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항
(李沆,
1474년
~
1533年
)은 朝鮮 中期의 文臣으로, 中宗 때 左贊成과 右議政을 지냈다. 本貫은
城山
으로, 號는 낙서(洛西) 또는 落書헌(洛西軒), 者는 호숙(浩叔)이다. 學問이 뛰어나고 降職했으나, 末年에 心情·김극핍과 國政을 專橫하여 彈劾을 받고 賜死되었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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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燕山君 때 文科에 及第하여 弘文館正字가 되었으나 燕山君의 暴政에 反對하여 諫言을 하면서 燕山君을 바른 政治로 이끌어보고자 努力했으나 失敗하였고 이에 中宗反正에 同參한다. 以後 中宗 때 侍讀官, 掌令, 添丁, 傳한 等을 거쳐서 다시 侍講官, 侍讀官을 하다가 中宗 때인 1512年에
弘文館
直提學
이 되고 以後
同副承旨
로 任命된다. 以後 參贊官을 겸했으며, 곧
右副承旨
로 乘車했다. 연이어서
刑曹參議
가 되었고 以後
司憲府
大司憲
과
刑曹參判
을 하지만,
조광조
一派의 彈劾으로 外職人 慶尙道觀察使로 밀려난다. 하지만 己卯士禍에 同參하여 다시
大司憲
이 되고 同知經筵事를 겸했으며 以後
藝文館
提學
,
刑曹參判
을 거쳐서
同知中樞府事
를 지냈다. 연이어서
刑曹判書
로 昇進하면서 國政을 紊亂시키던
김안로
를 귀양보낸다. 以後
吏曹判書
,
知義禁府事
,
都摠管
,
右參贊
,
大司憲
等의 要職을 거쳤으며 以後
右贊成
,
大司憲
等을 하면서
心情
,
김극핍
等과 權力 實勢로 浮上했다. 以後에는
大司憲
,
右參贊
,
左參贊
等을 했으며 연이어 다시
知義禁府事
를 거쳐서
禮曹判書
가 되었다. 以後에는 다시
左參贊
이 되었으며
判義禁府事
를 거쳐 다시
吏曹判書
가 되었다. 그 前에 暫時
右議政
이 되었지만, 臺諫들의 彈劾으로 因해 右議政 任命이 取消되고
右贊成
으로 左遷되었다. 그 뒤에 繼續
吏曹判書
와
左贊成
을 하면서 心情, 김극핍과 權勢를 부렸고
判中樞府事
와
判義禁府事
,
兵曹判書
를 거쳐서 다시
左贊成
이 되었지만 調整으로 復歸한
김안로
와 그 一派의 彈劾으로 因해
心情
,
김극핍
과 流配를 가게 되고 1533年에 配所에서 賜死된다. 事後 1537年, 金安老가 賜死된 以後에 復權되었다.
評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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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學問이 뛰어났으며 性品이 剛直하였다. 大司憲으로 在職 中에는 國政을 紊亂시키고 專橫을 일삼던
김안로
를 彈劾하여 귀양을 보내기도 했으며, 侍講院에 있을 때는 宰相과 大簡의 反目으로 戊午士禍가 일어나서 어진 선비가 많이 죽게 되었다고 諫言하기도 했다. 하지만
南袞
,
心情
,
履行
,
김극핍
과 손을 잡고
조광조
一派를 朝廷에서 몰아내는
己卯士禍
를 일으키는 데 同調했으며 末年에는
心情
과
김극핍
과 손을 잡고 國政을 專橫했다는 史觀의 나쁜 評價도 받고 있다.
南袞
,
김극성
,
心情
,
박상
,
이현보
,
朴은
等과 交流하면서 四柱를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