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동아’ 90年 ‘大經綸’의 章程|新東亞

‘신동아’ 90年 ‘大經綸’의 章程

民族의 公器로서 獨裁에 抵抗, 잡지 저널리즘 새 地平을 열다[창간 90周年]

  •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名譽敎授·言論社

    presskr@empal.com

    入力 2021-11-01 10:00:01

  • 글字크기 설정 닫기
    1931년 11월 동아일보 사장이자 신동아 발행인이던 송진우의 신동아 창간사.

    1931年 11月 동아일보 社長이자 新東亞 發行人이던 宋鎭禹의 新東亞 創刊辭.

    ‘신동아’가 創刊 90周年을 맞았다. 지난해 東亞日報 100周年에 이은 잡지 言論 歷史 한 世紀 高地를 눈앞에 바라보는 多難한 壯丁을 걸어온 것이다. 신동아는 植民 治下에서 태어나 1936年 손기정 選手 日章旗 抹消事件으로 목숨이 끊어졌다가 1964年에 復活해 韓國 雜誌 저널리즘의 發展을 先導하면서 指令 746號를 發行하기에 이르렀다.

    雜誌는 社會相을 反映하는 거울이다. 發行 當時의 時代 狀況이 담긴 精神的 産物이면서 讀者를 相對로 販賣하는 商品이다. 思想의 흐름, 政治, 經濟, 文化 等 여러 要件이 結集된 總和가 雜誌라는 形態로 나타난다. 무게 있는 主題를 다루는 定期刊行物은 勿論이고, 趣味 娛樂 爲主의 가벼운 읽을거리 雜誌도 모두 한 時代의 모습을 記錄한 遺物로 남는다.

    民族의 空氣(公器) 標榜 網羅注意 編輯

    신동아는 軍國主義 日本이 侵略戰爭을 擴散하던 植民地 時期에 태어나서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을 標榜하면서 雜誌 저널리즘의 先頭走者로 달려왔다. 日帝는 1931年 9月 18日 만鐵線(滿鐵線) 爆破事件을 造作해 萬株에 奇襲攻擊을 敢行하면서 侵略의 野慾을 드러냈다. 신동아는 滿洲事變 直後인 11月에 創刊됐으나 5年의 길지 않은 壽命으로 1936年 8月에 廢刊됐다. 日帝가 中日戰爭(1937)으로 中國大陸을 侵略하고 太平洋戰爭(1941)이라는 無謀한 擴戰으로 치닫는 狂氣 서린 먹구름이 다가오던 時期였다. 獨逸에서는 히틀러가 獨裁政權을 樹立하면서 世界는 漸次 戰爭의 威脅으로 인한 緊張과 不安이 高調되고 있었다.

    신동아는 創刊의 趣旨를 이렇게 闡明했다.

    “朝鮮民族은 바야흐로 大覺醒, 大團結, 大活動의 曉頭(曉頭·먼동이 트기 前의 이른 새벽)에 섰다”면서 朝鮮民族이 크게 覺醒하고 團結해 活動할 “思想的 臺溫陽(大?釀·마음속에 어떠한 생각을 慇懃히 품고 있음)은 民族이 包含한 特色 있는 모든 思想家, 經綸의 意見을 民族 大衆 앞에 提示하여 活潑하게 批判하고 吸收케 함에 있다”고 抱負를 밝혔다.



    “이러한 속에서 民族 多衆이 公認하는 가장 有力한 民族的 經綸이 發生되는 것이니 月刊 신동아의 使命은 鄭(正)히 이곳에 있는 것이다. 신동아는 朝鮮民族 顚倒(前途)의 大經綸을 提示하는 展覽會요, 討議場이요, 온양소이다. 그러므로 신동아는 어느 一黨 一派의 宣傳機關이 아니다. 하물며 어느 一個人 또는 數個人의 專有(專有) 機關이 아니다. 명실이 다 같은 朝鮮民族의 空氣(公器)다.”

    民族의 空氣로서 新聞과는 다른 次元에서 經綸을 펴는 雜誌를 志向하겠다는 다짐이다. 具體的인 編輯 方針은 ‘網羅注意’였다. 신동아 編輯을 主管했던 동아일보 編輯局長 代理 설의식(筆名 小梧)은 編輯後記에서 政治 經濟 社會 學術 文藝 等 各 方面을 網羅해 “우리의 知識과 聞見을 넓히고 實益과 趣味를 도울 만한 것이면 모두 다 取하기로”하는 것이 網羅主義라고 밝혔다. 新東亞 90年 歷史에서 記錄에 남을 만한 발자취를 分野別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學術的 內容을 大衆과 連繫

    日帝强占期에 新東亞를 編輯한 記者들은 大部分 後에 學者 또는 文人으로 大成했다. 新聞社 所屬 最初의 雜誌部長인 주요섭(朱耀燮·1902~1972)은 中國 상하이 後場大學(?江大學) 卒業 後 美國 스탠퍼드대에서도 工夫한 言論人이면서 文人이자 學者였다. 朱耀燮의 後任 雜誌部長 최승만(崔承萬·1897~1984)은 美國 매사추세츠 스프링필드臺 卒業. 연희대 敎授(1948~1951), 濟州道知事(1951~1953), 제주대학腸(1952~1953), 李花女子臺 副總長(1954~1956), 引下工科大學長(1956~1961)을 歷任한다. 고형곤(高亨坤·1906~2004)은 서울대 文理科大學 哲學科 敎授(1947∼1959), 전북대 總長, 韓國哲學會 會長을 歷任한다. 時調詩人 이은상(李殷相·1903~1982)도 新東亞 記者였다.

    新東亞에는 이처럼 最高 水準의 知識人들이 編輯陣으로 參與했기에 當時의 大衆雜誌와는 달리 學術的인 글이 많았다. 學術誌가 存立하기 어려운 時期에 신동아는 自然히 學術誌의 性格을 지니게 됐다. 創刊 2周年이던 1933年 11月 11日 學術 大講演會를 열기도 했다.


    * 朝鮮쌀은 어디로(盧東奎, 演戱專門 敎授)

    * 朝鮮經濟史의 方法論(白南雲, 演戱專門 敎授)

    * 藝術의 根本問題와 朝鮮文壇(梁柱東, 숭실專門 敎授)


    講演 內容은 12月號에 揭載됐다. 新東亞에는 學術的인 글과 함께 ‘網羅注意’ 編輯 方針에 따라 다양한 읽을거리도 실렸음은 勿論이다. 하지만 1936年 베를린 올림픽에서 優勝한 손기정 選手의 가슴에 그려진 日章旗를 지운 事件으로 廢刊됐다.

    동아일보는 日章旗를 지운 寫眞을 1936年 8月 25日 朝刊에 揭載했는데, 總督府는 이를 理由로 8月 27日 停刊 處分을 내렸다. 같은 때에 發行된 신동아 9月號는 畫報에 손기정의 上半身을 擴大한 寫眞을 실어서 아예 日章旗 削除 與否가 드러나지 않도록 했다. 姊妹誌 ‘新家庭’(現在 ‘여성동아’)도 함께 停刊當했다. 동아일보는 해가 바뀐 1937年 6月 3日子로 279日 만에 續刊했으나 新東亞와 ‘新家庭’은 日帝强占期에는 더는 發行되지 못했다.

    光復 後 19年, 廢刊 뒤 28年의 歲月 동안 죽어 있던 신동아는 1964年 9月에 다시 살아났다. 國際的으로는 11月의 도쿄 올림픽을 앞둔 時點이었고, 國內에서는 言論倫理委員會法 波動(言論波動)이 일어나던 時點이었다. 言論波動은 7月 18日 政府와 共和黨이 言論倫理委員會法 推進에 合意하면서 表面化됐다. 權力의 言論統制法 制定을 反對하며 言論界가 蹶起해 벌인 全面戰 性格의 對立이었고, 言論과 第3共和國의 葛藤이었다. 이 같은 狀況에서 準備를 進行하다가 9月에 첫 號를 내놓은 것이다.

    當時 동아일보 社長은 日帝 末期 朝鮮語學會事件으로 咸興刑務所에서 2年 넘게 獄苦를 치른 國語學者 이희승(李熙昇·1896~1989)이었다. 李熙昇의 新東亞 復刊社는 ‘民主主義의 岐路(岐路)에 서서’였다. “最近에는 新聞 雜誌 放送 等 言論機關이 國民에게 알려서는 안 될 것을 알려서인지, 알려야 할 것을 알리지 않아서인지, 그 입을 트러막기(틀어막기) 위하여 世界 各國에 類例가 없는 ‘言論倫理委員會法案’을 지난 日曜日(8月 2日) 深夜에 通過시켰다”고 말하고 “國民의 多大數의 福利를 圖謀하려는 것이 民主主義 政治라면, 그것은 반드시 王道政治(王道政治)가 되어야 할 것이요, 幸여나 牌도(覇道)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임을 밝혔다. 李熙昇은 1979年 3月號 ‘3·1運動 50周年 記念會 시리즈’에 ‘朝鮮語學會 事件’을 執筆했다.

    民主化의 긴 鬪爭을 거친 後인 오늘날 言論仲裁委員會法 改正이라는 名分으로 言論에 재갈을 물리려는 權力의 橫暴가 展開되는 狀況은 新東亞 復刊 때와 닮았다. 民主主義를 후퇴시키는 오늘날 權力의 橫暴는 더 큰 非難을 받아 마땅하다.

    논픽션으로 現代史 發掘과 大衆化

    신동아의 復刊은 日帝强占期와 6·25戰爭이라는 民族 受難의 歷史를 겪은 後였기에 在野 硏究者와 歷史의 現場을 몸소 經驗한 사람들이 다양한 視角에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쌓아두고 있었다. 신동아는 논픽션을 發表할 紙面을 提供하고 글을 쓸 수 있는 動機를 附與하는 制度를 만들었다. ‘신동아 復刊 記念事業 30萬원 稿料 논픽션 募集’이었다.

    “반드시 ‘센세이쇼날’韓 內容이 아니더라도 새 文化建設에 알뜰한 資料가 될 수 있는 여러분의 力作들을 期待합니다”라고 要領을 說明했다. 電氣, 記錄, 보고, 日記, 隨筆 等으로 일정한 틀에 拘束되지 않고 자유로운 形式을 取하도록 했다. 다만 電氣는 作故한 韓國人으로 高宗 以後에 死亡한 最近 100年 未滿의 人物에 限定했다.

    稿料 30萬 원은 破格的인 額數였다. 傳統的인 現象公募 新春文藝 賞金은 分野에 따라 額數에 差異가 있었지만, 短篇小說의 境遇 200字 原稿紙 70章 內外 分量에 賞金은 1萬 원이었다. 논픽션은 200~500張 分量에 最優秀作 10萬 원, 優殊作은 5萬 원이었다. 같은 時期에 ‘사상계’가 施賞하는 東人文學賞은 旣存 中堅作家에게 授與하는 制度였는데 賞金 3萬 원이던 時節이었다.

    논픽션 懸賞公募 作品이 들어오기 前에 于先 著名 筆陣의 手記를 실었다. 신상초(申相礎·言論人, 政治家)의 ‘自敍傳的 手記’는 ‘日軍(日軍) 脫出記’(1964.9·復刊號), ‘中共 脫出記’(1965.3), ‘北韓 脫出記’(1966.3)로 이어지는 시리즈였다. 筆者는 1944年 日本 도쿄帝國臺 法學科 3學年 在學 때 學徒兵에 徵集돼 中國 戰線에 配置됐다가 옌안(延安)으로 脫出한 뒤, 八路軍에 編入돼 朝鮮義勇軍의 一員으로 抗日運動을 한 特異한 經歷을 지닌 人物이었으니 原稿紙 250枚의 手記를 3便씩이나 發表한 것이다.

    民族 受難期에 知識人들이 겪은 手記는 每號 繼續돼 신동아의 한 特色을 이루었다. 通卷 2號(1964年 10月號)에는 ‘蘇聯 捕虜收容所 生活記’(金鐘斌), 11月號 ‘버마戰線 敗殘機(敗殘記)’(李佳炯), 12月號 ‘無聲映畫時代의 自轉(自傳)’(李慶孫), 同一 筆者의 ‘上海 臨政時代의 自轉’(1965.6) 等이 그런 手記였다. ‘시베리아 유수기(幽囚記)’(韓喬石)(1967.1~3, 3回 連載)는 總 950枚의 回顧錄이었다. 回顧錄은 大槪 原稿紙 200~250枚에 이르는 길이로 以前의 雜誌에는 벅찬 分量이었다. 동아일보 記者들의 深層取材度 150~200枚로 日刊紙 紙面에는 消化하기 어려운 內容을 集中的으로 다룰 수 있었다. 신동아는 긴 글을 處理할 수 있는 充分한 紙面과 긴 글을 지루하지 않게 엮어낼 수 있는 筆者 確保, 거기에 높은 水準의 讀者가 있었다는 與件이 어우러져 다른 雜誌를 壓倒할 수 있는 編輯이 可能했다.

    ‘復刊記念 30萬 원 稿料 논픽션 募集’은 1965年 9月에 第1回 當選作을 發表했는데 ‘侮蔑(侮蔑)의 時代’(朴順東)가 最優秀作으로 選定됐다. 日本 留學 中에 學兵으로 끌려가 버마 戰線에서 日本의 敗亡을 맞아 1946年 1月에 歸國하기까지 波瀾萬丈의 體驗을 記錄한 作品이었다. 當選 作家 박순동은 木浦에서 英語敎師로 在職 中이었는데, ‘전명운展(田明雲傳)’(1968·第4回), ‘巖泰島(岩泰島) 小作爭議’(1969·第5回)로 세 次例 當選 記錄을 세워 논픽션 作家로 登壇했다. 第4回 最優秀作 ‘전명운展’은 1908年 3月 23日 샌프란시스코에서 親日 外交顧問 스티븐스를 狙擊한 田明雲 義士의 一代記를 追跡한 作品으로 歷史的 人物의 숨은 一生을 復元했다는 評價를 받았다. 하지만 첫 當選作家 박순동은 1969年 10月 49歲 壯年의 나이로 死亡했다.

    신동아의 논픽션 作品 發掘은 成功을 거둔 새로운 試圖였다. 1967年에는 논픽션 當選과 入選한 作品 6篇을 모아 ‘侮蔑의 時代’라는 單行本을 出刊했을 程度로 人氣가 있었다. 復刊 記念事業으로 始作한 논픽션 募集은 半世紀 동안 이어져서 2013年 第49回까지 繼續됐고, 賞金도 제1회 30萬 원으로 始作했는데 제5회이던 1969年에는 賞金을 60萬 원으로 올렸고, 2000年代에는 1000萬 원까지 늘어났다.

    文學의 논픽션 장르 開拓

    柳周鉉의 ‘小說 朝鮮總督府’는 復刊號부터 人氣 連載物이었다. ‘小說’이라는 題目을 달았지만 登場人物, 事件, 時間, 場所가 歷史的으로 一致해 實在 人物과 事件을 새로운 方法으로 敍述하는 논픽션과 創作小說의 形式을 함께 갖춘 特異한 連載物이었다. 總督 데라우치(寺內), 警務總長 아카시(明石元二?), 警務課長 拘泥土毛(國友尙謙), 안명근(安明根) 等 實在 人物에 時間과 場所 亦是 事實(史實) 그대로였다. 歷史小說의 새 分野를 開拓했다는 評價도 있었다. 復刊 첫 號부터 始作된 連載는 大韓帝國 말에서 光復까지의 期間을 貫通하면서 抗日과 親日 人物을 통틀어 700餘 名이 登場하는 大河드라마였다. 連載가 끝난 後 1967年 신태양사에서 5卷으로 出刊돼 5萬 質이 팔리는 베스트셀러였고 라디오 朗讀, TV드라마, 映畫 等으로도 再加工됐다. 後에 서문당(1981)과 배영사(1993)에서도 出版됐고, 21年이 흐른 뒤 2014年에 나남출판이 다시 出版했을 程度로 商業性도 있었다. 日本語 飜譯版은 삼성출판사와 日本 고단샤(講談社)의 契約으로 3卷을 出版해 日本에서 販賣됐다.

    小說 執筆의 後日談도 있었다. 作家는 유주현이었지만 厖大한 資料를 蒐集하고 關聯 人士를 인터뷰해 草稿를 執筆한 사람은 이경남(李敬南)이었다. 그는 後에 ‘小說 朝鮮總督府’의 草稿 숨은 筆者가 自身이었던 事實과 新東亞 復刊 무렵의 狀況을 昭詳하게 밝혔다.(‘자유를 위한 回顧錄 2’, 圖書出版 알파, 2006) 言論人이자 文人이었던 이경남은 ‘小說 朝鮮總督府’의 고스트 라이터 役割을 맡으면서 많은 資料를 調査하고 涉獵하다가 다큐멘터리 作家로 立地를 굳히게 돼 신동아에 많은 作品을 發表했다. 이경남의 논픽션은 大槪 1回로 끝나는 것이었지만 2回 以上 連載된 作品도 여러 件이 있었다. 2回 以上 發表한 作品은 다음과 같다.


    * 運命의 4日(1972.2~1972.5, 4回)
    1回 8·15 正午의 歡聲, 2回 6·25 美名의 砲聲, 3回 4·19 학해의 怒濤, 4回 5·16 韓江의 횃불. 各 300枚.


    * 自由北韓 60日의 山川과 人物(1977.9~10, 2回)


    * 九月山 遊擊隊의 이태준 歸順工作(1993.8~9, 2回)


    * 韓國 企業의 라이벌(1969.9~1970.8, 12回)



    ‘小說 朝鮮總督府’는 歷史的인 素材를 小說化하는 새로운 장르를 形成해 다음 作品이 신동아에 連載되었다.


    * 유주현, 小說 大韓帝國(1968.4~1970.5, 26回)


    * 송병수, 小說 大韓獨立軍(1970.6~1972.2, 21回)



    電氣 作品도 신동아가 先導했다. 신동아 編輯長 손세일의 ‘李承晩 博士와 金九 先生’은 1969年 9月부터 連載(1969.10, 1970.3, 1970.9)하다가 增補를 거듭해 ‘李承晩과 金九’라는 題目으로 일조각(1970), 나남출판(2008), ‘월간조선’(월간조선 連載, 單行本 7卷)으로 이어지는 厖大한 作業으로 마무리되는데, 始作은 新東亞였다. 詩人 고은이 執筆한 ‘李仲燮 評傳’(1973.6~9, 300張 分量 4回 連載)도 淸夏(1992)와 饗宴(2004)에서 出刊됐다.

    學術誌 役割과 歷史의 討論場

    歷史를 探究하는 廣場의 役割도 신동아가 맡았다. 1969年 3月號부터 連載한 3·1運動 50周年 記念 시리즈는 年末까지 10回를 이어갔다. ①3·1獨立運動(3月號), ②大韓民國 臨時政府 樹立과 그 活動(4月號), ③總督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狙擊한 3代 依據(5月號), ④滿洲 獨立軍의 活動(6月號), ⑤義烈團의 3代 依據(7月號), ⑥新幹會 運動(8月號). ⑦6·10萬歲 事件과 光州學生運動(9月號), ⑧民族實力 向上運動(10月號), ⑨애국단의 活動(11月號), ⑩朝鮮語學會 事件(12月號)

    主筆이자 歷史學者였던 千寬宇의 社會로 1971年 1月부터 進行된 ‘討論, 韓國史의 爭點’은 該當 分野 最高 歷史學者들이 벌이는 水準 높은 學術 討論이었다. ①韓國史의 主人公과 舞臺(1月), ②韓國史의 創世記(2月), ③韓國文化의 起源(3月), ④韓國人의 原住地(原住地)와 移動(4月), ⑤三國의 形成과 都市國家(5月)가 집담회의 主題였다.

    硏究를 위한 稀貴 飼料도 轉載해 學術誌의 役割을 擔當했다. 1967年 1月부터 ‘日帝 高等警察이 內査한 韓國 獨立運動에 關한 祕密情報’(160~220枚 分量)를 卷末附錄으로 7月號까지 5回에 걸쳐 連載해 獨立運動에 關한 資料를 提供했다.


    *1968年 7月號 歷史學會의 ‘韓國史의 時代區分論의 諸問題’(討論)

    *1969年 4月號 ‘大韓民國 臨時의정원 記事錄’

    *1969年 5·7·8月號, ‘石窟庵 前室(前室)이냐, 광창(光窓)이냐’ 論爭.

    *1970年 8月號 문정창, ‘任那(任那)는 對馬島였다’에 對해 千寬宇가 동아일보 ‘敍事餘錄, 日本府(日本府)’(1970.8.26.)라는 칼럼으로 論議가 이어진 境遇도 있다.


    1986年 10月 1日 동아일보 紙齡 2萬 號 記念事業으로 始作한 現代史 對討論(1986年 10月號) ‘現代史를 어떻게 볼 것인가’ 심포지엄은 첫 番째부터 네 番째까지 ‘解放空間 3年, 葛藤’ ‘大韓民國 政府樹立 前後’ ‘5·10 選擧와 南北의 이데올로기’ ‘6·25의 國際的 性格과 國內的 影響’ 等을 다뤄 해를 거듭할수록 그 무게를 더하고 있었는데, 主題 論文과 討論 內容이 동아일보와 신동아에 揭載되고 單行本 ‘現代史를 어떻게 볼 것인가’로 出刊됐다. 신동아가 다룬 學術 論文은 여기서 모두 整理할 수 없을 程度이므로 特히 歷史 分野 論文과 企劃 시리즈를 大綱 살펴본 것이다.

    ‘次官’ 記事 필화

    1968年 신동아 필화는 影響力이 큰 新聞이 發行하는 代表的 雜誌에 對한 權力의 彈壓이라는 象徵性 때문에 關心이 集中됐다. 東亞日報 發行人이 바뀌고 重鎭 言論人들이 新聞社를 떠나야 했던 後遺症으로 인해 言論界에 衝擊이 컸다. 問題 된 ‘次官(借款)’ 記事는 동아일보 政治部 김진배(金珍培)와 經濟部 박창래(朴昌來) 두 記者가 共同 執筆해 신동아 12月號에 揭載한 原稿紙 250枚 分量의 深層報道였다. 本文 리드 部分은 이렇다.


    “特惠와 暴利가 말썽 되어 國民의 指彈으로 特別 國政監査까지 받게 된 借款業體들의 實態와 政府의 外資導入政策의 功過를 分析하고 앞으로의 償還 能力 等을 診斷한 銃 報告書. 政府가 一部 業者에게만 置簿할 수 있도록 特惠를 베풀고 있다는 非難을, 그리고 또 이들 惠澤을 받은 業者로부터는 그 施惠의 反對給付로 政權을 維持하기 위한 資金 供給을 받고 있다는, 權力과 企業과의 函數關係는 非但 어제오늘에 비롯된 것이 아니다.”


    記事와 함께 ‘次官, 나는 이렇게 본다’라는 題目으로 經濟政策 專門家들의 意見을 모았다. 金映宣(金永善), 백두진(白斗鎭), 부완혁(夫琓爀), 송인상(宋仁相), 조동필(趙東弼), 주요한(朱耀翰), 최호진(崔虎鎭)李 外資導入 政策을 批判하는 글을 실었다.

    ‘次官’의 筆者 박창래 記者는 11月 23日 午前 11時 30分 出入處인 水産廳 記者室에서 連行돼 세 次例 調査를 받았고, 또 다른 筆者 김진배는 韓國祈子床 受賞에 對한 負傷으로 記者協會가 마련한 東南亞 巡訪旅行을 마치고 歸國하던 中 金浦空港 到着 卽時 連行돼 亦是 네 次例에 걸쳐 連行되거나 出頭해 記事의 取材 執筆 經緯를 調査받았다. 關聯者 5名 外에도 中央情報部는 동아일보 論說委員 兼 신동아 週間인 홍승면과 政治部 次長 유혁인度 出頭를 要求하거나 連行해 調査했다.

    동아일보는 1968年 11月 29日子 1面에 5段 題目으로 記者가 連行된 事件을 報道했다. ‘本社 記者 5名 審問’이라는 컷과 함께 “情報部 新東亞地 ‘次官’ 記事 關聯/ 保管 原稿도 提出케”라는 記事는 신동아 12月號 ‘次官’ 記事와 關聯해 筆者 김진배(政治部), 박창래(經濟部) 두 記者를 비롯해 신동아 部長 손세일(孫世一), 記者 심재호(沈在昊), 이정윤(李正允) 等이 23日부터 次例로 中央情報部에 連行 또는 自進出頭 形式으로 불려가 審問받았는데, 그中 몇 사람은 反共法 違反嫌疑로 調査하고 있다는 內容이었다. 동아일보는 中央情報部를 正面으로 攻擊하는 社說도 실었다. ‘신동아 筆禍’라는 題目으로 事件의 經緯와 함께 問題 된 記事 內容을 要約 紹介했다.

    社說欄은 平時에 두 件을 다루었는데 이날은 신동아 事件 한 件만으로 儀禮的으로 긴 分量이었다. 中央情報部가 事件을 다루는 것은 不當하며, 適用 法規도 反共法 違反 嫌疑가 될 수 없다는 等으로 中央情報部를 批判했다. 民衆은 알 權利가 있고 매스컴은 알릴 義務가 있다. 次官으로 自立經濟를 내다보게 됐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알려야 한다면, 次官이 腐敗나 國民 間의 지나친 不均衡에 어떤 作用을 하고 있는지도 알아야 하고 알려야 한다는 論旨였다. 中央情報部와 正面 對決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姿勢였다. 論理的이면서도 强勁한 論說이었다.

    中央情報部는 오히려 搜査를 擴大했다. 12月 2日 신동아 10月號에 실린 ‘北傀와 中小 紛爭’ 英文 原稿(筆者 趙淳昇) 飜譯文 等을 비롯해 新東亞 月曜회의 會議錄, 송故障(送稿帳), 書信, 領收證 等 12點을 押收했다. ‘次官’ 記事로 始作된 필화가 10月號 論文으로 方向이 바뀌면서 擴大되는 樣相이었다. 押收搜索 令狀은 이규명 서울地檢 檢事가 請求하여 유태흥 서울地法 部長判事가 發付했다.

    12月 3日 午後에는 東亞日報 發行人 金相万과 主筆 천관우를 連行 심문해 동아일보에 對한 壓迫의 强度를 높였다.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이겠다는 態度였다. 동아일보는 이 같은 搜査 經過를 報道하면서 國會에서 정일권 總理를 向해서 質問 攻勢를 펴는 政治權의 움직임도 크게 다루었다. 中央情報部는 12月 3日에 이어 5日과 6日에도 主筆 천관우를 召喚 審問했다.

    12月 6日에는 서울地檢 公安部가 신동아 10月號에 揭載된 ‘北傀와 中蘇紛爭’에 關聯해 신동아 週間 홍승면과 部長 손세일을 反共法 違反 嫌疑로 拘束했다. 事態가 擴大되자 동아일보는 처음과는 달리 顯著히 萎縮된 姿勢를 보였다. 簡略한 事實 報道만 하고 더는 批判的인 態度로 나오지 않았다.

    마침내 12月 11日 동아일보는 關聯 幹部의 全面的인 人事 改編을 斷行했다. 理事 主筆이던 천관우와 홍승면(신동아 週間 兼 論說委員), 손세일(신동아 部長) 3名을 解任하고 1面에 ‘本社司令’으로 告知했다. 拘束된 홍승면과 손세일은 人事가 있기 前, 拘束 3日 만인 12月 9日 釋放됐다. 동아일보가 權力의 壓力에 屈服한 背景에는 東亞日報 系列社인 三養社와 경방(株)에 對한 稅務調査 壓力을 憂慮하는 同時에 동아일보 全 職員에 對한 兵役 調査 實施 等 前 防衛的 壓迫이 있었다고 손세일은 證言했다.(국가정보원, ‘過去와 對話 未來의 省察’, 2007, 70쪽)

    中央情報部가 名稱을 바꾼 國家情報院은 2007年에 ‘國精院 過去事件 眞實糾明을 통한 發展委員會’를 構成해 이 筆禍를 調査한 結果를 包含해 ‘過去와 對話 未來의 省察’이라는 報告書를 作成했다. 報告書 ‘言論·勞動便’(Ⅴ)에 新東亞 ‘次官’ 記事는 朴正熙 政權의 道德性을 攻擊했다고 記述했다.(국가정보원, ‘過去와 對話 未來의 省察’, 2007, 71쪽)

    東亞日報를 떠났던 歲 言論人은 오래지 않아 모두 復職했다. 홍승면은 編輯局長(1969.2~1971.4), 首席論說委員(1972.4), 出版局長 兼 理事(1973.8), 理事 兼 論說主幹, 主筆(1974.9)을 歷任하다가 1975年 2月에 退社했다. 손세일은 企劃部長(1969.4~1970.9), 論說委員(1970.9~1980.4)을 지냈다. 千寬宇는 가장 늦게, 3選 改憲이 끝난 後인 1970年 2月에 復歸해 常勤理事로 동아일보 四史 編纂을 擔當했다.

    이후락 證言 事態

    신동아 記事가 言論自由 伸張의 起爆劑 役割을 한 事件은 6·29宣言 直後의 ‘이후락 證言’ 記事였다. 1987年 10月號 ‘이후락 證言-最初로 밝힌 김대중 拉致 內幕’에 對해 製作 마감을 며칠 앞둔 9月 12日부터 國家安全企劃部(現 國家情報院)가 削除를 要請했다. 新東亞 이종각 記者가 김대중 拉致事件 때의 中央情報部長 이후락을 만나 取材한 內容이었다. ① 朴正熙 大統領은 이 事件을 事前에 全혀 몰랐으며 모두 自身이 했다. ② 김대중을 拉致한 배가 日本 出發 後 大統領에게 알리니까 대단히 怒했다. ③ 처음부터 金氏를 韓國에 連行할 作定이었지 죽일 생각은 全혀 없었다는 要旨의 記事를 100枚 分量으로 執筆했다. ‘월간조선’ 오효진(吳?鎭) 記者도 같은 글을 썼다.

    新東亞 製作팀은 國家安全企劃部와 팽팽한 對立을 벌이면서 記事削除를 拒否하고 製作을 强行하자 9月 20日 午後 9時 30分頃 搜査要員 7名이 동아印刷工業의 尹前室을 占據해 印刷를 物理的인 힘으로 中斷시켰다. 記事가 韓日 間 外交 問題를 일으킬 憂慮가 있다는 理由였다. 東亞日報 出版局 記者 一同은 ‘신동아 製作彈壓을 卽刻 中止하라’는 題目의 決議文을 採擇하고 徹夜籠城에 들어갔다. 記者들은 籠城 過程에서 1984年 以來 當局에 依해 製作이 彈壓받은 事例도 밝혔다. 때로는 記事를 싣지 못한 境遇도 있고, 어떤 때는 彈壓에 맞서 言論自由를 爭取한 事例도 있다고 밝혔는데 다음과 같다(이하는 2010.10.11 동아일보 創刊 90年 特別企劃 ‘安企部, “이후락 인터뷰 빼라” 新東亞 印刷 막아’ 認容).


    * 1984年부터 1987年까지 신동아는 當局으로부터 20次例에 걸쳐 制裁를 받았다. 連行調査 4次例, 記事 全面 削除 7次例, 部分 削除를 包含한 修正이 9次例였다.

    * 1984年 10月號 發刊을 앞두고 신동아 編輯陣은 ‘對討論 1988年’을 마련했다. 未來 志向的인 姿勢로 韓國의 現實을 分析하고 앞으로 나아갈 바를 摸索하려던 이 公開討論의 內容 揭載는 當局의 制裁로 霧散됐다.

    * 1986年 5月 安企部는 6月號 ‘改憲 對討論’ 特輯記事 가운데 ‘김대중 氏가 말하는 改憲 方向’의 削除를 要求했다. 신동아가 拒否하자 安企部 搜査要員 4名을 印刷處인 동아印刷工業에 派遣해 印刷 工程을 中斷시키고 記事를 削除하도록 했다. 그해 9月號 ‘富川署 性拷問 事件’ 記事는 安企部의 制裁로 折半 以上 削除됐으며, 12月號는 民主化 鬪爭에 나섰던 박형규 牧師의 인터뷰와 ‘維新 體制下의 拷問’ 記事가 실리지 못했다.

    * 1987年 1月號에서는 ‘코리아게이트’에 對한 김한조의 證言 ‘나는 朴 大統領의 對美 密使였다’를 削除하라는 安企部의 壓力에 따라 記事를 빼고 表紙와 目次를 지운 뒤 다시 作業해 發行해야 했다.

    1987년 9월25일 통일민주당 총재이던 김영삼 전 대통령(맨 왼쪽)이 전두환 정권의 신동아 탄압 사태에 맞서 농성 중이던 동아일보 출판국 기자들을 찾아 격려하고 있다.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출판국 기자들을 격려했다(오른쪽 사진에서 맨 왼쪽).

    1987年 9月25日 統一民主黨 總裁이던 김영삼 前 大統領(맨 왼쪽)李 全斗煥 政權의 新東亞 彈壓 事態에 맞서 籠城 中이던 東亞日報 出版局 記者들을 찾아 激勵하고 있다. 統一民主黨 常任顧問이던 金大中 前 大統領도 出版局 記者들을 激勵했다(오른쪽 寫眞에서 맨 왼쪽).

    이후락 證言 記事에 對한 當局의 强壓的인 制裁 措置에 東亞日報 出版局 記者들도 힘을 합쳤다. 21日 記者總會를 열어 “신동아 製作 彈壓을 卽刻 中止하라”는 聲明을 發表하고, 事態가 完全히 解決될 때까지 無期限 徹夜籠城에 突入했다. 出版局 記者들은 “이후락 氏 證言 收錄은 그동안 가려져 온 眞實을 밝혀 歷史의 敎訓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라며 “이番 關係 當局의 新東亞 製作 沮止 行爲는 또다시 言論自由를 蹂躪하려는 重大한 挑戰”이라고 밝혔다. 政府 側은 記事를 削除하면 要員들을 撤收하겠다고 提議했지만 記者들은 斷乎했다. 22日부터는 編輯局 記者들과 出版營業局 職員들도 徹夜籠城에 同調했다.

    ‘신동아 事態’는 동아일보가 9月 23日子 社會面에 이 事實을 報道하면서 새 局面을 맞았다. ‘신동아 記者 等 80名 3日째 籠城’과 ‘이후락 氏 證言記事 關聯 當局 印刷沮止 抗議’라는 副題를 단 記事는 5共和國 들어 言論彈壓에 對한 言論人들의 組織的인 抵抗을 報道한 첫 事例로 큰 反響을 불러일으켰다. 여러 階層에서 激勵 電話가 殺到했으며 在野團體와 다른 言論社들도 支持 聲明을 發表했다. AP, 로이터, AFP通信 等 外國 言論도 事態를 集中 報道했다. AFP通信은 “韓國 記者들이 政府 當局의 記事 報道禁止 措置에 抗議함으로써 言論自由를 위한 鬪爭에 拍車를 加하고 있다”고 말했다. 民主化推進協議會의 眞相調査, 민주당의 調査委員會 構成, 韓國出版文化運動協議會의 彈壓中止 促求 聲明, 國會 文公委 開會, 黨政 協議 等을 거쳐 28日 安企部 側이 印刷 中止 措置를 撤回하면서 一段落됐다.

    事態는 結局 신동아의 勝利로 끝이 났다. 이후락 證言이 실린 신동아 10月號는 40萬 部가 販賣됐다. 이는 當時 웬만한 日刊新聞 有料 購讀 部數를 뛰어넘는 數字였다. 신동아는 이때의 勇氣 있는 鬪爭으로 관훈클럽이 授與하는 관훈言論賞을 受賞했다.

    1987년 신동아 탄압 사태의 종결을 알리는 동아일보 9월 28일자 기사.

    1987年 新東亞 彈壓 事態의 終結을 알리는 東亞日報 9月 28日子 記事.

    무게 있는 特輯과 別冊附錄

    復刊 이듬해 1965年 1月號는 ‘戰後 20年의 學問과 藝術’이라는 主題의 各 分野 專門家들의 評價를 特輯으로 다루었다. 別冊附錄으로는 ‘光復 20年 記念/ 年表·主要 文獻集’을 發行했다. 憲法, 얄타協定, 포츠담 宣言, 카이로 宣言을 始作으로 大韓民國과 美合衆國 間의 援助協定, 農地改革法 같은 文獻을 集大成해 歷史的인 史料로 學術的 價値도 큰 單行本 附錄이었다. 3月號 ‘1919年 3月’은 地域別로 3·1運動의 全貌를 살펴본 特輯이었다.

    신동아는 時事 이슈를 學術的인 方式으로 接近하면서도 大衆性을 잃지 않는 編輯 趣旨를 살리도록 努力했다. 1996年 10月號 ‘96 韓國 4代 파워 集團 住居 出身 集中分析’, 15代 國會議員 全員(299名), 檢事長 및 地法院長 以上 法曹界 幹部(74名), 政府 部處 1級 以上(255名), 50代 그룹 會長과 賣出額 順位 30大 企業 社長級 以上(128名) 等 756名 分析 等이 그런 例였다.

    別冊附錄 ‘近代韓國 名論說 33篇’(1966.1)과 이듬해 같은 題目으로 ‘속 近代 韓國 名論說 33篇’(1967.1) ‘世界를 움직인 100卷의 冊’(1968.1)은 신동아가 每年 新年號 別冊附錄으로 發行한 資料集으로 重要한 文獻的 價値를 지니는 企劃이었다. 別冊附錄에서 신동아는 近世史와 關聯되는 資料를 비롯해서 哲學, 思想, 藝術 分野까지 讀者들이 손쉽게 理解할 수 있도록 努力을 기울였다. 附錄 가운데 여러 種은 東亞日報 出版部가 單行本으로 出版 販賣했다. 每年 1月號와 함께 發行한 附錄은 〈表〉와 같다.

    2000年代에 들어서는 新年號에 附錄을 싣는 傳統을 바꾸어 創刊 記念號, 또는 12月號에 附錄을 發行하는 境遇도 있었다. 歷史的인 文獻 中心에서 實用的인 것으로 變化하는 傾向이 나타났다. 創刊 75周年 記念號(2007年 11月號) 附錄 ‘내 손 안의 英語를 위한 名文章 名表現’(238쪽), 같은 해 12月號 特別附錄 ‘韓國의 核 主權’(240쪽), 2008年 12月號 附錄 ‘CEO 꿈꾸는 當身이 읽어야 할 經營서 49’(305쪽)가 그런 例였다.

    發行部數 增加에 따른 逆機能

    1980年代는 月刊誌의 讀者가 多數 大衆으로 擴散한 時期였다. 以前까지는 少數의 知識層이 主要 獨子였다. 高度成長의 물결을 타고 雜誌購讀이 부담스럽지 않을 程度로 經濟가 成長했으며, 敎育의 擴散으로 高學歷者가 늘어났다는 社會的인 變化에 따라 大衆社會가 到來하면서 讀者의 底邊이 넓어졌다.

    政治的 變化도 크게 作用했다. 第5共和國의 登場으로 以前까지 帳幕 속에 감춰져 있던 政治的 大事件에 國民의 關心이 높았다. 숨겨진 政治 裏面을 알고자 하는 國民의 欲求를 雜誌 媒體가 充足해 주었다. 讀者의 好奇心을 끌 수 있는 글을 쓸 能力을 지닌 새로운 筆者들의 登場도 잡지 저널리즘의 底邊 擴散을 이끈 要因이었다. 이리하여 月刊誌는 5共和國 時節 한때 暴發的인 部數 增加를 記錄했고, 新聞과는 다른 獨特한 잡지 저널리즘의 威力을 誇示했다.

    1984年 7月號부터 신동아의 部數가 急激히 불어나서 10萬 部를 突破했다. 우리나라 雜誌思想 月刊誌의 10萬部 突破는 드물었다. 1985年 3月에 20萬 部, 7月에 30萬 部를 넘어서는 急激한 伸張勢였다. 雜誌의 30萬 部 販賣 記錄은 이때가 最初였다. 特히 이후락 證言이 실린 1987年 10月號는 40萬 部를 突破했다.

    第3共和國 政治 祕話는 販賣部數를 大幅 늘리는 役割도 했지만, 한便으로 雜誌가 ‘暴露 저널리즘’의 舞臺로 變質됐다는 批判도 받았다. 表皮的인 事實의 羅列과 誇張, 正確性 없는 推測의 組合, 知的인 苦惱 없는 感情的인 글로 讀者의 好奇心만을 刺戟한다는 것이다. 暴露 저널리즘에 對한 批判과 ‘祕話’ 爲主의 編輯에 讀者들이 厭症을 느끼면서 政治 祕話 技士가 退潮를 보인다.

    暴露 저널리즘의 副作用으로 일어난 事件이 2008年 12月號와 2009年 2月號에 실린 이른바 ‘미네르바 誤報’였다. ‘미네르바는 金融界 7人 그룹, 박대성은 우리와 無關’이라는 題目으로 提報者의 거짓말에 속아 大型 誤報를 내고 말았다. 하지만 동아일보는 誤報의 警衛를 糾明하기 위해 社內에 眞相調査委員會(委員長 최맹호 常務理事)를 構成해 調査에 着手했다. 이 같은 事實은 東亞日報 1面(2009.2.17)에 “신동아 ‘미네르바’ 誤報 謝過드립니다, 社內 眞相調査위 構成, 眞實糾明 公開”라는 事故로 알린 다음에 한 달 동안 關聯者 深層 面談 等을 통해 眞相을 把握한 뒤 謝過文을 다시 한番 1面에 揭載(2009.3.18)하고 眞相調査報告書 要約文은 같은 날 동아일보에 한 페이지 分量으로 싣고, 報告書 全文은 신동아 4月號에 揭載했다. 出版編輯人, 出版局長이 責任을 지고 물러났고, 신동아 編輯長을 解任하는 等 問責性 人事 措置가 斷行되면서 “저널리즘의 基本原則을 지키는 努力을 强化할 것을 다짐”했다. 新東亞로서는 뼈아픈 事件이었다. 誤報는 자랑할 일이 아니지만 東亞日報-신동아가 信賴 回復을 위해 最善의 努力을 다하는 姿勢를 보였다는 事實은 높이 評價할 수 있을 것이다.

    1980年代 後半부터 신동아의 外形的인 體制와 編輯 內容에도 變化가 나타나기 始作했다. 可視的 變化는 1988年 1月부터 斷行한 가로쓰기 編輯이었다. 創刊 以來 固守해 오던 세로쓰기 體制를 全面 가로쓰기로 바꾼 것이다. 동아일보는 10年 뒤인 1998年 1月 1日부터 가로쓰기를 實行했다. 出版界가 한글 專用과 가로쓰기 編輯으로 轉換한 時期는 大槪 1970年代 中盤 무렵이었다. 日刊紙는 아직 가로쓰기와 한글 專用을 果敢하게 導入할 수 없었으나 雜誌와 一般 出版物을 비롯한 廣告 分野는 民衆의 要求를 積極的으로 受容해 한글 使用이 늘어나고 있었다.

    2000年代의 特種

    1996年 1月부터는 版權에 編輯陣의 이름을 記載한 것도 새로운 變化였다. 以前까지는 發行人, 編輯人, 印刷人의 이름만 밝혀왔는데 이때부터는 發行, 編輯, 印刷人 外에 編輯의 最高 責任者 出版局長을 筆頭로 신동아部 部長에서 記者, 出版寫眞部, 出版美術部, 出版營業國을 包含한 모든 製作 參與者의 이름을 記載하고 있다. 業務에 따르는 責任과 自負心을 지닐 수 있도록 配慮하는 措置였는데 다른 雜誌와 單行本 出版社도 같은 方式으로 바뀌는 趨勢를 反映한 制度이기도 했다. 創刊 65周年에 實施된 變化였다.

    記事 한 件當 原稿 分量은 줄어드는 趨勢로 바뀌었다. 앞서 살펴본 대로 1980年代에는 200枚 300枚 또는 그 以上의 긴 글을 果敢하게 실으면서 이처럼 무게 있는 글이 실려 있다고 자랑스럽게 宣傳하기도 했다. 그러나 긴 글을 부담스럽게 여기는 風潮에 따라 記事의 件當 買收가 줄어드는 쪽으로 徐徐히 바뀌었다. 긴 記事를 읽지 않는 讀者가 많아졌고, 資料 性格을 지닌 무거운 글은 專門誌나 學術誌가 싣고, 데이터베이스나 인터넷으로 檢索할 수 있는 時代로 變化하기 때문이다. 正確한 時期를 規定하기는 어렵지만, 2000年代 以後에는 100枚 넘는 記事도 잘 싣지 않는다. 1980年代까지 500枚가 넘는 긴 글도 果敢하게 실었지만 近來에는 길어야 70枚 程度에 그치고 있다.

    그런 가운데도 신동아는 新聞과 放送이 다루지 못하는 特種을 記錄하고 있다. 記憶에 남는 例로는 다음 記事가 있었다.


    * ‘수지킴 事件 追跡機’ (2001年 12月號) : ‘女間諜의 拉北 未遂’로 發表됐던 1987年 ‘수지킴 事件’의 實體를 파헤친 記事. 韓國祈子床, 三星言論賞 受賞.

    * 辛基南 議長 父親은 日本軍 憲兵 五臟(2004年 9月號) : 열린우리당 辛基南 議長 父親의 親日 行跡을 追跡 報道. 이 記事로 神 議長이 辭任하는 等 큰 波長.

    * 김우룡과 MBC, 8個月 戰爭 “金在哲 社長, ‘큰집’에 불려가 조인트 맞고 깨진 뒤 左派 整理했다”(2010년 4月號) : 政府의 放送 掌握 試圖를 告發한 記事로 韓國祈子床 受賞.

    * 全斗煥·이순자, 30年 沈默을 깨다(2016년 6月號) : 전두환 前 大統領 退任 뒤 첫 單獨 인터뷰. 알츠하이머 鬪病 中이라는 理由로 死者 名譽毁損 裁判 出席을 拒否하던 全氏에게서 光州民主化運動 關聯 發言 等을 이끌어냄.

    * 尹錫悅 地檢長 丈母의 異常한 法廷 證言(2018年 9月號) : 尹錫悅 서울中央地檢長의 丈母 崔某 氏 數百億臺 銀行 殘高 書類 僞造를 自白한 法廷 證言 入手 單獨報道. 이 報道 內容은 國政監査 이슈가 돼 뉴시스, 뉴스1, TV造船 等 55個 媒體가 後續 報道.

    * 太永浩 인터뷰 ‘潛跡 北韓 大使代理 조성길 10代 딸 北送 波紋’(2019年 3月號) : 조성길 前 이탈리아 駐在 北韓 大使代理가 潛跡한 뒤 태영호 前 英國 駐在 北韓 公使 等 取材源과 國家情報院의 證言을 土臺로 “조성길 夫婦가 로마 所在 北韓大使館을 脫出할 때 高校生 딸과 갈라졌고 이 딸이 北韓으로 보내졌다”는 事實 最初 報道. CNN, 워싱턴포스트, 가디언, 로이터, AFP, 텔레그래프, 유로뉴스, NHK, 사우스 차이나 모닝포스트를 비롯한 全 世界 100個 以上의 媒體가 引用 報道.

    雜誌 記事의 디지털 報道

    ‘신동아’ 모바일 네이버·카카오 채널.

    ‘신동아’ 모바일 네이버·카카오 채널.

    言論 環境의 急激한 變化로 多媒體 多채널 時代에 活字 媒體가 相對的으로 立地가 萎縮되는 現象이 나타나자 신동아도 인터넷을 통한 情報 傳達을 일찌감치 試圖했다. 時代의 推移에 따라 다음과 같은 變化가 있었다.

    ① 新東亞 인터넷 서비스
    1996年 11月 동아닷컴이 생기면서 신동아 記事 一部를 서비스하기 始作하다가, 2002年 10月부터 本格的인 서비스에 들어갔다. 2007年부터는 過去 記事 가운데 2001年 1月號 以後 目次와 記事를 서비스하고 있다.

    ② 모바일 新東亞 서비스
    2015年 11月 모바일 新東亞 서비스를 始作한 以後 照會數가 暴發的으로 늘어났다.

    ③ 포털에 신동아 記事 提供
    2003年頃 야후 포털을 통해 記事 서비스가 이뤄졌는데, 2007年 1月 1日부터는 네이버, 다음 等의 포털에서도 記事를 볼 수 있는 서비스가 始作됐다. 이로써 신동아는 종이 印刷와 디지털 서비스 두 個 버전이 共存하는 媒體로 進化한 것이다. ‘인터넷 新東亞’에 먼저 報道돼 接續 照會數가 늘어난 記事들이 다시 紙面에 실리기도 했다.


    * [單獨 인터뷰] 金鍾仁, 選對委員長 受諾할 듯(2020年 3月 14日) : “공관위 公薦, 더 以上 얘기 안 해” 累積 照會數 32萬7784. 多數 言論이 引用 報道.

    * 윤정옥 挺對協 初代 代表, “尹美香 斗頓 立場文, 連絡받은 적도 없다”(2020년 5月 2日) : 45萬 3996. 조선일보, 中央日報가 引用 報道하는 等 큰 話題.

    * n番房 被害者 暗示 名單 公開한 送波區廳(2020年 4月 14日) : 52萬7968. 報道 直後 KBS, SBS, MBC 等 放送 3社 및 東亞日報, 조선일보, 中央日報, 한겨레 等 主要 日刊紙가 引用 報道.

    * ‘그림 사기’ 無罪 確定 조영남 “監獄 갈 準備했다, 歷史的 判決 남겨 뿌듯(2020年 6月 25日) : 44萬1961. 조영남이 大法院에서 미처 못 한 이야기를 발 빠르게 記事化. 大法院 判決 當日, 自宅에서 조氏와 함께 裁判 結果 確認하고 最初로 조氏 心境 報道. 온라인 記事 報道와 同時에 映像도 업로드.

    * 송정교 崩壞 事件, 月刊誌의 境界를 뛰어넘어 動映像 뉴스를 媒體 中 가장 먼저 報道.(2020年 9月 4日) : 유튜브 ‘매거진東亞’ 動映像 照會數 6萬3125. 江原 平昌郡 진부면 양대천 송정교 崩壞 때 車輛 運轉者가 住民의 手信號를 보고 30秒 差異로 목숨을 求하는 場面을 가장 먼저 報道. KBS, MBC, SBS, 綜編 等 放送보다 빨랐음. 이튿날 동아일보 인터넷 판이 動映像 가져가 新東亞 動映像 使用.


    또 紙面에 揭載된 記事가 新東亞 홈페이지와 포털 媒體에 露出되면서 100萬 累積 照會數를 넘는 技士도 多數 나왔다.


    * ‘最前方 攻擊手’ 黃雲夏 警察 搜査改革丹粧의 直說(2017年 7月號 累積 照會數 97萬)

    * 아흔 살 老兵들의 외침 “90特務對 ‘北派 工作’ 記憶해 달라”(2017년 9月號 51萬)


    * 文在寅 政府 富者增稅 멈칫한 眞짜 理由(2018年 8月號 120萬)


    * 秋夕이 두려운 庶民들(2018年 10月號 189萬)


    * 富者들의 贈與稅 脫漏百態(2018年 10月號 120萬)


    * 장재연 敎授 “웬만하면 마스크를 벗어라”(2019년 4月號 143萬)


    * 安哲秀 “小說보다 더 끔찍한 現實, 어떻게 이런 일이...”(2020년 4月號 143萬)


    * 金鍾仁 “코로나19 對應 보며 文政府 國家經營 能力 있는지 會議”(2020年 4月號 190萬)


    * 尹美香 ‘安城 쉼터’ 仲介人 “7億5000萬원 말도 안 돼…적정가 4億 初盤”(2020年 7月號 134萬)


    * 丁世均 總理가 殊常하다 殊常해!(2021년 1月號 130萬)


    * “헉! 너무 冶해” 1500年 前 新羅 土偶의 性的 欲望과 快樂(2021年 5月號 237萬)


    * “文 辱했다고 携帶폰 뺏고 背後 캐물어…발가벗기는 느낌”(2021年 6月號 120萬)



    專門化 時代의 綜合雜誌

    신동아는 90年의 歷史를 記錄한, 雜誌界를 代表하는 言論媒體다. 하지만 媒體 環境의 變化에 따라 全 世界 모든 印刷 媒體가 發行部數의 下落과 影響力 縮小로 苦戰하는 樣相이다. 放送, 유튜브 等 技術 發展에 따르는 새로운 傳達 方式이 速報性, 廣域性, 콘텐츠의 擴張性 等을 갖추고 古典的인 言論媒體의 存立을 威脅하고 있다. 신동아도 이에 對處해 디지털 記事를 내보내고 있으며 相當 部分 成果를 내고 있기는 하다.

    이런 狀況을 打開하기 위해 어떤 戰略으로 對應할 것인가. 차라리 過去의 編輯 方向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어떨지 생각해 보게 된다.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을 標榜하는 姿勢를 堅持해 速報性이나 物量 爲主의 成長보다는 意見 雜誌로 더 高級스러운 編輯으로 方向을 잡으면 어떨지 모르겠다. 榮光의 90年을 記錄한 底力으로 다가오는 100年을 앞두고 苦悶할 時期라는 생각이다. 신동아의 發展이 韓國 雜誌 저널리즘의 未來이기에 던지는 話頭다. 新東亞 90年을 다시 한番 祝賀한다.

    #90周年 #잡지 저널리즘 #新東亞

    鄭鎭奭
    ● 1939年 出生
    ● 中央大 英語英文學科 卒業, 서울대 大學院 碩士(新文學), 英國 런던政經大 博士 (言論學)
    ● 韓國記者協會 編輯室長, 寬勳클럽 事務局長, 言論仲裁委員會 委員, 放送委員會 委員, 한국외국어대 社會科學大學長 兼 政策科學大學 院長
    ● 現 한국외국어대 言論情報學部 名譽敎授
    ● 著書 : ‘大韓每日申報와 排泄’ ‘韓國言論社’ 外 多數




    댓글 0
    닫기

    매거진東亞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推薦記事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