唱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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唱劇

唱劇 (唱劇)은 여러 歌客(歌客)들이 舞臺에서 演技를 하며 판소리 兆로 連行하는 韓國 劇의 한 分野이다. 朝鮮 末期 원각사 라는 國立劇場이 생겨 판소리 歌客들이 配役을 分擔하여 판소리를 公演했던 데서부터 唱劇이란 用語가 비롯된다 後 脚本도 새로 쓰고 曲調도 새로 붙인 創作 唱劇이 나왔다.

唱劇의 胎動과 흐름 [ 編輯 ]

唱劇은 先行藝術人 판소리 辭意 衰殘機(衰殘期), 卽 開化 後에 形成된 民俗樂劇이다. 판소리는 어느 것이나 한 사람의 광대가 부르기에 광대는 1人多役으로 自問自答하며, 作中人物이 되기도 하고 觀察·說明하는 第3者가 되기도 한다. 이에 反해 唱劇은 판소리를 改編해서 다인多役의 形式을 取하는 판소리의 本質과는 어긋나는 것이다. [1]

口碑藝術의 段階에 있었던 판소리를 集成하여 不動文學(浮動文學)에서 固定文學으로 固定시킨 사람은 19世紀 中葉의 신재효 였다. 申在孝는 판소리 作家로서 또한 판소리 理論價·敎育家로서 傳來하는 열두 마당의 판소리를 여섯 마당으로 改刪(改刪)하여 남겼는바, 그 中 5街(五歌)가 판소리의 古典으로 只今까지 傳承되고 있다. [1]

판소리 는 從來엔 타령(打令)·克家(劇歌)·仇隙(舊劇)·唱劇(唱劇) 等의 名稱으로 불리었고 光復 後에는 國劇(國劇)이라고도 불렀다. 그 中 唱劇은 1908年 宮內府 職割引 원각사 의 個館으로 在來의 판소리에 配役과 分廠形式(分唱形式)을 導入, 1932年 朝鮮聲樂硏究會 에 이르는 동안 形成되었고 이 時節부터 唱劇을 究極(舊劇)이라 했다. [1]

唱劇의 形成에 있어서 外部的인 影響-主로 日本을 媒體로 한 西洋 近代劇 -을 認定할 수 있으며 이러한 影響을 受容할 만한 餘地는 이미 신재효 의 定理에 依하여도 나타났으니 申在孝는 < 春香歌 >에서 配役의 分廠形態를 意圖했고 또 女子광대를 養成하기도 했다. [1]

1902年 12月 韓國 最初로 皇室劇場格인 協律社 가 開場되어 妓生·광대·舞童의 演藝를 上演시켰는데, 그 主要 레퍼토리는 광대들의 판소리와 妓生들의 各種 歌舞였다. 協律社와 원각사 以後 1914年 卿까지 協律社 一行은 <春香타령>이나 雜歌를 가지고 地方巡廻公演을 繼續하였다. 名唱 송만갑 一行도 1914年 警 地方 巡廻公演을 하였다. [1]

1910年代의 草創期를 지나 成長期에 該當하는 20年代에 注目할 수 있는 活動은 光武臺 (光武臺)· 長安寺 · 延興社 (延興社) 等에서의 唱劇이라기보다 立體唱(立體唱) 비슷한 것으로 名唱의 獨唱이 主가 되고 民謠아가(民謠雅歌)도 곁들인 토막劇으로 < 春香歌 >의 한 토막을 하는 程度였다고 한다. 그 사이에 광월단 (光月團)· 대동가극단 (大同歌劇團)李 光武臺 等에서 唱劇公演을 한 바 있으나 1933年의 朝鮮聲樂硏究會 가 發足될 때까지 別 進展 없이 踏步狀態에 머물러 있었다. [1]

本格的인 唱劇運動이 일어난 것은 1930年 朝鮮音律協會 의 組織과 1933年 朝鮮聲樂硏究會 의 結成 以後부터이다. 이 때의 中心人物은 송만갑 · 이동백 · 정정렬 · 김창룡 等이었고 中堅과 所長으로 오태석 · 김연수 · 강장원 · 김초향 · 박녹주 · 김소희 等이 있어, 唱劇의 再建과 改革, 그리고 復興이라는 目標를 세웠다. [1]

朝鮮聲樂硏究會 傘下團體인 창극좌 는 第1回 公演으로 <裵裨將傳(裵裨將傳)>을 公演한 以來 光復 前까지 存續하면서 商業劇團이 華麗하던 時節에 이에 參與했다. 창극좌 의 公演에 이르러 판소리 形式의 殘滓인 刀創(導唱)·傍唱(傍唱) 및 兼役(兼役) 等을 淸算하고, 舞臺美術에도 進展을 보여 唱劇形式이 確立되었다고 보겠다. 그 後 이들은 花郞 과 合同하여 朝鮮唱劇團 을 만들었으니 그들의 레퍼토리는 판소리 5街와 古代小說 및 脚色史劇(脚色史劇) 그리고 新派唱劇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1]

商業主義 演劇의 領域에서 唱劇은 滿足할 만한 藝術的 進展을 보이지 못해 低俗한 復古主義的(復古主義的) 趣味에 迎合하는 幾微마저 있었다. 朝鮮聲樂硏究會 의 發足 以後 商業劇團에 參與한 唱劇은 光復 前까지 10餘年間 그 成熟期를 맞이하였고 光復과 더불어 朝鮮聲樂硏究會 의 後身으로 朝鮮唱劇團 이 發足했으며, 1946年 에는 唱樂人을 總網羅한 國劇(國劇) <春香傳>을, 이듬해에는 <臺沈淸傳>을 公演하였다. 이 해에 또한 國樂院 傘下의 國劇團體들이 雨後竹筍처럼 簇出(簇出)했고, 이들 團體에서 公演한 作品으로는 <善花公主> <論介> <獄中花(獄中花)> <해님과 달님> 等이 있어 唱劇의 全盛期를 이루었다. 그러나 6·25戰爭 以後 大部分 分散되고 그나마 命脈을 이어 오던 몇몇 團體마저 國産映畫 붐 以後 商業劇團으로서의 存立도 어렵게 되었다. [1]

오늘날 唱劇은 國立劇場 傘下의 國立唱劇團 만이 年 3~4回의 公演을 갖고 演劇으로서의 唱劇 定立化를 試圖하고 있는 바, 여기에는 傳承의 民俗劇을 새롭게 再創造하는 文化的 配慮가 要請된다고 하겠다. [1]

歷史 [ 編輯 ]

원각사 때에는 金昌煥 · 송만갑 · 이동백 等 수많은 판소리 名唱들이 < 春香歌 >·< 沈淸歌 >·< 최병도타령 > 等 여러 唱劇을 公演하였고, 원각사가 解散된 뒤 1907年 頃에는 金昌煥이 協律社 (協律社)를 組織하였으며, 송만갑 또한 서울 에서 協律社를 組織하였다. 이 두 協律社는 1910年 까지 繼續되었고, 1910年代 中盤에서 團成社 · 長安寺 · 延興社 와 같은 劇場이 생겨 송만갑 · 이동백 · 김창룡 等이 長安寺 와 延興社에서 唱劇을 公演하였고, 光州 에서도 協律社가 組織되었다. 1920年代 에는 서울과 地方에 여러 唱劇團이 明滅하다가 1933年 에는 朝鮮聲樂硏究會 가 發足되어 송만갑·李東伯· 김창룡 · 정정렬 · 한성준 (韓成俊)· 오태석 (吳太石)· 김연수 · 박록주 (朴錄珠)· 김소희 (金素姬)· 박초월 (朴初月) 等 수많은 名唱이 活動하였는데, 1935年 동양극장 에서 '春香傳'을 公演하여 크게 成功한 以來 <沈淸傳>·<興保全> 等 많은 唱劇을 公演하여 唱劇의 極盛期를 이루었으나 1937年 에 解散되었다. 1930年代 말에는 畫廊唱劇團 · 同一唱劇團 이 있었고, 1940年 中盤에는 衰退하였다가 1945年 에 서울에서 大韓國樂院 이 組織되었고, 1946年 大韓國樂院 唱劇部에서 大春香傳을 公演하여 크게 成功하였다. 1947年 에는 金延壽唱劇團 ·林芳蔚(林芳蔚) 一行國劇社(國劇社)· 國劇協會 (國劇協會) 等이 있었으며, 金延壽唱劇團에서 < 薔花紅蓮傳 >· < 善花公主 > 等을, 國劇社 에서는 < 薯童謠 >를, 國劇協會에서는 < 萬里長城 >, 朝鮮唱劇團 에서는 < 호동왕자 >, 金延壽唱劇團에서 < 死六臣 >을 公演하였고, 1948年 에는 女性 名唱들로 構成된 女性 國樂 同友會가 <獄中花와 해님달님>을 公演하여 人氣를 끌자 旣成 唱劇團들은 기울어지기 始作하였다. 6·25 戰爭 當時 女性 國劇團이 亂立瑕疵 1950年 中盤에는 唱劇이 衰退하고 말았다. 1961年 國立劇場이 생기고 唱劇 臺春香傳이 공연되어 成功하였고 이어서 國立劇場 唱劇團이 創立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唱劇은 판소리 旋律로 짜여지며 흔히 國樂管絃樂 伴奏가 딸린다. [2]

唱劇의 種類 [ 編輯 ]

唱劇은 유래상 3가지로 區分할 수 있다. 첫째는 판소리 를 唱劇化시킨 것으로 판소리의 ‘더늠’과 社說을 그대로 끌어다가 唱劇으로 고친 것이며 《春香傳》, 《 沈淸傳 》, 《才名展》, 《水宮歌》 等이 있다. 이것들은 판소리의 旣存 가락인 더늠을 그대로 쓰기 때문에 판소리의 高度한 音樂性을 借用할 수 있으나 판소리의 構成을 살리다보니 劇으로서 構成이 散漫해진 것이 缺點이다. 둘째는 더늠이 消滅된 판소리 社說이나 古代小說 의 內容을 唱劇으로 꾸민 것인데 더늠의 拘礙가 없으므로 演劇에 알맞은 構成으로 脚色하여 쓴다. 音樂은 臨時로 作曲 및 編曲하여 쓰므로 音樂的으로 보아 첫째의 것보다 떨어진다. 예컨대 《薔花紅蓮傳》, 《裵裨將傳》 等이 있다. 셋째는 純粹 創作唱劇으로 臺本이 새로 創作된 것이며 音樂은 둘째의 것과 같다. 《아아앙》, 《해님 달님》 等이 있다. [3]

唱劇의 演出과 演技 [ 編輯 ]

1908年 '원각사'의 創立은 新劇(新劇)의 始發點인 同時에 唱劇의 舞臺를 보게 되는 貴重한 出發點이라 할 수 있다. 1人氣(一人技)인 판소리 의 形式이 分廠(分唱)이 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各其 配役을 맡아 演技를 하며 노래로 그 맡은 바 人物을 表現하는 形式을 取하게 되었다. [4]

그러나 初期의 唱劇의 演出은 專門的인 演出家가 없었고 그 舞臺表現度 幼稚하였다. 1908年代라면 西歐에서는 近代劇 樹立을 위하여 寫實主義 演出과 演技가 한창 論議될 때인데, 원각사 舞臺는 大槪 흰포장으로 뒤를 막고 背景도 固定되지 않고 흔들흔들한 未備한 畫幅이었다. 中國 京劇 이나 日本 가부키 舞臺는 舞臺와 演技와 演出이 일정한 形式에서 傳統藝術로 繼承·發展해 왔는데 唱劇은 우리 固有의 形式舞臺와 演出·演技를 갖지 못하여 出演한 唱劇俳優들이 舞臺에서 왔다 갔다 하며 無計劃한 演技를 하는 演出이었다. 勿論 舞臺 照明 施設도 없어서 그저 白光(白光)의 電燈불이 고작이었다. [4]

1930年 ' 朝鮮音律協會 '의 組織과 1932年 ' 朝鮮聲樂硏究會 '의 發足은 前近代的인 그때까지의 唱劇을 一步 전진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演出 方法은 新劇의 亞流에 지나지 않았다. 말하자면 新劇的인 演出, 新劇的인 演技에 槍을 붙였고 춤이 加味되었을 따름이다. 그러나 여기까지 到達한 것도 唱劇으로서는 큰 發展이라고 評價할 수 있었다. 다만 이러한 狀態는 조금도 改善·向上되지 못하고, 1949年 부터 일기 始作한 女性國劇團의 수많은 公演은 오히려 一步 後退한 느낌이 있었다. [4]

1962年 에 發足을 본 ' 國立國劇團 '은 國劇定立精神에 依해 비로소 그 形式에 一大 革新을 가져오는 動機를 가졌다. 1962年에 ' 國立國劇團 '이 試圖한 <興甫歌>(演出 이진순)는 이런 뜻에서 意義가 있었다. 卽 演出의 方向을 韓國的인 固有의 形式으로 表現한다는 것이 그 첫째 目標였다. [4]

舞臺裝置는 多目的 使用舞臺로, 卽 簡略하나마 東洋畫的인 畫風에 한 場面이 다음 場面에까지 應用되며 또는 한두 쪽의 變化로 簡單히 다른 場所로 變更시킬 수 있었으며 舞臺 前面의 左側에는 樂士席, 右側은 도창석(導唱席)으로 設定하였다. 導唱이라 함은 唱劇의 始初와 끝을 槍과 아니리 발림 으로 進行시키고, 極 사이 사이에 說明과 描寫를 하여 多角度로 變하는 舞臺場面을 有機的으로 끌어가는 役割이다. 여기에서 唱劇 演技者들의 演技 方法은 所謂 新劇的인 演技에서 完全히 벗어나 판소리에 있는 아니리(大使)와 발림(形容動作)을 主로 그 演技面에 使用한다. 그러나 아니리와 발림(或은 너름새)만으로는 唱劇 表現이 不足하다. 唱劇이 우리나라 固有의 演出과 演技를 發揮하려면 韓國的인 民俗에서 唱劇의 劇的 要素와 燕岐面을 補充할 수 있어야 할 줄 안다. 그렇다면 탈춤 · 假面劇 · 人形劇 의 劇的 形式을 加味시킴으로써 唱劇은 西歐的인 演劇 形態를 빌지 않는 獨特한 固有의 우리 唱劇으로 舞臺化할 수 있어야 하며, 新劇的인 臺詞는 唱劇에는 적합지 않고 大體로 아니리 兆(調)로 臺詞를 使用하여야 한다. [4]

演出은 이러한 專門的인 知識을 充分히 理解하고 專攻한 사람이 맡아 새로운 固有의 唱劇 舞臺美學을 追求하여야 할 줄로 안다. 唱劇의 延期는 어디까지나 本格的으로 窓을 專攻한 사람, 卽 위에서 말한 唱劇의 舞臺를 理解하며 表現할 수 있는 能力을 갖춘 演技人이라야 한다. 그러나 제아무리 名唱이라 할지라도 表現할 수 있는 能力과 唱劇 演技의 訓鍊을 받지 않은 사람은 唱劇 演技者라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唱劇 演技者는 于先 窓을 完全히 工夫하고, 古典舞踊·탈춤·民俗劇의 基本的인 訓鍊을 거치고 專門的인 演技工夫와 身體的인 訓鍊을 받은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나 아직 唱劇 自體도 完全히 定立이 되지 못하였고 演出과 演技에 있어서도 앞으로 開發해야 할 많은 問題點이 있다. [4]

唱劇의 臺本 [ 編輯 ]

唱劇에서도 新劇에서와 같이 臺本을 必須로 한다. '원각사' 時節의 唱劇 形態와 같이, 판소리 의 창자(唱者)들이 配役을 나누어 판소리를 分廠(分唱)하는 素朴한 形態에서는 판소리의 창자들이 판소리의 社說과 가락을 모두 외고 있으므로, 簡單한 約束 下에 서로 交代하며 불러 나갈 수 있다. 그러나 唱劇이 唱劇다운 形態를 갖추기 위하여서나 판소리를 唱劇으로 偏極하는 境遇에는 臺本이 必要하다. 創作唱劇의 境遇에는 말할 것도 없다. 오페라 의 臺本이 純粹演劇의 臺本과 다른만큼 唱劇의 臺本도 純粹演劇의 臺本과 다른 面이 있다. [5]

于先 唱劇은 劇中人物의 槍과 大使, 그리고 舞臺 밖에서의 刀創(導唱)으로 엮어가므로 이 세 가지를 適當히 配合하여야 한다. < 春香傳 >의 境遇, 흔히 廣寒樓 場面과 御史 秫稻 場面은 많은 對照가 된다. 前者에서는 本來 판소리의 이 대목은 房子와 李도령의 對話가 窓으로 아기자기하게 엮어져 있으므로 그것을 그대로 옮겨 씀으로써 창이 主가 되게 構成하는 일이 많은 反面, 御史 秫稻 場面에서는 本來 판소리의 이 대목에서 자진모리 장단의 敍事的인 場面描寫를 빼면 아니리로만 構成되므로, 이것을 唱劇으로 舞臺化했을 境遇 자진모리로 부르는 대목은 劇中 人物의 演技로 代替되고 아니리 部分은 모두 臺詞로 엮어가므로 창이 缺乏된다. 따라서 廣寒樓 場面과 御史秫稻 場面은 音樂的 均衡이 깨지고 있다. [5]

唱劇은 판소리型 가락으로 부르는 것이 原則이므로 臺本에서 窓 및 導唱으로 불리는 部分은 판소리 社說과 같이 4·4條의 韻文으로 쓰는 것이 無理가 없다. 판소리를 唱劇으로 偏極할 境遇에는 될 수 있는 한 現行 판소리의 辭說을 借用하는 것이 판소리 ' 더늠 '을 살리는 데 좋고 그 더늠을 외고 있는 창자들에게도 便利하다. 따라서 現行 판소리辭說이 아닌 古本(古本)을 借用하면 그만큼 창자들에게 不便하다. [5]

진양과 같은 느린 장단과 자진모리와 같은 빠른 장단으로 부를 境遇, 다같은 길이의 臺詞일지라도 그 時差가 크므로 이 點은 唱劇의 臺本作家·作曲家·演出家·演技者가 考察해야 할 問題이다. 또 오페라 에서 ' 아리아 '와 ' 레치타티보 '가 있는 것처럼, 唱劇에도 簡單한 臺詞로 處理하는 境遇와 劇中人物이 한바탕 소리하여 演技者의 窓에 對한 技倆을 拔取하는 ' 아리아 ' 部分의 設定을 臺本에서 미리 試圖하는 것이 必要하다. 舞臺에서 벌어지는 劇中場面을 同時에 導唱으로 描寫할 境遇에는 劇中場面과 導唱과의 時差가 없도록 해야 한다. [5]

唱劇의 作曲 [ 編輯 ]

오페라 의 境遇 臺本은 作曲家에게 넘어가 먼저 전곡(全曲)을 하나의 音樂 藝術品으로 完成시킨 뒤에 指揮者와 演出家에게 넘어간다. [6]

唱劇의 境遇에는 臺本이 演出家와 作曲家에게 넘어가고 唱劇의 指揮者가 따로 없으므로 作曲家가 演技者에게 窓 部分을 口傳(口傳)으로 傳授하여 音樂을 指導하며, 演出家가 唱劇의 全體 進行을 指揮하므로 오페라에서의 指揮者 役割까지 겸하게 된다. 唱劇에는 아직 西洋音樂에서 뜻하는 唱劇 作曲家가 따로 없고, 판소리 및 唱劇의 演技者 中 作曲할 能力의 保有者가 作曲을 맡는데 西洋音樂에서처럼 樂譜化하는 것이 아니라 臺本의 劇中人物과 劇的 狀況에 따라 판소리의 音樂的 이디嚴에 맞게 장단(長短)과 兆(調)를 짠다. [6]

먼저 臺本의 社說을 4·4條의 韻文으로 槍에 맞게 고치고, 獨唱·交窓(交唱)·提唱(齊唱)을 設定하고 판소리에서 쓰이는 진양·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엇모리 等의 장단과 羽調 · 平調 · 界面調 · 慶弔 · 설렁制 等의 組를 編成한다. 가락은 大部分 판소리式의 것을 빌려 쓰므로 嚴密한 意味의 作曲이 아닌 編曲의 境遇가 많고 어느 範圍 內에서는 창자의 卽興的인 窓에 맡기게 되므로 嚴格한 固定旋律(固定旋律)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6]

唱劇 演出家의 準備 [ 編輯 ]

唱劇에서의 演出家는 純粹 演劇에서의 演技뿐만 아니라 演技·臺詞·窓·音樂·舞踊·刀創·民俗놀이 및 韓國的인 몸짓(mime) 等을 綜合·統一하여 하나의 綜合藝術로 完成시키는 어려운 作業이 賦課된다. 唱劇은 中國 京劇 이나 日本 가부키 에서처럼 舞臺와 演技와 演出이 일정한 形式으로 굳어져 繼承·發達된 것이 아니므로 韓國的인 樣式의 綜合藝術的人 創造는 하나의 藝術 장르의 創造만큼이나 어려운 課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唱劇의 演出家는 韓國의 固有藝術에 對한 깊은 理解와 이것을 唱劇이라는 새로운 形式에 담는 創造的인 能力을 겸해야 한다. 따라서 臺本에 나타난 劇作家의 表現과 더불어 唱劇 形式의 創出(創出)이라는 作業은 純粹演劇의 演出 以上의 것을 要求한다. 過去에 無計劃하게 신극식의 演出을 唱劇에 適用하여 많은 施行錯誤를 거친 것은 唱劇史(唱劇史)에 貴重한 敎訓을 주고 있다. [7]

唱劇의 配役 決定 [ 編輯 ]

唱劇은 演出過程에서 純粹演劇과 根本的으로 差異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點이 있다면 그것은 純粹 演劇과 오페라 의 差異와 같이 演出 方法이 다를 뿐이다. [8]

오페라에서는 창자 의 聲域(聲域)에 따라 配役이 決定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젊은 女子 主役은 소프라노 , 그 相對가 되는 女子役은 메조 소프라노 (或은 알토 ), 젊은 男子 主役은 테너 , 그 相對가 되는 男子役은 바리톤 (或은 베이스 )으로 定해지는 例가 있으나, 唱劇에서는 男女의 性別은 있어도 聖域의 區分은 없다. 따라서 唱劇의 配役決定은 聖域에 依하지 않고 演技者의 個性과 機能에 依한다. [8]

다만 音質(音質)은 配役 決定에 口實이 되는 수가 있다. 特히 女性唱劇團은 女性만이 出演하기 때문에 重厚한 音質의 所有者는 男子役을 하는 例에서 볼 수 있다. 판소리에서는 아니리 발림 이 서투른 境遇에도 槍으로 聽衆을 감동시키는 이른바 '소리광대'가 있으나 唱劇에서는 窓 機能뿐만 아니라 아니리와 발림, 卽 演技力이 필수가 된다. [8]

創意 練習 [ 編輯 ]

臺本에 나타난 窓 및 刀創 部分은 唱劇 作曲者의 窓에 對한 指導로부터 始作된다. 오페라처럼 樂譜에 依한 個人 練習이 先行되는 것이 아니고, 作曲者가 장단과 條를 指示하고 直接 窓을 불러서 口傳, 심수(口傳心受)하는 것이다. 판소리일 境遇에는 어느 程度 固定旋律(固定旋律)이기 때문에 傳授生에게 리듬과 가락뿐만 아니라 唱法까지도 하나하나 敎授한다. 그러나 唱劇의 境遇에는 창자들이 어느 程度 판소리의 窓을 驅使할 수 있는 能力이 있으므로 장단과 組 그리고 가락의 骨格을 指示하지만 細部 唱法과 같은 것은 창자의 技倆에 맡기기 때문에 창자의 唱法에 依한 個性이 配役마다 甚하게 露出되기도 한다. 導唱은 一般的으로 元老級 창자가 맡게 되므로 장단과 組(調)만 指示하고 나머지는 창자의 音樂性과 表出力에 맡긴다. 齊唱의 境遇에는 多數의 出演者가 같은 가락으로 불러야 하기 때문에 合同 唱 練習이 必要하다. [9]

唱劇의 臺本읽기 [ 編輯 ]

唱劇의 演技者에게는 臺本에 나타난 演出者의 演出意圖를 指示하되 唱劇 演技者들의 先入見을 把握할 必要가 있다. 唱劇의 演技者들이 初演(初演)인 境遇 판소리에서 熟鍊된 '아니리'와 '발림'만을 保有하고 있으므로 이것이 相對役과 대면할 境遇는 판소리와 唱劇의 異質性에 接하게 된다. 唱劇에는 演出의 傳統이 따로 없으므로 熟鍊된 演技者들은 光復 前後에 盛行한 신극식 唱劇 演技의 後遺症을 안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판소리와 唱劇의 아니리 및 발림의 差異點, 그리고 唱劇과 新劇의 演技의 差異點을 미리 例示할 必要가 있다. [10]

唱劇의 動作 練習 [ 編輯 ]

中國 京劇 이나 日本 가부키 에서는 傳統的인 煙氣나 몸짓이 形式化되었기 때문에 演出者나 演技者는 共通된 表出 方向으로 나갈 수가 있다. 그러나 唱劇의 境遇에는 그렇지 못한 어려움이 있다. 판소리의 아니리와 발림에 基礎를 둔 臺詞와 演技를 하되 판소리의 아니리와 발림은 舞臺物로서는 그 表現能力이 좁기 때문에 이것을 擴大, 補完하는 것이 不可缺하다. [11]

이 作業에서의 表現材料는 탈춤 · 假面劇 · 人形劇 ·광대笑謔之戱(廣大笑謔之戱)·傳統舞踊 等에서 韓國 固有의 銅雀을 發掘하고 이것을 唱劇에 導入시켜야 한다. 이 點은 特히 無言劇 (無言劇)이나 舞踊劇과 같은 몸짓(mime)으로 表現 手段을 삼을 境遇에 더욱 强調되어야 하며, 反復되는 리듬으로 몸짓을 할 境遇에는 韓國 傳統音樂의 리듬을 活用해야 함은 勿論이다. 演技者와 觀客이 모두 共感을 갖는 無言의 約束된 몸짓을 찾는 것은 唱劇의 定立이라는 課題에서 가장 重要한 몫을 차지한다고 하겠다. 리듬의 活用에 있어서 槍과 接合할 때 그 配合을 考慮하는 것이 音樂的인 課題로 남는다. 이를테면 窓은 판소리의 중중모리로 부르며 몸짓은 탈춤에서 흔히 쓰는 타령을 쓸 때, 중중모리와 타령이 갖는 악센트의 差異로 窓의 音樂性을 破壞하는 境遇를 볼 수 있다. 卽 創意 리듬, 몸짓의 리듬. 伴奏音樂의 리듬의 最大 公約數를 찾아야 하겠다. [11]

唱劇의 一貫練習 [ 編輯 ]

大使·窓·動作으로 엮어서 一貫 練習에 들어가 하나의 連續的인 演劇의 흐름이 이루어질 때 臺本이 갖는 演劇으로서의 템포·리듬과 唱劇으로서의 템포·리듬의 部分的인 差異가 여기저기서 露出된다. 演劇的인 템포가 音樂性을 壓迫하거나 音樂的인 表現의 强調가 演劇的인 緊迫感 乃至 寫實性을 이완시키는 二律背反이 따르는 수가 있다. 이때에 어느 것을 擇하여 하나를 優位에 둘 것인지 或은 兩者를 折衝할 것인지는 演出者의 裁量이겠지만, 綜合藝術로서의 唱劇의 藝術的 創造力이 判斷의 基準이 된다. 純粹 演劇에서는 單純한 動作의 되풀이가 지루한 士族이 될 수 있으나 여기에 音樂을 導入할 때는 漸增的인 高祖의 手段이 되기도 하는 것이 綜合藝術의 魔力이다. 卽 唱劇의 흐름은 演劇構成的인 흐름과 音樂構成的인 흐름임을 念頭에 두어야 한다. 演劇으로 보아서는 클라이맥스인데, 音樂으로 봐서는 弛緩되는 不均衡은 作曲者나 演出家들이 犯하기 쉬운 唱劇의 陷穽이다. [12]

唱劇의 總練習 [ 編輯 ]

槍과 大使읽기와 動作 練習의 一貫練習을 거친 뒤에도 舞踊·無言劇·刀創·揷入音樂 等의 綜合藝術의 여러 手段을 動員할 때는 唱劇은 매우 複雜한 構成을 갖기 때문에 唱劇의 흐름이 斷絶이 되지 않도록 마무리하는 作業이 남아 있다. 演出者는 舞臺에서의 進行과 轉換이 刀創 및 伴奏音樂과 合致되도록 調節해야 하며, 窓으로 나타내는 音樂的 時間에서 모든 配役이 演劇으로서의 時間的 空白이 없도록 細心한 注意로 메워가야 한다. [13]

唱劇의 창우 [ 編輯 ]

唱劇은 판소리 를 몇 사람이 配役을 나누어 부르는 立體唱(立體唱)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唱劇이 싹트기 始作했던 원각사 時節에는 唱劇의 名人이 따로 없고 當時 판소리 名唱들이 唱劇에 出演했다. [14]

원각사 專屬唱劇團體인 協律社 時節의 重要人物은 金昌煥 · 송만갑 · 염덕준 · 유공렬 · 이동백 等인데 이들은 판소리 名唱으로 너무도 有名하다. 따라서 近來의 판소리는 도막소리밖에 부르지 못하지만 唱劇에는 좋은 演技를 보여 이른바 唱劇의 名人이 나고 있었던 것과는 좋은 對照가 된다. [14]

光武臺 (光武臺)· 延興社 (延興社)· 朝鮮聲樂硏究會 때에는 서울·地方巡廻로 唱劇이 興行을 하게 되자, 송만갑 · 이동백 · 김창룡 · 정정렬 · 김연수 · 오태석 · 이화중선 · 김여란 · 박녹주 · 김소희 · 임방울 等이 판소리를 하는 한便 唱劇에도 자주 出演하게 되었다. 地方에서는 김정문 · 박중근 · 공창식 같은 판소리 名唱들이 種種 唱劇에도 出演하였는데 김정문은 唱劇의 소리도 잘했고 唱劇演技에도 能하여 人氣를 끌었다. 그러나 唱劇은 外面하고 地方에 묻히어 판소리의 傳統을 固守한 名唱들이 있으니 유성준 · 전도성 · 이선유 · 정응민 을 들 수 있다. [14]

1939年 창극좌 · 花郞 · 朝鮮唱劇團 무렵에는 丁貞烈은 偏極에도 솜씨를 보였고, 박녹주 · 김여란 · 김연수 · 오태석 · 김소희 · 임방울 · 박초월 · 박귀희 等의 판소리 名唱은 唱劇에서도 活躍하였지만 박후성 · 김득수 · 김옥련 (金玉蓮) 같은 新人이 나와 典型的인 唱劇의 名人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들은 먼저 판소리를 工夫하였지만 唱劇에 專念하게 되면서 판소리로는 빛을 보지 못하였으나 唱劇에서 좋은 演技를 보이며 頭角을 나타낸 것이다. [14]

光復 直後에는 國劇社 · 國劇協會 (國劇協會)· 장악회 (掌樂會)· 朝鮮唱劇團 等의 唱劇團體가 次例로 생겼다. 國劇社 에서는 오태석 · 조상선 · 강장완 (姜章玩)· 信宿 (愼淑)· 박귀희 · 양상식 · 金元吉 · 박보아 等이, 國劇協會에서는 박후성 · 김득수 · 김소희 · 한일섭 (韓一燮) 等이, 朝鮮唱劇團 에서는 김연수 · 박보아 · 박옥진 等이 活躍했다. [14]

1949年 김아부 (金亞夫)를 中心으로 女性國劇同好會 (女性國劇同好會)가 組織돼 成功하면서 女性만이 出捐하는 女性唱劇段이 나오기 始作하여 뒤에 女性唱劇段이 汎濫하는 契機가 되었다. 1950年代는 女性唱劇段의 極盛期로 女性國樂同志會에 임춘앵 이, 三星國劇團 (三星國劇團)에 박보아 · 박옥진 이, 햇님唱劇團에 김경애 가, 女性國劇協會에 조금앵 (曺錦鶯)李, 眞景女性國劇團(眞慶女性國劇團)에 김진진 · 金慶洙 (金敬洙) 等이 活躍했다. 20餘個로 난립된 女性國劇團의 汎濫은 國劇社 ·國樂士·金延壽唱劇團 等 旣成唱劇團體를 沈滯하게 만들고 女性國劇團마저 서로 競爭의 過熱과 藝術的인 低下로 말미암아 大衆으로부터 疏外되고 映畫에 밀려 1960年頃에는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14]

1962年 에는 國立劇場 專屬으로 國立唱劇團 이 結成되어 金延壽가 團長이 되고 박동진 · 박후성 · 김득수 · 홍갑수 (洪甲洙)· 성순종 (成淳鍾)· 강종철 (姜鍾喆)· 장영찬 · 박초월 · 김소희 · 박귀희 · 박도아 · 조순애 (曺順愛)· 박옥진 · 성창순 · 성우향 (成又香) 等이 活躍하였다. 唱劇 60年 間에 수많은 唱劇의 名人이 나왔다. 그 中에 정정렬 · 김연수 · 박귀희 · 김정문 等은 판소리와 唱劇을 모두 잘하였고 송만갑 · 김창룡 · 이동백 · 임방울 · 이화중선 等은 판소리쪽에 優勢하였으며, 박후성 · 성순종 · 한일섭 · 임춘앵 · 박보아 等은 典型的인 唱劇人이다. [14]

唱劇의 作品과 鑑賞 [ 編輯 ]

唱劇은 窓(唱)을 爲主로 하여 劇的인 大使와 若干의 動作을 加味한 오페라 와 같은 것으로, 光武(光武) 年間에 원각사 (圓覺社)의 設立과 함께 劇場을 갖추고 作品을 公演하게 되었다. 그 作品 公演의 歷史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5]

唱劇의 作品 沿革 [ 編輯 ]

1903年 원각사 時節에 강용환 (姜龍煥)李 淸國 協律唱劇 (協律唱劇)을 模倣하여 < 春香歌 >를 唱劇化한 以來, 當時의 명창인 송만갑 · 이동백 · 유공렬 · 염덕준 의 努力으로 唱劇으로서의 <春香傳>이 비로소 連行(演行)되었다. 그러나 初期의 <春香傳>의 唱劇은 舞臺裝置와 道具도 없이 背景으로 둘러친 흰 包裝 앞에서 그것도 '앞科場' '뒷科場'으로 나누어 公演하였으며 그 後 <沈淸傳> <興保全> 等이 次例로 唱劇化되어 舞臺藝術로서의 발길을 내딛게 된 것이다. [15]

이와 전후하여 光武(光武) 年間(1897-1907)에 協律社원(協律社員)李 一端을 組織하여 地方巡廻를 하였으며, 이때의 상연물은 <春香傳> <沈淸傳> <장끼傳> <興保全> <蟾同知傳> 等이었는데, 1914年 卿 이 協律社 는 蹤跡을 감추고 말았다. 1905年 원각사 가 閉鎖된 以後 延興社 (延興社)· 長安寺 光武臺 (光武臺)에서 <春香傳> <沈淸傳> <興保全> <백上書가(白尙書歌)> <백進士가(白進士歌)> <華容道(華容道)> <三國志(三國志)> <토공展(兎公傳)> 等이 上演되었으나 初期의 貧弱함을 면하지 못하였다. [15]

그러나 1932年 朝鮮聲樂硏究會 가 發足하고, 1936年 그 傘下에 창극좌 가 組織되어 本格的인 唱劇運動이 展開되면서 唱劇은 本軌道에 올라섰다. 또 新劇 의 影響을 받아 舞臺裝置와 大小道具를 제대로 갖추어 全篇을 公演하게 됨으로써 唱劇의 傳統과 形式을 갖추게 되었다. 이리하여 <鼈主簿傳(鼈主簿傳)> <裵裨將傳(裵裨將傳)> <劉忠烈傳(劉忠烈傳)> 等의 새로운 唱劇이 나오게 되었는데 이는 名唱 정정렬 의 偏極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15]

1939年 에는 한주환 · 전일도 (全一道)· 박동실 (朴東實)· 김여란 · 김소희 · 박후성 을 中心으로 한 畫廊唱劇團 의 <봉덕사의 鐘소리>가 上演되었고, 같은 해에 임방울 · 정광수 · 江南中 (姜南中)· 이화중선 · 김추월 (金秋月)을 中心으로 한 同一唱劇團 이 <一目將軍(一目將軍)>을 가지고 地方을 巡廻하였다. [15]

그 後 1942年 창극좌 畫廊唱劇團 이 合同하여 朝鮮唱劇團 이라 稱하고, <입담春夢(入譚春夢)> <項羽(項羽)와 虞美人(虞美人)> <薔花紅蓮傳(薔花紅蓮傳)>이 次例로 上演되었다. 그러나 그 後 日帝의 모진 彈壓으로 唱劇系는 極度로 萎縮되었다가 光復 을 맞이하게 되었다. 1945年 10月에 大韓國樂院 이 創設되고, 그 傘下에 國劇社 ·國극협團(國劇協團)· 朝鮮唱劇團 ·金延壽唱劇團(金演洙唱劇團)李 組織되었고 國劇社 의 <臺春香傳(大春香傳)> 公演을 비롯하여 <아랑哀話(阿郞哀話)> <善花公主(善花公主)> <萬里長城(萬里長城)>, 朝鮮唱劇團 의 <論介(論介)> <왕자호동(王子好童)>, 金延壽唱劇團의 <斷種(端宗)과 死六臣(死六臣)>, 國극협段의 <高句麗의 魂> <秋風感別曲(秋風感別曲)> <彈夜曲(嘆夜曲)> 等이 繼續하여 上演되었다. [15]

더구나 1949年 에는 女性國樂同好會(女性國樂同好會)가 組織되어 <해님과 달님>의 前篇(全篇)을 上演瑕疵, 같은 해에 女性國劇同志會(女性國劇同志會)가 組織되어 <해님과 달님> 後篇을 들고 나왔다. 이에 이르러 唱劇은 바야흐로 一大 붐을 이루었으나 6·25戰爭 으로 이들 團體는 모두 解散되고 말았다. [15]

1952年 부터 唱劇系는 차츰 活氣를 띠기 始作하였고, 그때부터 女性國劇團이 雨後竹筍格으로 쏟아져 나와, 1955年 에서 1957年 사이에는 唱劇의 全盛期가 到來했다. 그러나 唱劇團의 亂立은 必然的으로 經營難을 招來하여 1950年代末부터 하나둘씩 解散되었으며 1960年代初에 이르러서는 全滅狀態로 그때부터 唱劇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러다가 1962年 國立唱劇團 (國立唱劇團)李 創立되고 <臺春香傳>의 公演을 契機로 唱劇 再建의 希望을 바라보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5]

唱劇의 鑑賞法 [ 編輯 ]

唱劇은 오페라 와 같이 窓(唱)을 부르며 演技하는 境遇와 演劇과 같이 臺詞를 하며 演技하는 境遇, 드물기는 하지만 無言劇이나 舞踊劇과 같이 마임 (mime)으로 演技하는 境遇로 大別된다. [15]

窓을 부르면서 演技하는 境遇에는 窓의 音樂을 理解해야 한다. 이 境遇에 있어서 窓은 판소리型의 가락을 부르므로 판소리에 나오는 兆· 長湍 ·唱法·高法(鼓法)·伴奏音樂 等의 판소리 音樂을 理解해야만 한다. 條에는 羽調 · 界面調 · 平調 · 京드름 · 덜렁제 等이 있다. 羽調는 英雄的이고 豪宕하며 男性的인 表現을, 界面調는 悽絶하고 柔軟하며 女性的인 表現을, 平調는 和平하고 和氣靄靄한 表現을, 京드름은 異色的이고 輕快한 表現을, 덜렁제는 武士的이고 輕快한 表現을 한다. [15]

장단에는 매우 느린 진양, 普通 速度의 중모리, 조금 빠른 중중모리, 매우 빠른 자진모리 및 휘모리, 異色的인 拍子인 엇모리·엇中모리가 있다. 진양은 抒情的인 表現을 하며, 중모리는 抒情的인 表現 或은 敍述的인 機能, 중중모리는 興겨운 表現과 絶叫하는 機能, 자진모리는 劇的이고 緊迫한 表現과 事件을 길게 羅列하는 機能이 있다. [15]

그러나 唱劇은 앞뒤를 連結하거나 劇中人物의 心情을 하소연하는 大使를 刀創(導唱) 및 劇中人物끼리의 交窓으로 連結해야 하기 때문에 1人窓(一人唱)으로 一貫하는 판소리 와는 音樂的으로 다른 面도 있다. 臺詞를 하며 演技하는 境遇에는 판소리의 '아니리式(式)'으로 하는 境遇와 假面劇 式의 臺詞를 쓰는 境遇, 新劇 式의 臺詞를 쓰는 境遇가 있다. 따라서 판소리 아니리式 臺詞法, 假面劇式 臺詞法, 신극식 臺詞法을 理解하고 이것이 唱劇에서 어떻게 延期되는가를 比較하며 鑑賞하는 것이 좋다. [15]

舞踊劇과 같이 마임 으로 演技하는 境遇는 最近에 國立唱劇團 이 結成되면서 試圖하는 것으로, 韓國的인 몸짓과 銅雀을 찾고자 하는 것이며, 韓國 傳統民俗劇의 마임을 理解해야 한다. 또 唱劇의 時代的 背景이 史劇인 境遇가 大部分이므로, 劇中에 나오는 모든 民俗的인 要素를 알아야만 한다. 唱劇은 60年의 歷史를 갖고 많은 施行錯誤를 하면서 그 定立에 努力하고 있으나 아직 唱劇 特有의 樣式을 찾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15]

各州 [ 編輯 ]

  1. 李眞淳, 文化·民俗/韓國의 演劇/唱劇/唱劇[序說], 《글로벌 世界 大百科》
  2. 韓國音樂/韓國音樂/韓國音樂史/현대 韓國音樂/唱劇, 《글로벌 世界 大百科》
  3. 文化·民俗/韓國의 演劇/唱劇/唱劇의 音樂/唱劇의 種類, 《글로벌 世界 大百科》
  4. 李眞淳, 文化·民俗/韓國의 演劇/唱劇/唱劇의 演出과 演技/唱劇의 演出과 演技 [開設], 《글로벌 世界 大百科》
  5. 文化·民俗/韓國의 演劇/唱劇/唱劇의 演出과 演技/唱劇의 臺本, 《글로벌 世界 大百科》
  6. 文化·民俗/韓國의 演劇/唱劇/唱劇의 演出과 演技/唱劇의 作曲, 《글로벌 世界 大百科》
  7. 文化·民俗/韓國의 演劇/唱劇/唱劇의 演出과 演技/唱劇 演出家의 準備, 《글로벌 世界 大百科》
  8. 文化·民俗/韓國의 演劇/唱劇/唱劇의 演出과 演技/唱劇의 配役 決定, 《글로벌 世界 大百科》
  9. 文化·民俗/韓國의 演劇/唱劇/唱劇의 演出과 演技/創意 練習, 《글로벌 世界 大百科》
  10. 文化·民俗/韓國의 演劇/唱劇/唱劇의 演出과 演技/唱劇의 臺本 읽기, 《글로벌 世界 大百科》
  11. 文化·民俗/韓國의 演劇/唱劇/唱劇의 演出과 演技/唱劇의 動作 練習, 《글로벌 世界 大百科》
  12. 文化·民俗/韓國의 演劇/唱劇/唱劇의 演出과 演技/唱劇의 一貫練習, 《글로벌 世界 大百科》
  13. 文化·民俗/韓國의 演劇/唱劇/唱劇의 演出과 演技/唱劇의 總練習, 《글로벌 世界 大百科》
  14. 朴憲鳳, 文化·民俗/韓國의 演劇/唱劇/唱劇의 창우, 《글로벌 世界 大百科》
  15. 文化·民俗/韓國의 演劇/唱劇/唱劇의 作品과 鑑賞, 《글로벌 世界 大百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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