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句麗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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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人
高句麗人
고구려인들이 그려진 덕흥군 벽화.
高句麗人들이 그려진 덕흥군 壁畫.
國家
高句麗
言語
高句麗語
宗敎
佛敎 , 道敎 , 巫俗信仰
民族系統
예맥족
起源·發想 滿洲
近緣民族 扶餘人, 百濟人
後裔 渤海人

高句麗人 (高句麗人)은 1世紀부터 7世紀까지 오늘날 中國 東部와 韓半島 北部에 該當하는 高句麗 에 居住했던 民族 이다.

668年 高句麗 唐나라 新羅 에 依해 滅亡하게 되면서 高句麗人들은 唐나라와 渤海 等地로 移住했고, 一部는 新羅 에 吸收됐다. [1] [2] [3]

歷史 [ 編輯 ]

起源 [ 編輯 ]

先진문헌 》에서 貊族 에 對해 다루며 北中國의 여러 地域에서 부터 요동 地域, 高句麗 發興地人 鴨綠江 中流 地域의 住民들의 種族 系統을 貊族이라고 記述했다. [4]

紀元前 1世紀 高句麗가 建國된 뒤 住民들은 스스로를 高句麗人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高句麗의 成長으로 인해 復屬된 藝脈系의 沃沮 , 東濊 , 扶餘 等이 高句麗人을 形成했다. [4]

滅亡 後 [ 編輯 ]

高句麗 復興運動 [ 編輯 ]

668年 高句麗가 滅亡한 뒤 高句麗 王族 安勝 검모잠 等이 高句麗 復興運動 을 일으켰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內紛이 일어나 安勝이 검모잠을 죽이고 高句麗 百姓 4千戶(推算 2萬名)와 함께 新羅 에 歸順하는 事態가 벌어졌다.

新羅의 문무왕 은 安勝과 高句麗 遺民들을 金馬渚 ( 全羅北道 益山 )으로 옮겨 살게하고 安勝을 보덕왕(報德王)에 封했다. [5] 報德國은 新羅의 番屬國(藩屬國)으로 있으면서 高句麗와 同一한 5部 와 官等 體系를 갖추고 羅唐 戰爭 에 參戰하거나 日本 과는 犬高麗史(遣高麗使)라는 이름으로 使臣을 주고받는등 對內外的으로 活潑한 活動을 벌였다. 그러나 683年 新羅 신문왕 이 安勝을 首都 慶州로 불러 小版(蘇判) 官等과 金氏姓을 附與하고 집과 土地를 주며 首都에 居住하게 하자 이에 不滿을 품은 報德國의 長壽 大門 [6] 이 金馬渚에서 亂을 일으켰지만 [7] 新羅에 鎭壓되어 吸收되었다. 報德國 滅亡 後 高句麗 貴族과 流民들은 新羅의 9週5小京 中 하나인 南原京 ( 全羅北道 南原 )으로 移轉되었다. [8] 이 過程에서 高句麗의 絃樂器 거문고 가 傳來되었다. [9]

한便 8世紀 末~9世紀 初에는 요동 地域에서 高句麗 遺民들이 세운 것으로 推定되는 나라( 小高句麗 ) [10] 가 登場하기도 했지만 高麗國에서 使臣을 보냈다.같은 斷片的인 記錄 外에는 關聯 記錄이 없어서 國家 成立 過程과 背景, 滅亡 時期 等은 알 수 없다. [11]

高句麗 復興 運動은 失敗로 끝났으나, 698年에 成立된 渤海 [12] [13] 와 918年에 成立된 高麗 [14] 가 高句麗 繼承을 闡明했다.

高句麗 遺民들의 日本 亡命 [ 編輯 ]

고마 神社 (高麗神社).

한便 1,799名의 또 다른 高句麗人들은 日本 으로 亡命했다. 多耳壺 3年(703年)에 日本 調整은 高句麗의 王族이자 寶藏王의 아들로 推定되는 膏藥狂 (高마노 잣코)에게 雇馬勞苦키시(高麗王)라는 街바네 (姓)를 주었다. 덴표쇼號(天平勝寶) 2年(750年)에는 高句麗 廣開土大王 의 5代 손 배내福德의 後裔 다카쿠라노 後쿠노部 等의 一族에게 高마노아손(高麗朝臣)의 가바네를 내렸는데, 아손이라는 가바네를 渡來人 에게 내리는 것은 當時 日本에서는 異例的인 것이었다. 그 뒤 後쿠노부는 다시 性을 다카쿠라(高倉)로 고쳤다. 또한 約廣義 子孫은 代代로 고마 紳士의 弓師(宮司)를 맡아 오늘날까지 이어져 現代의 高馬氏 (高麗氏)가 되었다.

膏藥狂 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고마 神社 (高麗神社)는 "出世하고 싶으면 고마 神社에 가서 빌라"는 俗說이 있을 程度로 日本에서는 名所이다. 河馬拘置 誤死치 , 와카쓰키 레이지로 , 사이토 마코토 , 고이소 구니아키 , 시데하라 基主로 , 하토야마 이치로 가 參拜한 뒤에 總理 에 任命되었기에, 出世名臣( 出世明神 슛歲이묘진 [ * ] )이라 하며 崇尙하고 있다. 1990年代에는 "큰 事件이 있을 땐 고마 神社에 가서 빌어야 搜査가 잘 풀린다"는 얘기가 퍼져, 도쿄地檢·도쿄高檢 檢事들이 줄줄이 參拜하기도 했다. [15]

姓氏 [ 編輯 ]

《三國史記》, 《三國遺事》 等에 依하면 高句麗라는 國號를 使用했기 高句麗의 王族 들은 때문에 高氏(高氏) 姓을 使用했다고 한다. 그 外에 해(解), 을(乙), 예(禮), 송(松), 목(穆), 禹(于), 週(周), 마(馬), 손(孫), 窓(倉), 桐(董), 예(芮), 年(淵), 명림(明臨), 乙支(乙支), 南(南) 等 10餘 個가 確認되었다. [16]

各州 [ 編輯 ]

  1. 《新唐?·高麗?》:“ ?章 二年,己巳二月,王之庶子 安勝 ,率四千餘戶,投新羅。”
  2. 《通典》186?:“其后、余?不能自保,散投新?,靺鞨。”
  3. 《三?史?·新?本?六》?:“高句??臣??土(盖?文弟)以城十二、?736、口3543?投。”
  4. “高句麗”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5. 報德國 - 韓國民族文化大百科
  6. 大門(大文)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7. 叛亂을 圖謀하다가 發覺되어 死刑당했다는 說도 있다. 大門 -韓國古典用語辭典
  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9. 全北日報 7. 옥보고와 南原 운상원 - 거문고 州法 完成한 國樂의 聖地
  10. 小高句麗 - 韓國民族文化大百科
  11. 韓國民族文化大百科, 두산百科 等에는 小高句麗가 渤海에 倂合되었다고 敍述되어 있지만 關聯 記錄이 없기 때문에 確實하지 않다.
  12. 庚午 帝臨軒 高麗使揚承慶等貢方物 奏曰 高麗國王大欽茂言 承聞 在於日本照臨八方聖明皇帝 登遐天宮 攀號感慕 不能默止 是以 差輔國將軍揚承慶歸德將軍揚泰師等 令齎表文幷常貢物入朝 詔曰 高麗國王遙聞先朝登遐天宮 不能默止 使揚承慶等來慰 聞之感通 永慕益深 但歲月旣改 海內從吉 故不以其禮相待也 又不忘舊心 遣使來貢 勤誠之至 深有嘉尙 , ( 속일본기 )
  13. 甲寅 天皇御中宮 高齊德等上其王書幷方物 其詞曰 武藝啓 山河異域 國土不同 延聽風猷 但增傾仰 伏惟大王 天朝受命 日本開基 奕葉重光 本枝百世 武藝?當列國 濫摠諸蕃 復高麗之舊居 有扶餘之遺俗 但以天崖路阻 海漢悠悠 音耗未通 吉凶絶問 親仁結援 庶協前經 通使聘隣 始乎今日 謹遣寧遠將軍郞將高仁義游將軍果毅都尉德周 別將舍航等?四人 齎狀 幷附貂皮三百張奉送 土宜雖賤 用表獻芹之誠 皮幣非珍 還慙掩口之? 主理有限 披瞻未期 時嗣音徽 永敦隣好 於是高齊德等八人竝授正六位上 賜當色服 仍宴五位已上及高齊德等 賜大射及雅樂寮之樂 宴訖賜祿有差 韓國史데이터베이스
  14. 서희의 外交 談判
  15. 최인준 (2016年 4月 23日). “1300年, 日本 한복판에서 지켜온 高句麗의 魂” . 朝鮮日報 . 2017年 10月 8日에 確認함 .  
  16. “姓氏 (姓氏)”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