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마라지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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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마라지바
키질 石窟 入口의 廣場에 세워진 쿠마라지바의 銅像
법명 쿠마라지바( 산스크리트語 : ???????? Kum?raj?va )
出生 334年 ? 350年 ?
쿠차國(只今의 中國 腎臟 위구르 自治區 쿠차 現)
入寂 409年 ? 413年 ?
中國 長安(長安)
出家 356年
咀嚼 《大勝代議長》
稱號 삼장法師(三?法師)
配偶者 쿠차國의 王女(쿠마라지바 本人의 四寸女同生)
父母 아버지: 쿠마라야나(Kum?r?yana), 어머니: 지바카(J?va)

쿠마라지바 ( 산스크리트語 : ???????? Kum?raj?va ) 鳩摩羅什 , 驅魔라十 , 구마라집 , 中國語 簡體字 : ?摩?什 , 正體字 : 鳩摩羅什 , 병음 : Ji?moluoshi 주모뤄스 [ * ] : 344 ~ 413 [1] )은 구자국 (龜玆國: 現在의 신장 쿠차 에 屬함) 出身의 佛敎 思想家다. [2] 漢字 表記는 舊마라시바(鳩摩羅時婆), 驅魔라기바(拘摩羅耆婆), 줄여서 羅什 (羅什), 襲(什), 意譯하여 同數(童壽)라고도 한다.

中國 後秦(後秦) 時代 長安(長安)에 와서 約 300卷의 佛敎 經典을 漢字로 飜譯한 게 有名하며, 그의 佛經 飜譯은 佛敎 普及에 貢獻했을 뿐 아니라 三論宗(三論宗)?成實宗(成?宗)의 基礎가 되었다. 最初의 삼장法師(三藏法師)로 불리며, 後날 現場(玄?) 等 많은 三藏이 登場하였다. 쿠마라지바는 現場과 함께 2代 帶域性(大?聖)으로 불리며, 또한 眞際 (?諦), 佛供錦江 (不空金剛)과 함께 4代 逆境가(??家)로 꼽는다.

略歷 [ 編輯 ]

印度 의 名門 貴族인 아버지 쿠마라야나(Kum?r?yana, 鳩摩炎)의 아들로 어머니는 쿠차國 王의 누이同生인 지바카(J?va)이며, 쿠차國에서 태어난 그는 7歲에 어머니를 따라 出家 하여 아버지의 故鄕인 西域 (西域) 카슈미르 야르칸드 에서 大勝(大乘)  · 小乘(小乘)을 배우고 故國에 돌아와 熱心히 大勝을 說破하여 그 名聲은 中國 內部에까지 퍼졌다. [2]

384年 쿠차로 쳐들어온 中國 後涼 (後?)의 將軍 여광(呂光)의 捕虜가 되었다. 軍事(軍師)의 位置에 있으면서 餘光을 돕기도 했지만, 餘光은 그를 捕虜로써 取扱했고 달리는 말에서 떨어뜨리거나 함께 捕虜로 끌려온 쿠차의 王女를 强制로 아내로 맞게 하는 等의 殘虐한 짓도 했다고 한다. 18年 동안 餘光과 餘贊(呂纂) 밑에서 洋酒(?州)에서 살던 쿠마라지바는 書記 401年 後進의 皇帝 요흥 (姚興)에게 局社(國師)로서 영접되었다. 요흥의 뜻에 따라 女性과 婚姻, 還俗한 그는 以後 經典 飜譯에 從事하여 35部 300卷의 佛經을 漢文으로 飜譯했다. [2]

쿠마라지바의 歷問은 流麗하여 《 法華經 》(法華經)이나 《 阿彌陀經 》(阿彌陀經)의 歷問 等은 現代의 法의(法儀)에서도 使用되고 있다. [2] 그의 飜譯 事業에 依하여 當時 流行하고 있던 《 般若經 》(般若經) 硏究는 더욱 硏究가 깊어졌고 또 大智度論 (大智度論) 等의 大乘論部(大乘論部)도 처음으로 紹介되었다. [2] 그가 《般若經》을 包含한 佛敎 經典들을 佛敎 本然의 뜻에 맞게 바르게 飜譯하면서 當時까지 中國에서 流行하던 隔意佛敎 (格義佛敎)의 弊端이 비로소 克服되었다. [3]

쿠마라지바는 413年(409年이라고도) 長安에서 世上을 떠났는데, 臨終 直前 그는 "내가 傳한 것(飜譯한 佛經)에 틀린 것이 없다면, 내 몸이 사라진 뒤에라도 내 혀는 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事後 佛敎의 方式대로 化粧되었고, 다 타버린 그의 屍身 속에서 혀만은 타지 않고 남아 있었다고 한다(『고승전』권2).

飜譯 [ 編輯 ]

쿠마라지바가 飜譯한 阿彌陀經

쿠마라지바의 佛經 飜譯은 中國뿐 아니라 東아시아의 佛敎史에서 길이 남을 公的이며, 中國에서는 그를 中國 "三藏의 한 사람"이라 일컫는다.

一部 經典에서 산스크리트語 原典에는 없는 쿠마라지바 本人의 創作(該當 敎理를 說明하기 위한)이나 醫逆으로 疑心되는 部分도 있으나, 그의 飜譯 佛經이 後代 東아시아 佛敎界에서 얼마나 큰 影響力을 行使했는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中國과 韓國, 日本, 베트남 等 漢字 文化圈에 퍼진 佛敎 用語, 例를 들어 極樂(極樂)이라는 單語는 쿠마라지바가 飜譯한 그대로 퍼져 쓰이고 있으며, 佛敎의 敎理를 說明하는 有名한 '色卽是空 空卽是色'(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文句도 쿠마라지바에게서 나온 것이다. (唐)의 現場 에 依해 산스크리트語 佛經이 中國에 輸入되고 飜譯된 뒤에도 「 新譯 」(新譯)이라 불린 現場의 飜譯에 對해 쿠마라지바의 飜譯은 「 區域 」(舊譯)이라 불리며 尊重되었다(쿠마라지바 以前의 飜譯은 苦役古?이라 불림).

쿠마라지바와 김만중 [ 編輯 ]

쿠마라지바는 飜譯에 對해 "이미 입에서 한 番 씹은 밥을 다른 사람에게 먹이는 것과 같아, 元來의 맛을 잃는 것은 勿論 甚至於 嘔逆질까지 느끼게 한다"고 했으며, 漢譯에 對해서도 "天竺의 風習은 文彩를 몹시 사랑하여 그 讚佛歌는 至極히 아름답다. 只今 이것을 漢文으로 옮겨 飜譯하면 그 뜻만 얻을 수 있을 뿐 그 말까지 傳할 수는 없다"고 했는데, 朝鮮 中期의 文人 西浦 金萬重은 쿠마라지바의 말을 引用해, 文學의 價値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말(音聲言語)에서 始作해 글과 노래(卽 視覺言語)로 옮겨지기도 하는 것이라며, 한글로 쓰여진 鄭澈 關東別曲 思美人曲 , 續美人曲 같은 作品을 굳이 七言古詩 같은 中國式으로 飜譯하려는 것에 對해 自己(朝鮮) 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中國)의 말을 배워서 表現해 봤자 鸚鵡새 가 사람 말을 따라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부질없는 짓이라 批判하고 當時의 民間에서 부르는 노래(卽 漢字로 적지 않은 純粹한 母國語)가 所謂 學者나 士大夫가 말하는 詩文(詩文)보다 形式이 低俗할지는 모르지만 表現의 眞率함에 있어서는 오히려 그들이 敢히 따라올 수도 없다고 적고 있다. 金萬重의 이 批評은 漢文이 아닌 國文으로 製作된 詩文學의 價値를 肯定하는 것으로 韓國文學史에서 높게 評價받는다.

著書 [ 編輯 ]

  • 『大勝代議長』(大乘大義章) 3卷 - 여산(廬山)의 僧侶 蕙園(慧遠)과 주고 받은 問答集이다.

各州 [ 編輯 ]

參考 資料 [ 編輯 ]

  • 出三藏器什 』(出三?記集) 卷14
  • 高僧傳 』(高僧傳) 勸第2( 對精神수大藏經 第50冊 No.2059)
  • 陳書 』(晉書)「列傳」
  • 誤쵸 에니치(?超慧日), 스와 要시즈美(諏訪義純) 共著 『라지바』(羅什)(新訂판新訂版 人物 中國의 佛敎人物中?の??, 오쿠라 出版大?出版, 1991年) ISBN   4804351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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