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道水軍統制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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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 의 三道水軍統制使
三道水軍統制使
坐纛旗
官邸 三道水軍統制營
所屬 朝鮮 水軍
品階 種2品
임명자 朝鮮 國王
任期 일정하지 않음
管轄 朝鮮 水軍
上官 都元帥
招待 李舜臣

三道水軍統制使 (三道水軍統制使)는 忠淸道 , 全羅道 , 慶尙道 水軍 (水軍)을 總指揮하는 朝鮮時代 의 官職으로 官品은 種2품이다. [1] 指揮 官廳과 海軍 基地로 三道水軍統制營 을 두었다.

三道水軍統制使는 그 職責 特性上 水軍 總司令官級이며, [2] 陸軍과 水軍을 아우르는 全軍 總司令官에 對應되는 都元帥 의 部下이다. 單, 都元帥는 戰爭 勃發 또는 事變이 있을 때만 任命되는 臨時 官職이며, 三道 水軍 統制使는 恒常 維持되는 常設 官職이라는 差異點이 있다.

統制營에서 三道水軍統制使를 補佐하는 바로 아래 官職은 鄭3品 水軍 虞侯 이다. 統制營 副司令官 또는 參謀長에 該當한다.

下三道 [ 編輯 ]

下三道 (下三道)는 慶尙道, 全羅道, 忠淸道를 일컫는 말이다. 이 地名은 《高麗史》에도 登場한다. [3] 따라서 그 以前에도 쓰였던 地名임을 알 수 있다.

輕傷左水營 [ 編輯 ]

輕傷左水營은 경상좌도水軍 節度使의 陣營으로, 主로 倭寇의 侵入經路人 洛東江에서 慶州地域까지의 水路 防禦를 擔當하였다. 最初로 設置된 곳은 釜山 동래현이었고, 太宗 때 蔚山 開雲浦로 移轉하였다가, 1592年 東萊 南村으로 옮겨갔다. 1635年 仁祖 13年에는 最初의 場所인 戡蠻二捕虜 옮겼다가 倭館 과 가깝다는 理由로 1652年 孝宗 3年에 다시 東萊 南村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임란 當時에는 朴弘 이 맡았지만 日本軍에 依해 瓦解되면서 임란이 끝날 때까지 輕傷左水營은 제 機能을 하지 못했다. 丁酉再亂 當時에는 全 玉浦萬戶 李雲龍 이 맡았으나 原菌의 漆川梁 海戰 以後 三道 水軍이 全滅하자 經常左水軍은 當時 慶尙道 地域에서 六典에 參加하였다.

經常右水營 [ 編輯 ]

經常右水營은 경상우도水軍 節度使의 陣營이다. 慶尙道 右水營은 처음에 巨濟에 두었다가 1604年(宣祖 37年) 高聲(固城 : 只今의 統營市)으로 옮겼다. [4] 經常右水營은 三道水軍統制營으로 기능하였으며, 李舜臣과 原菌이 統制使를 歷任한 壬辰倭亂 期間을 除外하면 大部分은 經常右水使가 統制使를 兼任하였다.

全羅左水營 [ 編輯 ]

1479年 成宗 10年 全羅道 수군절도사영이 全羅左水營과 全羅右水營으로 分離되면서 內禮萬戶眞 자리(現在 麗水 )에 設置되었다. 李舜臣은 壬辰倭亂이 勃發하기 1年 前인 1591年에 全羅左道 水軍節度使로 任命되었다. 5館( 順天 , 흥양 , 光陽 , 落雁, 寶城 ), 5包(使徒, 與도, 鹿島, 방답, 發砲)를 둔 작은 水軍基地였지만 李舜臣이 連戰連勝을 하고, 統制使를 겸하게 되면서 統制營 役割을 遂行하였다. 李舜臣의 後任인 李施彦 搜査까지는 統制營 役割을 遂行하였지만 類型 이 新任 統制使로 赴任한 以後에는 經常右水營에 그 地位를 넘겨 주게 된다. 그러나 朝鮮 後期로 가면서 漸次 重要性이 增大되었다.

全羅右水營 [ 編輯 ]

1377年 高麗 禑王 3年에 務安 黨串包에 水軍이 처음 設置된 後, 1440年 世宗 22年에 海南 荒原官으로 옮겼다. 1465年 世祖 11年에 수군절도사영으로 昇格하였다. 壬辰倭亂 當時 이억기 가 全羅右水使로 在任하였으며 李億祺가 漆川梁 海戰 徐 戰死한 다음에는 김억추가, 鳴梁 海戰 直後 巨濟縣令 安危 가 昇進하여 任命되었다. 壬辰倭亂 때 鳴梁 海戰 의 主要 本據地가 되었다. 大東地志에 따르면 7館 18包로 構成되어 있어 임란 當時 朝鮮 水軍 軍營 中 가장 規模가 컸다.

忠淸水營 [ 編輯 ]

高麗末 倭寇의 侵入이 잦은 地域이었고, 簡單한 形態의 方魚津만 存在하다가 1447年 世宗 29年 對馬島 征伐과 함께 水軍과 基地를 整備하고, 忠淸水營의 體系를 갖추었으며, 1466年 世祖 12年에 忠淸水軍節度使로 昇格하였다. 倭寇의 侵奪로부터 防禦하고 漢陽으로 가는 漕運船을 保護하는 任務를 遂行하였다. 壬亂視에는 挺傑 과 선거이가 再任하였다. 挺傑이 在任하던 當時 그는 행주大捷 當時 權慄 에게 화살等 物資를 支援하여 勝利에 寄與하였다. 丁酉再亂 當時에는 最好가 맡았지만 그가 漆川梁 海戰에서 戰死하여 後任으로 壬亂視 全羅左水使 李舜臣 의 麾下의 장수였던 前 慶尙右水使 權晙 이 맡았다. 現在의 五千港 地域에 該當한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처음 이 官職이 設置되었을 때에는 政3品 水軍節度使가 統制使를 兼職하는 形態였으므로 鄭3品級 官職이었다. 그러나 統制社로서 麾下의 水軍節度使를 統制해야 했으므로 禮遇나 權限은 그보다 한 段階 위인 種2品에 相當했으며, 實際로 統制使 官職에 任命된 人物들도 任命 當時에 이미 종2品 以上 品階를 가지고 있었다. 特히 1607年(宣祖 40年)부터는 統制使가 本職이고 水軍節度使가 兼職으로 職銜 表記가 變更되면서 名實相符하게 종2品 官職으로 設定되었다. 法典에서 種2品 官職으로 規定된 것은 1746年(英祖 22年)에 頒布된 《 [續大典(續大典)]》 때였다.
  2. 統制使는 現代의 海軍 作戰司令官에 相應하는 職位이지만 統制使가 軍政權 또한 行使하는 것을 미루어 볼 때 海軍 參謀總長이 軍政權 뿐만 아니라 軍令權度 맡고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3. 《高麗史》 卷133, 〈列傳〉46, 禑王 3年(1377年) 6月, "先是, 遣使于 下三道 , 抄閑散子弟, 至有?子易馬者."
  4. 造成도 (1995). 〈右水營〉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城南 : 韓國學中央硏究院 . 2020年 8月 1日에 確認함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