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니시 유키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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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니시 유키나가
小西 行長
고니시 유키나가
고니시 유키나가
꽃십자가, 하나구루쓰문
꽃十字架, 하나구루쓰문
無事 情報
時代 센고쿠 時代 ~ 아즈齒모모야마 時代
出生 告知 1年 ( 1555年 )? 에이로쿠 (永?) 元年( 1558年 )? [1]
死亡 게이初 5年 陰曆 10月 1日 ( 1600年 11月 6日 )
洗禮名 아우구스티누스 ( 라틴語 : Augustinus , 로마 가톨릭교회 )
所屬 徐君(세키가하라 戰鬪 當時)
主君 우키타 나오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 히데요리
官位 種5爲하 , 休暇 老카미, 셋쓰 老카미.
主要 參戰 分路쿠?게이초의 驛
세키가하라 戰鬪
氏族 고니시氏
父母 아버지: 고니시 류사
어머니: 와쿠사 (洗禮名: 막달레나, Magdalena)
兄弟姊妹 조세이 , 유키카게 , 度老母노스케
子女 아들: 히데社다
딸: 다에 (洗禮名: 마리아 )
養女: 줄리아 誤打아
宗敎 로마 가톨릭교회
墓所 기후縣 다루李霆 의 젠도지(?幢寺)
오사카部 사카이시 미나미部 사카이 公園 墓地 內의 供養塔
고니시 유키나가
日本語式 漢字 小西 行長
가나 表記 こにし ゆきなが
國立國語院 標準 고니시 유키나가
通用 表記 코니시 유키나가
로마字 Konishi Yukinaga

고니시 유키나가 ( 日本語 : 小西 行長 , 告知 1年 ( 1555年 )? 에이로쿠 元年( 1558年 )? ~ 게이初 5年 陰曆 10月 1日 ( 1600年 11月 6日 ))는 日本 商人(商人) 出身의 武裝 이다. 洗禮名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히포넨시스 ( 라틴語 : Aurelius Augustinus Hipponensis ). 壬辰倭亂 當時 日本軍 장수였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 아꼈고 當時 代 朝鮮 貿易을 獨占하고 있던 쓰시마國 소 요시토視 丈人 이다. 가토 기요마사 와는 怏宿 關係였다. 기리柴炭 信者( 기리柴炭 다이묘 ) [2] 이었으며, 그의 部長이자 사위인 소 요시토詩를 비롯한 그의 麾下 冊肆를 包含, 兵士들 亦是 洗禮名 기리柴炭 으로 構成되었다.

生涯 [ 編輯 ]

에이로쿠 元年( 1558年 ) 이즈美國 사카이 에서 藥材 장사를 하던 고니시 류사(小西隆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린 時節을 교토에서 보냈다. [3] 本名은 야쿠로 (彌九?)였다.

처음에는 非젠 후쿠오카 의 擧上 아베 요시社다 (阿部善定)의 데다이 (手代) 겐로쿠 (源六) [4] 의 養子로 들어갔다가(《오카야마 現事》), 그가 장사를 하던 地域의 榮州 우키타 나오이에 에게 才能을 인정받고 無事로 拔擢, 나오이에의 家神이 되었다. 以後 오다 노부나가 의 家臣이던 하시바 히데요시 미키性 (三木城)의 나오이에를 攻擊할 때에도, 노부나가에게 降伏하기로 決定한 나오이에의 名으로 유키나가가 히데요시와 交涉에 나섰는데, 이 때 히데요시로부터 그 才能을 인정받아 나오이에 死後 다시 히데요시의 臣下가 되었다.

그後 도요토미 政權 후나浮橋 (船奉行)으로 任命되어 水軍을 統率했다. 덴쇼 13年( 1585年 )에는 셋쓰老카미(涉津守)로 任命되고 아울러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그의 도요토미 姓을 下賜받기도 했다. 같은 해에 벌어진 규슈 征伐 에서 水軍을 거느리고 參戰했다가 사이가秋(雜賀衆)의 抵抗으로 敗北했으나, 한便으로 誤打性(太田城)에 對한 水攻에서 亞타케婦女 大砲 를 動員한 攻擊으로 降伏을 받아내는데 成功하기도 했다.

그가 洗禮를 받고 기리시탄이 된 것은 덴쇼 13年( 1585年 ) 쇼度섬 (小豆島)의 領地 1萬 席을 [5] 下士받기 1年 前인 덴쇼 12年( 1584年 )으로, 다카야마 禹콘 의 紹介로 洗禮를 받아 기리시탄이 되었다고 한다. 아우구스티노라는 이름으로 洗禮를 받고 기리시탄이 된 後 새로 自身의 領地가 된 쇼도 섬에 포르투갈 出身의 로마 가톨릭교회 新婦 人 세스페데스를 招聘해 基督敎를 布敎하고 섬의 田土 開發을 積極的으로 行했다. 또한 덴쇼 15年( 1587年 )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내린 바테렌 追放令 (バテレン追放令) 때에 改譯당한 禹콘을 섬에 숨겨주고 追放令의 不當함을 도요토미 히데요시 에게 諫言하였다고 한다.

우토 星州로써 [ 編輯 ]

히고 高쿠진 잇키 (肥後?人一揆)에서 專攻을 세워, 히고 의 國主(國主) 삿社 나리마사 割腹 後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서 히고 南半部人 우토 (宇土), 야시로 (八代), 마시키 (益城) 3軍 20萬 石을 받았다.

덴쇼 17年( 1589年 )에 히고 의 옛 禹土星 東쪽(只今의 구마모토현 우토市 後루시路程古城町)에 새로이 우토城을 쌓아 自身의 本據地로 삼았다. 유키나가가 새로 쌓은 禹土星은 姓은 작은 丘陵에 頂上에 魂마루(本丸)를 두고 西쪽에 니노마루(二の丸), 楷字와 城壁, 산노마루(三の丸)를 두어 各自가 楷字와 城壁으로 둘러싸인 形態의 近世 城郭의 構造를 갖추고 있었고, 가마쿠라 時代 末期에 우토氏(宇土氏)가 처음쌓아았던 옛 우토 性과 함께 보면 마치 이 날개를 펼치고 있는 모습과 같아서 「鶴聲」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이 우토城을 쌓을 때 動員한 아마쿠社 制度의 다섯 고쿠陣이 叛亂을 일으켰으나, 이를 가토 기요마사 의 도움을 받아 討伐하고 아마쿠社 1萬 石島 유키나가의 차지가 되었다. 이에 對해서 後날 朝鮮으로의 攻擊을 計劃하던 히데요시가 意圖的으로 유키나가를 히고 땅에 領地를 준 것이라는 解釋도 存在하고 있다.

이 무렵 아마쿠社는 總人口 3萬 名 가운데 2萬 3千 名이 기리柴炭으로 60人 假量의 神父와 30個의 敎會가 있었다고 하며(' 그리스도 의 섬'이라고 불릴 程度였는데, 이는 後날 시마바라 蜂起 의 伏線이 된다) 시키 氏(志岐氏)의 領地였던 시키에는 宣敎師의 要請에 依해 畫家이기도 했던 이탈리아人 修道士 지오반니 니콜라오가 派遣되어 그의 指導 아래 聖像學校(聖像?校)를 運營하기도 했으며, 이곳에서는 聖火 및 聖像 製作을 위한 油畫 , 水彩畫 , 銅版畫 等 西洋 美術을 가르치며 實際 製作도 이루어지기도 했다. 學校는 後날 分路쿠 3年( 1594年 )에 아리마 半島(有馬半島) 하치라오(八良尾)의 세미나리오와 합쳐졌고 [6] 規模도 더욱 늘어났으며, 이들 예수회의 活動을 積極的으로 支援하고 保護한 것이 유키나가였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十字架 가몬 (家紋). 壬辰倭亂 前後로 交替되었다.

유키나가의 禹土星은 미즈키 (水城)로써 重要한 機能을 가지고 있었는데 히데요시의 뜻을 받들어 야시로의 港口인 도쿠부치노쓰(?淵津) [7] 에도 武器視魔性(?島城)를 쌓아 水利 施設을 强化하고 中신 고니시 유키시게 (小西行重)를 星州 代理로 派遣해 支配하였다. 이때 유키나가는 旣存의 山 頂上에 있던 候樓後土星(古麓城)을 없애고, 驅魔價와(球磨川) 江물이 야시로 앞바다로 흘러드는 어귀의 섬에 武器시마 城을 쌓아서 周邊의 물들을 誠意 天然 垓子로 삼고 아울러 船舶이 直通으로 往來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밖에 周邊의 구마노造成(?庄城), 基野魔性(木山城), 야베性(矢部城), 아이土星(愛藤寺城) 等을 知性(支城)으로 삼아 驅魔勞組 城에 동생 고니시 圖謀老母스케(小西主殿介), 아이土 性에는 流寓키 野헤이打(結城?平次) 等 一族의 重臣들을 星州 代理로 派遣해서 支配하는 任務를 맡겼다. 또한 다카야마 禹콘의 옛 臣下(그리고 기리柴炭이었다)들도 많이 自身의 家神으로 받아들였다.

한便 삿社 나리마사 割腹 後 같은 時期에 유키나가의 領地와 隣接한 히고 北半部 25萬 席을 받아 다이묘가 된 가토 기요마사와는 以後 사이가 갈수록 나빠졌다. 宗敎的인 面에서 熱烈한 니치렌종 信者로 알려져 있던 기요마사를 避해 逃亡친 기리柴炭들을 유키나가가 自身의 領地로 받아들여 保護해주면서, 두 사람의 사이가 서로 틀어지기 始作하였다는 指摘도 있다.

臨津·丁酉再亂 [ 編輯 ]

도요토미 히데요시 의 朝鮮 侵略 野慾을 感知한 유키나가는 戰爭을 막고자 試圖하였으나 失敗하자, 사위인 소 요시토視 , 나가사키 半島의 작은 다이묘들人 마쓰라 시게노部 , 아리마 하루老父 , 오무라 요시아키 , 고토 스美하루 와 僧侶 겐소 를 이끌고, 가토 기요마사 에게 보란 듯이 18,700名으로 構成된 朝鮮 侵攻 先鋒隊 第1軍의 指揮官으로 가장 먼저 朝鮮에 上陸하였다. 유키나가를 先鋒으로 세운 決定은 히데요시의 意思에 따른 것이었다.

犬猿之間이었던 가토 기요마사는 咸鏡道 로 進擊하여 국경인 等의 叛亂 德分에 임해군 순화군 을 生捕하며 커다란 野戰을 치르지 않은 것에 비해 유키나가는 부산진城 多大浦性 , 동래성 을 陷落시키고, 漢陽 을 가장 먼저 占領하여 參戰 武裝 가운데 가장 큰 功을 세웠다. [8] 特히 기요마사는 普及을 無視한 채 咸鏡道로 繼續 進擊하여 정문부 等 咸鏡道 義兵들에게 各個擊破 當하고 女眞族 에게 完敗 當한 것에 비해, 유키나가는 平壤城 을 陷落시킨 以後, 普及 問題와 明의 援軍에 對한 負擔을 걱정하는 等 가토 기요마사와는 對照的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以後 유키나가의 걱정대로 名의 介入과 全羅左水使(全羅左水使) 李舜臣 을 爲始한 朝鮮 水軍의 南海 制海權 掌握, 그리고 各地에서의 朝鮮 義兵 의 活躍으로 因한 普及 問題로 더 以上 進擊을 못하고 遲滯하던 中 照明聯合軍에 敗해 쫓겨났다.

유키나가는 기요마사와는 달리 이시다 미쓰나리 等과 함께 積極的으로 强化交涉에 힘썼는데, 朝鮮側은 이를 몇 番이나 拒否 또는 默殺하였고, 기요마사는 이를 두고 "고니시가 朝鮮에서 조금만 더 積極的이었다면, 戰爭의 樣相은 달라졌을 것이다."라고 不滿을 터트렸다고도 한다. 名의 介入 初期에는 조승훈(祖承訓) 等이 이끄는 名君의 平壤城 攻擊 을 擊退하기도 했으며(조선측의 平壤城 奪還 試圖도 番番이 失敗하였다), 이때 유키나가의 동생인 고니시 要시치로 ( 日本語 : 小西?七? )와 四寸 兄弟 고니시 안토니오 ( 日本語 : 小西アントニオ ), 一門의 히비야 아구스度 ( 日本語 : 日比谷アゴスト ) 等이 戰死하였다. 그 뒤 强化 交涉에 强勁한 姿勢로 一貫하던 朝鮮 朝廷 代身 明과 交涉을 試圖했고, 名側과 유키나가 兩側은 50日間의 休戰과 强化 交涉에 同意했다.

그러나 分路쿠 2年( 1593年 ) 1月에 李如松 이 이끄는 4萬 名의 朝鮮 支援軍이 平壤을 攻擊해 陷落시켰고, 유키나가는 名君의 攻勢에 밀려 漢陽까지 退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5月에 시마즈 다다토키 (島津忠辰)가 病을 理由로 出陣을 拒否하다 改譯당했을 때는 그의 身柄을 살펴주는 等 自國內에서도 活動했다. 漢城 周邊으로 물러난 日本軍 은 進擊해 오는 名君을 碧蹄館(碧蹄館)에서 擊破( 碧蹄館 戰鬪 )했는데, 이때 유키나가의 軍은 漢城에 머무르고 있었다. 碧蹄館 戰鬪 以後 明軍과 日本軍 사이에는 다시 한 番 强化 交涉이 벌어졌는데, 유키나가는 名側의 會談 擔當者 沈惟敬 과 짜고 히데요시에게 名이 降伏했다고 속였고, 名에 對해서는 히데요시가 降伏한다고 속여 强化 交涉을 성립시킨다. 이때 유키나가의 家臣인 나이토 조안 (?藤如安) [9] 이 日本側 使節로써 베이징(北京)까지 오기도 했다. 그 結果 明의 使臣이 히데요시를 日本國王으로 봉한다는 萬曆帝 (萬曆帝)의 勅旨와 今人(金印)을 가지고 日本으로 當到했다. 冊封 內容은 過去 名이 알탄 칸 의 先例에 따라 히데요시를 醇化王(順化王)으로 봉한다는 것이었다(히데요시의 日本國王 冊封 以外에도 유키나가나 오타니 요시쓰구 等 和平을 主張했던 日本側 武裝에게도 大都督(大都督), 유키나가의 家臣들은 都督(都督) 指揮(指揮) 等 名義 軍號를 받았다). 그런데 이는 히데요시가 名의 臣下가 된다는 것으로 히데요시가 名에 要求한 和議 條件과는 다른 것이었다. 때문에 히데요시에게 回報하는 段階에서 유키나가는 勅旨를 읽는 任務를 命한 사이쇼 操舵이 (西笑承兌)에게 內容을 살짝 바꿔서 읽어줄 것을 付託했지만, 操舵이는 勅旨를 곧이곧대로 히데요시 앞에서 읽어버렸고, 强化 交涉은 決裂되었다. 交涉을 主導한 유키나가는 히데요시의 憤怒를 사서 죽을 危機에 몰렸으나, 사이쇼와 마에다 都市이에 (前田利家), 尿道逃奴 (淀殿) 等의 挽留로 목숨은 건졌다.

남원성 戰鬪 當時 日本軍의 攻略도
남원성 內部 簡略度

유키나가는 不忠不義의 待罪를 戰爭에서 功을 세워서 갚으라는 히데요시의 嚴命을 받고 朝鮮으로 向했다. 壬辰年과는 달리 기요마사가 제1진을 맡았고, 유키나가는 가신 사이노 시치多柳(梯七太夫, 朝鮮側 記錄에 登場하는 요시라 )를 朝鮮의 經常右兵士(慶尙右兵使) 김응서 에게 보내어 가토君의 圖解 情報를 보내주었다. 이에 對해 朝鮮의 三道水軍統制使 가 된 李舜臣은 敵軍이 보내준 정보라 믿지 않아 攻擊하지 않았고, 朝廷에서 다시 攻擊 命令을 내렸을 때는 이미 가토軍이 釜山에 上陸한 뒤였기에 攻擊 命令을 다시 拒否했다. [10] 그러자 朝廷은 李舜臣을 罷免하고 代身 元均 을 後任으로 앉혔다. 그러나 元均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出戰하지 않았고, 都元帥 權慄 이 原菌에게 笞刑을 加해 半强制로 출전시켰다. 以後 巨濟島 隣近의 漆川梁에서 朝鮮 水軍은 大敗하였다. 朝鮮 水軍을 潰滅시킨 뒤 유키나가는 5萬 8000名의 軍士를 이끌고 順天으로부터 남원성 攻擊에 加擔했고, 남원성을 陷落시킨 뒤 朝鮮人들의 코와 귀를 베어 소금에 절여 日本으로 보냈으며 그 後 全州 戰鬪에서 꺾이게 된다.

이듬해 게이初 3年( 1598年 ) 陰曆 8月 18日 에 히데요시가 죽었다. 9月 末부터 10月 初에 걸쳐 유키나가는 順天에서 照明聯合軍을 相對로 籠城을 벌였다. 戰鬪에 앞서 名의 將軍 유정 의 强化 提案에 應해 유키나가는 性 밖으로 나왔지만, 이는 유키나가를 잡으려는 名側의 陷穽이었다. 間髮의 差異로 유키나가는 이를 알아채고 城안으로 돌아왔지만, 照明 聯合軍에 依해 유키나가의 姓은 包圍되었다. 히데요시가 죽었다는 消息을 듣고 撤收를 決定, 明나라 水軍을 指揮하던 진린 에게 賂物을 주어 退路를 確保해 주겠다는 確約을 받아냈지만, 朝鮮의 水軍 統制使 李舜臣은 진린의 이러한 方針에 强力하게 反對하고 退却하는 日本 水軍에 對한 攻擊에 나섰고, 露梁 에서 벌어진 戰鬪에서 시마즈 요시히로 等의 도움으로 유키나가는 가까스로 後退, 12月에 歸國할 수 있었다.

壬辰倭亂 當時 유키나가의 軍隊를 따라 從軍했던 僧侶 덴케이 ( 日本語 : 天荊 )는 戰亂 狀況을 詳細히 記錄한 《 抒情日記 》(西征日記)를 남겼고, 이는 壬辰倭亂 硏究의 飼料로 손꼽힌다.

세키가하라 戰鬪 [ 編輯 ]

歸國한 뒤 日本 國內에서 文治派와 武斷派 사이의 對立이 깊어지는 가운데,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시다 미쓰나리와의 親交로 文治派에 加擔하면서도, 데라者와 히로타카 와 함께 도쿠가와 이에야스 의 道理쓰기(取次)를 맡는 等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가까워지려고 애썼지만, 게이初 5年( 1600年 )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아이즈 征伐 (?津征伐)에 나섰을 때 이에야스는 그를 參戰시키지 않고 殘留하도록 했다. 또한 武斷派의 가토 기요마사가 이시다 미쓰나리를 襲擊하는 事件을 일으키고, 도요토미 家門을 守護한다는 名分으로 陰曆 9月 15日에 세키가하라 戰鬪 가 벌어졌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미쓰나리를 따라 徐君에 加擔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野戰에 强한 이에야스를 의식하여 籠城(或은 東軍이 陣을 갖추기 前에 夜襲 [11] )을 提案했으나 이시다 미쓰나리는 간토의 對 다이묘人 이에야스를 制壓하기 위해서는 野戰에서 크게 勝利해야 한다며 拒否했다. 이로 因해 고니시 유키나가는 세키가하라에서 우키타 히데이에 나 미쓰나리에 비해 積極的이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키가하라에서 戰鬪가 始作되자 고니시 君은 東君의 다나카 요시마사 , 쓰쓰이 사다쓰구 , 오다 우라쿠사이 , 後壘打 시게카쓰 君을 맞아 激戰을 치르지만,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等의 背反으로 오타니 요시쓰구 部隊가 潰滅되고, 이어 고니시 自身의 部隊도 우키타 部隊와 함께 무너져 버렸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自決을 禁止하는 기리시탄의 가르침에 따라 割腹을 拒否했고, 이부키 산(伊吹山)으로 들어가 숨었고, 19日에 하야시 조주 (林?主)에게로 依支했으나, 이어 自身을 잡아 바치고 褒賞을 세울 것을 提案한다. 하야시는 이를 拒絶했지만 다케나카 시게카도 (竹中重門)의 가신 이토 겐子에몬 (伊藤源左衛門)· 야마다 모쿠노스케 (山田?之丞) 두 사람에게 事情을 이야기하고 함께 고니시 유키나가를 護衛해 아사쓰(草津)의 무라考試 나오요시 (村越直吉)에게로 데려갔다. 무라考試 나오요시는 이때 하야시 조주에게 上으로 黃金 열 兩을 주었다고 한다. [12]

10月 1日, 고니시 유키나가는 徐君의 다른 將帥들과 마찬가지로 媤家에서 조리돌림당한 뒤 교토 로쿠兆 의 江邊에서 이시다 미쓰나리, 안코쿠地 에케이 와 함께 斬首되었다. 이때 淨土宗 僧侶가 머리 위에 經文을 갖다 대는 것을 自身은 기리柴炭이라는 理由로 拒絶했고, 예전 포르투갈 王妃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리타 로부터 膳物받은 예수 聖母 마리아 이콘 을 들어 세 番 머리 위로 대고 난 뒤에 斬首되었다고 한다. 또한 죽기 直前 같은 氣理柴炭인 구로다 나가마사 에게 自身의 告解聖事를 要請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名이라는 理由로 그는 拒絶했고, 司祭를 불러오는 것조차 許諾되지 않았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處刑된 以後 그의 목은 도쿠가와側에 依해 散調 大橋에 梟首되었고, 예수회側 史料에는 그의 屍體를 敎會에서 거둔 뒤에 告解聖事를 行하고 基督敎式으로 葬禮를 치렀지만, 머리와 몸이 함께 賣場되지는 못했다고 한다.

고니시 家門이 完全히 滅門된 뒤 그의 領土는 가토 기요마사의 所有가 되었고, 고니시가 割腹을 拒否한 理由가 기리柴炭 때문이라는 것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認識하면서 日本에서는 大大的인 기리柴炭 彈壓이 實施되었다는 指摘도 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領地였던 아마쿠社 制度에서 다이묘의 苛酷한 徵稅에 기리柴炭 彈壓에 對한 反撥까지 더해져 시마바라의 난 이라는 大大的인 蜂起가 일어났으나 鎭壓되었고, 이 蜂起에는 옛 고니시 유키나가의 家臣들이 많이 參加했었다고 한다. 그의 죽음은 예수회를 통해 西區에까지 알려져 當時 바티칸 敎皇 클레멘스 8歲 는 그의 죽음에 對해 哀悼를 표한다는 말을 했고, 그의 死後 7年 뒤인 1607年 이탈리아 제노바 에서 그를 主人公으로 하는 音樂劇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家計 [ 編輯 ]

登場 作品 [ 編輯 ]

※본 項目에서는 韓國과 日本의 作品을 合쳐 說明하고 있습니다. 韓國의 境遇 ○, 日本의 境遇 ●으로 表記합니다.

韓國에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媒體에서 登場하는 境遇는 小說이나 漫畫, 大部分 壬辰倭亂(丁酉再亂 包含)을 다룰 때로 集中되어 있다. 日本에서는 다이묘 가운데 보기 드문 기리柴炭 다이묘라는 點에 注目한 作品이 많고, 代表的인 作品으로 基督敎人이기도 했던 小說家 엔도 슈사쿠 의 《宿敵》李 알려져 있다.

小說
  • 《海葬(海將) ~ 바다의 司令官 고니시 유키나가》(海?~海の司令官?小西行長) (시라이시 이치로白石一?, 신쇼사新潮社, 新版 고단샤文庫 上下)●
  • 《鐵로 된 用水 고니시 柳키나가 전》(?の首枷 小西行長?) ( 엔도 슈사쿠 주오公論社, 新版 分카사文庫)●
  • 《宿敵》(宿敵)(엔도 슈사쿠, 가도카와文庫 上下)●
  •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아사쿠라 가즈야麻倉一矢, 고분샤문고光文社文庫)●
  • 《고니시 柳키나가 後悔없이 사는 法》(小西行長 後悔しない生き方) (에미야 다카유키江宮隆之, PHP文庫)●
  • 《7年 戰爭》( 김성한 , 산천재) - 1990年에 처음 행림출판사에서 出刊되었을 當時 題目은 《壬辰倭亂》이었다. 該當題目은 2012年에 復刊되면서 붙은 것.○
  • 《히데요시 朝鮮의 난》(秀吉朝鮮の?) (김성한]] ? 古墳샤光文社) ●
  •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모리무라 시게루森本繁, 가쿠엔??M文庫) ●
  • 《考慮婢妾》(高麗秘帖) (아라야마 토오루荒山徹, 료텐샤문고祥?社文庫) - 韓國에는 2000年 에 세창出版社에서 《李舜臣을 暗殺하라》라는 題目으로 飜譯 出刊되었다. ●
  • 《麻風海峽》(魔風海?) (아라야마 토오루, 료텐샤문고) ●
드라마
映畫

各州 [ 編輯 ]

  1. 고니시 유키나가의 生年에 對해서는 韓國의 朝鮮側 記錄인 宣祖實錄(宣祖??) 宣祖 28年頃에 「行長(유키나가)는 올해 나이 서른여덟로」(行長今年三十八)이라고 記錄한 것이 唯一하며, 이를 通해 逆算하면 고니시 유키나가의 生年은 에이로쿠 元年이 된다.(鳥津亮二 저 『小西行長 : 「抹殺」されたキリシタン大名の?像 : 史料で?む??史』 八木書店, 2010年. ISBN   9784840620499 .)
  2. 고니시 유키나가 - 두산世界대백과사전 2010年 11月 1日 確認.
  3. 예수회 宣敎師 루이스 프로이스 는 本國에 보내는 便紙에서 「하시바(羽柴, 後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海軍 司令官은 首都(교토)에 사는 크리스천 ( 기리柴炭 )으로 이름은 아우구스티노 (아고스티니요)라고 한다」라고 적고 있다.( 1584年 8月 31日子 루이스 프로이스의 便紙. 이 便紙는 『예수회 日本 年譜』 商圈에 收錄되었다.
  4. 後날 오카야마試打노마치(岡山下之町)에서 布木商을 하는 陶土야노 쿠로禹에몬 (魚屋九?右衛門).
  5. 다만 이 1萬 席이라는 規模에 對해서 쇼도 섬 한 곳만으로는 1萬 席에 미치지 못한다는 點에서 그 外에 다른 領土가 있었거나 1萬石이라 記錄된 數字 自體가 誤謬이거나 하는 여러 가지 說이 存在하지만 確定된 것은 없다.
  6. 後날 유키나가의 外孫子인 萬쇼 고니시(マンショ小西)도 이곳 아리마 세미나리吳에서 工夫하였다.
  7. 사가라氏(相良氏)가 支配하던 時節부터 야시로는 이미 이 地域의 海外 交易의 中心地였고, 야시로의 繁榮한 모습에 對해서 루이스 프로이스는 自身이 著述한 《日本史》에서 極讚하고 있다.
  8. 유키나가가 愛用하던 武器는 巨大한 檢이었는데, 그것을 들고 있으면 敵兵들이 恐怖에 질려 敢히 나서질 못하였다고 記錄되어 있다.
  9. 名側 記錄에는 소서비彈(小西飛?), 소서비(小西飛) 等으로 되어 있다.
  10. 애當初 諜者 요시라의 情報는 기요마사와의 不和를 戰略的으로 利用한 유키나가의 計略이었고, 이를 눈치챈 李舜臣이 攻擊命令을 拒否했다고도 한다.
  11. 夜襲을 建議한 다이묘와 關聯하여 우키타 히데이에, 시마즈 요시히로 等 여러 이름들이 擧論되었다.
  12. 《板坂ト??書》

같이 보기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