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바라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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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바라의 난
(시마바라·아마쿠사의 亂)
에도 時代 의 一部

하라城터
날짜 間에이 (?永) 14年( 1637年 ) 10月 25日 (陽曆 12月 11日 ) - 間에이 15年( 1638年 ) 2月 28日 (陽曆 4月 12日)
場所
結果 에도 幕府 軍이 苦戰끝에 勝利
交戰國

에도 幕府
(마쓰다이라)

네덜란드 聯邦共和國
(마쓰다이라)

기리柴炭
(基督敎徒)
指揮官

마쓰다이라 老父쓰나
이타쿠라 시게마사  

마스다 도키社다  
아리에 겐모쓰 뉴도큐이  

兵力
125,800名 12,000名(여러설이 있음)
被害 規模
10,000名以上 야마다 에모사쿠 (1575 ~ 1657)를 除外한 全員 戰死

시마바라의 난 ( 日本語 : 島原の? )은 에도 時代 初期에 일어난 日本 歷史上 最初의 大規模 잇키 (一揆)다. 막말 以前에 일어난 本格的인 內戰으로 週 構成員은 日本의 土着 基督敎人 들을 일컫는 기리柴炭 이다. 시마바라·아마쿠社 잇키 (島原?天草一揆) 또는 시마바라·아마쿠사의 亂 (島原?天草の?)이라고도 한다.

槪要 [ 編輯 ]

시마바라의 亂은 마쓰쿠라 가쓰이에 (松倉勝家)가 다스리던 히젠 시마바라半島 시마바라番 데라者와 伽陀打카 가 다스리던 가라쓰番 , 이 두 番의 住民 들이 人民 들의 酷使와 過重한 연공(해마다 現物로 바치는 貢納으로 收入의 約 折半을 쌀로 바쳤음)부담, 거기에 더해 番의 기리柴炭 迫害와 飢饉에 依한 어려움까지 겹치면서 兩 番에서 모두 反撥이 일어났다.

기리柴炭 4萬餘 名이 主導한 이 叛亂에서 '人民'은 困窮한 生活에 빠져있던 農民뿐 아니라 隸屬民을 包含한 農業 , 漁業 , 手工業 , 商業 等의 거의 모든 産業 從事者들까지 크고 넒게 包含되어 있었으며, 가톨릭 敎會 彈壓에 對한 反撥이라는 宗敎的 性格과 稅金 搾取로 惹起된 生存權 問題가 모두 包含된 複合的 性格을 지닌다. 그러나 12萬 名의 鎭壓軍에 依해 4個月 만에 鎭壓되었으며, 기리柴炭에 對한 彈壓은 더욱 苛酷해졌다.

背景 [ 編輯 ]

시마바라는 기리柴炭 다이묘 아리마 하루老父 의 領地로 住民들 中에 기리시탄이 늘어났지만, 게이初 19年( 1614年 )에 아리마氏 休暇 盧베오카 로 前鋒되고 히노에 影池는 約 2年間 幕府領이 되었다가 그 뒤를 이어 야마토 (大和) 高調 (五?)로부터 들어오게 된 마쓰쿠라 시게마사 에도城 의 改築 作業을 떠맡게 되면서, 獨自的으로 루손섬 遠征計劃을 세워 先發隊를 派遣하고 시마바라 性을 改築하는 過程에서 住民들로부터 年功을 過度하게 거둬들였다. 또한 기리시탄을 苛酷하게 彈壓하기 始作했으며, 年功을 내지 못하는 農民들과 改宗을 拒否하는 기리柴炭들을 殘忍하게 拷問 하고 處刑하였다. [1] 시게마사의 뒤를 이은 長男 가쓰이에 亦是 기리柴炭에 對해 시게마사와 같은 政策을 取했다.

아마쿠社는 過去 기리柴炭 다이묘 고니시 유키나가 의 領地였는데, 세키가하라 戰鬪 以後 데라者와 히로타카 에게로 넘어가 히로타카의 次男 伽陀打카의 時代로 이어졌으며 시마바라와 마찬가지로 기리柴炭 彈壓이 이어지고 있었다. 當時의 《 호소카와 가기 》(細川家記)와 《 아마쿠社 道警 》(天草島鏡) 等의 記錄에는 叛亂의 原因이 苛酷하고 無理한 연공 徵收에 있다고 적고 있지만, 시마바라 번주 마쓰쿠라 가쓰이에 는 叛亂 勢力들이 基督敎로 結束되어 있다고 보고 叛亂을 기리柴炭들에 依한 暴動이라 主張하였다. 幕府 또한 시마바라의 亂을 기리柴炭 彈壓의 口實로 삼고자 「시마바라의 난 = 기리柴炭 叛亂(宗敎戰爭)」이라는 圖式을 정착시켰다. 그러나 實際로 시마바라의 欄에는 아리마·고니시 兩 집안을 섬기던 浪人 (浪人)이나 旣存의 土着領主였던 아마쿠史氏 (天草氏)· 시키氏 (志岐氏) 또한 加勢했으며, 一般的으로 알려진 「기리시탄의 宗敎戰爭과 殉敎」라는 것은 叛亂의 一面일 뿐이며 잇키 卽 「호미와 竹槍, 거적 旗발」을 들고 일어난 民亂으로 보는 것이 正確하다고 알려져 있다. [2]

蘭의 展開 [ 編輯 ]

勃發 [ 編輯 ]

番의 苛酷한 政策에 견디지 못한 시마바라 百姓들은 過去 無事였으나 百姓의 身分이 되어 地域 有志로서 活動하던 옛 아리마 집안의 家神들 아래서 組織化되었고(이 組織化 自體를 잇큐라고 부른다), 몰래 叛亂 計劃을 세웠다. 히고 의 아마쿠사에도 고니시 유키나가? 삿社 나리마사 (佐?成政)? 가토 다다히로 (加藤忠?)를 섬기다 改譯당한 많은 로닌들을 中心으로 잇큐가 組織되었다. 시마바라?아마쿠社 잇큐의 主謀者들은 유지마(湯島, 談合島)에서 會談을 갖고 기리柴炭 가운데서도 가장 카리스마的 人氣를 누리던 16歲의 少年 아마쿠社 詩로 (天草四?, 本名은 마에다 지로 도키社다益田四?時貞로 아마쿠社는 옛 아마쿠사의 領主였던 豪族의 이름)를 잇큐군의 總大將으로 내세워 蹶起를 決意했다. 間에이 14年 10月 25日, 아리마 寸(有馬村)의 기리시탄이 中心이 되어 對官소(代官所)로 쳐들어가 對官(代官) 하야시 효자에몬(林兵左衛門)을 殺害함으로써, 잇큐는 始作되었다.

잇큐는 시마바라半島 운젠(雲仙) 地域 南쪽의 미나미메(南目)라 불리는 地域의 組織化에 成功하고, 影池 住民들도 叛亂에 贊成하건 反對하건 强制的으로 叛亂軍을 따랐지만, 北쪽의 기타메(北目)라 불리는 地域은 組織化에 成功하지 못했다. 기타메 領地의 住民 指導層은 운젠 地域의 斷層들, 特히 그 北쪽의 至治세키(千?石) 單層의 巖壁을 天然의 要害地로 삼고 잇큐에 加擔하라고 强要해오는 叛亂軍을 擊退했고, 亂에도 連累되지 않았다(물론 미나미메 안에도 參加하지 않은 마을이 많았고 其他메 마을에서도 參加한 마을이 있었다).

시마바라 番은 곧바로 討伐軍을 보내 後카에 寸(深江村)에서 잇큐군과 交戰했지만 兵士들의 疲勞를 勘案해 시마바라 性(島原城)으로 들어갔다. 잇큐군의 氣勢가 騰騰한 것을 본 시마바라 番의 討伐軍은 籠城戰을 擇하고 誠意 防備를 굳혔고, 잇큐군은 시마바라 城을 包圍하고 性 아래의 마을을 불사르며 掠奪을 벌였다. 討伐軍側은 잇큐에 加擔하지 않은 農民들을 모아 武器를 주고 잇큐를 鎭壓하게 했지만, 오히려 이 農民들 가운데서 잇큐군에 加擔하는 者도 적지 않았다. 잇큐군은 차츰 그 數가 불어났고 시마바라半島 西北部까지 擴張되었으며, 히美 고개(日見峠)를 넘어 나가사키 (長崎)까지 쳐들어가자는 意見도 있었지만 討伐軍이 追擊할 것을 勘案해 中止되었다.

며칠 뒤에는 잇큐군 에 呼應해 히고 아마쿠사에서도 잇큐가 일어났다. 아마쿠社 詩로 를 끼고 잇큐군은 아마쿠社 各地의 支配 據點을 攻擊, 11月 14日에는 魂도 性(本渡城)에서 都彌오카 性(富岡城) 星州 代理 미야케 詩게토視(三宅重利)를 [3] 쳐부수었다. 勢를 늘린 잇큐군은 가라쓰 番의 兵士들이 籠城하고 있던 도미오카 城까지 攻擊해 기타마루(北丸)를 陷落시키고 陷落 直前까지 몰아붙였으나, 堅固한 魂마루(本丸) 防禦에 밀려 失敗했다. 攻城戰 中에 규슈 여러 番의 討伐軍이 오고 있음을 알게 된 잇큐군은 後方에서 攻擊을 받게되면 不利함을 알고 撤收했다. 아리아키 해(有明海)를 건너 시마바라半島로 移動, 援軍을 期待할 수 없게 된 狀態에서 잇큐군은 次惡으로나마 시마바라 領地의 옛 主人인 아리마 집안의 거성으로 當時에는 이미 廢性(?城)李 되어 있던 하라 姓(原城)의 터에서 籠城하는 길을 擇하였다. 여기에 시마바라와 아마쿠사의 잇큐 勢力이 合流하였다. [4] 잇큐군은 하라 城을 修理하고 番의 倉庫에서 빼앗은 武器와 彈藥, 食糧을 이곳으로 옮겨 討伐軍의 攻擊에 對備하였다.

잇큐군은 이를 土臺로 日本 國內를 內亂 狀態로 몰아넣고 最終的으로는 포르투갈 로부터의 援軍도 期待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고 보는 硏究者도 있다. 日本 NHK의 歷史 다큐멘터리 「그때, 歷史가 움직였다」(その時?史が動いた) 2007年 1月 24日 放送分에서 이러한 설을 採用하여, 當時의 著書인 가리바料 辯駁서(カリバ?リョ弁駁書)를 土臺로 하라 省(原城)을 세워 籠城한 要因이 로마 敎皇 으로부터의 잇큐군 支援을 祕密裏에 要請하고 예수회 와의 鳶이 깊던 가톨릭 國家(포르투갈 王國)의 援軍이 올 때까지 籠城하면 된다는 作戰을 세웠다고 한다. 辯駁書에는 實際로 포르투갈이 日本 上陸을 試圖하려다 失敗했다는 記錄이 남아있다.

하라 姓 籠城戰 [ 編輯 ]

바다 쪽에서 바라본 하라 城터.

幕府는 고쇼人半老카미(御書院番頭)를 맡고 있던 이타쿠라 시게마사 (板倉重昌)와 이시가야 사다키요 (石谷貞?)를 各各 上司(上使)와 府使로서 派遣하였다. 시게마사가 거느린 규슈 各 番의 討伐軍은 하라 城을 包圍하고 여러 次例 攻擊해 12月 10日과 20日에 總攻擊을 敢行하지만 番番이 敗走했다. 幕府는 다시 路中 (老中)인 마쓰다이라 老父쓰나 (松平信綱)와 度다 우지카네 (?田氏?) 等을 討伐軍 大將으로 拔擢하기로 決定했고, 공을 가로채일까 두려워한 시게마사는 肝에이 15年(1638年) 1月 1日(2月 14日)에 노부오카가 到着하기 前에 亂을 平定하겠다며 再次 하라 性에 對한 總攻擊을 開始하지만, 별다른 對策도 없이 無理하게 밀어붙인 突擊 作戰으로 4千에 達하는 軍士를 잃고 시게마사 自身도 銃에 맞아 戰死함으로써 攻擊은 다시 失敗로 끝났다. 한便 《上山奇談》(常山紀談)에는 시게마사가 派遣될 무렵, 野규 무네노리 (柳生宗矩)가 작은 番의 번주에 不過한 [5] 시게마사를 總大將으로 삼으면 규슈 다이묘들을 統制하지도 못할 것이고 叛亂 鎭壓도 失敗할 것이라 여겨 反對했다는 이야기가 남아있다.

마쓰다이라 老父쓰나가 이끄는 사이고쿠(西國) 諸侯들의 增員까지 더해진 討伐軍의 數는 12萬 以上으로 불어났고, 陸地와 바다 兩쪽에서 하라 性을 完全히 包圍하였다. 소바쥬(側衆)? 나카메 마사모리 (中根正盛)는 料理키(?力) 20餘 基(騎)를 여러 方面으로 派遣해 잇큐군의 움직임을 詳細히 報告하게 했고, 모치즈키 요에몬 (望月?右衛門) 等 高價 닌자(甲賀忍者)의 한 무리가 하라 姓으로 潛入해 軍糧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事實을 確認했다. 老父쓰나는 普及을 遮斷하는 作戰을 採擇했다.

네덜란드의 援助 [ 編輯 ]

하라 誠意 指導. 아래쪽에 작게 西洋 艦船이 그려진 것이 보인다.

1月 6日, 나가사키 副校 의 依賴를 받은 네덜란드 上官腸 쿠케바케르가 艦砲 5門을 幕府軍에 提供했고, 두 隻의 帆船을 시마바라로 派遣해 바다에서 城안으로 艦砲 射擊을 加했다. 그러나 눈에 띄는 效果는 거두지 못했고, 호소카와 다다토시 (細川忠利) 等 여러 武將들이 나서서 國內의 叛亂을 鎭壓하는데 外國人의 도움을 받느냐고 批判하는 바람에 노부오카는 砲擊을 中斷해야 했다. 그러나 노부오카는 포르투갈 援軍을 期待하고 있을 잇큐군은 心理的으로 큰 衝擊을 받았을 것이라며 日本의 羞恥라 批判하는 것은 適當하지 않다고 反駁하였다고 한다. 實際로 砲擊에 依한 破壞 效果는 적었지만 잇큐군의 士氣를 깎는 效果는 있었다.

네덜란드의 援助에 對해서는 當時 네덜란드 포르투갈 이 戰爭(1603年 ~ 1663年)中이었고, 日本과의 交易을 놓고 競爭 相對였던 포르투갈을 排除하려는 네덜란드 側의 計算이 있었다. 또한 日本 中世史 硏究家인 핫토리 히데오 (服部英雄)는 잇큐 勢力이 포르투갈(가톨릭 王國)과 連結된 것에 對해 幕府側은 네덜란드( 改新敎 國家)와 連結되어 있었으며, 그 뒤 幕府가 鎖國政策 을 行하면서 포르투갈을 排除하고 네덜란드에만 交易을 許可한 것도 이때의 軍事同盟의 結果였다고 考察하고 있다. [6]

幕府의 討伐軍은 몰래 城안으로 獅子나 화살에 묶은 便紙를 보내 內應이나 投降을 期待했지만 成功하지 못했다. 生捕한 아마쿠社 詩로 의 어머니와 姊妹를 시켜 投降을 勸告하는 便紙를 써서 城으로 보내게도 했지만 잇큐군은 이것을 받지도 않았다고 한다. 잇큐군은 하라 誠意 깎아지른 듯한 絶壁을 타고 바다로 내려가 海草를 따먹으며 버텼는데, 마쓰다이라 老父쓰나가 性밖에서 戰死한 잇큐군의 屍體를 解剖해보니 胃腸에 海草밖에 나오지 않았고 이것을 보고 城안에 食糧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다고 한다. 또한 亂이 長期間 鎭壓되지 않고 있는 것에 幕府君의 威信도 깎이고 있었고, 老父쓰나는 마침내 2月 28日에 하라 性에 對한 總攻擊을 決定했다. 그러나 賜暇番 (佐賀藩)에서 갑작스럽게 먼저 攻擊을 始作하는 바람에 豫定보다 하루 앞서 總攻擊이 始作되었고, 여러 다이묘들이 잇따라 攻擊을 開始했다. 普及 遮斷 作戰의 結果로 城안의 食糧도 彈藥도 바닥나 있었고, 幕府君의 首都 壓倒的으로 많았던 탓에 하라 姓은 結局 陷落 [7] , 아마쿠社 詩로가 處刑됨으로써 亂은 鎭壓되었다.

處分 [ 編輯 ]

幕府는 叛亂軍에 對해 苛酷한 處斷을 내렸고 시마바라半島와 아마쿠社 制度의 기리柴炭들은 欄에 參加하라는 잇큐군의 强制를 避해 숨은 者나 마침 他地에 있어 叛亂軍에 加擔하거나 끌려가는 일 없이 살아남은 예전 領地 住民을 除外하고는 모조리 죽임을 當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기리柴炭들은 깊숙히 숨어버렸고 가쿠레키리柴炭 (?れキリシタン)李 되었다.

시마바라의 난 以後 幕府의 가톨릭 政策은 한層 더 苛酷하고 嚴格한 것으로 바뀌었고, 鎖國政策을 推進하는 結果를 낳았다. 또한 以後 一國一城令(一?一城令)을 내려 廢性된 城郭들을 더는 叛亂 據點으로 삼지 못하도록 아예 破壞해버렸다. 시마바라 번주 마쓰쿠라 가쓰이에도 領地 百姓들의 生活을 어렵게 하는 苛酷한 稅金을 徵收한 것이 잇큐의 原因이 되었다는 責任을 물어 個驛 處分되었고, 뒤에 斬刑에 處해졌다(에도 時代의 다이묘는 셋푸쿠 或은 斬刑으로 處刑되었는데 그 事例 가운데 하나이다). 아마쿠사의 데라者와 伽陀打카도 責任을 물어 領地를 몰수당했는데, 그는 後에 精神異常을 일으켜서 自害함으로써, 데라者와 집안은 代가 끊어지고 말았다.

또한 軍律을 어기고 멋대로 攻擊을 開始한 社가 번주 나베緦麻 가쓰시게(鍋島勝茂)도 半年만에 閉門(閉門) 處罰을 當했다. 한便 이 事件으로 幕府는 포르투갈과의 國交를 斷絶하여 日本과의 交易을 포르투갈 代身 네덜란드가 完全히 代行하게 되었는가는 確實하지 않으나, 國交 斷絶까지는 1年 半 程度가 必要했다. 1670年 에 포르투갈에서 貿易을 위한 公式使節團을 보냈을 때, 에도 幕府는 포르투갈 船員을 包含해 57名을 處刑하고 그들이 타고 왔던 배를 불사른 뒤, 몇 名만 남겨 本國으로 돌려보내면서 다음과 같은 警告를 했다.

앞으로 또 한 番 日本에 上陸을 試圖한다면 똑같은 處分을 받게 될 것이다. 外交 使節이건 船員이건, 失手로 上陸했건 暴風으로 難破되어 떠내려왔건, 理由는 相關없다. 甚至於 포르투갈의 王이나, 기리柴炭들이 믿는 神이 온다 할지라도 모두 똑같은 處罰을 받게 될 것이다.

한便 蜂起가 鎭壓되고 보름 後인 3月 13日에 朝鮮 의 東來府使(東萊府使) 정양필(鄭良弼)에 依해 朝鮮 調整에도 시마바라 蜂起가 報告되었다. [8]

文化 속의 시마바라의 난 [ 編輯 ]

參考로 시마바라의 亂은 漫畫 少年探偵 김전일 》의 素材로 使用되기도 했으며, (株)SNK에서 開發한 사무라이 스피릿츠 라는 게임의 마지막 보스인 야마쿠社 詩로 도키社다 는 그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이는 當時 네덜란드 의 上官腸(商館長) 니콜라스 쿠케바케르의 日記(《네덜란드 上官腸 日記》 1637年 12月 17日子) 및 포르투갈 船長의 航海記錄에도 남아있으며 그 殘酷함은 改新敎徒였던 네덜란드 사람들조차도 질리게 할 程度였다고 한다.
  2. 덧붙여 欄에 參戰했던 기리柴炭들은 現在에 이르기까지 殉敎者로 認定받지 못하고 있다.
  3. 一名 逃奴孝에(藤兵衛)로 아케치 히데미쓰(明智秀?)의 아들이다.
  4. 그 正確한 數는 確實하지 않으나 37,000名 程度로 여겨진다.
  5. 시게마사의 英知人 後코즈 番 (深溝藩)은 1萬 5千 席 程度의 番이었다.
  6. 시마바라의 亂이 일어나기 1年 前에도 當時 네덜란드 上官의 次席(次席)이었던 프랜시스 카론이 나가사키 奉行 (長崎奉行) 사카키바라 모토나오 (?原職直)에게, 日本과 네덜란드가 同盟을 맺어 마카오 마닐라 , 지룽 (基隆)을 攻擊할 것을 提案하기도 했다.
  7. 가장 먼저 性에 들어간 것은 貧苦 (備後) 후쿠야마 番 (福山藩)의 世子(世子) 미즈노 가쓰토시 (水野勝俊)였는데, 아버지 미즈노 가쓰나리 (水野勝成)는 過去 오사카 戰鬪 에서 누가 먼저 城으로 들어갈 것인지를 놓고 競合을 벌인 者였다고 한다(공식적으로 가장 먼저 城으로 들어간 것은 에치젠 후쿠이番 福井藩 가로 家老 혼다 度미마사 本多富正).
  8. 《仁祖實錄》(仁祖實錄) 人組 (仁祖) 16年 無人( 1638年 ) 3月 13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