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民防衛軍 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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召集된 國民防衛軍

國民防衛軍 事件 (國民防衛軍 事件)은 韓國 戰爭 1951年 1月 1·4 後退 때 第2國民兵으로 編成된 國民防衛軍 高位 將校들이 國庫金과 軍需物資를 否定處分하여 着服함으로써 12月~2月 사이에 500,000名에 達하는 國民防衛軍으로 徵集된 이들 가운데 餓死者, 病死者, 凍死者가 約 50,000-90,000餘名에 이르렸고 [1] 銅像으로 인해 손가락과 발가락 뿐만아니라 손과발까지 切斷난 200,000餘名이 넘는 凍傷者들을 이르게 한 事件을 말한다. [2]

中共軍의 韓國戰爭 參戰으로 인해 豫備兵力 擴充에 어려움을 겪은 韓國 政府는 中共軍 및 朝鮮人民軍에 對抗하고자 第2 國民病을 編成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國民防衛軍이다. 李承晩 學徒兵 을 이끌고 洛東江 戰鬪 에서 活躍했던 김두한 을 國民防衛軍 陸軍准將 司令官으로 임명해주겠다고 提議했으나 김두한 은 士官學校 出身도 아니고 軍隊經驗이 없다고 해서 李承晩 의 提議를 拒絶했다. 신성모 大同靑年團 團長 김윤근 을 推薦하여 陸軍准將 國民防衛軍 司令官으로 임명하고 追加로 兵力을 募集하였다. 副司令官에는 獨立運動家 出身 윤익헌 이 大領으로 特別 任命된 뒤 補職되었다. 이들은 士官學校 出身도 아니고 軍隊 經驗이 없었다. 그러나 國民防衛軍에게 軍需補給, 物資를 支給해야 할 것을 高級 將校들이나 幹部들이 이를 否定 着服, 橫領하여 수많은 國民防衛軍으로 徵集된 이들이 굶어죽거나 얼어죽는 事態가 續出하였다.

1951年 봄 이 事件이 國會(當時 釜山)에서 暴露되어 드러남으로써, 이 事件으로 신성모 (申性模) 國防部 長官이 물러났다. 國民防衛軍 事件이 眞相糾明되는 過程에서 國防長官 신성모 를 비롯한 李承晩 政權 에 依해 眞相糾明이 妨害받는 것을 지켜보았던 副統領 이시영 (李始榮)은 第1共和國 政府에 크게 失望感을 느껴 이에 反撥하여 辭表를 提出하였다. 또한 野黨 內에서 李承晩 에게 好意的이었던 한민당 민국당 界 人事 조병옥 , 윤보선 , 金性洙 等이 李承晩 政權 에 등을 돌리게 된다. 또 國民防衛軍 事件을 契機로 軍入隊 忌避現象이 增加했고 및 李承晩 內閣의 信賴度가 떨어졌다.

槪要 [ 編輯 ]

첫 部隊 召集 [ 編輯 ]

韓國戰爭 中華人民共和國 의 介入으로 戰勢가 逆轉되면서 政府 1950年 11月 20日 韓國戰爭 勃發 以後 防衛軍으로 組織된 靑年防衛隊를 國民防衛軍으로 代替하기 위한 法案을 國會 에 提出한다. 韓國戰爭 初盤 北韓이 南韓 占領地에서 義勇軍을 大擧 動員한데다 南韓側은 大部分의 領土를 뺏긴상황에서 豫備兵力 擴充에 어려움을 겪었던 經驗을 土臺로 하여 北韓軍이 오기전에 미리 兵力資源들을 빼돌려놓자는 意圖에서 實施한 政策인 것이다.

그 主要 內容은 다음과 같다.

  1. 軍人, 警察과 公務員이 아닌 滿 17歲 以上 40歲 以下 壯丁들을 제2국민병에 편입시킨다.
  2. 第2國民病 가운데 學生을 除外한 字는 支援에 依해 國民防衛軍에 편입시킨다.
  3. 陸軍參謀總長은 國防部長官의 指示를 받아 國民防衛軍을 指揮, 監督한다.

1950年 12月 21日 '國民防衛軍 設置法'이 公布되었고, 當時 國防部 長官 신성모 는 右翼團體인 '大韓靑年團' 團長 김윤근 을 准將으로 任官시키고 國民防衛軍 司令官으로 임명한다. 最小限의 基幹要員만이 現役에서 差出되었고, 防衛軍 指揮官 大部分은 主로 靑年團 出身들로 充員되었는데,불과 몇 個月 사이에 召集된 國民防衛軍 中 서울 에 모여든 防衛軍 數字만 無慮 50萬餘 名에 이르는 兵力을 모으긴 했으나, 中共軍의 大攻勢로 또다시 서울을 빼앗기게 된 政府는 防衛軍 將兵들을 大邱 · 釜山 等으로 移動할 것을 指示하게한다.

司令官 김윤근 지청천 等이 물러난 뒤 右翼靑年團體人 大韓靑年團 의 團長이었다.

副司令官 윤익헌 은 獨立運動家 出身이었다. [3] 윤익헌 中華民國 에서 獨立運動에 從事한 後 歸國하여 靑年 運動에 投身하여 各種 靑年團體의 總務部長을 歷任하였다. [3] 그가 때때로 名分이 분명치 않게 돈을 쓴다는 疑心을 받으면서도 各種 靑年團體의 總務部長을 歷任한 理由는 "돈을 만들어 내는데 그와 맞먹는 사람을 到底히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3] "라는 視角도 있다.

윤익헌 京畿道 龍仁郡 出身으로, 京城第一高普 를 同盟休學 事件으로 中退, 中華民國 에서 황포軍官學校 를 卒業하고 지청천 將軍 밑에서 獨立運動에 從事했다. 解放 後에는 光復靑年會, 大同靑年團, 韓淸 等에서 總務局長職을 歷任했고, 김윤근 과는 大同靑年團 時節부터 함께 일했다. [3]

죽음의 行列과 高位幹部들 豫算 流用 [ 編輯 ]

當時 國防部長官 신성모
(김윤근을 司令官으로 임명했으며 事件을 隱蔽하려 했다.)

問題는 서울에 集結한 50萬 名을 어떻게 後送하느냐였는데, 이들 50萬 名은 걸어서 추운 酷寒 狀況속에 千里길을 突破해야 했다. 그러나 제대로 된 宿食도 提供되지 않았으며 普及과 겨울被服 및 軍服조차 제대로 支給되지 않았다. 國民防衛軍의 高級 指揮官, 將校들이 將兵들에게 支給되어야 할 補給品을 橫領, 着服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酷寒의 秋윗속에 食糧과 겨울 被服 조차 支給 받지 못하고 굶주린 채 '長距離를 이동하라'는 命令을 받은 수많은 50餘萬 名의 兵士들은 移動 中 餓死하거나 同舍하게 된다. 不過 100餘 日 사이에 50萬의 防衛軍 將兵 中 無慮 約 12萬 餘名이 死亡했고 20萬 餘名이 凍傷에 걸렸다.

本來 國民防衛軍을 創設할 때, 政府는 後方에 51個의 敎育隊를 設置하고 兵力을 이곳에 集結하도록 했다. 卽 國民防衛軍 兵力을 約 50萬 名으로 잡으면 1個 敎育臺當 1萬 名 程度가 割當되는 셈이었는데, 그러나 敎育大義 基幹要員들은 兵力이 오더라도 이들을 받아들일 能力도 醫師도 없었다.

'돌려차기'式으로 '서울이나 漢江 以北에서 떠난 兵力이 集結地에 到着하면 收容能力이 없다는 理由로 金海로 가라 하고, 金海의 敎育隊에 가면 晉州로 가라하고, 晉州의 敎育隊는 또 馬山으로 가라'고 하는식의 手法으로 各 敎育對 幹部들은 이들을 며칠씩 受容한 것으로 書類를 꾸며 政府에서 支給한 豫算과 食糧을 빼돌려 不正 着服, 公金橫領을 저질렀던 것이다.

高位 幹部들의 國民防衛軍 豫算 流用은 이미 豫定된 것이었다. 그러나 50萬 兵力을 運用하기 위해서 必要한 숱한 幹部와 期間將兵들의 月給은 豫算의 어디에도 計算되지 않았다.

그런 渦中에 國民防衛軍에 所屬된 이들은 訓鍊所 갈때마다 '돌려치기'式으로 當하면서 아무런 軍需品도 補給品도 못받게 되어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거나 或은 訓鍊所 入所하지만 補給品이나 食糧도 없이 아무것도 못받고 訓鍊所안에 갇혀 지내듯이 지내게 된다. 이렇게 되어 酷寒의 추위속에서 餓死者와 凍死者가 무더기로 續出하였고, 이 悲劇的인 狀況에 國民防衛軍 高位幹部들은 軍需品이나 補給品을 橫領하거나 不正 着服해서 빼돌린 돈으로 帳簿上으로 '兵士들을 위해 젤리工場을 짓는다.'고 써놓았다. 이렇게 無能한 政府에 依해 굶주린 兵士들은 訓鍊을 빌미로 마을로 가서 먹을 것을 奪取하고 잔치집과 굿판을 襲擊하는 等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렇게해서 國民防衛軍으로 徵集된 이들은 가는 곳마다 凍死者, 餓死者가 大量 發生했으며 慘酷한 죽음의 行進을 繼續하게 된다.

非理에 對한 提報 [ 編輯 ]

事件을 처음 제보받은 野黨 國會議員 이철승

事態가 이 地境에 이르자, 곳곳에서 餓死者와 凍死者가 續出하는 가운데 慘酷한 죽음의 行進을 繼續하는 것이 目擊되고 곳곳에서 所聞이 나타났다.

1951年 臨時首都 釜山에 到着한 國會議員 이철승 에게 國民防衛軍 幹部들이 衣服과 補給品을 橫領·着服한다는 諜報를 入手, '國民防衛軍 非理 疑惑'李 제보되었다. 偶然히 國民防衛軍에 屬해있던 親舊를 만나게 된 그가 餓死 直前인 親舊의 事緣을 듣고 眞相 調査에 着手하여 疑惑을 提起했는데 이는 事實로 確認되었다. 國民防衛軍들에게 傳達해야할 50餘億圜을 着服했다는 疑惑을 接한 뒤 調査, 그 結果 高位 幹部들이 軍人들의 衣服, 食糧 等에 關한 費用 約 72億원을 着服했다는 事實을 알아냈다.

以後 이철승 等은 疑惑에 對한 證據 資料와 寫眞들을 提出, 國會 에 國民防衛軍 事件의 眞相 調査를 要求하며 自由黨 政權을 批判, 國民防衛軍 事件의 眞實을 暴露하게 하였다.

事件에 對한 責任處罰과 政治的 影響 [ 編輯 ]

呂運亨과 김윤근, 오른쪽이 김윤근
李承晩

以後 眞相調査團이 꾸려지면서 곳곳에서 餓死者와 凍死者들의 屍身과 飢饉, 疾病에 걸린 防衛軍 兵士들을 目擊한 野黨議員들에 依해 國會는 1月 15日 '第2國民病 非常對策委員會'를 結成한다. 그러나, 國民防衛軍 司令官 김윤근 과 國防長官 신성모 는 이러한 眞相糾明 움직임을 '不純分子와 第5列의 策動'이라며 事件의 隱蔽를 試圖한다.

大韓靑年團 張인 김윤근은 軍事關聯과는 全혀 無關한 二等兵 經歷조차 全無한 民間人이었음에도 하루아침에 별을 달았고 윤익헌 等 靑年團 幹部들 亦是 大領 中領 等으로 高位 軍 幹部로 任命되었다. 1月 말 內務部 長官 조병옥 장택상 유진산 은 屍體들의 寫眞과 蒐集한 낡은 옷과 食糧 等의 證據를 들고 景武臺 로 찾아가 國防部長官 신성모 에 對한 處罰을 要求하였으나 李承晩 은 承認을 拒否하였고, 조병옥 李承晩 과 言爭을 벌였다. 서울特別市葬 을 지냈으며 李承晩 의 最側近 人士의 한사람이었던 윤보선 亦是 景武臺 李承晩 을 찾아가 關聯者 處罰을 要求했다.

國防長官 신성모 는 國民防衛軍 慘事의 最終的 責任이 李承晩 에게 돌아갈 것을 알았기 때문에 '防牌막이'를 自任하고 執拗하게 搜査를 妨害하지만, 들끓는 輿論 때문에 國民防衛軍 司令官 김윤근 은 빼돌리고 副司令官 윤익헌만 處罰하자는 線에서 處罰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서둘러 構成된 軍事法廷을 通해서 裁判 開始 3日 만에 김윤근에게는 無罪가, 윤익헌에게는 懲役 3年 6個月을 宣告하였으나, 이 消息을 들은 輿論의 狀況은 더욱 惡化되어만 갔을뿐이다. 美國이 支援했던 豫算을 國民防衛軍 幹部들이 不正着服을 하여 50萬衆 12萬 餘名의 將兵들이 餓死와 兵士 動詞로 인해 죽고 20萬 餘名이 넘는 將兵들이 銅像으로 犧牲되었다고 消息을 듣고 國民防衛軍 事件으로 憤怒한 美軍 指揮官들은 李承晩을 찾아가 國民防衛軍을 망쳐놓은 國民防衛軍 責任者 신성모를 當場 解任을 하지 않으면 美軍은 撤收하겠다고 脅迫했다.

그 渦中에 同時에 居昌 良民 虐殺 事件 마저 겹치면서 多急해진 李承晩 은 國防長官 신성모 와 內務部長官 조병옥 法務長官 김준연 을 同時에 解任하고 이기붕 을 國防長官으로 任命, 內閣을 再改編하면서 國會에서의 國民防衛軍事件 中間發表의 中止를 要請, 事件의 擴散을 撫摩하려 했다.

윤보선 은 景武臺를 찾아가 李承晩 에게 신성모 김준연 및 國防部, 防衛軍 司令官 김윤근 外 防衛軍 幹部들의 處罰을 建議하였다. 그러나 李承晩 은 共匪들의 術策이라며 眩惑되지 말라고 對應하였다. 國民防衛軍 事件, 居昌 良民 虐殺 事件 當時 政府와 軍의 過剩鎭壓과 虐殺을 無條件 共匪와 內通한 者들을 射殺한 것이라며 合理化하는 李承晩 의 態度를 보고 失望을 느끼게 되었다. 1952年 國民防衛軍 餓死 事件 때 李承晩 이 事件을 批判하는 者들을 共産主義 字로 몰면서 윤보선 은 '그들이 왜 共産主義 字인지 根據를 대시라'며 이를 面前에서 非難하다가 李承晩 과 完全히 訣別하게 됐다.

政府에서는 卽時 共匪들의 跋扈이며 루머라고 言論에 發表하였다. 그러나 眞相調査委 서민호 議員은 發表를 强行, 國民防衛軍 幹部들 大部分이 上部의 命을 憑藉하여 豫算을 함부로 着服 使用하였음을 밝힌다.

國會의 發表 [ 編輯 ]

國會 調査委員會의 報告에 依하면 1950年 12月 17日 부터 1951年 3月 31日 까지 幽靈人口를 造作하여 着服한 것이 現金 23億 원(圓), 쌀 5萬 2千 섬이나 되었다고 한다. 또한 國民防衛軍 司令部에서 提示한 統計를 그대로 認定한다고 하더라도 食料品費의 調達額數와 實際로 執行된 額數의 差異가 無慮 20億원에 達함으로써 結局 3個月 동안 55億이라는 莫大한 金額을 防衛軍 高位 幹部層이 着服한 것으로 드러났다.

副司令官 윤익헌에 對한 機密費用이 105日 동안 無慮 3億 1千755萬원이나 支出되었고, 國會 內에 關聯된 政派에 1億원이나 흘러간 것 等 밝혀지면서 이 着服한 規模는 매우 큰규모의 複雜하여 '眞相을 제대로 糾明하려면 最小 6個月이 걸릴 것'이라는 衝擊的인 中間 發表結果가 나왔다.

國民防衛軍 司令官 外 5名 銃殺執行瞬間

國會는 1951年 4月 30日 國民防衛軍의 解體를 決意하였고, 이와 關聯된 不正着服한 國民防衛軍 高位幹部들은 軍法會議에 回附되었다. 그 해 7月 19日 中央高等軍法會議는 司令官 김윤근, 副司令官 윤익헌 以下 5名에게 死刑을 宣告하였으며, 8月 12日 野山에서 김윤근 , 윤익헌 , 강석한 , 박창언 , 박기환 等 公開銃殺刑이 執行되었다.

當時 國會에서는 이들이 着服한 莫大한 資金이 政治權勢力, 特히 李承晩支持 勢力에 흘러들어간 情況證據를 捕捉하고 있었지만, 이들이 너무 일찍 處刑되는 바람에 結局 숱한 疑問을 남긴 채 事件은 終結된다.

國民防衛軍 關聯責任者 調査裁判 [ 編輯 ]

1951年 6月 15日 國民防衛軍 事件 裁判廷에서 정일권이 證人으로 나왔을 때 한 答辯이다. 위에도 言及한 陸軍准將 김태청이 陸軍參謀總長 정일권 所長에게 國民防衛軍司令官 김윤근 은 一等兵의 經驗도 없는데 어떻게 하루 아침에 별을 달고 司令官이 될 수 있나? 하고 묻자 정일권 신성모 國防長官이 시키는일만했고 李承晩 大統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해서 했을 뿐입니다. 라고 答辯하였다. 檢閱官으로 參席했던 金錫元 은 이에 하도 어이가 없어서 憤怒했고 소리를 버럭 지르며, 이봐! 오늘 答辯이 그게 뭐야! 當場 階級章을 떼어버려! 라고 하였다 國民防衛軍의 慘狀이 곳곳에서 目擊되면서 社會問題가 되자 事件 搜査가 進行되었고, 關聯者들이 軍事裁判에 回附되었다. 하지만 裁判으로 宣告된 刑量이 너무 낮子 社會的으로 批判輿論이 激昂되었다. 이에 李承晩 신성모 를 國防長官에서 解任하고 이기붕 을 國防長官에 임명했으며 陸軍參謀總長 정일권 을 解任하고 李鍾贊 으로 交替하였다.

政治人들의 資金 收受 [ 編輯 ]

事件은 當事者 5名을 銃殺刑 執行하는 線에서 終結되었으나 一部 政治人들이 國民防衛軍 資金을 수수하거나 받은 事件은 一部 事實인 것으로 確認되었다. 防衛軍 關聯者들 中에는 그 資金이 政治人들에게 건네졌다고 證言하였고, 法院에서 再審을 實施하였으나 김윤근, 윤익헌 等의 犯行이며 政治와는 無關하다는 判決을 내렸다. 그러자 一部 大學 敎授들과 知識人들은 國民防衛軍 資金을 賂物로 받은 政治人들을 糾明하라고 要求하였다.

繼續된 討議過程에서 政治資金 關聯 疑惑을 받고 憲兵搜査隊 또는 裁判過程에서 事實審問을 위해 召喚되었던 議員들의 거의 全部가 發言에 나섰다. 이들 中 지청천 議員만이 윤익헌 과의 오래된 親分關係 속에서 生活費條로 金錢을 수수한 적이 있다고 認定하였고 [4] , 나머지는 모두 嫌疑事實을 頑剛하게 否認하였다. [4]

靑年運動에 오랫 동안 關與했던 여러 議員들의 發言 속에는 金錢收受 嫌疑는 頑强히 否認하면서도 김윤근 , 윤익헌 等 防衛軍 幹部와 김종회 , 박승하 等 韓淸 出身 議員들이 主軸이 되어 靑年團 出身 國會議員을 糾合 乃至는 包攝하여 政治勢力化하는 움직임이 第2代 國會에 들어와 있었다는 事實이 여러 次例 言及되었다. [4]

김정식 (金正植) 議員은 具體的으로 김윤근 , 윤익헌 等과 協議하여 靑年團 出身 新訂同志會 議員들이 積極 參與했었다고 밝혔다. [4] 特히 서범석 議員은 김윤근 윤익헌 이 앞으로 있을 유엔 監視下의 南北統一 選擧가 열릴 境遇 韓淸 系列의 國會議員 을 各 地方代表로 推薦해서 南北總選擧에서 헤게모니를 차지하자는 方案이 論議된 적이 있다고 밝히고, 이는 "윤익헌이 당치 않은 政治運動을 構想했기 때문이며" 또한 김윤근 , 윤익헌 에게 "政治的으로 어떠한 動態가 있었음을 疑心할 수 없는 事實이다"라고 結論지었다. [4] 그럼에도 國會議員이나 國會와는 關聯이 없다는 結論을 내렸다.

一部 野黨 人士와 大學敎授, 知識人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다며 다시 再審할 것을 要請했다. 그러나 以上과 같이 政治資金 疑惑에 對한 熾烈한 論爭 끝에 國會는 結局 政治關聯 無嫌疑라는 判決을 내린 法院 의 判決을 受容하여 防衛軍 非理에 國會議員이 關聯되었다는 嫌疑 [4] 는 事實無根인 것으로 結論을 내렸다. [5]

事件에 對한 再審判決을 受容할 것을 提案하는 同意가 在籍議員 139人 가운데 93票의 越等한 贊成으로 通過되었던 것이다. [5]

事後 [ 編輯 ]

結果 [ 編輯 ]

그때까지 各種 靑年團體의 總務部長을 歷任하며 手腕을 發揮했던 副司令官 윤익헌 李 司令官 김윤근을 代身하여 防衛軍 運營을 實質的으로 擔當하고 있었다. [6] 이는 김윤근 윤익헌 이 모두 認定한 事實이다. [6] 國民 防衛軍 慘事는 防衛軍 部隊의 運營을 李承晩의 親衛組織人 大韓靑年團 과 그 靑年團을 基盤으로 만들어졌던 靑年防衛隊에게 맡겼기 때문에 저질러진 事件이었다. [7]

徵集된 이들은 名簿도 없고 軍番도 없고 武器도 없고 軍服도 없는 軍隊. 一名 '죽음의 隊列', '骸骨들의 行進'이라 불린 바로 그런 軍隊가 國民防衛軍이었다. 名簿도 없으니 몇名이 動員되었고, 어디서 어떻게 얼마나 죽었는지는 오늘날 現在에도 正確히 모른다. 推測上으로 政府의 公式記錄人 '韓國戰亂1年誌'에는 千數百名 死亡으로 돼 있지만, 當時 所聞으로는 5000名 乃至 1萬名이 죽었다고 알려졌다. 中央日報 刊行의 '民族의 證言'에 따르면 '50萬名의 隊員 中 1割假量이 兵士나 餓死했다'고 整理되어있고, 釜山日報 刊行의 '臨時首都 千日'에는 死亡者가 1萬餘 名으로 整理되어 있다. 歷史學者 中에서는 李承晩을 가장 肯定的으로 評價하는 유영익 敎授조차 이 事件을 "1萬名假量의 軍人이 凍死, 餓死, 病死한 天人共怒할 事件"으로 規定하고 있다. 國民防衛軍에 일어난 事態가 끝나자 國民防衛軍 將兵 50萬 中 1萬이 넘는 將兵들이 犧牲되었다. 國民防衛軍 事件을 契機로 軍入隊 忌避現象이 增加하였고, 李承晩 內閣의 信賴度는 急激히 失墜된다.

이 事件을 契機로 副統領 이시영 이 辭職書를 提出했고, 李承晩 에게 好意的이었던 한민당 민국당 界 人士였던 조병옥 , 윤보선 , 金性洙 等은 李承晩 政權 에 등을 돌리게 된다.

眞實和解委 眞相調査 [ 編輯 ]

2007年 3月 9日 '眞實,和解를 위한 過去事整理委員會'에서 國民防衛軍事件을 職權 調査하기로 決定했다고 밝혔다. 또한 2007年 10月 30日에 韓國戰爭 當時 '國民防衛軍'으로 끌려가 訓鍊 中 毆打를 當해 傷害를 입고 숨진 犧牲者에 對해 軍 當局이 56年 만에 殉職決定을 내렸다. [8]

2010年 大韓民國 眞實·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에서 國民防衛軍으로 徵集되어 犧牲된 이들과 遺族들에게 謝過하고 禮遇를 갖추라고 大韓民國 政府에 勸告했다. [9]

評價 [ 編輯 ]

國民 防衛軍 事件은 李承晩 政權 에 依해 저질러진 人材慘事이자, 軍 高位 幹部들의 不淨腐敗함을 드러내는 事件이었다.

비록 國民防衛軍 徵集者들이 國家權力에 依해서 直接的인 虐殺을 當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들에 對한 處遇와 官吏는 그 規模가 크고 끔찍했다. 리영희 는 國軍 通譯將校로서 當時 慘狀을 直接 目擊했다. 리영희는 '美軍 顧問團 將校와 함께 無理하게 補給品을 빼서 그들을 도왔다.'고 한다. 이어 리영희는 " 6·25 戰爭 罪惡史에서 으뜸가는 人間 抹殺行爲였다"라고 回顧했다. [10]

그리고, 國民防衛軍事件 司令官 김윤근 은 씨름꾼 出身이며 軍事 關聯과는 相當히 無知했다고 한다. 이는 副司令官인 윤익헌 亦是 마찬가지였다.

當時 國民防衛軍 副司令官 윤익헌을 搜査했던 김태청 (金泰淸, 뒤에 辯護士協會 會長을 지냈다.)은 '윤익헌의 씀씀이에 기막혀 自身은 물이라도 윤익헌이 돈 쓰듯이 해보았으면 願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回顧했다. 한便 裁判部 構成에도 問題點이 指摘되었다. "裁判部 構成에서도 當時 現役將星 가운데 防衛軍과 가장 가까운 人物이었고 同時에 신성모 김윤근 과 각별한 사이에 있던 이선근 國防部 政訓局腸을 임명하였다. [6] "는 點이 提起되었다.

各州 [ 編輯 ]

  1. “國民防衛軍 事件” . National Archives of Korea . 2011年 4月 27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0年 7月 20日에 確認함 .  
  2. “ko:'國民防衛軍' 犧牲者 56年만에 '殉職' 認定” . 《 뉴시스 》. 2007年 10月 30日 . 2010年 7月 14日에 確認함 .  
  3. 유영익, 韓國과 6.25戰爭 (연세대학교出版部, 2002) 100페이지
  4. 유영익, 韓國과 6.25戰爭 (연세대학교出版部, 2002) 127페이지
  5. 유영익, 韓國과 6.25戰爭 (연세대학교出版部, 2002) 128페이지
  6. 유영익, 韓國과 6.25戰爭 (연세대학교出版部, 2002) 112페이지
  7. 事實 元來 策定된 費用마저 不足해서 大量의 餓死者 發生은 必然的이었다. 그러나 國民防衛軍 高位 幹部들은 그것마저도 橫領해서 被害規模가 몇倍로 불어나게 되었다. 5名의 國民防衛軍 高位幹部들이 橫領한 돈이 1951年 當時 貨幣로 30億원이었다.
  8. 眞實和解委 '國民防衛軍' 職權調査
  9. 山과 들에 몰래 '賣場'…60年만에 밝혀낸 眞實
  10. 國民防衛軍 事件 職權調査

外部 링크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書籍 [ 編輯 ]

  • <大韓民國史> 2卷, 한홍구 지음.
  • <大韓民國 50年史> 1卷, 임영태 지음.
  • 남정옥 (2010年 3月 5日). 《來日을 여는 知識 社會-34 6·25 戰爭時 豫備電力과 國民防衛軍》. 韓國學術情報. ISBN   978-89-268-0856-6 .  
  • 윤보선, 외로운 選擇의 나날들 (동아일보사, 1991)
  • 康俊晩, 韓國現代史散策:1950年代篇 1(人物과 思想史, 2006)
  • 康俊晩, 韓國現代史散策:1950年代篇 2(人物과 思想史, 2006)
  • 유영익, 韓國과 6.25戰爭 (연세대학교出版部,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