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音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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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時代『樂學軌範』 鄕部樂器圖說에 나오는 鄕琵琶와 唐琵琶

韓國音樂 (韓國音樂)은 韓半島 中國 東北部 等에서 發生하여 古代時代부터 傳來되어오는 音樂과, 이를 基盤으로 오늘날 새로이 生成되고 있는 音樂(創作國樂 等), 또한 現代에 西洋音樂 의 技法을 使用하여 創作된 現代 大衆音樂 等을 包含하여, 韓民族 (韓民族)의 音樂 을 總稱한다. 地域相 東洋音樂 의 한 갈래이다.

좁은 意味의 韓國音樂은 韓國 戰爭 以前의 朝鮮王朝에서 관촬하여 繼承하도록 奬勵한 것과 百姓들의 自發的인 農樂을 包含한 傳來·傳統 音樂, 卽 國樂 (國樂)을 가리킨다. 이러한 協議의 韓國音樂은 基礎 人文學 音樂史學 의 硏究對象이다. 그러나 巨視的 觀點에서 韓國音樂史 를 眺望하고 世界音樂의 한 潮流로 把握하기 위해서는 客觀的인 名稱의, 卽 廣義의 韓國音樂을 使用하기도 한다.

韓國音樂科 韓國音樂史學 [ 編輯 ]

韓國音樂私學 [ 編輯 ]

近代科學으로서의 韓國音樂史學 硏究는 韓國 傳統音樂을 硏究하는 韓國國樂學會를 中心으로 進行되었다. 이혜구 (李惠求)는 1940年代 <梁琴新譜의 思潮(梁琴新譜 四調)>를 發表한 以來 많은 論文을 내었고 論文集 <韓國音樂硏究>와 <韓國音樂序說>, <韓國音樂論叢>을 내었다. 장사훈 (張師勛)은 <步虛子高(步虛子考)>를 비롯하여 많은 論文을 내었고 論文集 <國樂논고>·<韓國傳統音樂의 硏究>·<韓國樂器對官>·<國樂總論>·<韓國音樂史>·<傳統舞踊의 硏究>를 내었다. 그 밖에도 함화진 (咸和鎭)의 <朝鮮音樂通論>, 성경린 (成慶麟)의 <朝鮮音樂讀本>·<朝鮮의 아악>·<국악감상>·<한국음악논고>·<한국의 舞踊>, 金基洙(金琪洙)의 <國樂入門>, 박헌봉(朴憲鳳)의 <唱樂大綱> 等의 著書가 있다.

1959年에는, 비록 人文學 認 韓國 音樂史學 이 儼然히 다른 音樂 連奏 作曲 을 擔當하는 領域과 共存하는 形態이지만, 서울大學校 音樂大學에 國樂과 理論專攻이 新設되어 韓國 音樂史學 硏究의 命脈을 이어오고 있으나 人文學 의 性格은 退化되었다편 國立國樂院이 主軸이 되어 引出된 것으로 兩顎 5仙步에 옮긴 <韓國音樂>이 第14輯까지 나왔고 在來의 律字譜(律字譜)에 依한 <韓國音樂選集>도 第5輯까지 나왔다. 서울대학교 音樂大學 國樂科에서 刊行한 影印本(影印本) <俗樂원보>와 <大樂後譜>價 있고 兩顎 5仙步에 採譜한 이재숙(李在淑)의 <伽倻琴散調>가 있다. 只今까지 活潑한 硏究活動을 한 사람으로는 권오성·한만영·이재숙·김정자·이성천·이병원·송방송·이보형·김길운·권도희 等이 있다.

韓國音樂學은 ‘韓國’과 ‘音樂學’이라는 두 낱말 사이에 어떤 調査를 使用하는가에 따라 ‘韓國의 音樂學(Korean Musicology, Musicology of Korean)’을 뜻하기도 하고 或은, ‘韓國에서의 音樂學(Musicology in Korea)’을 의미할 수도 있다. [네이버 知識百科] 韓國音樂學 [Musicology of korean] (學問名百科 : 藝術體育, 곽현규)

韓國國樂學會 [ 編輯 ]

韓國國樂學會(韓國國樂學會)는 韓國 音樂史學 을 硏究하는 學會로서, 1948年 이혜구 · 성경린 · 장사훈 의 發議(發意)로 韓國國樂學會 前身인 國樂硏究會(國樂硏究會)가 發隊되었다. 이어서 第1回 定例 發表會를 가졌다. 1964年에 韓國國樂學會는 社團法人體로 認可 登錄되고 會長에 이혜구, 移徙에 성경린·김성태·정호근·장사훈(常任), 監査에 이주환·以上만이 被任되었다. 1972年까지 200餘回 硏究發表會를 가졌고, <韓國音樂硏究>라는 學術誌를 2回 發刊했다. 또한 100餘篇의 論文이 發表되었고, 10餘卷의 學術書籍 및 樂譜가 出版되었다.

韓國音樂史學會 [ 編輯 ]

韓國音樂史學會(韓國音樂史學會)는 韓國 音樂史學 을 硏究하는 學會로서, 새로운 韓國 音樂史 硏究를 위해 1988年 大邱에서 創立되어 學術誌 <韓國音樂史學報> 第 1輯을 發刊하였다. 現在까지 53卷의 學會誌를 發刊하였고 2004年 한국학술진흥재단 等才地가 되었다. 現在 會長은 송방송 이다.

分類 [ 編輯 ]

韓國音樂은 크게 韓國音樂, 韓國現代音樂, 韓國大衆音樂으로 區分한다.

韓國現代音樂 [ 編輯 ]

韓國現代音樂은 一般的으로 20世紀에 收容된 西洋音樂을 바탕으로 한 現代音樂 作曲家와 國樂器 를 使用하거나 國樂의 音樂的 要素를 利用하여 만든 現代의 國樂人 創作國樂을 總稱한다. 西洋音樂을 바탕으로 한 現代音樂은 西洋音樂의 一般的인 장르와 同一하다.

韓國音樂 [ 編輯 ]

韓國 音樂史學 에서 韓國音樂을 分類하는 方法은 여러 가지이다. 音樂의 由來를 따져서 鄕樂·唐樂·雅樂으로 나누기도 하고, 그 쓰이는 目的에 따라서 祭禮樂·宴禮樂·民間音樂으로 나누기도 하고, 演奏形態에 따라 器樂·聲樂으로 나누고, 樂器編成法에 따라 合萼·三絃六角·細樂·倂奏 같은 말도 쓰인다. 또 西洋音樂 의 分類方法에 따라 管絃樂曲·重奏曲·獨奏曲·合唱曲·獨唱曲으로 나눌 수도 있고, 宗敎音樂·世俗音樂으로 나눌 수도 있다. [1]

歷史的 分類法 [ 編輯 ]

韓國音樂의 歷史的 分類法은 樂曲의 由來와 形式에 依한 區分法이다. 이 區分法 床에서 國樂은 크게 雅樂, 唐樂, 鄕樂으로 나뉜다.

아악 [ 編輯 ]

中國 宋나라 에서 由來한 正樂으로, 具體的으로는 高麗 睿宗 11年 ( 1116年 )에 輸入된 '대성雅樂(大晟雅樂)'을 가리킨다. 高麗 中期까지만 해도 널리 쓰였으나, 高麗 後期에 衰退하였다. 朝鮮 時代에는 世宗 때에 朴堧 이 中心이 되어 아악 을 整理하였다. 現在에 남아있는 아악 曲은 文廟祭禮樂 하나뿐이다.

唐樂 [ 編輯 ]

中國의 唐나라 에서 傳來된 音樂과 더불어 中國 宋나라 邪惡 (詞樂)을 總稱한다. 《 經國大典 》 等에 보이며, 《 高麗史 》〈樂誌〉에 40餘種의 音樂이 紹介되어 있다. 現在 남아있는 唐樂은 〈 步虛子 〉와 〈 洛陽春 〉 두 曲뿐이다. 唐樂은 大體로 黃=C의 音階를 따른다.

鄕樂 [ 編輯 ]

雅樂과 唐樂을 除外한 韓國의 在來 音樂과 西域 에서 傳來된 音樂을 總稱한다. 판소리 , 民謠 , 雜歌 等은 包含되지 않는다. 享樂은 大體로 黃=E♭의 音階를 따른다.

批判과 現況 [ 編輯 ]

現在 남아있는 樂曲으로 볼 때, 雅樂은 한 曲, 唐樂은 두 曲밖에 남아있지 않아 大部分의 樂曲이 鄕樂에 屬하게 되어 分類가 큰 意味를 지니지 못한다. 또한 이 分類法에서는 民謠 , 판소리 等의 民俗樂과 現代의 創作國樂 을 分類하기 곤란한 點이 있다. 이런 理由로 現代에는 이러한 分類法을 많이 使用하지 않는다. [2] 그러나 音階上의 差異가 뚜렷하기 때문에 黃=C의 音階를 따르는 曲들을 '唐樂系 音樂', 黃=E♭의 音階를 따르는 曲들을 '鄕樂系 音樂'으로 부른다.

現代의 分類法 [ 編輯 ]

現代에 가장 많이 쓰이는 分類法은 '正樂'과 '民俗樂'으로 나누는 方法이 있다. 그러나 音樂史學 契에서 異見도 있다. 梵唄 와 같은 佛敎音樂은 어디에도 包含되지 않는가 하면, '民俗音樂'이라는 말이 元來 '藝術 音樂(art music)'의 反對 槪念으로 使用되기 때문에, 散調 판소리 와 같은 藝術音樂의 分類가 곤란하다는 理由로 장르別로 分類하기도 하고, 宗敎音樂을 따로 分類하기도 한다. [2] 또한 演奏되는 方法에 따라 器樂曲과 聲樂曲으로 分類하기도 한다. [3] 여기서는 一般的인 分類 方法을 따라 正樂과 民俗樂, 創作 國樂으로 區分하기로 한다.

正樂 [ 編輯 ]

正樂은 宮中音樂과 民間 上流層에서 演奏되어 오던 모든 音樂을 가리킨다. 細部的으로 分類하자면 意識 音樂(祭禮樂)으로 分類되는 宗廟祭禮樂 文廟祭禮樂 , 宮中의 宴禮樂, 民間 上流層에서 享有하던 風流 音樂 으로 分類할 수 있다.

民俗 音樂 [ 編輯 ]

民俗 音樂은 正樂에 對稱되는 말로, 民謠 판소리 , 雜歌 , 散調 , 시나위 를 包含한다. 크게는 佛敎 의 宗敎 音樂인 梵唄 도 包含된다.

發展 및 繼承 [ 編輯 ]

上古 時代 [ 編輯 ]

上古 時代의 國樂에 關한 內容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하지만, 扶餘 迎鼓 , 高句麗 同盟 , 東濊 무천 等 節制와 같은 堤川 行事에 關聯된 中國 歷史書에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는 內容이 있다. 韓國의 上古 時代 音樂은 各 部族의 祭天儀式에 쓰이는 醫이였던 것이 옛 中國 文獻에서 斷片的으로 보인다. 扶餘ㆍ高句麗ㆍ 馬韓 變한 等 上古時代 不足 國家들은 秋收가 끝나는 때, 或은 씨를 뿌릴 때에 일정한 時期를 擇하여 하늘에 祭祀를 지냈으며 男女老幼가 함께 모여 連日 밤낮없이 춤과 노래로 즐겼다고 記錄되어 있다.

삼한의 音樂 [ 編輯 ]

韓國音樂에 關한 가장 오래된 文獻은 中國의 眞髓(陣壽, 233-297)가 讚한 <三國志(三國志)> 魏書(魏書) 동이전(東夷傳)으로, 여기에 依하면 馬韓에서는 5月 下從(下種)과 10月의 農工(農功)이 끝났을 때 鬼神에게 祭를 지내고 群衆들이 밤낮없이 쉬지 않고 소리하고 춤을 추며 술을 마셨다. 이 3世紀 馬韓 의 굿音樂은 아마 오늘날의 別神굿이나 都堂굿에서 굿중牌들이 꽹과리와 북을 치면서 춤추는 搖亂한 音樂과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3世紀 馬韓·弁韓의 아마도 强烈하고도 투박하였던 音樂은 저 新羅 遺跡에서 發掘된 黑色의 素朴한 土器에 비할 수 있겠다.

弁辰의 樂器 고 [ 編輯 ]

中國 《 三國志 》 동이전에 依하면 弁辰에 中國의 軸과 形象이 비슷한 絃樂器 (絃樂器)가 있었다. 伽倻國(伽倻國) 가실왕(嘉實王)李 가얏고를 만들고 王山岳(王山岳)李 거문고를 만들기 前인 韓國 最高(最古)의 이 樂器는 '高'라고 불리는 가야고의 전신일 것이며 아마 6世紀에 가얏고(伽倻琴)가 伽倻 國에서 새로 생긴 後로 자취를 감추고 만 것 같다.

安岳古墳에 나타난 音樂 [ 編輯 ]

映畫(永和) 13年(357年)이란 連帶가 標示된 安岳 第3號 分(墳)의 壁畫는 여러 가지 中國 古代惡(古代樂)을 보여준다. 前室(前室)의 한 壁에는 입고(立鼓)와 소(簫)를 各各 연주하는 2人과 노래하는 사람 1人이 그려져 있는데, 이 입고·소·가(歌)의 그림은 한(漢)의 剪定(殿庭)의 鼓吹(鼓吹)를 그린 것이라고 생각된다. 回廊(廻廊)의 壁에는 대행렬도(大行列圖)가 있는데, 後部의 騎馬樂隊(騎馬樂隊, 4人으로 되었다)는 一列 橫隊로 故(鼓)·蘇(簫)·가(茄)(또는 燒却(小角))·요를 週(奏)하고 있는데, 이 騎馬樂隊의 音樂은 한 臺(漢代)의 短簫요가를 그린 것 같다. 後室(後室)의 壁에는 세 사람의 惡人(樂人)李 앉아서 各各 거문고(또는 箏(箏))·阮咸(阮咸)·戕賊(長笛)으로 춤伴奏를 하는 模樣이 그려져 있는데, 이 그림은 後殿(後殿)의 曲宴(曲宴)을 그린 것 같다. 이 4世紀의 古墳壁畫에 그려져 있는 입고(立鼓)·소(簫)·가(苛)·요 等의 한대(漢代) 樂器는 漢江 流域에서 發掘된 初頭(醮斗)와 함께 韓文化의 特色을 보여주고, 馬韓 , 變한 의 惡(樂)과는 全혀 다르다.

三國 時代 [ 編輯 ]

高句麗 [ 編輯 ]

高句麗 의 歌謠로 只今까지 傳해 오는 것은 유리왕 黃鳥歌 가 있다.

高句麗 의 國樂士는 크게 세 段階로 區分한다. 第1期는 外來 音樂이 들어오기 以前의 時期이며, 거문고 도 이 때에 만들어졌다. [4] 이 때의 音樂은 거문고 와 같은 鄕土 樂器로 대표된다. 第2期는 高句麗 中國 의 後魏(後魏)와 交流를 하기 始作한 4世紀부터 6世紀 中葉까지로 區分한다. 이 時期에는 箜篌 와 같은 西域 의 樂器가 들어온 時期이다. 第3期는 6世紀 後半부터 高句麗가 滅亡할 때까지로 區分한다. 이 때의 高句麗의 音樂은 매우 隆盛하여, 隋나라 의 9部機(九部伎) 等에도 包含되었다. 高句麗 音樂에는 西域音樂人 九紫惡(龜玆樂)李 들어와 高句麗에 많은 樂器가 쓰인 時期이다. 箜篌·枇杷(琵琶)·五鉉(五絃)·生(笙)·蘇·피리·妖蠱(腰鼓) 等 많은 樂器를 使用하여 當時 百濟와 新羅의 音樂에 비해 매우 發展하였다.

거문고 [ 編輯 ]

<三國史記(三國史記)> 에 依하면 高句麗 의 王山岳이 거문고 또는 玄琴(玄琴)을 만들었는데, 그 樂器는 眞人(晋人) 아마 西晉(西晉)李 아니고 東進(317-420年)의 사람)李 高句麗에 보내온 中國의 金(琴)을 改造한 것으로 보인다. 現行 거문고와 같은 樂器가 통구(通溝)에 있는 高句麗의 舞踊塚의 壁畫에 그려져 있는데, 다만 6絃 代身 4縣을 가진 點에서 現行 거문고와 다를 뿐이다. 이 高句麗 古墳에 그려져 있는 樂器가 거문고의 圓形이고, 現行 거문고는 그 變形으로 보인다.

日本後期에 나타난 樂器 [ 編輯 ]

〈日本後期〉에 依하면 高句麗音樂은 樂士(樂師)가 4人인데, 橫的(橫笛)·君侯·莫目(莫目, 一種의 管樂器)과 무등사(無等師)였다. 卽 高句麗의 聯鄕樂(宴享樂)은 橫的·거문고·莫目(莫目)科같은 樂器에 맞추어 노래하고, 그에 따라 춤을 추는 것이었다. 〈日本後期〉에 依하면 百濟樂(百濟樂)도 高句麗惡과 같이 橫的·君侯·莫目으로 춤을 伴奏하였다. 백제가 高句麗의 거문고를 借用한 것이 注目된다.

西域樂器의 傳來 [ 編輯 ]

佛敎가 高句麗에는 372年에 北部 中國 에서, 그리고 백제에는 그보다 늦게 384年에 南部 中國에서 들어온 것처럼, 外國 樂器도 高句麗와 백제에 中國 南北朝 (南北朝) 末期에 各各 달리 들어온 것 같다. 卽 水西(隋書, 622年 찬)의 <동이전>에 依하면 高句麗惡은 5現金·箏·피리·橫取(橫吹)·蘇·高를 썼고, 百濟樂은 고(鼓)·각(角)·공후·쟁(箏)·우·지·적(笛)을 使用하였다. 그런데 高句麗惡에 採用된 五鉉琴과 피리는 西域系의 樂器로서 中國의 北朝에서 使用되었던 것이며, 百濟樂에 採用된 箜篌와 지, 特히 지는 南朝의 淸樂(淸樂)에서만 使用되었던 것이다. 이같이 高句麗는 北方 中國에서, 백제는 南方 中國에서 各各 樂器를 輸入하여 兩國音樂은 달랐다. 特히 高句麗惡은 北部 中國에서 새로운 勢力을 가진 西域 樂器를 輸入 採用함으로써 豐富해져서 數(隋)의 宮中에서 7部機(七部伎), 그 後 9簿記에 熱(列)하였고, 繼續하여 黨(唐)의 宮中에서도 10部機(十部伎) 속에 들었다.

百濟 [ 編輯 ]

只今까지 傳해 오는 百濟 의 歌謠로는 〈 井邑詞 〉가 있다. 現在 演奏되는 樂曲 中 〈 井邑 〉과의 關係는 確實하지 않다. 백제音樂의 資料는 高句麗에서 보이는 古墳(古墳)의 高句麗惡壁畫(高句麗樂壁畵) 같은 것이 없고 記錄이 零細(零細)하다. 古爾王 (古爾王) 元年(238年)에 堤川地(祭天地) 龍鼓吹(用鼓吹)라 하여 鼓吹악(鼓吹樂)이 쓰였다는 記錄이 있으나 그것이 대방(帶方)에서 使用된 中國系 鼓吹인지는 알 길이 없다. 《日本後期》에 依하면 백제音樂度 高句麗 와 같이 橫的·君侯·莫目으로 춤을 伴奏하였다. 百濟音樂이 高句麗의 거문고 를 借用한 것이 注目되는데 이 點은 백제音樂이 高句麗와 같고 新羅와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백제音樂은 5~6世紀에 中國 南宋 (南宋)과 北緯(北魏)에 紹介되었고 또 《日本書紀(日本書紀)》에 依하면 백제樂士(百濟樂師)들이 交代로 日本에 건너가서 音樂을 前習(傳習)시켰는데 文獻에 보이는 惡人(樂人) 施德(施德) 蔘根(三斤), 戒德(季德) 己麻次(己麻次), 瞋怒(進奴), 大德(對德) 辰時 等 4人은 橫的·君侯·莫目·무(舞)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後期의 백제에는 南朝(南朝)音樂의 影響이 보인다. 中國 文獻 《水西》의 〈동이전(東夷傳)〉에 고(鼓)·각(角)·공후·쟁(箏)·우·지·적(笛)과 같은 樂器를 쓴 記錄이 보인다. 이 樂器들을 數의 九部伎(九部伎)와 比較하면 江南(江南)의 淸樂(淸樂-淸商伎)에서 쓰이는 樂器編成 (樂器編成)과 비슷하다. 백제 사람 味摩之(味摩之)는 中國 南部 吳나라에서 器樂(伎樂)을 배워 日本에 傳했다.

南朝音樂의 傳來 [ 編輯 ]

水西의 <동이전>에 記錄된 백제樂器는 故(鼓)·各(角)·箜篌·箏(箏)·右·知·赤(笛)인데 箜篌·知를 쓴 點에서 數(隋)의 9簿記에 나타난 淸商伎, 卽 淸樂의 樂器와 비슷하다. 高句麗音樂이 西凉惡(西凉樂), 卽 북조(北朝)의 音樂을 받아들인 것과 百濟音樂이 淸樂(淸樂), 卽 南朝(南朝)의 音樂을 받아들인 것은 對照가 된다. 百濟伎(百濟伎)의 無人(舞人)은 南部 中國의 피리(皮履, 短靴)를 申告 高麗技(高麗伎)의 無人은 北部 中國의 오피화(烏皮靴-장화)를 신은 點도 이것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器樂 [ 編輯 ]

百濟人 味摩之 (味摩之)가 오(吳, 南部中國)에서 器樂(伎樂)을 배워 가지고 612年에 日本 에 傳했다. 이 器樂의 假面이 日本의 동대사 (東大寺) 等 여러 곳에 保管되어 있는데 그 容貌, 特히 높은 코가 西域의 特徵을 말해 준다. 이 器樂의 內容은 1233年 日本의 《敎訓秒(敎訓抄)》라는 冊에 簡單히 紹介되었는데 그 構成이 오늘날 韓國에 傳해 내려오는 山臺都監(山臺都監)놀이 및 鳳山(鳳山)탈춤과 거의 비슷하다. 百濟人 미마지가 日本에 건너가서 가르친 器樂(伎樂)은 오(吳), 卽 南部 中國에서 백제로 들어와서 오늘날까지 山臺都監놀이로 傳承되고 있다.

新羅 [ 編輯 ]

統一 以前의 新羅 의 音樂은 伽倻琴 으로 대표될 수 있다. 伽倻琴 진흥왕 때에 伽倻 의 于勒이 新羅에 傳했다고 한다. [4] 이 時期의 音樂으로는 《 三國史記 》에 이름만 傳하는 伽倻琴 12曲이 있다. 진흥왕 13年에는 戒告, 法知, 萬德이 于勒에게서 各其 伽倻琴, 노래, 춤을 배웠다고 한다. 于勒이 가얏고를 新羅에 가져오기 前 奈解王(奈解王, 196-229) 때 勿稽子(勿稽子)가 '高'를 쳤고 慈悲王(慈悲王, 458-479) 때 白결 先生 (百結 先生)李 '高'로 방아소리를 내었다는 記錄이 있는 만큼 新羅音樂은 일찍부터 '高'(伽倻琴)가 代表的인 樂器이다. < 三國史記 >에 新羅音樂은 '高(琴)'와 춤(舞)과 노래(歌)로 編成되었다 하였고 <日本後期>에도 新羅音樂에는 '高'와 춤만이 보이는 것으로 봐서 新羅音樂은 管樂器 打樂器 가 보이지 않고 오직 絃樂器 한 가지에 맞추어서 춤추고 노래하는데, 이 點은 橫的(橫笛)·거문고·莫目(莫目)으로 編成된 高句麗 및 백제音樂과는 다르게 單純한 編成으로 되었다. 이것은 마치 高句麗와 백제의 古墳(古墳)의 構造가 같은데 新羅의 그것만이 養子와 判異하게 다른 것과 相通한다. 진흥왕(眞興王, 540-576) 때는 于勒 이 伽倻國으로부터 '가얏고'를 가지고 와서 新羅에 퍼뜨렸는데 이 뒤부터 新羅의 '高'는 伽倻國의 '高' 卽 '가얏고'로 代置된 것 같다. 于勒은 大奈麻(大奈麻)인 주지(注知·法知)·계고(階古)·대사(大舍)인 萬德(萬德)에게 音樂을 가르쳤고, 伽倻國에서 만든 下加羅都(下加羅都)·上加羅都(上加羅都) 等 12曲을 傳受했다. 세 사람은 이 12曲이 雅亭(雅正)치 못하다 하여 5曲으로 줄이고 바로잡아 新羅의 宮中音樂인 大惡(大樂)으로 삼았다. 于勒의 12曲은 一部가 雜戱(雜戱)이고 나머지는 各軍(各郡)의 音樂으로 山神祭(山神祭)와 같은, 軍(郡)마다 베푸는 意識音樂(儀式音樂)으로 보인다. 이러한 軍樂(郡樂)은 <三國史記> 악지에 보이는 新羅의 音樂 20餘曲 속에도 보이고 있다. 新羅의 宗敎意識 音樂의 하나인 八關會(八關會)는 高麗를 거쳐 吏曹에까지 影響을 미쳤다.

南北國 時代 [ 編輯 ]

新羅 [ 編輯 ]

統一 以後의 新羅 에서는 鄕樂 의 發展이 두드러졌다. 特히 伽倻琴 , 거문고 , 鄕琵琶 의 3현과 代金 , 中金 , 소금 의 3粥으로 대표된다. 거문고 音樂은 옥보고 가 智異山에 들어가 지은 30餘 曲이 있으나 傳해지지 않는다. 琵琶 音樂은 212曲, 代金 曲은 324曲, 中金 曲은 245曲, 소금 曲은 298曲의 이름이 傳한다.

또한 唐樂 이 流入된 것도 統一 以後이다. 문무왕 4年에 사람을 보내 唐樂 을 배웠다는 記錄이 남아있고, 各種 遺物에서 唐樂器의 그림을 볼 수 있다.

唐나라 音樂의 比重이 큼에 따라 在來音樂, 卽 鄕樂 (鄕樂)에 對照되는 唐樂 (唐樂)·唐琵琶(唐琵琶)·黨(唐)피리·黨風(唐風)의 梵唄(梵唄) 等 唐나라에서 새로 輸入된 音樂 樣式이 생기고 黃宗祖(黃鍾調)·月條(越調)·平調(平調)·般涉調(般涉調)와 같은 黨音樂에서 쓰던 組들이 쓰이게 되었다. 한便 新羅에 佛敎가 들어와 隆盛해지자 梵唄가 성히 불리고 또 黨에서 새로운 梵唄가 들어오자 新羅風·黨風·黨 以前의 古風(古風) 이렇게 세 가지 梵唄가 불렸다. 新羅의 在來音樂은 伽倻琴·춤·노래로 編成되어 樂器는 伽倻琴만이 쓰이던 것이 高句麗의 거문고 와 西域에 起源을 둔 琵琶가 쓰이고 代金 等 管樂器가 導入되어 新羅의 音樂은 伽倻琴 · 거문고 · 琵琶 · 代金 · 中金 · 소금 , 卽 三絃三竹 (三絃三竹)李 쓰이게 되었다. 최치원(崔致遠)의 <향악잡영(鄕樂雜詠)>에 보이는 금환(金丸)·월전(月顚) 같은 것들이 모두 西域系 雜戱(雜戱)인 것과 같이 西域系 音樂의 影響도 받았다. 統一新羅時代의 唐樂과 享樂은 後世의 唐樂과 향악의 基礎가 되었다.

新羅에서는 音樂을 管掌하는 公式的인 國家 機關이 처음으로 登場하는데, 진흥왕 때는 '音聲署'로 불리다 경덕왕 때 '大樂監'으로 고쳤다. 後 혜공왕 때 다시 音聲서로 바뀌었다.

唐樂의 受容 [ 編輯 ]

新羅時代의 唐樂에 關한 文獻이 全혀 發見되지 않지만, 崔致遠의 <향악잡영(鄕樂雜詠)> 5首에 '鄕樂'이란 말이 있는 以上, 當然히 그 對稱인 唐樂(唐樂)도 벌써 9世紀에 있었을 것이다. 또 鄕琵琶·鄕피리의 對稱으로의 唐琵琶·唐피리가 있는데, 唐琵琶는 문무왕 (文武王) 13年(637)으로 推定되는 계유명(癸酉銘)의 阿彌陀佛三尊(阿彌陀佛三尊) 赦免(四面) 石像(石像)에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唐樂에서 使用되는 朴(拍)李 新羅 鄕樂에까지 借用된 것을 보면, 本來 朴을 使用하는 唐樂度 新羅에 있었을 것이다. 그 밖에 梵唄(梵唄)에도 唐音(唐音)·黨風(唐風)이 있는 以上, 音樂에도 當然히 黨風·唐樂이 있었을 것이다. 한便 高麗의 唐樂은 方向(方響)·唐琵琶·箏·黨籍·唐피리·퉁소·杖鼓·朴 같은 것을 使用하였고, 또 한便 앞에 言及한 계유명 阿彌陀佛三尊 赦免石像은 琵琶·箏·黨籍·퉁소·生·蘇·妖蠱를 보여주는데, 이들을 綜合 考慮하면, 新羅의 唐樂은 方向·唐琵琶·箏·黨籍·퉁소·唐피리·生·蘇·妖蠱·朴을 썼을 것이다. 參考로 <事大司資材場(西大寺資材帳)>에 依하면 780年(보구(寶龜) 11年) 日本에서 臺當惡(大唐樂)은 箏·枇杷·箜篌·方向·生·右·觱篥(對蘇(大小))·蘇·척팔(尺八)·橫的·동발子·갈고(鞨鼓)·갈양·요고(腰鼓)·계루·도고(倒鼓)·계고(楷鼓)·고악고(古樂鼓)·대고(大鼓)·백자(百子:박(拍))를 使用하여 新羅時代의 唐樂에 參考가 된다. 唐피리는 그 最低音이 黃鐘(黃鍾, 다)이고 鄕피리의 最低音보다 4度 높기 때문에, 그런 높은 音域(音域)의 樂器로 演奏되는 唐樂 은 鄕樂에 비하여 靑(淸)하다고 하겠다. 또 漢語(漢語)의 歌詞를 가진 音樂이 大槪 日子日飮式(一字一音式)이고, 拍板(拍板)은 規則的인 길이의 句節을 떼어 주기 때문에, 唐樂은 鄕樂같이 複雜하지 않고 정아하다고 하겠다. 唐樂이 새로 들어온 以後로(12세기 中葉 景德王(景德王) 때로 推定), 在來音樂은 그것이 西域系惡(西域系樂)이건 韓國의 惡이건 모두 享樂이라고 불렸다(최치원의 <향악잡영> 5首의 例와 같이). 그것은 마치, 西洋音樂이 새로 밀려 들어온 後로 在來音樂을 中國系의 音樂이건 韓國의 音樂이건 가리지 않고 모두 國樂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唐樂이 들어온 以後로 唐樂은 鄕樂과 臺(對)를 이루고, 各各 左坊樂(左方樂)과 右坊樂(右方樂)이라고도 稱해졌고, 唐樂은 서(西)에, 享樂은 洞(東)에 位置하여 唐樂과 享樂이 엇갈려 演奏되는 風習이 朝鮮 初期까지 繼續되었다.

西域系惡 [ 編輯 ]

최치원 (崔致遠)의 <향악잡영> 5修(首) 中에서 4首가 鄕樂이 아나라 실은 西域系(西域系, 主로 山岳(散樂)임을 알 수 있다.

  • 狻猊(獅子伎(獅子伎))는 分明히 西凉 또는 舊自戒(龜玆系)의 것이다.
  • 束毒(束毒)은 南面(藍面)의 이인간(異人間)李 북장단에 맞추어 濫分(南奔) 北約(北躍)하는 춤인데, 이 速讀과 日本에 傳해진 考慮(高句麗)惡의 하나인 燒土쿠(宿德)는 모두 中央아시아의 소그디아나(Sogdiana)를 漢字로 標示한 것이다.
  • 월전(月顚)은 群有(群儒)가 술盞을 서로 다투어 마시는 우스운 內容의 것으로, 그 月前이란 文字는 中央아시아의 호탄(kohtan)을 漢字로 表記한 것이다.
  • 對面(大面)은 黃金面色(黃金面色)의 假面을 쓴 사람이 손에 主便(珠鞭)을 쥐고 鬼神을 쫓는 內容의 것으로, 이 對面은 分明히 北齊(北齊, 550-577)의 對面(代面)이다. 要컨대 북을 搖亂하게 치는 西域系 惡(樂)李 저·北을 쓰지 않고 伽倻琴 하나 또는 거문고·橫的·莫目(莫目) 세 가지를 쓰는 三國惡(三國樂)과 다른 것은 마치 濫分(南奔)·北約(北躍)하는 西域系의 巾舞(健舞)와 中國의 寒鴉(閑雅)韓 춤만큼이 다르고, 三國時代의 그 목이 길고 몸이 날씬한 金銅佛像(金銅佛像)과 統一新羅時代의 목이 짧고 몸이 두툼한 佛像만큼이 다르다.
향악의 發展 [ 編輯 ]

統一新羅時代에도 伽倻琴 한 가지 樂器에 맞추어서 춤추고 노래하는 예전 新羅樂 以外에 高句麗惡이나 百濟樂도 存續하였다. 高麗 때와 朝鮮朝 때까지도 百濟樂人 方登山(方等山)· 井邑 (井邑)李 演奏되었고, 高句麗惡人 來遠城(來遠城)·軟癢(延陽)·溟州(溟洲)가 <高麗史>에 殿下였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이 밖에 <三國史記>에 依하면, 新羅樂은 三絃(三絃)·現金(玄琴)·伽倻琴(伽倻琴)·鄕琵琶(鄕琵琶)), 三竹(三竹, 代金·中金·소금(小芩))·拍板(拍板)·대고(大鼓)·歌舞(歌舞)였는데, 新羅樂은 高句麗의 現金·西域의 5現琵琶(鄕琵琶)·黨의 拍板을 여기저기서 攝取한 것이었다. 그런 新羅의 管絃伴奏는 伽倻琴 하나에 맞추어 춤추고 노래하던 예전의 新羅樂에 비하면 큰 發展이라고 하겠다. 한便 拍板을 使用한 點으로 미루어서, 또 現金 曲名(玄琴曲名)의 春朝曲(春朝曲)·秋夕曲(秋夕曲)·幽谷淸聲曲(幽曲淸聲曲)·入實相曲(入實相曲) 等으로 미루어서, 그런 新羅樂은 終戰 것과 달리 덜 複雜하고 더 雅正한 性質의 것이라고 하겠다.

新羅의 거문고 音樂 [ 編輯 ]

거문고 는 高句麗에서 쓰던 樂器로 백제에서도 쓰였으며, 新羅에서는 언제부터 輸入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효소왕 (孝昭王, 643-702) 때 천존고(天尊庫)에 保存되었다는 것이 最高記錄이고 경문왕 (景文王, 在位 861-875) 때에는 民間에 퍼지게 되었는데 그 經緯는 新羅人 沙飡 共營(恭永)의 아들 옥보고(玉寶高)가 智異山 운상원(雲上院)에 들어가 현금곡(玄琴曲) 30曲을 지어 그것이 거문고의 操縱(祖宗)같이 되었다. 그의 襟度(琴道)가 명득(命得)을 거쳐 貴金(貴金)에 이르러 斷絶된 뻔하였다가 다시 安葬(安長)과 그의 아들 克從(克宗)에 依하여 繼承되었다. 克從은 7曲을 지었다. 克從 以後에는 거문고를 業으로 하는 사람이 많았다 한다. 옥보고 가 지은 30曲의 曲名은 <三國史記>에 傳한다.

新羅의 梵唄 [ 編輯 ]

新羅의 梵唄 는 泰和(太和) 4年(830)에 黨에서 돌아온 震撼臺詞(眞鑑大師)에 依하여 油田(流傳)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보다 17年 늦게 黨에서 歸國한 日本勝(日本僧) 自覺大師(慈覺大師)가 著述한 入黨舊法巡禮記(入唐求法巡禮記)에 依하면 中國 山東半島(山東半島) 等주현(登州縣)의 赤山院(赤山院)이라는 新羅人 節에서 본 强勁意識(講經儀式)·一日講義式(一日講儀式)·誦經依式(誦經儀式)에 新羅風(新羅風)·黨風(唐風)·黨 以前의 古風(古風) 等 세 가지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는데 震撼臺詞가 遺傳한 梵唄는 黨의 신풍(新風)이라 하겠다.

新羅의 旋風과 國選의 音樂 [ 編輯 ]

八關會(八關會)는 하늘을 섬기고 名山大川(名山大川)의 龍神(龍神)을 섬기는 古風(古風)으로 선랑(仙郞)·國選(國仙)·船價(仙家)가 主宰하였다. 이 八關會 意識에서는 國選이 歌舞를 아뢰어 龍泉(龍天)을 環列(歡悅)시켜 福을 비는 制度였기 때문에 百戱歌舞(百戱歌舞)를 성히 하였다. 新羅 眞興王 때에 생겨서 崇尙받은 國選 또는 花郞(花郞)은 八關會와 더불어 高麗 때에도 盛行하다가 高麗 睿宗 때부터 漸漸 衰退하였다.

渤海 [ 編輯 ]

渤海는 民間 音樂과 宮中 音樂이 發展함에 따라 太常寺(太常寺)를 設置하고 渤海의 音樂,무영,祭祀에 關한 것은 本來 義父(義部)에서 맡아 보는 業務였으나 渤海 音樂과 舞踊이 發展하는 需要에 따라 새로 獨立的인 機構인 "太常寺"를 設置하고 禮樂과 祭祀를 管理하였다. 渤海敎坊은 발害惡과 渤海무를 直接 管理하는 專業機構이다.

高麗 時代 [ 編輯 ]

高麗를 創建한 太祖(太祖)는 新羅의 古風을 많이 踏襲하였다. 花郞 또는 선랑(仙郞)李 天靈(天靈)과 五惡(五嶽)·名山大川(名山大川)·聳身(龍神)·新機(神抵)에 國家 太平을 비는 八關會(八關會)와 佛敎儀式人 燃燈會(燃燈會)가 그 一例이다. 이 두 가지 意識은 鄕樂과 唐樂뿐만 아니라 百戱(百戱)까지도 包括한 大規模 意識으로, 그 音樂들도 意識과 함께 新羅의 것을 踏襲하였다. 新羅風의 詞腦歌(詞腦歌)는 均如(均如, 917-973)에 依하여 繼續되었다. 그러나 睿宗, 毅宗(毅宗) 때에 이르러서는 新羅의 遺風(花郞 따위)李 많이 衰退하였다. 睿宗 때에는 宋나라로부터 아악 이 導入되었고, 또 宋의 邪惡(詞樂)李 들어와 新羅 때 들어온 黨의 音樂을 밀어냈다. 三國時代부터 내려오는 享樂은 高麗에서도 繼承되었고 새로 많은 향악곡이 생겨 그 一部는 朝鮮 때까지 傳承되었다.

八關會 [ 編輯 ]

名山大川·聳身을 歌舞로 喜悅시켜 福을 비는 制度로 新羅 國選의 遺風(遺風)이다. 燃燈會와 더불어 高麗의 큰 國家意識의 하나로 宮中의 舊正(毬庭)에 다섯길이나 되는 舞臺를 세우고 斜線樂府(四仙樂部) 및 龍·鳳·上(象)·馬(馬)·茶(車)·善(船) 等 여러 가지 形態의 춤을 비롯하여 歌舞百戱가 行해졌다. 이 八關會는 高麗 初期에 極盛期를 이루었고, 그 後 衰退하기는 했으나 高麗 末期까지 繼續하다가 近世朝鮮에 와서 撤廢되었다.

宋의 邪惡의 盛行 [ 編輯 ]

宋의 音樂이 高麗에 들어와 新羅時代에 들어온 黨(唐)의 音樂을 밀어냈다. <高麗史(高麗史)> 樂誌(樂志)에 실린 唐樂(唐樂)이란 것은 事實 全部 宋의 邪惡이다. 社(詞)라는 것은 長短句(長短句)라고도 稱하듯, 市의 매행(每行)李 均一的으로 七言(七言)으로 되어 있지 않고, 7언·5언·7언·6언과 같이 길고 짧다. 그러나 그 不規則的인 길이의 歌詞에 붙여진 音樂의 길이만큼은 規則的으로 8行(井間譜로)이다. <高麗史>의 '樂誌'에 실린 社(詞) 41修 中에서 8首가 中國詩人 游泳(柳永, 11世紀)의 作으로 判明되었는데, 그 판名으로 社가 大槪 11世紀 以後에 高麗에 들어온 것을 알 수 있다. 社(詞)의 하나인 洛陽春(洛陽春)의 歌詞가 <高麗史> 악지에 실려 있고, 歐陽脩(歐陽修, 1007-1072)의 作으로 判明되었는데, 4行 1具(尾前詞와 尾後詞)로 되었다. 또 한便 洛陽春 의 樂譜는 18世紀의 <俗樂원보(俗樂源譜)>에 실려 있는데, 社(詞) 1行(5字-7字)李 規則的으로 井間譜의 8行에 들어 있고, 그 井間譜 8行은 第4行과 第8行에 들어가는 朴(拍)에 依하여 둘로 나뉜다. 위에서 ○票는 그 先行歌詞가 ○標가 달리지 않은 歌詞의 2倍의 詩가(時價)를 가진 것을 標示한다. 이 樂譜에 依하면, 中國의 邪惡(詞樂)은 大槪 日子日飮式(一字一音式, syllabic)이고 間奏曲(間奏曲)과 後奏曲(後奏曲)을 갖지 않은 것을 特色으로 하고 있다.

高麗의 鄕樂 [ 編輯 ]

高麗朝의 鄕樂 은 <高麗史>의 '樂誌'에 29曲에 보여주는데, 그 中 五冠山(五冠山)·居士戀(居士戀)·處容(處容)·沙里花(沙里花)·장암(長岩)·濟危寶(濟危寶)·鄭瓜亭(鄭瓜亭)의 7曲은 이제현(李齊賢, 1288-1367)에 依하여 漢文으로 亦是(譯詩)되어 있어 그것들이 13世紀 以前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말의 詩가(詩歌)는 한時가 4행임에 비하여 3行 또는 5行과 같이 期數(奇數)의 行을 가진 것이 注目된다. 그리고 音樂에서는 그 1行에 두 朴이 들어간다. 3行(行)의 예 歸乎曲(歸乎曲-가시리) 가시리 가시리 /이꼬나난 바리고 가시리 /이꼬나난 위 重즐가 /大平盛代 5行(行)의 예 靑山別曲(靑山別曲) 살어리 살어리 /라ㅅ다 淸算의 살어리 /라ㅅ다 멀위랑 다래랑 /따 먹고 창신의 살어리랏다/얄리얄리 얄라 /얄라성얄라 <大樂後譜(大樂後譜)>와 <時用鄕樂譜(時用鄕樂譜)>에 依하면, 享樂은 大部分 日自首飮食(一字數音式)이어서(예: 西京別曲) 中國音樂의 日子日飮式(一字一音式)의 雅亭(雅正)한 것에 비하여 念慮(艶麗)한 것을 特色으로 하고 있다. 또 鄕樂이 中餘音(中餘音, 間奏)을 가진 點에서도 中國音樂과 다르다. 高麗朝의 享樂은 男女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 많다. 그리고 管絃 伴奏를 가진 노래는 看做와 後周 같은 發達한 形式으로 되었고, 또 日子手淫式이라서 念慮(艶麗)하여 이런 點에서 高麗靑瓷의 華麗한 것에 비할 수 있겠다.

高麗鄕樂의 樂譜 [ 編輯 ]

<高麗史> 악지에 그 名稱이 적힌 많은 향악곡은 大部分 樂譜는 勿論 社說도 傳하지 않지만 多幸히 그 一部는 朝鮮 때까지 傳承되어 樂譜와 社說이 남은 것이 있다. <高麗史>에 名稱이 있는 것으로 現在까지 傳하는 것으로는 동동 (動動)· 西京別曲 (西京別曲)·紫霞洞(紫霞洞)·翰林別曲(翰林別曲)·風入松(風入松)· 鄭瓜亭 (鄭瓜亭) 等이다. 이 밖에 高麗향악곡으로 推定되는 것으로 樂譜가 傳하는 것은 思母曲(思母曲)· 雙花曲 (雙花曲)· 鄭石歌 (鄭石歌)·靑山別曲(靑山別曲)·維鳩曲(維鳩曲)· 가시리 (歸乎曲, 歸乎曲)·相杵歌(相杵歌)·夜深詞(夜深詞)· 滿殿春 (滿殿春)· 井邑 (井邑)·履霜曲(履想曲)·鳳凰吟(鳳凰吟)·북전(北殿) 等의 樂譜가 傳한다. 이들 樂曲은 오늘날 거의 傳承되지 못하고 끊어졌으나 風入松·西京別曲·滿殿春은 朝鮮의 祭禮樂에 編曲되어 이 樂曲만은 只今도 演奏되고 있다.

鄕樂呈才와 唐樂呈才 [ 編輯 ]

呈才 (呈才)란 宮中舞踊을 가리키는 用語이다. 高麗 때에 쓰던 淨齋에 新羅 때부터 내려오는 鄕樂呈才 와 中國에서 들어온 唐樂呈才 가 있는데, 그 制度가 다르다. 唐樂呈才에는 抛毬樂(抛毬樂)·헌선도(獻仙桃)·壽延長(壽延長)·五羊仙(五羊仙)·蓮花臺(蓮花臺) 等이 있는데, 抛毬樂을 例로 들면 竹竿子(竹竿子-呈才에 쓰이는 道具로 긴 나무 막대기의 한쪽 끝에 가는 대 100個를 꽂았다)를 든 여기(女妓) 2人이 管絃伴奏(管絃伴奏) 前引子(前引子)에 맞추어 入場하여 書面, 同時에 音樂이 그치고 竹竿子가 無伴奏로 漢文으로 된 口號를 부른다. 다음에는 無期(舞妓)들이 管絃伴奏로 춤추며 들어와서 서면, 音樂이 그치고 武器들은 無伴奏로 漢文의 唱詞(唱詞)를 부른다. 이어서 管絃伴奏에 맞추어 춤을 추고 나서 龍알을 構文(毬門)의 구멍으로 던져넣는다. 龍알 던지기가 끝나면 竹竿子 2人이 管絃伴奏(後引子)에 맞추어 나와 無伴奏로 '口號'를 부르고 나가고 뒤이어서 武器가 나간다. 이같이 唐樂呈才는 竹竿子의 입退場과 音樂(前引子와 後引子)과 救護 및 武器들의 無伴奏의 唱詞를 그 特徵으로 한다. 鄕樂呈才는 동동(動動, 牙拍)·無㝵舞(無▩舞)·왕모대무(王母隊舞) 等이 있는데 동동을 例로 들면 武器 2人이 들어와서 엎드려 있으면서 音樂에 맞추어 동동의 첫구, 卽 德과 福을 드리는 노래를 부르고 나서 일어나서 管絃樂科 提起(諸妓)의 合唱에 맞추어서 춤을 춘다. 춤이 끝나면 武器는 엎드렸다가 일어나서 退場한다. 이같이 鄕樂呈才는 唐樂呈才에 보이는 竹竿子의 人者(引子)와 口號가 없고 創社처럼 無伴奏로 武器가 노래하지 않고, 新羅時代의 무척(舞尺)·金尺(琴尺)·笳尺(歌尺)과 같이 高麗時代의 鄕樂呈才度 武器·管絃伴奏·女聲合唱(女聲合唱)의 3部分으로 이루어진 것을 特徵으로 하였다.

朝鮮 時代 [ 編輯 ]

世宗 , 世祖 때에는 아악 朴堧 에 依해서 整理되고, 樂器都監을 設置하여 樂器를 直接 만들어 썼으며, 井間譜 , 吳音樂步等에 依한 記譜法이 窓안되고, 雅樂譜가 編纂되었다. 世宗大王은 定大業, 保太平 等을 直接 作曲하였다.

人組 21年에는 辭職 과 文廟祭禮樂이 定해지고, 仁祖 25年 雅樂을 다시 쓰게 되었으며, 광해군 , 孝宗 , 英祖 때, 樂學軌範 을 復刊하고 樂器 를 다시 만들었다. 宗廟祭禮樂과 三絃 六角에 依한 音樂 이 使用되었다. 또한 歌曲, 歌詞, 時調 等의 聲樂曲이 널리 불렸다. 特히 英祖 以後, 一般 百姓들에게서 판소리 , 散調 , 雜歌 等이 盛行하기 始作하였다. 肅宗 때의 판소리 體系化는 큰 發展이라 할 수 있다.

朝鮮 前期 [ 編輯 ]

李成桂(李成桂)가 朝鮮을 세운 뒤 抑佛양유(抑佛揚儒) 政策에 따라 禮樂(禮樂)을 國是(國是)로 삼았다. 정도전 等은 建國과 더불어 많은 朝鮮의 創業송가(創業頌歌)를 지었으나, 樂曲은 高麗朝의 音樂을 引用할 수밖에 없었다. 차츰 制度가 整備되고 儒敎가 大興한 世宗 때에 이르러 前兆(前朝)의 音樂을 많이 改刪(改刪)하였다. 世宗은 朴堧을 시켜 아악 을 整備하고 律官과 樂器를 製作하였고, 鄕樂과 鼓吹樂(鼓吹樂)에 期하여 〈 保太平 (保太平)〉, 〈 定大業 (定大業)〉을 만들고 〈 與民樂 (與民樂)〉, 〈 致和平 (致和平)〉 等을 制定하였으며, 有量樂譜(有量樂譜)인 井間譜를 만들어 《 世宗實錄 (世宗實錄)》에 실었다. 世祖는 父王(父王)의 音樂事業을 이어받아 〈保太平〉과 〈定大業〉을 宗廟祭禮樂에 쓰게 하여 오늘날까지 傳하게 하였으며, 井間譜를 改良하였고, 五音略譜(五音略譜)를 내어 《 世祖實錄 》 樂譜에 실었다. 朝鮮 前期의 音樂整備 製作事業은 成宗 때까지 繼續되었고, 特히 聖賢(成俔)李 撰述한 《 樂學軌範 (樂學軌範)》이 出刊되어 韓國 最初로 獨立한 綜合 惡書(樂書)가 나왔다. 연산군 (燕山君)의 暴政(暴政)과 壬辰倭亂 · 丙子胡亂 을 거치는 동안에 朝鮮 初期까지 傳하던 三國時代 및 高麗音樂은 消滅되고 唐樂은 衰退하여 鄕樂化되었으며 새로운 향악곡이 생겨 朝鮮 後期 音樂으로 바뀌게 되었다.

特徵 [ 編輯 ]

朝鮮 前半期에 世宗은 채원정(蔡元定)의 《律呂信書(律呂新書)》에 刺戟되어, 樂理(樂理)를 硏究하였고 朴堧에게 律官(律管)을 製作시켰고, 有量樂譜를 發明하였고, 成宗 때 聖賢은 《樂學軌範》 같은 獨立한 樂書를 撰述하여 音樂의 學問面에서 큰 發展을 보았다. 또 한便 音樂 藝術面에서는 儒敎의 禮樂(禮樂) 思想의 影響을 받아 雅樂이 重要視되어 雅樂署(雅樂署)가 獨立하였고 唐樂과 향악의 男女相悅之詞度 改刪(改刪)되었고, 그 때 特히 享樂은 有識한 漢文의 歌詞를 많이 써서 그런 歌詞에 붙여진 音樂도 漸次 唐樂같이 淡淡해져 朝鮮 前期의 享樂은 朝鮮의 白瓷에 비할 수 있게 되었다.

創業송가 [ 編輯 ]

太祖 2年에 정도전 이 〈納氏歌(納氏歌)〉, 〈窮獸奔曲(窮獸奔曲)〉, 〈靖東方曲(靖東方曲)〉을 지어 올렸고, 〈文德曲(文德曲)〉, 〈夢金尺(夢金尺)〉, 〈受寶籙〉 等 神樂을 線撰하고 4年에는 河崙 (河崙)李 〈근천정(覲天庭)〉, 〈壽命名(受明命)〉 等 樂章을 지어 올렸다. 〈納氏歌〉는 高麗의 〈靑山別曲〉을, 〈靖東方曲〉은 〈西京別曲〉의 曲에 歌詞만 새로 얹은 것이다. 이와 같은 近世朝鮮 創業宋家의 製作은 世宗 때까지 繼續되었다. 朝鮮 初期까지도 高麗 때의 音樂을 많이 引用하였지만 儒敎가 大興한 世宗 때에 이르러서 前條의 音樂을 많이 開山하였다. 朴堧·孟思誠(孟思誠) 等 音樂理論家들을 動員하여 아악 을 整備하고 享樂을 創作하고 樂器를 製作하며 樂譜를 創案 編纂하는 等 近世朝鮮 音樂의 基礎를 닦았다.

唐樂과 享樂 [ 編輯 ]
唐樂

儒敎 特히 中國의 禮樂思想(禮樂思想)은 아악 의 完成을 促進하였을 뿐만 아니라, 唐樂을 再檢討시켰다. 卽, 의 社(詞)의 大部分이 男女相悅之詞(男女相悅之詞)라 해서 批判되었고 例外로 〈水龍吟(水龍吟)〉, 〈夏雲峯(夏雲峰)〉, 〈億取消(憶吹簫)〉의 歌詞만이 楚亭(稍正)하다 해서 그 曲은 그대로 쓰고 원歌詞(元歌詞)를 버리고 《 市警 (詩經)》의 歌詞를 借用하였다. 이런 歌詞의 改變은 太宗·世宗·中宗 때에 자주 發見된다. 例를 들면 中强調(中腔調)에다 《詩經》의 錄名(鹿鳴)의 歌詞를 붙이는 따위이다.

鄕樂

朝鮮 電氣는 高麗朝의 音樂을 襲用(襲用)하였거나, 例를 들면 <大樂後譜(大樂後譜)>의 <翰林別曲(翰林別曲)>, <雙花店(雙花店)>, <振作(眞勺)>과 <時用鄕樂譜(時用鄕樂譜)>의 <風入松(風入松)>, <夜深詞(夜深詞)> 또는 高麗朝의 音樂에다가 新制歌詞(新製歌詞)를 붙이고 曲名을 바꾸기도 하였다. 例를 들면 <納氏歌(納氏歌)>의 原曲은 <靑山別曲>, <靖東方曲>의 原曲은 <西京別曲>, 그러나 重要한 것은 世宗 때에 <保太平>, <定大業>, <發想(發祥)>, <鳳來儀(鳳來儀- 前引子, 與民樂, 致和平, 醉豊享, 後引子의 모음曲)>, <鳳凰吟(鳳凰吟)>, <滿殿春(滿殿春)의 신악(新樂)>이 制定되고 <世宗實錄>에까지 그 樂譜가 記錄된 事實이다.

代表的인 音樂 [ 編輯 ]
保太平과 定大業

《保太平》은 先王의 文德(文德)을, 《定大業》은 그 武功을 各各 漢文으로 稱頌한 것이고 音樂은 鼓吹樂에 期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定大業》 中의 火太(和泰)와 順應(順應)의 音樂은 各各 高麗 때의 〈西京別曲〉과 〈滿殿春〉의 曲에서 借用하였다. 《保太平》 11曲은 모두 林鐘宮(林鍾宮)의 平調(平調)이고, 《定大業》 15曲은 모두 南呂宮(南呂宮)의 界面調(界面調)이다. 元來 《保太平》과 《定大業》은 世宗 때 年例(宴禮)에 演奏되었는데, 世祖 9年(1464)에 이르러 鄕樂이 雅樂 代身에 宗廟祭享惡으로 採用되었다. 이에 따라서 짧은 祭享(祭享) 節次에 맞게 改革된 宗廟樂이 비록 後世에 그 리듬은 變改되었지만 朝鮮 末까지 約 500年間 繼續되었다. [5]

發想

〈發想〉 11曲은 歌詞가 漢文으로 되었고 그 音樂도 唐樂같이 6音階로 되었는데, 이 鼓吹曲(鼓吹曲)은 世祖 때 廢用되었는지 《大樂後譜(大樂後譜)》에는 보이지 않는다.

龍飛御天歌

한글이 1443年에 創製되었고, 1445年에는 操縱(祖宗)의 성덕(聖德)과 神功(神功)을 歌詠(歌詠)하고 後孫에게 敬天勤民(敬天勤民)을 銘心케 하는 <龍飛御天歌> 125張을 한글로 지었고, <致和平(致和平)>과 <醉豐亨(醉豊享)>이라고 稱하였다. <世宗實錄>에는 <致和平>과 <醉豐亨>이 各各 125張의 樂譜를 모두 記載하였으나, 實際로는 그 中에서 <致和平> 3期(三機)의 첫 16張과 拙匠(卒章)만 연주하고, <醉豐亨>의 첫 8張과 拙匠만 연주하였다. <大樂後譜>의 <致和平> 1·2期(機)의 境遇에는 첫 3張만, 3基의 境遇에는 첫 16張만 技保(記譜)되었고, <醉豐亨>의 境遇도 첫 8張만 技保되었다.

與民樂

<龍飛御天歌>를 漢文으로 飜譯하고, 125張 中에서 첫 4張과 終章만을 떼어서 歌詞를 中國系의 鼓吹曲에 붙여서, 그것을 <與民樂>이라고 稱하였다. <致和平>과 <醉豐亨>은 오늘날 演奏되지 않고, <與民樂>만은 비록 그 歌詞를 부르지 않지만 只今까지도 管絃合奏로 演奏된다. <鳳凰吟(鳳凰吟)>(林鍾宮 平調)과 <滿殿春(滿殿春)>(林鍾宮 界面調)은 <處容歌(處容歌)>의 속된 歌詞를 卯正正樂(廟廷正樂)의 것으로 改撰한 것이다.

樂譜地 [ 編輯 ]
世宗實錄의 樂譜

〈步대평〉, 〈定大業〉, 〈發想〉, 〈與民樂〉, 〈致和平〉, 〈醉豐亨〉, 〈鳳凰吟〉, 〈滿殿春〉 等 世宗 때 音樂이 《世宗實錄》 第 136卷~第147卷에 樂譜를 남기고 있는데, 그 樂譜는 1行 32楨幹(井間)으로 되었고, 그 停刊은 時間 單位를 表示하여, 그것이 韓國뿐만 아니라 東洋에서 最高(最古)의 有量樂譜(有量樂譜)이고, 西洋의 五線紙보다 約 2百年 늦다. 그 1行 32停刊이 世祖에 依하여 1行 16楨幹 2行으로 개서(改書)되었고, 朝鮮後期에 이르러서는 16停刊이 大部分 20井間으로 變하여진 채로 只今까지 繼續 使用되고 있다. 이 世宗의 井間譜는 記譜法 史上 劃期的인 것이다. 《世宗實錄》 樂譜에는 〈會禮樂〉, 〈祭禮樂〉, 〈保太平〉, 〈定大業〉, 〈發想〉, 〈鳳來儀〉, 〈前引子〉, 〈與民樂〉, 〈致和平〉, 〈醉豐亨〉, 〈後引子〉, 〈鳳凰吟〉, 〈滿殿春〉 기타 宗廟社稷 等의 祭禮樂이 실려 있다.

世祖實錄의 樂譜

《世祖實錄》 48卷~49卷에 실린 樂譜이다. 《世宗實錄》 樂譜는 1行 32停刊이나 《世祖實錄》 樂譜는 1行 16井間으로 縮小되었고, 3·2·3·3·2·3井間으로 갈라 6大江(六大綱)으로 區分하였는데 이 16楨幹 6大江法은 朝鮮 末期까지 繼續되었다. 《世宗實錄》은 律字譜로 되었으나 《世祖實錄》은 五音略譜(五音略譜)로 되었고 唐樂에서 쓰던 工尺譜(工尺譜)를 竝用하였다. 《世祖實錄》 樂譜에는 〈保太平〉, 〈定大業〉 等 宗廟祭禮樂과 원구祭樂이 실려 있다.

安契鷺譜

宣祖 5年 안상이 編纂한 樂譜로 一名 <琴合字譜(琴合字譜)>라 한다. 便將 眼象이 明宗 16年에 掌樂院(掌樂院) 僉正(僉正)이 되어 樂士 홍선종(洪善終)·樂工 허억봉(許億鳳)·이무금(李無金)과 함께 이 樂譜를 編纂하고 宣祖 5年에 冊을 낸 것이다. 거문고의 五音略譜·合字譜 및 肉譜(肉譜)와 노래와 社說을 적고 피리의 五音略譜 및 肉譜·長考樂譜를 곁들여서 總報(總譜)를 만들었다. 이 樂譜에는 <慢大葉(慢大葉)>, <鄭石歌(鄭石歌)>, <북전(北殿)>, <思母曲(思母曲)> 같은 高價요(古歌謠)가 실렸는데, 朝鮮 後期에 크게 성했던 歌曲의 실마리가 되는 <慢大葉>, <북전>의 最高 樂譜로서 朝鮮 前期音樂과 後記音樂을 比較하는 데 重要한 資料가 된다. 고 전형필(全瑩弼) 所長으로 寶物 第283號로 指定되었다.

時用鄕樂譜

壬辰亂 以前에 刊行된 것으로 보이는 著者를 알 수 없는 古版本(古版本) 樂譜. 6·25戰爭 後에 世上에 알려졌다. <世祖實錄> 樂譜와 같이 6大江 16政間에 五音略譜로 되었다. 4行을 한 묶음으로 하여 제1행은 五音略譜, 第2行은 杖鼓의 樂譜, 第3行은 朴(拍)의 樂譜, 第4行은 樂曲의 社說을 적었다. 이 樂譜에는 <思母曲>, <西京別曲>, <靑山別曲>, <歸乎曲(歸乎曲-가시리)> 等 많은 高麗歌謠와 <納氏歌> 等 朝鮮 初期의 樂歌와 <城隍飯(城隍飯)>, <內堂(內堂)>, <三城大王(三城大王)>, <大國(大國)> 等 10餘曲의 巫俗歌謠가 있어서 高麗 享樂을 硏究하는 데 貴重한 資料이다. 이 樂譜의 發見으로 20餘曲의 高歌謠가 새로 알려진 것이다. 原本은 이겸로(李謙魯)가 所藏하고 있고 1954年 延世大學校 東方學硏究所에서 影印本이 나왔다.

音樂 書籍 [ 編輯 ]
樂學軌範

朝鮮 成宗 때(1493) 聖賢이 主가 되어 撰述한 9卷으로 된 綜合惡書이다. 이 惡書는 第1卷에 惡(樂)의 原理, 第2卷에 樂器陳設圖說(樂器陳設圖說), 第3, 4, 5卷에 呈才圖說(呈才圖說), 第6, 7卷에 악기도설(樂器圖說), 第8, 9卷에 儀物(儀物), 官服圖說(冠服圖說)을 仔細히 記述하여 韓國에서 最初로 獨立된 惡書(樂書)이다. 勿論 그 以前에 朴堧이 惡書 纂集을 提議하였지만 實現치 못한 것 같고, <世宗實錄> 128卷에 악기도說과 樂懸圖가 一部 揭載되었으나 <樂學軌範>같이 全般的인 것이 못된다. 16世紀 末 壬辰倭亂으로 樂士가 四方으로 흩어지고 樂器가 破壞되었어도, 잿더미에서 救出된 <樂學軌範>으로 인하여 樂器를 製造하고, 音樂의 高弟(古制)를 復舊할 수 있었다. 古樂 復舊에 不可缺한 <樂學軌範>은 秒間 以後 광해군(光海君)·孝宗(孝宗)·英祖(英祖), 1933年, 1968年 等 여러 番 伏角(複刻)되었다.

朝鮮 後期 [ 編輯 ]

壬辰倭亂 丙子胡亂 을 겪는 동안에 韓國의 文化는 큰 試鍊을 當하여 많은 變化를 가져왔다. 朝鮮의 音樂도 이 때를 契機로 變化가 일어났다. 朝鮮 電氣에 힘써 갖추어 놓았던 아악 은 亂離통에 흩어졌다. 後에 文物이 바로잡히자 아악 을 再建하였으나, 規模는 훨씬 줄어들고 말았다. 朝鮮 電氣 音樂에 많이 傳하던 高麗朝의 鄕樂과 宋의 邪惡은 大部分 喪失되었거나 變質되었다. 唐樂은 鄕樂化되었다. 그러나 多幸히 命脈을 維持한 <靈山會上>, <步虛子> 歌曲(<慢大葉>) 같은 樂曲은 많은 變奏曲을 낳아서 朝鮮 後期의 向樂曲의 큰 比重을 차지했다. <靈山會上>은 厖大한 器樂 모음曲으로 되었고, 歌曲·家事·時調는 많은 種類가 생겼다. 한便 英祖 以後에는 庶民文化의 擡頭에 따라 판소리 · 散調 ·雜歌와 같은 民俗音樂이 생겨 民間에 流布되었다.

特徵 [ 編輯 ]

朝鮮 後期 音樂은 民間音樂의 擡頭와 諧謔的인 點을 特徵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漢詩(漢詩)에 臺가 되는 우리말의 <靑丘永言>, <九雲夢>에 臺가 되는 鄕土色이 짙은 <春香歌>, 竹林七賢(竹林七賢)의 그림에 臺가 되는 檀園(檀園) 金弘道 및 蕙園(惠園) 申潤福의 風俗圖의 特徵과도 같다.ㅋ

唐樂과 향악의 相互變化 [ 編輯 ]

唐樂度 世宗 때의 <大樂前譜(大樂前譜)>에는 14曲이 技保되었지만, 朝鮮 後期의 <俗樂원보(俗樂源譜)>에는 겨우 <步虛子>와 <洛陽春> 2曲밖에 없고, 그 두 曲만이 唐樂으로 只今도 演奏되고 있다. 그 <步虛子>도 <大樂後譜>에는 1行 16井間으로 技保되었는데, <俗樂원보>에 이르러서는 1行 20井間으로 技保되어서, 리듬에서 變化된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特히 <步虛子>는 時代가 내려옴에 따라 原音(元音) 사이에 姦淫(間音)이 漸漸 들어가서, 唐樂인지 鄕樂인지 區別하기가 어려울 地境으로 變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世宗 때만 하더라도 唐樂器는 西쪽에, 鄕樂器는 東쪽에 따로 分離되어서 唐樂과 享樂이 交代로 演奏되었는데, 朝鮮 後期에는 唐樂器와 鄕樂器의 合奏로 되어 버려, 唐樂과 享樂을 區別하기 어렵게 되었다. 또 한便 享樂도 <大樂前譜(大樂前譜)>에 실린 世宗 때 된 <致和平(致和平)>, <醉豐亨(醉豊亨)>, <鳳凰吟(鳳凰吟)>, <滿殿春(滿殿春)>은 勿論 <大樂後譜>에 실린 <振作(眞勺)>, <履霜曲(履想曲)>, <納氏歌(納氏歌)>, <橫殺門(橫殺門)>, <西京別曲>, <翰林別曲(翰林別曲)>, <雙花店(雙花店)>, <紫霞洞(紫霞洞)> 等 많은 曲이 朝鮮 後期에는 없어지고, 그 中에서 겨우 <感君恩(感君恩)>, <慢大葉(慢大葉)>, <북전>, <동동(動動)>, <井邑(井邑)>, <靈山會上>이 남았다가, <感君恩>, <慢大葉>, <북전>은 朝鮮 後期 늦게 없어져서 只今에 傳하지 않고, <동동>, <井邑>, <靈山會上> 等만 只今도 演奏되는데, 그것도 <大樂後譜>의 曲과의 關聯性을 찾을 수 없도록 變해 버렸다. <步虛子> 같은 唐樂이 原音에 姦淫을 追加하여 鄕樂化韓 것과 같이, 또 享樂도 唐樂의 스타일로 接近하였다. 卽 <定大業(定大業)>의 革政(赫整)은 元來 享樂이어서, <大樂後譜>에서는 1楨幹(井間), 2楨幹, 3楨幹, 5停刊같이 不規則한 市價(時價)의 音으로 되었는데, <俗樂원보>에 이르러서는 均一하게 1井間의 音으로 되어, 그 音樂은 中國 音樂의 스타일에 가까워졌다. 또 <井邑>, 一名 <壽齊天(壽齊天)>도 唐樂의 <洛陽春>만큼이나 한音 한음을 느릿느릿한 템포로 연주하면서 鄕樂에 獨特한 꾸밈音(裝飾音)과 延音(連音)을 지녀서, 그前의 樂譜에서는 볼 수 없는 威嚴을 새로 갖게 되었다. 이같이 朝鮮 後期의 宮中에서는 享樂도 中國 古典樂같이 緩舒하고 威嚴있게 연주하도록 政府가 申飭(申飭)하였으나 民間에서는 音樂이 漸漸 빨라지는 데다가 歌詞도 諧謔的인 傾向으로 흘렀다.

代表的인 音樂 [ 編輯 ]
靈山會上의 發達

靈山會上 (靈山會相)>은 《大樂後譜》에서 보는 바와 같이, 佛敎의 노래로 武道에 쓰였다가 後에 《遊藝志(遊藝志)》에서 보는 바와 같이, 중령산(中靈山), 세령산, 가락덜이 같은 본(本) 靈山의 빠른 變奏曲과 〈靈山會上〉의 音樂과 關係없는 上絃도드리, 下弦(下弦), 念佛, 타령, 軍樂(軍樂)이 追加되었고, 나중에는 더 빠른 가벼운 曲으로 界面(界面) 가락도드리, 兩淸(兩淸), 羽調(羽調) 가락도드리가 끝에 달렸다. 이같이 선비들이 즐기는 〈靈山會上〉 같은 室內樂이 威嚴으로 始作하였다가 正樂(正樂)을 벗어나서 가벼운 弄調(弄調)로 끝나는 것을 볼 수 있다.

歌曲의 發達

歌曲(歌曲)은 朝鮮 前期의 <大樂後譜>와 안상의 <琴合字譜(琴合字譜)>에는 <慢大葉(慢大葉)>萬 보이지만, 壬辰倭亂 後의 <梁琴新譜(梁琴新譜)>에는 <慢大葉> 外에 그보다 빠른 <中大葉>이 보다 많이 나오고, 利益의 <星湖僿說(星湖僿說)>에 依하면, 18世紀 當時에 벌써 第一 느린 <慢大葉>은 사람들이 그것을 싫어하여 없어진 지 오래이고, 그보다 좀 빠른 <中한잎(中大葉)>도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적고, 當時에 通用된 것은 빠른 잦은한닢(삭대엽)뿐이었다. <遊藝志>에는 그 잦은한잎보다 더 빠르고, 歌詞가 諧謔的인 弄(弄), 樂(樂), 便(編)李 끝에 달린다.

歌詞의 盛衰

家事(歌詞)로 말하면 1728年에 刊行된 <靑丘永言(靑丘永言)>에 <相思曲(相思曲, 相思別曲)>, <春眠曲(春眠曲)>, <勸酒歌(勸酒歌)>, <白鷗詞(白鷗詞)>, <길軍樂(軍樂)>, <襄陽歌(襄陽歌)>, <어부사>, <處事가>, <黃鷄가(黃鷄歌)>, <梅花가>, <觀燈歌(觀燈歌)>, <歸去來(歸去來)>, <還山別曲(還山別曲)>, <樂貧歌(樂貧歌)>, <江村別曲(江村別曲)>, <關東別曲(關東別曲)>의 16曲이 보이고 그 中에서 뒤에 있는 6曲을 잃고, 代身 <竹枝詞(竹枝詞)>와 <首陽山歌(首陽山歌)> 2曲을 얻어 모두 12曲이 傳唱(傳唱)되고 있다. 여기서 注目되는 點은 <靑丘永言>에 벌써 雜歌인 <白鷗詞>와 <梅花가>가 歌詞에 섞인 點이다.

時調의 發達

時調(時調)는 歌曲인 數大葉(數大葉)의 歌詞를 車用하나, 韓脩를 5張 代身 3章으로 나눈다. 時調의 樂譜는 서명응(徐命膺)의 <遊藝志(遊藝志)>와 이규경(李圭景)의 <歐羅鐵絲琴洑(歐邏鐵絲琴譜)>에 보여서, 時調는 英祖朝(英祖朝)의 이세춘(李世春)에서 나왔다는 말을 首肯케 한다. 後에 時調도 平時調(平時調) 外에 지름時調와 辭說時調(辭說時調)를 派生한 것도 잦은한닢의 境遇와 비슷하다.

판소리의 擡頭

異常은 上流層에서 愛好된 音樂들이고, 庶民層에서는 판소리와 散調 같은 全혀 새로운 音樂이 생겼다. 판소리는 광대가 부채를 들고 서서 그와 마주 않은 鼓手(鼓手)의 북장단에 맞추어서 <春香歌> 같은 긴 이야기를 소리·아니리(白)·발림(科)으로 敍述하여 觀衆을 울리고 웃기는 一種의 劇音樂(劇音樂)이다. 이 판소리는 <漫畫集(晩華集)>(유진한:柳振漢, 1711-1791)의 家事 <春香歌> 200區에 依하여, 늦어도 英祖朝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송만재(宋晩載)의 <觀優戱(觀優戱)>에 依하면, 18世紀의 판소리에는 <春香歌>, <沈淸歌>, <박타령>, <토끼타령>, <華容道(華容道)> 以外에 <裵裨將가)>, <壅固執>, <변강쇠타령>, <장끼타령>, <江陵梅花가>, <無宿(武叔)타령>, <假짜新鮮타령> 等 12가지가 있었다. 그 中 只今은 먼저 다섯가지만 傳해진다(<오가전집>에서처럼). 이 판소리에 關한 重要한 文獻은 신재효(申在孝)의 <광대가(廣大歌)>이다.

伽倻琴 散調의 盛行

伽倻琴 散調 는 伽倻琴 獨奏曲으로 진양調·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의 順序로 演奏되고, 진양調는 羽調(羽調)로 始作되어 界面調로 그친다. 이 伽倻琴 散調는 光州(光州)의 衙前人 김창조(金昌祖 또는 昌祚, 約 1865-1929)가 만들어냈다고 하며, 그 後 그의 弟子 안기옥(安基玉), 한성기(韓成基)에 依하여 普及되었다. 이 器樂 獨奏曲은 마치 판소리같이 感情을 充分히 表出하여 一般에 實感을 주어 愛好되었다.

慢大葉

慢大葉(慢大葉)은 <安契鷺譜>, <梁琴新譜> 等 朝鮮 前期·中期 樂譜에 나타나는 옛 聲樂曲으로 <中大葉>과 더불어 歌曲의 源流로 推定되는 樂曲이다. 社說은 時調詩(時調詩)로 되었고 歌曲과 같이 5章으로 區分된다. 朝鮮 初期에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옛 樂譜에는 장대엽·늦은한닢·진화엽(晋化葉)으로 보이며 <安契鷺譜>에 처음 보이고 <遊藝志> 때에는 보이지 않는다.

中大葉

中大葉(中大葉)은 <梁琴新譜>, <遊藝志> 等 朝鮮 中期 樂譜에 나타나는 옛 聲樂曲으로 朝鮮 中期 <慢大葉>에서 派生되어 <數大葉> 卽 現存 歌曲의 源流가 된 것으로 보인다. 社說은 時調詩로 되었고, 平調·平調界面調·羽調·羽調界面調로 4條가 있었고 各 組마다 제1·제2·제3의 파생곡이 있었다. <梁琴新譜>에서 처음 보이고 <西琴譜(西琴譜)>, <일사금보(一蓑琴譜)>에는 보이지 않는다. 中한닢이라고도 부른다.

북전

북전(北殿)은 <安契鷺譜>에서부터 <遊藝志> 等 朝鮮 前後期 樂譜에 보이는 옛 聲樂曲. 高麗 때부터 朝鮮 後期까지 꾸준히 불리던 樂曲이었으나 朝鮮 末期에 끊어지고 말았다. 社說은 時調詩를 얹어부르는 等 歌曲과 비슷한 形態의 聲樂曲으로 歌曲과 密接한 關係가 있는 曲이다. 平調·平調界面調·羽調 等 여러 條가 갖추어지기도 했다. 文獻에는 <後庭花(後庭花)>, <後殿(後殿)>으로도 보인다. <뒤篆> 或은 <臺받침>으로도 부른다.

樂譜 [ 編輯 ]
梁琴新譜

《梁琴新譜(梁琴新譜)》는 光海君 2年(1610) 梁德壽(梁德壽)가 엮은 거문고 版本 樂譜이다. 樂士 梁德壽가 壬辰亂을 避하여 南原에 살았는데 거기서 예로부터 잘 알던 任實 縣監 김두남(金斗南)을 만나 그의 勸에 依하여 樂譜를 냈다. 6大綱에 五音(五音-宮商角徵羽)·合字譜·肉譜를 같이 적어서 알기 쉽게 엮었다. 內容은 <慢大葉>, <북전>, <中大葉>, <感君恩> 等 比較的 簡略하나 <中大葉>은 4兆(四調-平調 羽調 平調界面調 羽調界面調)를 갖춘 點에서 뒤에 없어진 中大葉 硏究에 貴重한 資料이다. 朝鮮 電氣 音樂과 後期 音樂의 經過過程을 보여주는 樂譜이다. 이겸로(李謙魯) 所長으로, 通文館(通文館)에서 影印本이 나왔다.

현금동문유기

《현금동문유기(玄琴東文類記)》는 光海君 12年(1620)에 이득윤(李得胤)이 엮은 거문고 樂譜. 이득윤이 光海君 때 벼슬을 그만두고 草野에 묻혀 지내며 엮은 것이다. 合字譜로 되었고 停刊法은 弱하였다. 이 樂譜는 안상·造成(趙晟)·迫近(朴謹) 等 여러 사람의 樂譜를 引用한 點이 特色이다. 이 樂譜에 실린 樂曲은 <慢大葉>, <북전>, <中大葉>, <數大葉>으로 <梁琴新譜>와 비슷하다. 李秉岐가 發見하여 이득윤 自筆古本(自筆稿本)임을 밝혀냈다.

現金腎症假令

《現金腎症假令(玄琴新證假令)》은 肅宗 6年(1680) 神聖(申晟)李 엮은 거문고 樂譜. 合字譜와 肉譜를 함께 적었으나 停刊法은 弱했다. <慢大葉>, <中大葉>, <북전>, <數大葉>, <與民樂>, <步虛子> 等이 실렸는데, <中大葉>, <數大葉>은 4兆(四調-平調·羽調 平調界面調·羽調界面調)를 갖추었고 各各 제1·2·3곡이 나타나 있어서 <中大葉>과 <數大葉>의 硏究에 重要한 資料가 된다. 이혜구 所長이었으나 原本은 흩어지고 廳舍 謄本이 國立國樂院에 傳한다.

白雲巖金寶

《白雲巖金寶(白雲庵琴譜)》는 肅宗 무렵에 엮어진 編者 未詳의 거문고와 퉁소樂譜. 肉譜에 合字譜를 곁들였으나 停刊法은 弱하였다. 內容은 <中大葉>, <북전>, <感君恩>, <慢大葉> 單價(短歌)·<數大葉>으로 <中大葉>과 <북전>의 比重을 크게 다루었고 보기 드문 單價 및 퉁소의 平調界面調 樂譜가 실려 貴重한 硏究資料가 되고 있다. 이혜구 所長으로, 이 樂譜에 실린 單價 社說의 作者 백우암이 樂譜의 편자로 推定되어 <白雲巖金寶>라 불리고 있다. <梁琴新譜>와 <現金腎症假令>과의 사이에 엮어진 것으로 推定되고 있다.

大樂後譜

《大樂後譜(大樂後譜)》는 英祖 35年(1763) 徐命膺 等이 王命을 받고 <大樂前譜(大樂前譜)>와 <大樂後譜>로 編纂한 樂譜. <大樂前譜>는 世宗朝 樂譜를 모아 엮었다 하며 內容은 唐樂系 音樂이 主가 되고, <大樂後譜>는 세조조 樂譜를 모아 엮었다 하며 內容은 <世祖實錄> 樂譜의 <保太平>, <定大業> 等 祭禮樂譜와 그 밖의 많은 <振作>, <滿殿春>, <동동>, <井邑> 等 高麗歌謠가 主가 되는 施用(時用)의 鄕樂譜이다. 電報는 唐樂系 音樂의 貴重한 資料인데 朝鮮 末期에 아깝게 亡失되고 候補는 國立國樂院에 傳하여 鄕樂硏究에 貴重한 資料가 되고 있다. 記譜法은 <世祖實錄> 樂譜와 같이 6大江 停刊法에 五音略譜로 되었다.

俗樂원보

《俗樂원보(俗樂源譜)》는 영·貞操에 編纂된 것으로 보이는 編者 未詳의 官撰 版本 樂譜. 6大江 停刊法에 律字譜로 되었다. 內容은 宗廟·務安王墓(武安王廟)·景慕宮(景慕宮)의 祭禮樂과 <與民樂>, <洛陽春> 그리고 거문고·伽倻琴·琵琶의 宗廟祭禮樂保와 方向步(方響譜)로 엮어졌다. 方向보는 9停刊法을 썼다. 國立國樂院에 所藏되어 傳한다.

遊藝志

《遊藝志(遊藝志)》는 서유구 (徐有渠)의 著書 《林園經濟十六志(林園經濟十六志)》 가운데에 실린 樂譜. 大槪 正祖 무렵에 編纂된 것으로 推測된다. 徐有榘는 <大惡前候補>를 엮어 바친 徐命膺의 孫子이다. 거문고 樂譜는 肉譜에 合字譜를 곁들였고, 洋琴(洋琴)樂譜는 律字譜(律字譜)로 되었고, 笙簧(笙簧)樂譜는 수자步(數字譜)로 적었다. 內容은 <中大葉>, <數大葉>, <弄葉(弄葉)>, <羽樂(羽樂)>, <界樂(界樂)>, <編數大葉(編數大葉)> 等 歌曲 樂譜와 <靈山會上>, <靈山會上이層制止(靈山會上二層除 指)>, <細靈山>, <三絃回入(三絃回入)>, <念佛타령>, <軍樂流入타령(軍樂流入打鈴)> 等 <靈山會上> 樂譜를 실었고 洋琴補에 時調樂譜가 있다. 이 樂譜는 英祖 以前의 音樂과 高宗 때의 音樂을 比較硏究하는 데 다리 구실을 하는 貴重한 樂譜이다. 서울대학교 中央圖書館과 高麗大學校 圖書館에 所藏되었다.

歐羅鐵絲琴步

《歐羅鐵絲琴步(歐邏鐵絲琴譜)》는 이규경 (李圭景)李 純祖 때 엮은 洋琴 樂譜. 洋琴은 朝鮮 中期에 들어온 西洋樂器로, 이 樂器로 된 樂譜로는 <歐羅鐵絲琴步>와 <遊藝志>의 洋琴 樂譜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洋琴 各縣(各絃)과 距離가 먼 아악食人 12율旬에 倍率(配律)하여 적었기 때문에 解讀이 不可能했던 것을 近年에 장사훈에 依하여 倍率을 修正하여 이 樂譜를 解釋했다. 內容은 <靈山會上>, <下絃還入>, 歌曲·時調로 엮어졌다. 李丙琪 所長으로 되었다.

三竹琴譜

《三竹琴譜(三竹琴譜)》는 高宗 때 編纂한 것으로 보이는 編者 未詳의 樂譜. 冊머리에는 警鐘 1年에 쓴 이승무(李升懋)徐가 얹혀 있으나 樂譜 內容으로 봐서 高宗 때 編纂된 이 樂譜에 以前부터 傳해오는 이승무의 序文을 붙인 것으로 밝혀졌다. 16政間에 肉譜로 적혀 있다. <靈山會上>, <평조영산회상>, <軍中吹打>, <路軍樂(路軍樂)>, <家軍樂(家軍樂)>, <兩淸還入(兩淸還入)>, <數大葉>, <所用>, <愚弄>, <中大葉>, <相思別曲>의 巫女時調(巫女時調) 等을 包含하여 <靈山會上> 歌曲·歌辭 等 60餘 曲이 매우 廣範하게 실려 있다. 이 樂譜는 <遊藝志>와 現存 國樂과 다리 구실을 하는 貴重한 樂譜이다. 國立國樂院 에 所藏되었다.

近世 [ 編輯 ]

洞里 신재효 에 依해 판소리 가 現在의 形態로 整理되었다. 日帝强占期 에는 西洋 音樂이 들어오는 等 國樂이 많이 衰退한 時期이나 命脈만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갑오경장(甲午更張) 以後 물밀 듯이 밀려온 西歐文化로 韓國文化의 變化는 勿論 韓國人의 音樂活動도 많이 變했다. 韓日合邦(韓日合邦)으로 朝鮮 王朝가 무너지니 王室의 意識이 없어짐과 때를 같이하여 여기에 쓰이던 數千年 傳統 音樂이 설 자리를 잃었다. 王의 擧動이나 軍隊 行進에 쓰이던 吹打(吹打)는 量音樂 밴드(Band)의 行進曲으로 代置되었다. 사랑(舍廊)마다 울려나오던 風流소리는 자취를 감추었고, 心身을 닦는 道路서 音樂을 연주하던 風流人들이 베토벤이나 브람스에 熱中하게 되었다. 廣場에서 판소리와 雜戱(雜戱)를 즐기던 大衆들은 流行歌와 新派劇(新派劇)에 귀를 기울였다. 게다가 日帝의 韓國文化 抹殺政策으로 韓國音樂은 더욱 萎縮되었다. 이러한 어려운 時期에 韓國 傳統音樂은 李王職(李王職) 雅樂部(雅樂部)·원각사(圓覺社)와 協律社(協律社)에 이은 朝鮮聲樂硏究會(朝鮮聲樂硏究會)·朝陽俱樂部(調陽俱樂部)에 이은 朝鮮正樂원(朝鮮正樂院)·其他 私設傳受所(私設傳授所)에서 겨우 命脈을 이어나갔다.

音樂 機關 [ 編輯 ]

李王職 雅樂部 [ 編輯 ]

光武 元年(光武 元年, 1897)에 從來의 掌樂院(掌樂院)을 敎坊司(敎坊司)로 改稱하고 製造(提調) 以下 772人의 人員을 두었으며, 隆熙 元年(隆熙元年, 1907)에는 敎坊司를 掌樂課(掌樂課)로 고쳐서 宮內府(宮內部) 禮式과(禮式課)에 附屬시키고, 國樂師長(國樂師長) 以下 305人의 人員을 두고, 김종남(金宗南)李 招待 國樂師長이 되었다. 韓日合邦 以後 掌握과는 雅樂隊(雅樂隊)로 바뀌고 雅樂師長 以下 189人의 人員으로 줄었다. 이 中에는 兩顎軍樂隊에 밀려서 侍從院(侍從院) 附屬 區 軍樂手(軍樂手)인 吹鼓手(吹鼓手)들이 一部 編入되어 있었다. 그 뒤 人員을 84名으로 줄이고, 다시 57名으로 줄였다. 1917年에는 雅樂生 養成所를 두어 제1기생 9名(뒤에 18名)을 募集하여 授業年限을 3年(뒤에 5年)으로 하고 音樂實技·音樂理論·一般學科를 授業하였다. 1920年 日本 音樂學者 다나베(田邊尙雄)의 建議로 1922年에는 當局의 보다 나은 支援을 받게 되었다. 1925年에는 雅樂隊에서 雅樂部(雅樂部)로 名稱을 고치고 당주동(唐珠洞) 廳舍에서 운니동(雲泥洞)으로 옮겼으며, 光復 直前까지 宗廟·文廟 祭享에 祭禮樂을 연주하고, 雅樂生 養成·雅樂 放送·惡書 및 樂譜 編纂·樂器 製作 等의 活動을 繼續하였다. 第1代 國樂師長에 김종남, 第2代 國樂師長 이남희(李南熙), 第3代 雅樂師長 함재운(咸在韻), 第4代 國樂師長 명완벽(明完璧), 第5代 雅樂師長 김영제, 第6代 雅樂師長 함화진(咸和鎭)李 歷任하였다. 李王職 雅樂部의 傳統은 現 國立國樂院이 이어받고 있다.

朝鮮 正樂院 [ 編輯 ]

音律을 즐기는 大家집 사랑에는 栗房(律房) 또는 風流房(風流房)이라 하여 靈山會上·歌曲 等 正樂 系統 音樂을 演奏 및 傳授하는 私設 音樂室이 있었다. 이러한 栗房의 制度를 擴大하여 1905年 9月 朝陽俱樂部(調陽俱樂部)가 組織되었다. 正樂의 演奏도 하였지만 主로 正樂의 傳授에 注力하였다. 當時 敎師陣容은 歌曲에 하규일(河圭一), 하순일(河順一), 거문고에 金景南(金景南), 伽倻琴에 명완벽(明完璧), 함화진(咸和鎭), 洋琴에 김상순(金相淳), 笙簧에 한진구(韓鎭九), 短簫에 조동석(趙東錫) 等이 이름난 大家들이었고, 西洋音樂에는 김인식(金仁湜)이었다. 1911年 朝陽俱樂部는 正樂院(正樂院)으로 改稱하고 組織을 個體하여 朝鮮正樂원 或은 朝鮮正樂傳習所(朝鮮正樂傳習所)라 부르게 되었다.

원각사 [ 編輯 ]

1907年에 設立된 最初의 近代式 國立劇場으로, 唱劇(唱劇)李 主가 되고 雜歌(雜歌)와 雜戱(雜戱)도 公演한 常設劇場이다. 판소리는 元來 鼓手의 북장단에 소리하던 獨唱이었으나, 원각사 時節에 若干의 舞臺裝置로 配役마다 여러 人物이 出演하여 延期하며 分廠(分唱)하는 唱劇이 처음 始作된 것이다. <春香歌>·<沈淸歌> 等이 唱劇化되고, <귀의 城(鬼-聲)>· <雉岳山(雉岳山)> 等 新小說(新小說)李 劇化되어 上演되었다. 唱劇에는 金昌煥(金昌煥)·宋萬甲(宋萬甲)·李東伯(李東伯)·金昌龍(金昌龍)·이화중선(李花中仙) 等 많은 판소리 名唱들이 出演하였고, 卿西道窓(京西道唱)과 才談에는 박춘재(朴春載)·문영수(文泳洙) 等이 出演하였다. 원각사는 3年이 못되어 解散되고, 協律社(協律社)·長安寺(長安社)·延興社(延興社)·광월단(光月團) 等이 組織되어 光武臺(光武臺)를 中心으로 地方公演에 注力하였다.

朝鮮聲樂硏究會 [ 編輯 ]

원각사가 解散된 뒤에 여러 唱劇團體들이 明滅하였으나, 日帝의 彈壓 아래 活動이 低調하여 새로이 統合하여 再起의 길을 摸索하였으니, 이것이 1933年에 組織된 朝鮮聲樂硏究會이다. 이 硏究會는 後進養成과 唱劇運動에 注力하였는데, 當時의 陣容은 판소리에 송만갑·金昌龍·李東伯·정정열·林芳蔚(林芳蔚)·김연수(金演洙)·강장원(姜章沅)·김초향(金楚香)·朴綠珠(朴綠株)·김소희(金素姬) 等이었고, 器樂에 강태홍(姜太弘)·박종기(朴鍾基)·신쾌동(申快童) 等이었다. 이 當時 上演된 唱劇은 <春香歌>·<沈淸歌>·<水宮歌>·<弘報가> 等 판소리를 唱劇化한 것, <裵裨將가>·<장화홍련전>·<숙영낭자> 等 古本(古本)을 唱劇化한 것이었다.

朝鮮樂府 [ 編輯 ]

1940年 朝鮮總督府 警務局 管掌 아래 朝鮮樂府가 設立되었다. 部長理事에 함화진, 常務理事에 박헌봉(朴憲鳳)李 歷任하여 主로 唱劇과 歌舞로 地方公演을 하였으나 官憲의 干涉이 甚하여 隘路가 많았다.

代表的인 音樂 [ 編輯 ]

唱劇 [ 編輯 ]

여러 歌客들이 舞臺에서 演技를 하며 판소리調로 連行하는 劇의 한 分野. 朝鮮 末期에 원각사(圓覺社)라는 國立劇場이 생겨 판소리 歌客들이 配役을 分擔하여 판소리를 公演했던 데서부터 唱劇이란 用語가 비롯되며 그 後 脚本도 새로 쓰고 曲調도 새로 붙인 創作 唱劇이 나왔다. 원각사 때에는 金昌煥(金昌煥)·宋萬甲(宋萬甲)·李東伯(李東伯) 等 수많은 판소리 名唱들이 <春香歌>·<沈淸歌>·<최병도타령> 等 여러 唱劇을 公演하였고, 원각사가 解散된 뒤 1907年 頃에는 金昌煥이 協律社(協律社)를 組織하였으며, 송만갑 또한 서울에서 協律社를 組織하였다. 이 두 協律社는 1910年까지 繼續되었고, 1910年代 中盤에서 團成社·長安寺·延興社와 같은 劇場이 생겨 송만갑·李東伯·金昌龍(金昌龍) 等이 長安寺와 延興社에서 唱劇을 公演하였고, 光州에서도 協律社가 組織되었다. 1920年代에는 서울과 地方에 여러 唱劇團이 明滅하다가 1933年에는 朝鮮聲樂硏究會(朝鮮聲樂硏究會)가 發足되어 송만갑·李東伯·金昌龍·丁貞烈(丁貞烈)·韓成俊(韓成俊)·오태석(吳太石)·김연수(金演洙)·朴綠珠(朴錄珠)·김소희(金素姬)·박초월(朴初月) 等 수많은 名唱이 活動하였는데, 1935年에 동양劇場에서 '春香傳'을 公演하여 크게 成功한 以來 <沈淸傳>·<興保全> 等 많은 唱劇을 公演하여 唱劇의 極盛期를 이루었으나 1937年에 解散되었다. 1930年代 末에는 花郞極端·同一唱劇團이 있었고, 1940年 中盤에는 衰退하였다가 1945年에 서울에서 大韓國樂院이 組織되었고, 1946年에 大韓國樂院 唱劇部에서 大春香傳을 公演하여 크게 成功하였다. 1947年에는 金延壽唱劇團·林芳蔚(林芳蔚) 一行國劇社(國劇社)·國劇協會(國劇協會) 等이 있었으며, 金延壽唱劇團에서 <薔花紅蓮傳>· <善花公主> 等을, 國劇社에서는 <薯童謠>를, 國劇協會에서는 <萬里長城>, 朝鮮唱劇團에서는 <호동왕자>, 金延壽唱劇團에서 <死六臣>을 公演하였고, 1948年에는 女性 名唱들로 構成된 女性 國樂同友會가 <獄中花와 해님달님>을 公演하여 人氣를 끌자 旣成 唱劇團들은 기울어지기 始作하였다. 6·25 當時 女性 國劇團이 亂立瑕疵 1950年 中盤에는 唱劇이 衰退하고 말았다. 1961年 國立劇場이 생기고 唱劇 臺春香傳이 공연되어 成功하였고 이어서 國立劇場 唱劇團이 創立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唱劇은 판소리 旋律로 짜여지며 흔히 國樂管絃樂 伴奏가 딸린다.

現代 [ 編輯 ]

解放 以後 傳統音樂을 되살리고자 하는 사람들에 依하여 새롭게 傳統音樂이 定立되고 國立國樂院 을 中心으로 하여 發展하여 왔다. 休戰 以後, 一部 國民들의 韓國文化에 對한 再認識이 次次 높아지고 政府의 支援이 있게 되면서 國立國樂院(國立國樂院)·國樂士養成所(國樂師養成所)·서울大學校 音樂大學 國樂과·국악예술학교·한양대학교 音樂大學 國樂科 等 正規 國樂敎育機關이 次例로 생겨서 新人들을 輩出하고 있다. 새로운 學問을 닦은 新人들이 連奏·創作·硏究·敎育에 參與함으로써 韓國音樂은 어느 面에서는 밝은 展望이 보인다. 그러나 한便 판소리·十二歌詞·十二雜歌 같은 特殊分野는 新人들의 進出이 많지 않아 거기에 對한 對備策이 要求되고 있다. 韓國音樂을 硏究하는 學術團體로 韓國國樂學會(韓國國樂學會)가 活躍해 왔다. 오늘날에는 國樂의 演奏에 西洋樂器를 더하는 等 現代的인 느낌을 살린(크로스 오버) 國樂이 만들어지고 있으며, 國樂器의 改良 等 創造的인 試圖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6]

創作活動 [ 編輯 ]

創作 活動 [ 編輯 ]

韓國音樂을 近代 管絃樂으로 처음 作曲한 사람은 金基洙(金琪洙)이다. 그는 1942年에 硏究作品 <歲우영(細雨影)-4重奏曲>의 發表를 始作으로 1951年 <故鄕소(顧鄕韶)>, 다음해에 <정백魂(精白魂)>, <송광복(頌光復)> 等을 作曲하였으며, 그 後 10餘年 間 20餘曲의 作品을 썼는데, 이 時期가 國樂 作曲의 初期라 하겠으며 그의 作風(作風)은 1960年代 以後 出現한 作曲家들에게 많은 影響과 刺戟을 주었다. 1962年 國立國樂院에서 新國樂 公募를 始作하면서 많은 젊은 作曲家들이 參與하여 入選作 및 硏究發表作을 내놓았는데, 이들의 作品은 大槪 傳統韓國音樂에 바탕을 두고 現代的 技法과 演奏法을 開發해 가면서 새로운 聽衆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이강덕(李康德)은 合奏曲 <새하늘>(1962年 作品)을 發表한 以來 只今까지 수많은 作品을 내놓았다. 그는 傳統的인 旋律과 장단 위에 새로운 樣式을 構築했으며 特히 <伽倻琴 協奏曲 3番>은 그의 力作이다. 황병기(黃秉冀)는 1962年 歌曲 <國花 옆에서>를 發表한 以來 獨奏曲과 合唱曲을 많이 썼는데, 그의 特徵은 伽倻琴 獨奏曲에 있다. 황병기는 最初로 伽倻琴 獨奏曲을 作曲했으며, 그의 作品 속에 흐르는 雰圍氣는 傳統에 바탕을 두고 現代的 感覺을 살린 詩的이고 標題的이며 繪畫的이다. <침향무(沈香舞)>(1974)는 伽倻琴 音樂의 世界性을 試圖한 作品이고 初期 作品 <숲>(1963)은 頻繁히 演奏되어 新古典作品처럼 되었다. 이성천(李成天)은 1962年 <淸聲자진한잎 主題에 依한 變奏曲>을 發表한 以後 가장 폭넓고 活潑한 作曲活動을 보였다. 그의 作品의 特徵은 雅樂의 精神的 깊이를 追求한 作品에서 音樂的 技巧와 纖細한 音感覺은 勿論 音 하나하나를 眞摯하게 愛情을 가지고 다루는 데에 있다. 그의 力作은 伽倻琴 獨奏曲 <놀이터>(1966)와 <숲속의 이야기>(1967-1974) 두 個의 모음曲들이다. 그는 <놀이터>에서 最初로 伽倻琴의 兩손 使用法과 글리산도의 走法을 導入하여 伽倻琴 音樂에 色彩的 技法을 더하였고, 不規則한 複合拍子를 使用했다. 또 <頭音을 위한 5現金>에서 伽倻琴 12絃 中 7絃을 안쓰고 頭音과 5縣으로 制限한 그의 態度는 極度로 自己를 拘束하여 自由를 얻으려는 藝術家的 苦行에 들어선 것이다. 김용진(金溶鎭)은 1962年 合奏曲 1番을 發表한 後 2番(1966), 4番(1967), 5番(1969) 等과 많은 重奏曲, 獨奏曲을 썼다. 그의 作品은 傳統音樂의 깊은 音樂的 흐름과 樣式的 要素들을 찾아 自身의 感覺으로 浮刻시키려는 데 特徵이 있다. 그의 代表作은 亦是 合奏曲들이다. 조재선(趙在善)은 1963年에 合奏曲 <合奏> 다음에 <젓대를 위한 시나위>와 이어 <가얏고를 위한 시나위>를 썼는데 이 두 作品은 南道音樂을 主題로 形式化시킨 作品이다. 이 音樂은 1960年代에 가장 頻繁히 演奏된 合奏曲으로 꼽을 수 있으며 1975年作 <原色(原色)의 율(律)>은 樂器編成이나 配置가 東洋 哲學思想에 根據하고 있으며, 流率(有律)樂器가 길게 뻗다가 끝을 밀어올리는 것과 無律(無律)樂器의 끊임없는 간타음(間打音) 反復의 單純性에서 宇宙空間의 無限性을 느끼게 한다. 그 外 李海植(李海植)·李相奎(李相奎)·김용만(金容萬)·박일훈(朴一薰) 等 젊은 30代들의 斬新한 作品들이 發表되어 韓國의 創作音樂을 質的·量的으로 豐富하게 하고 있다. 또한 西洋音樂 作曲을 專攻한 重鎭作家들人 정회갑·김달성·김흥교·이성재·강석희·백병동·박중후·서우석·이건용 等도 좋은 作品을 내놓았다.

音樂 團體 [ 編輯 ]

國立唱劇團 [ 編輯 ]

國立唱劇團(國立唱劇團)은 國立中央劇場에 所屬된 唱劇團, 1961年 政府組織法에 따라 만들어졌다. 1962年 國立劇場에서 第1回 創團公演으로 唱劇 <春香傳>을 公演했으며. 이 때 함께 公演한 韓國國樂協會 會員들이 그 主體가 되었다. 그 後로 <沈淸傳>, <興保全>, <裵裨將傳> 따위를 定期 公演하면서 唱劇을 一般人에게 普及하는 데 앞장섰다. 1973年부터는 團員들이 全員 留級制가 되고, 1974年에는 國立劇場이 南山에 세워지면서 판소리 普及과 唱劇 公演을 繼續해서 할 수 있는 與件이 마련되었다. 그 後로는 <水宮歌>, <숙영낭자전>을 비롯해서 앞서 公演한 作品을 反復해서 公演하고 있다. 最近에는 판소리 普及을 위한 講義와 鑑賞會를 열고 있으며, 海外 公演도 時期와 期間을 定해 놓고 꾸준히 하고 있다.

韓國音樂의 現況 [ 編輯 ]

文廟祭禮樂 [ 編輯 ]

韓日合邦 後에 文廟祭享은 嚴修되었고 光復 後 只今까지 繼續되고 있다. 元來 文廟祭禮樂은 掌樂院(掌樂院) 左方(左坊)의 專擔으로 이른바 樂生(樂生)들이 연주하였다. 韓日合邦 後에는 李王職 雅樂部에서 雅樂手가 派送되어 연주하였으며, 光復 後 現在까지는 國立國樂院 樂士들이 1年에 두 次例 봄가을 釋奠日(釋尊日)에 派送되어 祭禮樂과 一無(佾舞)를 아뢰어 왔다. 中國 上古時代 音樂에 起源을 두는 것으로 高麗 睿宗 때 들어와서 朝鮮 世宗 때 整備된 數千 年의 歷史를 갖는 文廟祭禮樂은 東洋에서 가장 오랜 音律이다. 執事樂師(執事樂士) 1人, 等價(登歌), 軒架(軒架) 執拍(執拍) 2人, 車費握手(差備樂手)로 等價 軒架에 各 18人 外에 一無로 8一無, 64人의 無願이 動員된다.

宗廟祭禮樂 [ 編輯 ]

宗廟祭享은 年5香(年五享)이었다가 韓日合邦 後 1911年에는 1月, 4月, 7月, 10月의 연4향으로 줄었으나 光復 直前까지 嚴修되었다. 音樂과 一無는 李王職 雅樂部에서 專擔하였다. 構成人員은 執事雅樂師(執事雅樂師) 1人, 執拍아악수장(執拍雅樂手長) 2人, 가(歌)아악수장 4人, 車費雅樂手(差備雅樂手) 2人, 一無雅樂手(佾舞雅樂手) 36人이었다. 光復 後에 宗廟祭享은 全州李氏대동종약원(全州李氏大同宗約院)에서 主管하여 연2향으로 繼續되었으나 祭禮樂은 쓰지 못하고 있다가 1970年부터 國立國樂院 國樂士들이 派送되어 宗廟祭享을 아뢰었다. 一無는 8一無를 추고 있다. 近世朝鮮 世宗 때 鼓吹樂과 享樂을 土臺로 製作된 宗廟祭禮樂은 世祖 때 쓰기 始作하여 5百年 歷史를 가지고 掌樂院·李王職 雅樂部·國立國樂院을 통하여 傳해졌고 重要無形文化財 第1號로 1964年 12月에 指定되었다. 現在 宗廟祭享은 5月 첫 日曜日에 年 1回 奉行하고 있다.

宴禮樂 [ 編輯 ]

韓日合邦으로 近世朝鮮 王朝가 무너짐과 同時에 王室의 諸般 年例意識에 쓰이던 音樂은 廢用되었다. 그래도 多幸히 李王職 雅樂部에서 連奏行動과 雅樂生 養成을 통하여 光復되기까지 傳해 왔고 光復 後에는 國立國樂院에 傳해 와서 純音樂으로 保存되고 있고 音樂會에서 연주하고 있다. 國樂高等學校·서울大學校 國樂과·이화여대 國樂과·한양대학교 國樂科와 서울市立 國樂 管絃樂團에서도 純音樂으로 연주하고 있다.

正樂 [ 編輯 ]

예전에 大家집 사랑에서 盛行하던 이른바 栗房(律房)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正樂傳習所(正樂傳習所)와 李王職 雅樂部에서 命脈을 이어왔다. 光復 後에는 國立國樂院, 서울市立國樂管絃樂團, 서울大學校 國樂科 等 各級 學校 및 私設學院에서 傳해지고 있다. 靈山會上에 뛰어났던 命금(名琴) 이병문(李柄文)의 거문고 手法은 이수경(李壽卿)을 거쳐 장사훈(張師勛)으로 傳해져 왔고 與民樂의 先金(善琴)이었던 함재운(咸在韻)의 거문고 手法은 함화진(咸和鎭), 장인식(張寅湜), 성경린(成慶麟)으로 傳해져 왔고, 歌曲 伴奏에 뛰어났던 金景南(金景南)의 거문고 傳統은 임석윤이 이어받았으나 그의 死亡으로 斷絶되었다. 함제홍(咸濟弘)·최학봉(崔鶴鳳)·정약대(鄭若大)·함재영 等 代金 名人의 傳統은 近世 젓대의 名人 김계선(金桂善)을 거쳐 金聖鎭(金星振)李 이어받았다. 김수장(金壽長)·김천택·박효관(朴孝寬)·安玟英(安玟英) 等의 歌曲 傳統은 하준권(河俊權)·하순일(河順一)·하규일(河圭一)·이병성(李炳星)·이주환(李株煥)을 거쳐 전효준(田孝準)·홍원기(洪元基)·김월하(金月荷)에게, 하규일·임기준(林基俊) 等의 歌詞 傳統은 이병성·이주환을 거쳐 이양교(李良敎)·정경태(鄭坰兌)가 이어받았다.

판소리 [ 編輯 ]

송흥록(宋興綠)에서 비롯된 東便制(東便制) 소리는 박만순(朴萬順)·송우룡(宋雨龍)·金世宗(金世宗)·정춘풍(鄭春風)·김찬업(金贊業)을 거쳐 박기홍(朴基洪)·傳導性(全道成)·이선유(李善有)·유성준(劉成俊)에 이르렀으나 오늘날 純粹한 東便制 소리는 끊어졌다. 宋興祿의 宗孫 송만갑(宋萬甲)은 東便制 家門에서 태어났으나 西便制 정창업(丁昌業)의 소리制를 導入하고 自己 創製(唱制)를 開發하여 별입하였다. 宋萬甲의 弟子로는 장판개(張判介)·박중근(朴重根)·김정문(金正文)·박봉래(朴鳳來)가 있었으나 모두 송만갑 生前에 他界하였고 박녹주(朴綠株)가 김정문의 소리를, 박봉술이 박봉래의 소리를 이어받고 있다. 박유전(朴裕全)에서 비롯된 西便制(西便制) 소리는 李捺致(李捺致)·정창업을 거쳐 김채만(金采萬)·金昌煥(金昌煥)에게 傳해졌으나 純粹한 西便制 소리는 듣기 어렵다. 김채만의 弟子 공창식(孔昌植)의 傳統을 임방울(林芳蔚)李 이어받았으나 弟子없이 他界했고 한승호(韓承鎬)가 김채만의 소리를 若干 保有하고 있다. 정정렬(丁貞烈)은 정창업의 弟子로 西便制 소리를 이어받았으나 전도성·박기홍의 影響으로 東便制 소리를 받아 自己流(自己流)로 別立했다. 丁貞烈의 소리는 김여란(金如蘭)·김연수(金演洙)·김소희(金素姬)가 傳하였다. 박유전의 沈淸歌는 정재근(鄭在根)·정응민(鄭應珉)을 거쳐 정권진(鄭權鎭)李 이어받았다. 염계달(廉季達)·告訴館(高素寬)·金成玉(金成玉)에게서 비롯된 中高制 소리는 金正根(金正根)·金碩昌(金碩昌)을 거쳐 이동백(李東伯)·金昌龍(金昌龍)으로 내려와 강장원(姜章沅)에게 이르렀으나 中高制 소리는 끊어져 버렸다. 重要無形文化財 第5號로 指定된 판소리의 曲目別 藝能保有者는 다음과 같다. 春香歌에 김여란(金如蘭)·김소희, 沈淸歌에 정권진(鄭權鎭), 興甫歌에 박녹주(朴綠株), 水宮歌(守宮歌)에 정광수(丁光秀)·박초월(朴初月), 赤壁歌(赤壁歌)에 박봉술(朴奉述)·박동진(朴東鎭)·한승호(韓承鎬), 그리고 판소리의 孤樹로 김명환(金命煥)李 指定되어 있다.

散調 [ 編輯 ]

김창조 (金昌祖)·한숙구에서 비롯됐다는 伽倻琴 散調(散調)는 여러 流派로 갈라졌다. 한성기(韓成基)流는 김죽파(金竹坡)가, 최網둥類는 함동正月(咸洞庭月)李, 안기옥類는 정남희를 거쳐 金胤德(金允德)李 繼承하였다. 강태홍(姜太弘)流는 원옥화(元玉花)가, 박상근類는 성금연 (成錦鳶)李 이어받고, 심상건(沈相健)流는 끊어졌다. 백낙준(白樂俊)에게서 비롯된 거문고 散調는 신쾌동(申快童)과 박석기(朴錫基)에게 傳授됐는데 박석기는 弟子 한갑득(韓甲得)에게 傳하고 한갑득은 다시 金胤德에게 傳하였다. 申快童流는 많은 弟子를 길러 一世를 風靡하였는데 1977年 他界하였다. 거문고 散調의 器能保有者로는 한갑득이 指定되고 있다. 피리 散調는 이충선(李忠善), 代金 散調에는 박종기(朴宗基)를 이어받은 한주환(韓周煥)을 거쳐 강백천(姜白川)·편재준·김만식·한범수(韓範洙) 等이 있다. 奚琴 散調는 지용구(池龍九)를 거쳐 池瑛熙 (池映熙)가 이어받고 重要無形文化財로 指定까지 되었으나 지영희의 美洲 移民으로 解除가 되었다.

雜歌의 現況 [ 編輯 ]

추교신(秋敎信)·조기준(曺基俊)·박춘경(朴春景)의 京畿雜歌 소리는 박춘재(朴春載)·임기준(林基俊)을 거쳐 이창배(李昌培)·정득만(鄭得晩)·김순태(金順泰) 等이 이어받고 있다. 女樂(女樂)으로는 일찍이 최정식(崔貞植)에게 師事한 안비취(安翡翠), 주수봉(朱壽奉)에게 師事한 묵계월(墨桂月), 그리고 이은주(李銀株) 3人이 1974年 重要無形文化財 京畿雜歌(民謠)의 技能保有者로 指定되어 各各 傳受 奬學生을 指導하였다. 한便 西道雜歌 소리는 名唱 장학선(張鶴仙)李 技能保有者로 指定되었다가 他界한 뒤 김정연(金正淵)·오복녀(吳福女) 2人이 承繼하여 또한 全數 奬學生을 가르치었다.

韓國音樂의 樂曲 [ 編輯 ]

韓國 傳統 樂器 [ 編輯 ]


韓國現代音樂 [ 編輯 ]

韓國現代音樂은 一般的으로 1900年代부터 西洋音樂 敎育을 받고 西洋音樂 의 樂器, 樣式, 音樂語法 等을 使用한 韓國 現代 作曲家들의 音樂과, 1900年代부터의 現代的인 國樂 作曲家로 나뉜다. 西洋音樂 은 舊韓末 外國人 宣敎師들과 宮中 西洋人 作曲家들 및 軍樂隊를 통해 受容되었다. 代表的인 現代音樂 作曲家로는 金聖泰 , 尹伊桑 , 강석희 , 박영희 , 진은숙 等이 있다.

같이 보기 [ 編輯 ]

參照 [ 編輯 ]

  1. 韓國音樂/韓國音樂/韓國音樂의 基礎知識/韓國音樂의 分類, 《글로벌 世界 大百科》
  2. 《國樂通論》, 서한범, 台臨出版社, p.110
  3. 《國樂感傷》, 성경린, 三湖뮤직, p.31
  4. 《三國史記(三國史記)》 〈雜誌〉第 1
  5. 韓國音樂/韓國音樂/韓國音樂史/朝鮮 前期의 音樂/保太平과 定大業, 《글로벌 世界 大百科》
  6. 室內樂으로 作曲된 소나기, 퓨전 國樂그룹 소리아 Archived 2017年 9月 26日 - 웨이백 머신 等이 그 例이다

參考 文獻 [ 編輯 ]

이 文書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 (現 카카오 )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配布한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의 "韓國音樂史" 項目을 基礎로 作成된 글이 包含되어 있습니다.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