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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는 왜 反省과 轉向 代身 親北 勢力과 妥協했을까[민경우 586칼럼]|新東亞

리영희는 왜 反省과 轉向 代身 親北 勢力과 妥協했을까[민경우 586칼럼]

親北 統一運動의 起源, 리영희 다시 읽기

  • 閔境遇 閔境遇數學敎育硏究所 所長

    mkw1972@hanmail.net

    入力 2021-05-04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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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運動圈 人士들이 ‘思想의 恩師’라고 부르는 사람

    • 堂山 地震과 뉴욕 停電 比較에 드러난 社會主義 偏向性

    • 第3世界 社會主義와 民族主義가 北韓을 만났을 때

    • 北韓은 가난하지만 道德的으로 깨끗하다?

    *586世代 NL(民族解放 系列) 理論家이자 祖國統一汎民族聯合(범민련) 事務處長 出身인 筆者가 文在寅 時代에 表하는 遺憾.

    운동권 인사들은 리영희 선생을
‘사상의 은사’라고 부른다. [동아DB]

    運動圈 人士들은 리영희 先生을 ‘思想의 恩師’라고 부른다. [東亞DB]

    3月 中旬 以後 韓半島와 周邊 情勢가 빠르게 달아오르고 있다. 美·中 高位級 會談이 열리는 狀況에 北韓은 彈道미사일을 發射했다. 美·中 新冷戰, 北·美 對峙 局面이 다시 到來했다고 봐도 無妨하다. 奇異한 것은 韓國 政府의 態度다. 3月 下旬 李仁榮 統一部 長官은 對北 人道的 支援을 擧論하고 大統領은 西海守護의날 行事에서 男·北·美 對話를 들먹였다.

    옭高 그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퍼즐 조각 中 韓國이 맞춰야 할 퍼즐 조각이 全혀 엉뚱한 곳에서 헛돌고 있다. 筆者는 여러 次例 文在寅 政府 統一政策의 起源이 되는 1980~90年代를 追跡해야 한다고 主張했다. 그것이 全部는 아니지만 그것이 文在寅 政府를 理解하는 有效한 經路이기 때문이다.

    이番 時間은 리영희다. 리영희는 運動圈 人士들이 ‘思想의 恩師’라고 부르는 사람이다. 그만큼 强力한 影響을 끼쳤다는 뜻이다. 民主化를 主導한 運動圈의 過去 相當 部分은 隱蔽되거나 美化됐다. 리영희에 對한 評價도 그러하다.

    1世界, 2世界, 그리고 第3世界

    1970年代에 地球村은 美國과 蘇聯 兩大 國家로 兩分돼 있었다. 사람들은 美國을 頂點으로 한 資本主義 陣營을 1世界, 蘇聯을 中心으로 한 社會主義 陣營을 2世界라 불렀다. 1世界와 2世界 사이에 많은 國家가 있었는데 이런 國家들을 3世界 또는 非同盟 陣營으로 불렀다. 2世界와 3世界는 混同하기 쉬웠다. 第3世界 國家 大部分이 社會主義的 性向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假令 中國은 社會主義 陣營이면서 微笑와 同盟을 맺지 않는다는 意味를 가진 3世界의 代表 國家이기도 했다.



    1960~70年代 韓國은 反共國家였다. 韓國은 第3世界 國家들이 獨立的인 自己 領域을 갖지 못한 蘇聯의 꼭두각시라고 여겼다. 우리는 中國 本土에 있는 只今의 共産黨 政府 代身 臺灣에 있는 中國 政府를 自由中國이라 불렀다. 自由中國이 中國人들의 合法 政府이고 中國共産黨은 打倒해야 할 政府라고 생각했다.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의 民族解放戰線을 베트콩이라 한 것도 그런 理由였다.

    1960~70年代 民族解放運動은 不可思議한 힘을 發揮하고 있었다. 中國을 始作으로 알제리·베트남에서 帝國主義를 밀어내고 있었다. 그들은 美國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獨自的인 信念과 歷史를 지닌 勢力임이 明確했다.

    리영희의 作業은 이 近方에서 作動했다. 그는 具體的인 事實과 데이터를 통해 中國과 베트남의 現實을 擧論하며 粗惡한 反共的 視野의 問題點을 指摘했다. 리영희와 비슷한 作業이 西方世界에서도 있었다. 6·8革命의 주된 이슈 中 하나는 베트남戰爭에서 美國의 侵略的 本性에 對한 糾彈이었다. 이 過程에서 ‘地獄의 默示錄’ 같은 베트남戰爭을 主題로 한 많은 映畫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運動圈 出身은 勿論 主流社會 많은 사람이 리영희를 肯定的으로 評價하는 것은 主로 이 脈絡이다. 이것이 우리가 리영희를 評價하는 첫 番째 地點이다.

    리영희의 業績은 世上이 1, 2, 3世界로 나뉘어 있을 때 2, 3世界에 걸쳐 있던 나라, 具體的으로 中國과 베트남에 對한 이야기에서 비롯됐다. 2, 3世界 特히 中國과 베트남에 對한 리영희의 作業은 連鎖的으로 中國·베트남 社會主義에 對한 評價와 中國·베트남과 類似한 北韓에 對한 疑問으로 이어진다.

    第3世界 社會主義에 對한 리영희의 評價를 잘 보여주는 것은 1976年 中國의 당산詩 地震에 對한 評價다. 그는 1988年 한겨레신문에 寄稿한 글에서 1976年 堂山 地震과 1977年 뉴욕市 停電 事態를 比較한다. 社會主義 治下의 堂山 地震에서 市民들이 獻身的인 모습을 보인 反面 資本主義 治下였던 뉴욕 停電 事態에서는 無政府狀態였다는 것이다. 兩者를 比較하며 社會主義에 對한 友好的인 感情을 드러냈다. 이 地點이 리영희를 評價해야 하는 두 番째 地點이다.

    主體思想과 先軍政治

    그는 칼럼에서 이렇게 主張했다.

    “中國은 只今 美國式의 物質的 豐饒를 이루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市民들은 코카콜라에 입맛을 들였고 知識人들은 보다 絶妙한 勞動者 管理를 위해서 MIT 大學 經營學 敎科書를 들고 밤을 새운다. 資本 原理와 物質主義의 神이 道德主義와 平等思想을 追放했다. 只今 中國 社會는 墮落과 腐敗, 詐欺와 橫領, 犯罪와 人間疏外의 깊은 늪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 당산시의 貿易代表團이 韓國資本主義를 배우러 온다는 消息이다. 나는 사랑하는 堂山 市民들을 위해서 哀悼辭를 쓴다.”

    1970~80年代 運動圈 人士들에게 ‘資本主義는 經濟成長에는 優越하지만 本質的으로 腐敗한 體制이고 社會主義는 經濟的으로는 落後하지만 精神的인 側面에서는 資本主義보다 낫다’는 생각이 蔓延해 있었다. 리영희는 그 같은 認識을 가진 代表的인 人物이었다.

    1970年代 後半 第3世界는 나라의 獨立을 넘어 經濟發展을 두고 分化되고 있었다. 알제리와 베트남 等 거의 모든 나라가 獨立을 爭取했다. 以後 第3世界는 여러 갈래로 갈라진다. 리영희가 着目했던 中國과 베트남은 改革開放의 길로 나아가며 變貌하기 始作했다. 그가 隱然中 推仰했던 社會主義的 美德을 지닌 社會가 아예 사라져버린 것이다.

    反面 社會主義的 信念과 價値를 固守하겠다고 主張한 나라와 政治勢力이 있었다. 北韓이 代表的이다. 北韓 以外에는 나라 次元에서 그런 國家를 찾기 어렵다. 굳이 들먹이자면 아프리카의 짐바브웨, 라틴아메리카의 베네수엘라, 니카라과 等을 들 수 있다. 北韓은 蘇聯 社會主義圈이 滅亡했음에도 社會主義的 信念을 지키자며 全 世界의 群小 政治勢力을 모아 1992年 平壤宣言을 發表한다.

    第3世界 國家로서 北韓이 나아간 經路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世界的으로 影響力을 찾기 어려운 群小 政治勢力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脈絡은 記憶해 둘 必要가 있다. 왜냐하면 韓國의 運動圈 中 多數가 이런 性向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中 代表的 人物이 리영희다.

    리영희가 北韓 社會主義에 對해 내린 評價는 흔치 않다. 그는 本質的으로 1970年代 中後半 中國과 베트남을 두고 씨름했던 人物이다. 그는 第3世界 國家들에서 나타났던 社會主義와 民族主義 性向을 民族解放의 觀點을 넘어 社會主義的 觀點에서도 肯定的으로 評價했다. 그리고 이는 3世界 分化 過程에서 北韓이 걸은 ‘精神과 制度’를 重視하는 길과 脈이 닿아 있다. 이 길의 마지막 쯤 있는 것이 主體思想과 先軍政治다.

    1970年代 리영희의 作業은 必然的으로 北韓에 對한 疑問으로 이어진다. 第3世界 社會主義와 民族主義가 北韓을 만났을 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가 그것이다.

    1970年代를 거치며 學生들은 社會主義的 信念을 굳힌 狀態였다. 中國과 베트남이 그러하다면 北韓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答하면서 主思派가 本格 胎動한다. 主思派가 學生運動에 本格 出現하는 過程에서 리영희의 役割은 크지 않았다. 다만 1970年代 中後半에서 1980年代 後半에 이르는 리영희의 精神的 軌跡은 北韓 社會主義의 發展 過程과 櫃를 같이한다.

    1980年代 後半 親北 性向의 祖國統一運動이 發展하는 過程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그는 61歲가 되던 1989年 한겨레신문 創刊記念 北韓 取材 計劃과 關聯해 拘束되기도 했다.

    1988年에서 1990年代 初盤 韓國에서는 祖國統一運動이 本格的으로 進行됐다. 1989年 문익환과 林秀卿, 황석영 等이 北韓을 訪問했다. 1980年代 中後半 社會主義가 살아 있던 時期와 달리 1989年 무렵에는 社會主義 動搖와 瓦解 徵候가 뚜렷했다. 그 같은 局面에서 北韓에 對한 레토릭이 必要했다. 社會主義가 崩壞됐지만 어떻게든 社會主義를 辯護하고 祖國統一運動의 根據를 찾고 싶었을 것이다. 여기서 資本主義와 社會主義에 對한 새로운 構圖가 만들어졌다. 資本主義는 本性的으로 經濟的으로 優越하지만 本質的으로 墮落한 存在이고 社會主義는 經濟的으로 無能하지만 正式的으로 高潔한 存在라는 것이다.

    가난하지만 道德的으로 깨끗하다?

    1989년 7월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전대협 대표로 참가한 한국외대 재학생 임수경. [동아DB]

    1989年 7月 平壤 世界靑年學生祝典에 전대협 代表로 參加한 韓國外大 在學生 林秀卿. [東亞DB]

    카를 마르크스에 따르면 社會主義는 資本主義에 비해 經濟的으로도 優越한 體制다. 그러나 社會主義가 崩壞하는 狀況에서 社會主義의 經濟的 優越性을 主張할 수는 없었기에 精神的 優越性을 앞세워 狀況을 糊塗한 것이다. 1970年代 中後半에서 1990年代 初에 이르기까지 리영희가 했던 作業이 本質的으로 그러했다. 이 레토릭에 가장 잘 맞는 對象이 北韓이었다. 1980年代 中後半을 지나면서 中國과 베트남은 運動圈이 알던 마르크스類의 社會主義가 아님은 明白했다. 따라서 中國과 베트남을 들먹이며 社會主義를 辯護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런 面에서 精神的인 勝利와 社會主義的 信念을 强調하는 北韓이 南韓 運動圈들의 信念 構造와 잘 맞았다.

    實際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連이은 訪北 鬪爭이 벌어졌고 그들은 北韓이 가난하지만 道德的으로 깨끗하다는 印象을 傳했다. 北韓을 訪問한 황석영의 訪北記 題目은 ‘사람이 살고 있었네’였다. 그러나 全部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1991年 密入北한 민혁당 김영환은 北韓의 落後함에 對해 失望했다고 記錄하고 있다.

    김영환의 所感이 事實에 좀 더 符合할 것이다. 反面 祖國統一運動 陣營은 그들이 한때 가졌던 社會主義的 信念을 正直하게 돌아보지 않고 새로운 論理를 앞세워 그것을 合理化하는 길로 접어들었다. 이제 統一運動은 ‘가난하지만 純粹한’ 또는 ‘經濟的으로 어렵지만 民族的 尊嚴을 버리지 않는’ 北韓을 相對로 새로운 脫出口를 찾는다.

    이 무렵 리영희에 對한 評價는 明瞭하지 않다. 여기서부터는 記錄보다는 證言이 有效하다. 筆者가 들은 證言을 要約하면 “그는 社會主義 崩壞 以後 社會主義에 對한 생각을 많이 버렸지만 그것을 사람들과 함께 剛하게 主張하지는 않았다”로 要約된다. 더 劇的인 評價도 있다. 當時 運動圈 主流들은 리영희 先生이 反省과 轉向의 길로 접어드는 것을 막았고, 리영희 先生은 消極的으로 이를 默認했다는 것이다.

    1970年代 리영희는 反共國家 韓國에서 中國과 베트남의 眞實을 알리며 知識人의 面貌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反面, 그가 믿었던 第3世界 社會主義는 蘇聯社會主義圈의 崩壞와 함께 痕跡도 없이 사라졌다. 이 局面에서 그는 그가 한때 믿었던 社會主義에 對한 제대로 된 淸算을 躊躇하고 1990年代 初盤 親北的 統一運動을 圖謀하는 當時 運動圈과 어떤 形態로든 妥協했다.

    리영희와 統一運動의 먼 遺産이 30年을 거슬러 只今에 이른다. 사람들은 如前히 리영희를 思想의 恩師로 追慕한다. 그러나 막상 무엇을 追慕하는지에 이르면 事情이 달라진다. 1970年代에서 1980年代까지의 文筆 活動이 主로 記憶되는 反面 1980年代 後半 그의 생각이 現實的으로 檢證되는 時期에 그가 했던 思想的 遍歷과 知識人으로서의 姿勢는 制限的 또는 選擇的으로 記憶되거나 아예 忘却되고 있다. 그들이 忘却을 强要하는 部分, 中國과 베트남 社會主義에 對한 友好的 態度에서 北韓에 對한 肯定的 評價와 親北的 統一運動으로 繼承되는 部分을 記憶해야 한다.

    #리영희 #祖國統一運動 #新東亞


    閔境遇
    ● 1965年 出生
    ● 서울대 國史學科 卒業
    ● 서울대 人文大 學生會長
    ● 祖國統一汎民族聯合 事務處長·進步連帶 政策委員會 副委員長
    ● 著書 : ‘數學 工夫의 再構成’ ‘새로운 保守의 아이콘’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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