宗會
(鍾會,
225年
~
264年
1月 18日
)는
中國
三國時代
위나라
의
將軍
으로
者
는 沙溪(士季)이며
醴酒
永川郡
장사현(長社縣)
사람
이다.
太尉
鍾繇
의 아들이다.
倍잠론(裴潛論)에서 宗會는 最高 權力者였던
司馬所
의 무정後(武亭侯)였으며
蜀나라
를 征伐한 軍事라 評했다.
全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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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宗會는
鍾繇
의 아들로서 熱心히 學問을 익혀 아는 것이 많았기에 名聲을 얻었다.
蜀나라
에 降伏했던
下朽敗
는
姜瑜
에게 宗會가 나중에 政權을 잡을 境遇
燭
과
오
두 나라의 걱정거리가 될 것이라고 豫測했다. 官職에 나아간 後
조某
에 依해 管內後(關內侯)에 封해졌으며, 學問에 能한 여러 臣下들과 함께 祖母와 學問을 論議하기도 했다.
255年
에는 中書侍郞(中書侍郞)의 자리에 있었는데,
毌丘儉
이 社馬氏에 對抗하여 蜂起하자
私馬社
는 病이 심해졌기 때문에 直接 討伐에 나서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다. 이때 宗會는
部下
와 함께 私馬社가 直接 나서서 鎭壓할 것을 勸告하였다.
毌丘儉
의 蜂起가 鎭壓된 지 얼마 안 되어
私馬社
가 죽어 私馬社의 아우
司馬所
가 大將軍이 되고 宗會는 皇門侍郞(黃門侍郞)에 任命되었는데,
司馬所
는 宗會를 거느리고 다닐 때가 많았다. 이 때문에 宗會가 교만해져 이를 警戒하는 部下의 忠告를 받았다.
257年
第褐炭
이
司馬所
의 野心에 反撥해 蜂起하자, 宗會는
司馬所
를 따라 第褐炭과의 全面戰에 나섰다. 이때
吳나라
에서
第褐炭
을 도우러 온
轉役
(全?)에게 위나라에 降伏했던
轉役
의 조카
前徽
(全輝)와
全義
(全儀)의 이름으로 便紙를 보내 吳나라에서
轉役
을 죽이려 한다고 傳하자
轉役
은 위나라에 降伏했다. 이것은
司馬所
가 宗會의 提案을 實行에 옮긴 것이었다.
第褐炭
의 蜂起가 鎭壓된 後
司馬所
는 더욱 宗會를 아꼈으며 事例敎委(司?校尉)로 승진시켰다. 周圍 사람들은 宗會를
乳房
의 參謀
丈量
에 比喩하였다.
宗會는
竹林七賢
中 하나인
惠岡
을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惠岡
이 宗會를 倨慢한 態度로 對하자 怏心을 품고 돌아갔다가
262年
에
惠岡
이
毌丘儉
을 도우려 했다고 謀陷하여 죽게 만들었다. 그해
司馬所
가 蜀나라를 征伐할 計劃을 세우자 調整 臣下들은 大部分 成功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으나 宗會는
司馬所
의 意見에 贊同했다. 蜀나라 征伐이 確定된 後 眞書將軍(鎭西將軍)李 되었다.
蜀나라 征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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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3年
宗會는 10餘萬 軍士를 거느리고 蜀나라를 攻擊했다. 예전
姜瑜
가 韓中의 防禦體系를 바꿔 漢城(漢城)과 落城(樂城)을 據點으로 삼고 韓中 駐屯軍은 南쪽으로 물린 後 各 關門을 지키게 했다. 이는 韓中으로 들어오는 敵軍을 깊숙이 끌어들인 後 끝내 要塞를 突破하지 못한 敵軍이 退却할 때 攻擊해 전멸시키는 것을 노린 것이었다.
[2]
이에 答中의 剛柔를 妨害하기 위해 情緖將軍
等愛
와 翁主自社
諸葛서
가 各各 3萬餘 軍士를 이끌고 剛柔를 앞뒤에서 攻擊했고, 宗會가 그 틈에 韓中 防禦線을 突破하는 것이었다. 宗會는 軍隊를 나누어 夜曲(斜谷)과 落穀(駱谷)으로 進入했는데, 이 過程에서 아문장 虛儀(許儀)가 먼저 길을 닦았으나 自身이 뒤따르다 다리가 꺼져 말이 빠지자 虛儀를 벴다. 虛儀는
허저
의 爵位를 繼承한 아들이었으나 容恕받지 못했으므로 全君은 모두 두려워했다. 觸軍은 싸움을 避하고 兵力을 漢城과 落成으로 물려들였는데 落成은 減軍 王函(王含)李, 漢城은 護軍
장빈
이 5千 名씩으로 지켰다. 宗會는 落成을 攻擊했으나 陷落시키지 못했다. 그런데 一部 兵力으로 量안관구(陽安關口)를 攻擊하게 하니 羊안관구 長壽 中
藏書
가 不滿을 품다 城을 나와서는 宗會의 先鋒 中 護軍
好熱
에게 投降해, 位軍이
附添
을 죽이고 量案管區를 陷落하는 일이 벌어졌다.
[2]
[3]
宗會는
諸葛亮
의 墓에 祭祀지내고 兩岸管區로 進擊하는 한便 護軍
純個
에게 漢城을, 前將軍 이보(李輔)에게 落成을 1萬 名씩으로 包圍하게 했다.
한便 諸葛書가 剛柔에게 속아, 剛柔는 諸葛書를 따돌리고 音坪에 다다른 後 兩岸管區를 救援하려다가 그곳이 陷落되었음을 알고 장익·妖花와 함께
檢角
(劍閣)으로 옮겨갔다. 等애는 音坪에서 姜瑜(江油)를 攻擊해 面죽·성도를 노리려고 했으나 諸葛서는 剛柔를 攻擊하라는 本來의 命令을 지키려고 宗會에게 合流했다. 宗會는 檢角으로 가던 中 兵士들을 손에 넣을 目的으로
諸葛서
가 敵을 두려워하여 나아가지 않았다고 謀陷하였다. 結局
諸葛서
는 벼슬에서 쫓겨나 罪人이 되었고, 宗會는
諸葛서
가 指揮하던 3萬 軍士까지 거느리게 되었다.
나아가 檢角을 攻擊했으나
姜瑜
가 決死的으로 抵抗했기 때문에 별다른 所得을 거두지 못했다. 더구나 遠征으로 因해 軍糧이 到達하기가 어려워저 退却까지도 議論하고 있었다.
[2]
그러나
等愛
(鄧艾)가 險峻한 곳을 거쳐
聖徒
(成都)로 進軍하여
有線
의 降伏을 받았기 때문에,
姜瑜
는 宗會를 찾아와 降伏했다. 宗會는
姜瑜
를 厚하게 待接했으며,
姜瑜
를 얻은 것을 매우 기뻐하였다. 宗會는 當時 自身의 部下였던
杜預
(杜預)에게
하후현
(夏候玄)과
第褐炭
이
姜瑜
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12月, 朝廷에서는 詔書를 내려 宗會를 師徒에 任命하고, 食邑 1萬 號를 증가시켰으며 두 아들을 정후로 봉하고 各各 1千 號를 주었다.
半 司馬所 蜂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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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宗會는 隱密히
司馬所
에게 對抗할 마음을 품고 있었고,
姜瑜
도 蜀나라를 부흥시키려고 하였기에 宗會를 부추겼다. 이 때문에 宗會와
姜瑜
는 매우 가까워졌다.
이때
等愛
는
익주
를 다스리고 吳나라를 征伐할 方案을 담은 글을
司馬所
에게 올렸으나,
司馬所
는 이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이것을 利用하여 部下
尉官
(衛瓘)과 함께
等愛
가 叛亂을 일으키려 한다고 謀陷했다. 宗會는 다른 사람의 글씨를 模倣하는 것에 뛰어났는데,
等愛
가 調整과
司馬所
에게 보내는 글을 가로채고 自身이
等愛
의 글씨를 模倣하여 傲慢不遜한 內容으로 고쳐 보냈다. 그리고
司馬所
가
等愛
에게 보내는 答狀을 自身이 만들어서 보내자,
司馬所
는
等愛
를 疑心하게 되었다.
마침내
264年
1月에
司馬所
가
等愛
를 잡으라는 命令을 내리자, 宗會는
尉官
을 보내어
等愛
富者를 잡아들였다. 이로써 唯一하게 꺼리던
等愛
가 除去되자 本格的으로 反
司馬所
蜂起를 일으키기로 하고
姜瑜
를 先鋒으로 삼아 夜曲(斜谷)으로 가게 했으며, 衛戍(渭水)와
黃河
를 거쳐 短時日 內에
洛陽
을 占領할 計劃을 세웠다.
그러나
司馬所
는 宗會 亦是 疑心했기에 大軍을 거느리고
弔環
(曹奐)과 함께
長安
(長安)에 駐屯하고 이를 宗會에게 알렸다. 宗會는 自身의 野心이 看破당한 것을 알았으나 最小限 익주에서 獨立할 수 있을 것으로 여기고 部下 官吏들을 招請한 다음,
263年
말에 죽은
곽太後
(郭太后)가 自身에게
司馬所
를 除去하라는 密命을 내렸다고 主張하고 그들을 모두 가두었다.
姜瑜
가 위나라에서 온 장수들을 모두 죽이라고 建議했으나 쉽게 決定을 내리지 못했다.
한便 宗會에 依해 갇혀 있던
好熱
(胡烈)李 아들 호연(胡淵)에게 便紙를 보내 宗會가 自身들을 죽이려 한다고 알리자, 好演은 아버지를 求하기 위해 18日
好熱
의 部下들을 이끌고 宗會가 있는 곳으로 攻擊해 왔다. 結局 宗會는
姜瑜
와 함께 싸우다
好熱
의 軍士들에게 화살에 맞아 죽고 半
司馬所
蜂起는 失敗로 돌아갔다.
以後 宗會의 部下였던 上웅(向雄)李 宗會를 葬事지냈다.
著述
[
編輯
]
어머니 張氏의 前을 지었으며, 배송지가 《三國志》에 註釋을 달면서 宗會展에 引用한 것이 남아 있다.
그의 著述로 《社本論》은 위진時代의 論爭 主題인 재와 性에 對한 네 가지 主張을 記錄한 것으로 재성사本論이라고도 한다. 네 가지 主張은 部下, 異風, 宗會, 왕광의 것으로, 簿하는 재와 性이 같음[재성동]을, 異風은 재와 姓이 다름[재성이]을, 宗會는 재와 性이 合함[재성합]을, 왕광은 재와 性이 有利됨[재성이]을 代表했다. 이들의 主張은 政治的 位置에 充實한 것으로, 阻擋人 異風과 왕광은 曹操의 구현령·유재시거를 繼承해 재와 性의 關係를 否定했고 社마당인 部下와 宗會는 재와 性을 聯關시켰다. 이 冊에 關한 逸話로, 著者 宗會는 이걸
惠岡
에게 보여주려 했으나, 敢히 보여주지 못하고 門 밖 멀리에 던져두고 달아났다는 말이 남아 있다.
[4]
家計
[
編輯
]
關聯 人物
[
編輯
]
鍾繇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 ↑
王冠救濟葛藤終戰(王?丘諸葛鄧鍾傳)
- ↑
가
나
다
진수: 《三國志》 卷44 蜀黍14 中 姜瑜
- ↑
습착치: 《韓進春秋》 (陳壽의 《三國志》 卷44 中 剛柔에서 再引用)
- ↑
유의경, 《世說新語》 〈文學〉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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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括弧는 曺偉 皇祖를 創建하기 前 諸侯國 時節의 임명자, (+)는 代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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