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安 봉선홍경사 갈기非

天安 봉선홍경사 갈기非
(天安 奉先弘慶寺 碣記碑)
(Stele for the Construction
of Bongseonhonggyeongsa Temple, Cheonan)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國寶
種目 國寶 第7號
( 1962年 12月 20日 指定)
面積 保護角 5.9坪, 面積 1019m 2
數量 1期
時代 高麗 時代
所有 國有
參考 비 2.4m
位置
봉선홍경사 갈기비은(는) 대한민국 안에 위치해 있다
봉선홍경사 갈기비
봉선홍경사 갈기非
봉선홍경사 갈기非(大韓民國)
住所 忠淸南道 天安市 西北區 성환읍 大紅3길 77-48 (대홍리)
座標 北緯 36° 56′ 35″ 東京 127° 08′ 05″  /  北緯 36.94306° 東經 127.13472°  / 36.94306; 127.13472
情報 國家遺産靑 國家遺産포털 情報

天安 봉선홍경사 갈기非 (天安 奉先弘慶寺 碣記碑)는 忠淸南道 天安市 홍경사 에 있는 高麗時代 石碑 이다. 1962年 12月 20日 大韓民國의 國寶 第7號로 指定되었다.

歷史 [ 編輯 ]

봉선홍경사는 京釜線 성환驛 에서 北쪽으로 直線距離 約 3km 떨어진 地點에 位置한 홍경사지에 位置하고 있다. 高麗 顯宗 12年( 1021年 )에 創建된 절이다. 東國輿地勝覽 稷山縣 逆援助에 依하면, 이곳은 고을 北쪽 15里에 位置하고 있는 交通의 要旨인데, 갈대 가 茂盛하여 盜賊이 出沒하므로, 高麗 顯宗 이 僧侶 荊棘 에게 命하여 절을 세우게 하였고, 이에 兵部尙書 강민첨 李 監督하여 1016年 부터 1021年 까지 2百餘 칸을 세우고, 봉선홍경사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또한 節 西쪽에 客觀 80칸을 세우고 廣淵通話願 理라 하여, 行人을 위하여 樣式과 마초를 提供하였다고 한다. 東國輿地勝覽 刊行 當時에 이미 절은 없어졌고 원과 碑石만 남아서, 절의 이름을 따서 홍경원 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事跡碣碑는 봉선홍경사의 事績을 記錄한 碑石이다. 절 이름 앞의 ‘봉선(奉先)’은 高麗 安宗 (安宗)이 그 完成을 보지 못하고 목숨을 다하자, 아들 高麗 顯宗이 절을 完成하였으므로, 아버지의 뜻을 받든다는 意味로 붙인 이름이다. 碑石은 절이 完工된 지 5年 뒤인 1026年에 세워졌다.

갈비(碣碑)는 一般的인 石碑보다 規模가 작은 것을 말하는데, 大槪 머릿돌이나 지붕돌을 따로 얹지 않고 非몸의 끝部分을 둥글게 處理하는 것이 普通이지만, 이 石碑는 거북받침돌과 머릿돌을 모두 갖추고 있다. 鬼斧는 址臺石과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귀斧石 等에는 龜甲 무늬를 새겼고, 물고기의 지느러미 같은 날개를 머리 兩쪽에 새겨 生動感을 더하고 있다. 귀浮石의 머리는 魚龍의 모습인데, 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리고 있다. 碑座는 長方形으로, 福聯과 仰蓮을 새겨 碑身을 받치는 形象이다. 碑身의 앞面에는 輪廓線을 돌리고 碑文을 새겼는데, 바깥 主演에는 唐草紋對, 兩쪽 옆面에는 寶相華紋을 새겼다. 王命으로 碑文은 海東孔子로 稱해졌던 翰林學士 崔沖 이 撰하였고, 國慈乘(國子丞) 백현례 가 썼으며, 글字는 2.4cm 크기의 해서체이다. 碑身 韋編에는 가로로 '봉선홍경사갈기'라는 全額이 陰刻되어 있고, 履修에는 높은 山 模樣의 圖式化된 運用門이 새겨졌다. 現在 完全하게 남아 있는 寺跡碑 가운데 하나이다.

參考 資料 [ 編輯 ]

  • 天安 봉선홍경사 갈기非 - 國家遺産靑 國家遺産포털
  • 《文化財解說》, 忠淸南道, 1990年
  • 《忠淸南道文化財對官》, 忠淸南道歷史文化硏究院
  • 《文化遺跡總覽-金石文便》, 忠淸南道, 1993年
  • 《天安市地》, 天安市, 1997年
  • 《忠淸南道指定文化財解說集》, 忠淸南道, 2001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