抗日英雄으로 생각한다면 그 亦是 웃음거리다. 金斗漢은 抗日英雄의 아들이지 그 自身이 抗日英雄은 아니다.

英雄이 없는 時代, 그리고 ‘眞짜 사나이’- 그런 게 ‘眞짜’ 있는지 모르지만- 가 없는 時代에 金斗漢에 對한 鄕愁는 週期的으로 되풀이된다. 김두한 살아生前에는 그 自身의 입으로 엄청 부풀려진 武勇談으로, 그의 死亡 以後에는 1970年代에 신상옥 監督, 이대근 主演의 시리즈로, 1980年代에는 小說家 홍성유에 依해 에 連載된 으로, 그리고 1990年代 劈頭에는 임권택 監督의 시리즈로, 그리고 世紀가 바뀐 뒤에는 로 金斗漢에 對한 鄕愁는 끊임없이 되살아난다. 勿論 이런 小說이나 映畫에 비추어진 金斗漢의 生涯는 엄청난 誇張과 美貨로 歷史라기보다는 하나의 神話로 우리 앞에 다가왔지만, 아무나 神話의 主人公이 될 수는 없다는 點에서 金斗漢의 生涯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

將軍의 아들, 그것은 金斗漢을 象徵하는 말이다. 한 個人을 論할 때 그 사람 個人이 아니라 누구의 아들이라는 것이 그 사람을 象徵하는 修飾語가 된다는 것은 그 人物이 끝내 아버지의 後光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된다. 그만큼 김두한 神話에서 金佐鎭의 位置는 絶對的이다. 아버지의 後光이 없었다면 金斗漢은 그저 뒷골목 깡牌의 보스나 解放 뒤 白色테러의 行動大將의 하나로밖에는 記憶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金佐鎭 將軍과 雙璧을 이룬 洪範圖 將軍의 아들을 記憶하지 않는다. 李儁 烈士의 아들로 眞짜 獨立軍 大將이 되어 中國大陸을 누빈 利用(李鏞) 將軍을 記憶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利用 將軍은 北에서 高位職을 지냈기 때문이다.

一部에서는 金斗漢이 正말로 金佐鎭 將軍의 아들이 맞느냐는 疑問을 提起한다. 虎狼이에게서 어떻게 승냥이가 나오냐는 것이다. 그러나 金斗漢이 將軍의 아들이 아니라는 確證 亦是 어디에도 없다. 金佐鎭 將軍의 夫人 等 遺族들이 金斗漢을 將軍의 아들로 認定하고, 安東 金氏 一家들 亦是 金斗漢을 높이 評價하지는 않지만, 一家로 받아들이는 것을 躊躇하지 않는데 確證도 없이 金斗漢이 將軍의 아들이 아니라고 主張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다만 興味 있는 것은 金斗漢이 自身의 이름으로 1963年에 刊行된 回顧錄 에서 金玉均을 自身의 養할아버지로 描寫하고 있는 대목이다. 金佐鎭이 金玉均의 養子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金斗漢의 回顧錄을 바탕으로 박창규가 1965年에 刊行한 에서는 金玉均을 金佐鎭의 伯父라고 쓰고 있다. 金玉均과 金佐鎭은 모두 安東 金氏지만, 寸數로는 20寸이 넘는 그냥 같은 門中일 뿐이다. 甲申政變이 失敗하고 金玉均이 日本으로 亡命한 뒤 逆賊으로 몰리자, 安東 金氏 門中에서는 김옥균 行列의 돌림字를 菌(均)에서 규(圭)로 바꾸었는데, 金佐鎭의 아버지는 아마도 兄菌(衡均)에서 형규(衡圭)로 改名했을 것이다. 이런 事情을 考慮해볼 때 金佐鎭이 金玉均의 養子로 들어갔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金斗漢이 正말 金佐鎭 將軍의 아들이 맞느냐는 疑心이 자꾸 提起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의 回顧錄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일 것이다.

金斗漢이 本格的으로 抗日英雄으로 描寫되기 始作한 것은 아마 1980年代 後半 홍성유가 金斗漢의 깡牌 時節을 다룬 小說을 에 連載하면서부터가 아닐까 한다. 이 小說의 原題目은 이었는데, 뒤에 冊으로 刊行될 때 題目을 으로 달았고, 임권택 監督의 映畫도 이 題目을 따서 붙인 것이다. 나 이 冊을 土臺로 박창규가 쓴 에는 에서 金斗漢과 歲를 겨룬 日本人 깡牌 組織 하야시 霸에 對한 이야기는 없다. 代身 고노에(近衛) 敗와 一戰을 겨룬 이야기가 나온다. 고노에 牌와의 一戰도 鍾路의 商權을 지키기 위한 民族的인 立場에서 이야기된 것이 아니라 그냥 깡牌(俠客)들 間의 싸움으로 描寫되어 있을 뿐이다.

1960年代의 김두한 神話에서 俠客 部分은 强調되었지만, 이 俠客이 抗日俠客은 아니었다. 김두한 敗와 對決했다는 魂馬찌(本町: 오늘날의 忠武路)의 하야시 牌 우두머리 하야시도 事實은 朝鮮사람 선우영빈(解放 뒤에 建設協會 副會長을 지냈다고 한다)이었고, 그 部下들도 大部分 朝鮮사람들이었다. 다만 그들은 日本人들과 좀더 癒着되어 있을 뿐이었다. 김두한度 現在 中央郵遞局 앞에 있는 自轉車 營業所의 管理權을 하야시로부터 넘겨받는 條件으로 하야시 敗에 統合되었다는 證言이 나오는 것을 보면, 金斗漢과 하야시의 關係는 類에서 그려지는 그런 對立的인 關係는 決코 아니었다. 하야시 敗와 김두한 牌가 한때 對立했다면 그것은 깡牌들의 領域 싸움 때문이었지, 民族主義的 對立이라고는 할 수 없다.

처음엔 左翼陣營에 加擔

1960年代까지 金斗漢이 强調한 것은 自身의 抗日이 아니라 反共이었다. 란 題目이 象徵하듯이 金斗漢은 解放 直後의 左右對立에서 右翼 白色테러의 行動大將으로 猛活躍했다. 白色테러란 말은 金斗漢의 冊에서 아주 자랑스럽게 無數히 登場한다. 1968年에 刊行된 에 실린 金斗漢의 回顧錄은 더욱 誇張이 甚하여 1945年 12月7日 左翼 系列의 國軍準備對를 襲擊하여 竹槍으로 가슴을 박아 一一이 죽음을 確認하고 建物에 넣고 揮發油를 뿌리고 불을 질러 모두 1300餘名을 一時에 火葬했다고 자랑하고 있다. 박창규의 에서는 國軍準備對 襲擊에서 10餘名을 殺害했다고 했는데, 몇年 사이에 前科가 100倍로 늘어난 것이다. 그러나 民間人 虐殺이 한참 恣行되던 韓國戰爭 勃發 以後면 모를까, 1945年 12月에 1300名은 고사하고 十數名의 虐殺도 있지도 않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이 記錄은 비록 虛構이긴 하지만, 虐殺의 主役이 虐殺을 正當化한 거의 唯一한 事例라고 할 수 있다. 金斗漢은 이때 使用한 武器는 解放 直後 3千餘名의 隊員들을 이끌고 용산의 日本軍 司令部를 包圍하여 빼앗은 武器 中 美軍에 押收당하지 않은 것들이었다고 하지만, 우리 손으로 日本軍을 武裝解除시킬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으랴!

1945年 12月이라면 아직 左右 間에 物理的인 衝突이 本格化되기 前이며, 金斗漢이 屬한 大韓民主靑年同盟이 結成되기도 여러 달 前의 일이다. 이 時期 金斗漢은 阿片을 密賣하다가 美軍政에 團束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3個月假量 獄살이를 한 뒤 出獄하여, 右翼이 아니라 左翼쪽에 加擔하고 있었다. 이를 감추다 보니 解放 直後에 金日成이 特使를 보내 陸軍 所長에 南半部 人民軍 司令官으로 임명하면서 金단추가 달린 軍服을 보냈다는 荒唐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金斗漢은 日帝强占期와 解放 直後에 最高의 人氣를 누린 有名한 漫談家 신불출(申不出)의 影響을 받아 左翼 系列의 朝鮮靑年前衛隊에 加擔하여 活動하고 있었다. 이 組織에는 金斗漢과 過去 水標橋 다리 밑에서 같이 거지生活을 했던 竹馬故友 정진룡(丁鎭龍, 김두한 回顧錄에는 鄭鎭英으로 나온다)도 包含되어 있었다.

정진룡은 金斗漢과 같이 鍾路 牌에 屬해 있다가 釜山으로 내려가 釜山의 주먹 보스가 되었다가, 解放 以後에 서울로 올라가 하야시 敗가 崩壞된 以後 無主空山이 된 明洞의 주먹界를 掌握한 人物이었다. 그런데 정진룡이 청계천을 건너 鍾路로 進出하여 5街와 6街를 掌握하고 南進해오자 金斗漢은 危機意識을 느끼게 되었다. 特히 김두한 밑의 中間 보스들이 여럿 정진룡쪽으로 넘어가자 이 危機感은 加重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金斗漢은 朝鮮靑年前衛隊의 一方的인 解體를 宣言하고 部下들을 이끌고 右翼 靑年團體쪽에 加擔하게 된다. 大槪의 回顧談은 金斗漢이 처음 멋모르고 左翼에 加擔했다가, 염동진(百意思 司令으로 盲人將軍으로 알려진 수수께끼의 人物)이나 박용직(朴容直) 等으로부터 아버지인 金佐鎭 將軍이 共産主義者에게 살해당했는데 네가 어떻게 共産黨 노릇을 하느냐는 말을 듣고 說得당했다고 하지만, 金佐鎭 將軍이 共産主義者에게 암살당한 事實은 日帝强占期에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었는데 그 아들인 김두한만 몰랐다는 것은 믿기지 않는다. 金斗漢이 左翼陣營에서 右翼으로 넘어간 것은 주먹 世界 內의 領域 다툼이 左右翼 對決로까지 飛火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金斗漢이 加擔한 右翼靑年團體는 大韓民主靑年同盟이었다. 아니, 正確히 말해서 김두한 牌가 加擔함으로써 이 團體는 1946年 4月에 出帆한 것이다. 이 團體의 名譽會長은 李承晩과 金九였고, 會長은 뒷날 朴正熙 時代 野黨의 總裁로 이른바 鎭山波動의 主役이 된 유진산(柳珍山)이었다. 이 團體의 總務部長 유우석(柳愚錫)은 柳寬順 烈士의 오빠로 日帝强占期에는 아나키스트였던 사람이고, 宣傳部長은 김두한에게 많은 影響을 준 박용직. 情報部長은 5·16軍事叛亂 以後 장태화란 이름으로 서울新聞社 社長을 지낸 腸尤極(張愚極) 等이었다. 金斗漢은 이 團體에서 監察部長이 되었는데, 當時 靑年團體의 監察部는 白色테러의 行動隊 役割을 遂行하는 곳이었다. 金斗漢이 이끄는 大韓民主靑年同盟 別動隊는 西北靑年團 等 다른 右翼靑年團體들과 함께 左翼이 主導한 1946年의 9月總罷業 等을 破壞하는 데 앞장섰다. 當時 罷業은 合法的인 것이었기 때문에 美軍政 當局도 이를 막기가 어려웠는데, 右翼 靑年團體들을 오늘날의 求社隊 格으로 動員해서 罷業을 깨버린 것이다.

美軍政 아래서 絞首刑을 받다

美軍政 警察의 强力한 後援을 받는 右翼靑年團體들은 特히 1946年 以後 無所不爲의 權力을 휘둘렀다. 그런데 權力과 주먹패가 本格的으로 野合하기 始作한 것은 이때부터지만, 그 端初는 이미 日帝强占期에 열려 있었다. 日帝는 朝鮮人 靑年들을 戰爭에 動員하는 過程에서 많은 靑年들이 日本語도 모르고 學校도 제대로 다니지 못해 組織生活을 해본 經驗이 없어 軍人이나 戰爭勞務者로 動員하는 데 어려움이 있자, 이를 解決하기 위해 靑年團이나 靑年訓鍊所를 組織하여 朝鮮人 靑年들을 皇國 靑年으로 敎育하는 데 注力했다. 金斗漢을 비롯한 주먹패들이 太平洋戰爭 勃發 以後 反도의용靑年團(또는 精神對)에 加擔하게 된 것도 日帝의 靑年動員冊의 하나였다. 이는 파시스트 權力이 뒷골목 世界에까지 일정한 公式性을 附與하며 體制內化韓 것으로, 解放 뒤의 白色테러나 韓國戰爭 戰後의 民間人 虐殺 等과 같은 不幸한 事件들의 씨앗은 이때부터 뿌려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주먹界에서 頭目을 團長님이라 부르는 1950年代의 慣行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白色테러의 主役으로 活動하던 金斗漢이 美軍政에 依해 拘束된 것은 1947年 4月의 일이다. 1年 以上 끌어온 明洞牌 정진룡과의 對立으로 골치를 앓던 김두한 牌거리가 정진룡 一波 여러 名을 南山 기슭의 大韓民主靑年同盟 本部로 拉致하여 拷問하다가 그만 정진룡을 죽여버린 것이다. 이때 같이 잡혀온 사람 中의 하나가 脫出하여 美軍政에 告發하는 바람에 김두한 等 10餘名은 死體가 있는 現場에서 美軍政에 依해 逮捕되었다. 當時 右翼勢力은 이 事件의 搜査와 裁判에 깊이 介入하여 김영태 等 3名만이 懲役刑을 받고, 責任者인 金斗漢과 많은 部下 10餘名은 罰金刑을 宣告받았다.

張澤相 等은 分明 金斗漢을 庇護하고 있었지만, 美軍들은 極右派 靑年團體들의 無法行動을 길들일 必要가 있었기 때문에 이 裁判에 介入했다. 當時로서는 드물게 이 事件의 2審은 美軍 軍法會議로 넘어갔고, 이 때문에 이 事件을 裁判한 審判官 3名이 外部 介入에 抗議하여 辭表를 提出하기도 했다.

迂餘曲折 끝에 裁判은 1948年 1月에 續開되어, 김두한 等 14名이 絞首刑을, 2名이 無期懲役을 宣告받았다. 그러나 하지는 管轄官 確認過程에서 김두한 1人만 絞首刑으로 하고 終身刑 4名, 30年 懲役 9名, 20年 懲役 2名으로 刑을 確定했다. 金斗漢은 이때 自身이 오키나와의 美軍刑務所로 移監되어 獄中에서 黑人 주먹들을 相對로 一戰을 벌였다고 武勇談을 늘어놓고 있으나, 當時의 新聞資料나 靑年運動 關係 記錄을 보면 金斗漢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이태원의 美軍刑務所로 移監되었다가 刑確定 以後 大田刑務所로 移監되어 政府 樹立 直後인 1945年 9月이나 10月에 假釋放된 것으로 보인다. 金斗漢은 回顧錄에서 呂運亨을 暗殺한 한지근에게 自身이 拳銃을 주었다고 하였으나, 呂運亨 暗殺이 일어난 1947年 7月은 金斗漢이 罰金刑을 宣告받았지만 풀려나지는 못한 狀態였던 것으로 보이니, 이 또한 事實과 다른 暗殺 英雄譚()이다.

李承晩이 "사람 좀 그만 죽이게"

政府 樹立 以後 李承晩은 亂立한 右翼靑年團體들을 하나로 統合하여 1948年 12月19日에 大韓靑年團을 組織했다. 民族靑年團의 合流 問題로 難航을 겪다가 해가 바뀌어 發表된 大韓靑年團의 幹部 名單을 보면 金斗漢은 뒤에 國民防衛軍 司令官이 되어 國民防衛軍 事件으로 死刑을 當한 김윤근(金潤根) 監察局長 밑에서 副局長이 되었고, 그 밑의 監察部長에는 1950年代 中盤까지 鳴動을 掌握한 이화룡(李華龍)李 任命되었다. 얼마 뒤 金斗漢은 建設局長으로 昇進했는데, 1949年 6月17日 다시 不法監禁·恐喝 等의 嫌疑로 拘束되었다. 金斗漢은 自身의 回顧錄에서 1948年 自身이 釋放된 뒤 李承晩을 만나러 갔을 때 李承晩이 金一封만 주고 다른 日程이 있다고 나가면서 “사람 좀 그만 죽이게”라고 말해 섭섭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썼는데, 李承晩이 金斗漢을 불러 만났다는 것도 確實하지는 않으나, 어쨌든 大韓民國 政府 樹立 以後 論功行賞에서 排除된 채 다시 獄살이를 하게 된 金斗漢이 李承晩에 對해 不滿을 갖게 된 것은 分明하다.

韓國戰爭 時期의 金斗漢은 그 行跡이 多少 不分明하다. 自身의 回顧錄에는 學徒義勇軍 總司令官으로 永川·浦項 等地에서 싸웠다고 한다. 金斗漢이 김윤근을 따라 國民防衛軍 指導部로 갔다면, 그도 防衛軍 事件의 責任을 지고 잘못되었을 可能性이 높지만, 多幸히 그는 1949年 事件으로 投獄된 經歷 때문인지 防衛軍으로 가지는 않았다. 이 時期 金斗漢은 大韓勞總의 監察責任委員을 거쳐 1954年 4月에는 모두 3人인 最高委員의 한 사람이 된다. 그 自身 한番도 正當한 勞動을 해보지 않았고, 解放 以後에는 勞動運動 破壞에 앞장섰던 人物이 大韓勞總의 最高委員이 된 것이다.

金斗漢은 여기에 滿足하지 않았다. 自由黨 中央委員이기도 했던 그는 自由黨의 公薦을 바랐으나 如意치 않자 無所屬으로 出馬를 强行한다. 이에 自由黨은 그를 反黨行爲를 理由로 除名했다. 自由黨의 彈壓에도 金斗漢은 鍾路 乙區에서 大法官 出身의 辯護士 한근조, 呂運亨의 동생 呂運弘 等 中央政界의 巨物들을 물리치고 當選되었다. 이때 金斗漢은 鍾路 遊興業所 아가씨들의 全幅的인 支援을 받았는데, 次點者인 한근조와 채 500票도 差異가 나지 않은 것을 보면, 金斗漢이 아가씨들 德에 當選되었다는 말은 헛된 것이 아니다.

金斗漢은 國會議員이 되었지만, 自由黨은 그를 選擧法 違反에다 殺人嫌疑까지 씌워 拘束해버렸다. 이 渦中에 金斗漢은 金斗漢은 自由黨에 다시 入黨하게 된다. 李承晩의 終身執權을 위해 改憲을 꿈꾸던 自由黨으로서는 改憲線에 한참 모자라는 議員 數를 메우기 위해 밉지만 할 수 없이 金斗漢을 다시 모셔간 것이다. 그러나 金斗漢은 自由黨의 改憲에 끝끝내 反對했고, 1票 差로 否決된 改憲案이 四捨五入 波動을 거쳐 可決된 것으로 宣布되자 다시 自由黨에서 나왔다.

國會議員으로서의 金斗漢은 뉴스 메이커이자 트러블 메이커였다. 政策 立案 같은 것과는 距離가 멀었지만, 金斗漢은 그래도 自由黨 時節 國會에서 李承晩을 親日派 民族反逆者들의 頭目으로 몰아붙인 唯一한 人物이었다. 그가 이 發言을 한 것은 野黨 副統領으로 李承晩을 批判한 金性洙를 自由黨 議員이 親日派라고 批判한 것에 對해 反撥했기 때문이다. 이런 因緣이 있으니 드라마 가 많은 批判에도 不拘하고 金性洙를 獨立運動家로 그리는 것은 偶然이 아니다. 金斗漢이 李承晩을 親日派 頭目으로 批判한 것이 말인즉 옳은 것이라 하더라도, 정작 李承晩이 頭目의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온갖 破壞工作을 일삼은 自身의 行動을 批判하지 않은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어쨌든 金斗漢은 李承晩을 批判한 事件으로 過去의 部下였던 이정재로부터 議員休憩室에서 脅迫을 當하게 된다. 이 事件은 이정재가 過去의 보스 김두한에게 公公然히 挑戰한 첫 事件이다. 以後 이정재는 自由黨 創黨同志會 創立大會 事件, 그리고 1957年 20餘萬名의 市民 앞에서 擧行된 野黨의 奬忠壇 集會를 部下들을 動員하여 襲擊한 奬忠壇公園 事件에서 다시 金斗漢과 激突했다. 이 두 集會의 警備責任者가 金斗漢이었기 때문이다.

曺奉巖의 進步黨에도 몸담다

金斗漢의 政治行跡에서 또 하나 特異한 經歷은 그가 한달이라는 짧은 期間이긴 하지만 曺奉巖의 進步黨에 몸담았다는 것이다. 金斗漢이 한달 만에 脫黨聲明을 냈을 때 進步黨에서는 “正式으로 入黨願書를 쓴 바 없으니 脫黨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다”라고 論評했다.

金斗漢은 1958年 4代議員 選擧에서는 落選했다. 政黨政治가 뿌리내려가는 마당에 勞農黨이라는 群小政黨 看板을 달고 나온 金斗漢이 서울을 席卷하다시피 한 민주당 突風을 견뎌내지 못하고 한근조에게 더블 스코어로 敗한 것이다. 選擧가 끝나자마자 金斗漢은 다시 選擧法 違反으로 逮捕되었다. 이때 西大門乙 選擧區의 李起鵬을 利川으로 몰아내었으나 落選한 민주당의 김산도 같이 拘束되었는데, 金斗漢은 自身이야 監獄을 別莊같이 드나들지만, 年老한 김산이 걱정이라는 餘裕를 부리기도 했다.

4月革命 以後 實施된 5代 國會議員 選擧에서 金斗漢은 이番에는 鍾路乙을 避해 아버지의 故鄕인 忠南 洪城에서 出馬했다. 當時 洪城에는 가뭄이 들었는데 金斗漢이 祈雨祭를 지내니 비가 왔다고 해서 話題가 되기도 했으나 金斗漢은 10名이 겨룬 選擧에서 1等과 700餘票 差異로 落選하고 말았다. 金斗漢이 다시 國會에 進出한 것은 6代 때였다. 그러나 總選거 때가 아니고 野黨議員 中 强勁派가 韓日會談에 反對하여 辭退한 뒤 이루어진 補闕選擧 때였다. 이때 金斗漢은 韓國獨立黨의 看板으로 나와 龍山에서 當選되었는데, 3代 때와 마찬가지로 當選되자마자 韓國獨立黨 內亂陰謀事件으로 인해 國家保安法 違反으로 또다시 拘束되고 만다. 이 事件은 金斗漢이 김종필과 가까워지자, 그를 牽制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實際로 에서는 김종필을 金玉均에 比喩하면서 김종필은 우리 歷史에서 500年에 한番 나오는 人物이라면서 그를 돕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겠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다고 쓰고 있다.

金斗漢은 補闕選擧로 當選된 뒤 몇番 登院도 못하고 拘束된 것에 對한 同情輿論이 일어 國會에서 釋放同意案이 通過되어 釋放되었고, 國家保安法 事件으로는 드물게 1966年 5月 1審에서 無罪判決을 받았다. 그리고 그해 9月22日 金斗漢은 憲政史上 初有의 事件을 일으키며 政治生活을 마감하게 된다. 三星財閥의 李秉喆은 5·16軍事叛亂 뒤 不正蓄財者로 몰려 處罰對象이 되었으나, 朴正熙 政權의 方針이 바뀌어 풀려났을 뿐 아니라, 莫大한 商業借款을 바탕으로 韓國肥料를 引受하였다. 그런데 韓國肥料가 工場建築資材를 輸入한다면서 禁輸品目人 사카린을 密輸한 것이다. 一般人들은 量담배 한 개비만 피워도 警察署에 끌려가 困辱을 치르던 時節에 當代 最大財閥의 密輸가 밝혀지자 輿論은 벌집을 쑤신 듯했다. 더구나 이렇게 密輸로 번 돈이 공화당의 政治資金으로 흘러들어간다는 疑惑이 불거져 國會는 連日 이 問題를 놓고 論難이 벌어지고 있었다. 野黨의 김대중 議員이나 與黨의 권오석 議員 等도 當事者들을 光化門 네거리에서 極刑에 處해야 한다는 輿論을 傳하며 熱辯을 吐했다.

午前會議에서 當時 國會副議長으로 社會를 보던 이상철이 金斗漢의 發言 順序에 不利하게 社會를 보자 金斗漢은 머리를 가리키며 “當身 이거 한番 부서지는 것을 보려고 그래요” 하고 險惡하게 몰아붙였다. 그리고는 “그 따위로 當身 하면 좋지 않아! 老人이니까 그냥 두지 張 副議長(장경순)같이 誘導깨나 쓰면 날릴 테야!” 하고 소리쳤다. 김대중 議員의 날카로운 質疑에 이어 마침내 發言權을 얻은 金斗漢은 自身은 “말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할 줄 모르는 行動을 할 수 있다”고 韻을 뗀 뒤 別莊 같은 監獄에 이미 40餘回 들락날락했는데 “또 들어갈 心情”이라며 自身의 反共鬪爭에 對해 張皇하게 늘어놓았다. 이상철 副議長이 時間이 없으니 本論만 말하라고 하자 金斗漢은 國會에 出席해 있는 國務總理와 長官들을 하나의 被告로 다루겠다고 말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議席에는 웃음소리가 터져나오고 있었다. 金斗漢은 가지고 온 종이라 싼 箱子를 들어보이며 이 內閣을 糾彈하는 國民의 사카린이라며 “이 內閣은 고루고루 맛을 보여야 알지, 똥이나 처먹어 이 개새끼들아!” 하고 외치며 國務委員席을 向해 똥물을 끼얹었다.

김대중 議員 發言 뒤에 똥물을 뿌리다

공화당 政權은 이 事件을 가지고 密輸事件으로 窮地에 몰린 處地를 逆轉시키려고 强攻을 퍼부었다. 그러나 市井의 輿論은 金斗漢을 擁護했다. 똥을 뿌린 것이야 잘한 것은 아니지만, 痛快하기 짝이 없다는 反應이 만만치 않았다. 더구나 민중당과 鮮明性 競爭을 벌이던 신한당度 金斗漢을 斗頓하고 나오자 민중당도 態度를 바꿔 金斗漢을 擁護하기도 했다. 金斗漢에 對해서는 議長(議場) 冒瀆으로 懲戒案이 提出되었지만, 金斗漢이 議員職을 辭退함에 따라 懲戒案이 處理되지는 않았다. 1年이라는 짧은 期間의 6代議員職을 辭退한 金斗漢은 拘置所로 直行했다. 金斗漢은 裁判 中에 울먹이며 父親의 勳章을 返納하겠다고 하기도 하고 自害를 試圖하는 等 獄中에서도 끊임없이 뉴스를 만들다가 3個月餘 만인 1966年 12月22日 病保釋으로 出監했다. 그 뒤 金斗漢은 鑛産業에 손을 댔다가 失敗하고, 暴力, 反共法 等으로 두어 次例 더 獄門을 드나들다가 1972年 11月21日 갑작스러운 腦出血로 55살의 한창 나이에 世上을 뜨고 말았다.

金斗漢의 生涯는 거품을 벗겨낸다 하더라도 참으로 波瀾萬丈했다. 그는 우리 歷史에서 참으로 惡役을 많이 맡았지만, 分明히 그 어딘가 미워할 수 없는 구석이 있다. 5年餘의 議員生活 中 그만큼 黨籍을 많이 옮긴 사람도 적지만, 아무도 그를 철새라 하지 않는다. 그는 殺人과 暴力을 일삼기도 했지만, 때로는 軍靴에 가죽掌匣을 낀 모습으로 나타나 政治깡牌들로부터 野黨議員들을 保護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自身만의 方式으로 그 自身이 定한 法에 따라 不義를 膺懲했다. 나름대로 自己 立場을 갖기 위해 熱心히 살았지만, 그는 周邊의 模寫들에 依해 利用되는 境遇가 많았고, 끝내 自身의 이름보다 將軍의 아들이란 아버지의 後光 속에 들어가야만 빛을 發하는 存在가 되고 말았다. 歷史에 萬一이란 없지만, 그의 活動舞臺가 鍾路가 아니라 아버지처럼 만주벌이었다면 그 亦是 將軍이 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한홍구 ㅣ 성공회대 敎授·韓國現代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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