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移轉 (後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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移轉 (李典, 174年 ~ 209年 )은 中國 後漢 말의 武裝으로, 慢性 (曼成)이며, 連奏(?州) 山羊群(山陽郡) 거야현(鋸野縣) [1] 사람이다.

行跡 [ 編輯 ]

曹操 (曹操)를 섬겼다.

202年 元素 (袁紹)가 죽고 原狀 (袁尙)李 뒤를 잇자 曹操는 元氏 兄弟들을 攻擊했는데, 이때 以前은 軍糧 輸送을 妨害하는 原像의 部下 位郡太守 苦煩(高番)을 擊破했다. 以後 遊標 (劉表)에게 依託하고 있던 劉備 (劉備)가 攻擊해 오자, 曹操는 하후돈 (夏侯惇) 等을 보내 막게 하였다. 劉備가 陣營을 불태우고 떠나자 하후돈은 以前의 挽留를 뿌리치고 追擊하다가 埋伏에 걸려 不利한 處地에 놓였다. 홀로 後方에 남았던 移轉이 하후돈을 도우러 오자 劉備는 물러났다.

205年 10月 曹操에게 降伏했던 병주자사 固諫 (高幹)李 다시 反旗를 들고 抵抗하자, 曹操의 命令으로 惡眞 (樂進)과 함께 號館(壺關)을 攻擊했으나 끝내 占領하지는 못했다.

206年 8月 惡陣과 같이 海賊 官升(管承)을 攻擊하여 討伐에 成功했고, 窮地에 몰린 官升은 섬으로 달아났다. 以後 파로將軍(破虜將軍)으로 任命되었다.

209年 12月부터 匠料 (張遼)를 따라 합비(合肥)를 지키게 되었는데, 예전부터 以前은 匠料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215年 8月 孫權 (孫權)李 10萬 軍士를 이끌고 합비를 攻擊해 왔을 때 匠料는 移轉이 自身의 생각을 따르지 않을 境遇를 憂慮했으나, 以前은 私的인 感情을 생각지 않고 匠料와 함께 孫權을 무찔렀다. [2] . 36歲라는 젊은 나이로 死亡하였고, 黃초 (黃初) 6年( 225年 ) 조비 (曹丕)는 以前의 功을 追念하여 諡號로 민후(愍侯)를 내렸다.

《三國志演義》에서 以前 [ 編輯 ]

曹操가 童濯 (董卓)을 죽이려다 失敗하고 故鄕으로 돌아와 勢力을 키울 때 曹操에게 加擔한 것으로 나온다. 以後 呂布 (呂布), 黃巾賊, 元素, 劉備, 孫權 等과의 싸움에서 活躍한다. 性急하게 劉備를 攻擊하려던 調印 (曹仁)과 하후돈을 말리는 신중한 性格을 가진 人物로 描寫되어 있다. 演義에서 예형 (?衡)은 移轉이 學問을 좋아하는 것을 두고 글이나 傳達하게 할 사람이라며 비꼬았다.

以前의 親族關係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資治通鑑》 64卷에는 冀州(冀州) 거록群(鉅鹿郡) 사람으로 記錄되어 있다. 여기서는 《三國志》 魏書 以前前의 記錄을 따랐다.
  2. 《資治通鑑》 67卷에는 孫權에 對한 防備를 論議하는 자리에서 以前과 惡陣이 匠料의 말에 대꾸하지 않아 激忿한 匠料가 혼자서라도 싸우겠다고 하자, 移轉은 公的인 일에 私的 感情을 내세우지 않을 것을 말하고 匠料를 도와 싸우는 것으로 나오는데, 《三國志演義》의 內容은 資治通鑑 쪽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