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윤
(李範允, 1856年 12月 29日
(
1856-12-29
)
~ 1940年 10月 20日
(
1940-10-20
)
)은 舊韓末
復辟主義 性向 獨立運動家
였다. 沿海州에서 武裝 獨立軍을 組織하여 國內侵攻作戰을 推進했던 그는
大韓帝國
에서
邊戒警務署
隸下
北邊間島管理師
職責을 지냈다.
本館
은
全州
(全州)이다.
出生과 成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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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爲大將을 지낸
朝鮮
末期의 無關(武官) 出身인
이경하
(李景夏)의 아들로서 1856年 12月 29日
京畿道
高陽郡
(現在 동대문구 신설동)에서 出生했다.
舊韓末
의
政治가
兼
外交官
을 지낸
이범진
(李範晋)의 6寸 再從 아우이며
舊韓末
의
外交官
을 지낸
이위종
(李瑋鍾)의 親家 7寸 再從 叔父이다. 한때
京畿道 洋酒
에서 暫時 幼兒期를 보낸 적이 있으며 後날
漢城府
에서 成長하였다. 1875年부터 1880年까지 5年間 淸나라 滿洲
延吉
에 滯在한 그는 1887年 淫書 薦擧로써 官僚가 되어 以後 求한 말
肝도
問題로
淸나라
와의 葛藤 끝에
邊戒警務署
가 設置된 뒤
1902年
間島視察
(間島視察)로 任命되기까지의 經歷에 對해서는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公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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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間島로 派遣되었고, 이듬해(1903年)에는 間島管理師로 任命되어 間島 地域 朝鮮人에 對한 行政 業務를 專擔하였다. 李範允은 이 地域의 砲手들로 自衛的 性格의 軍隊인
社布袋
를 組織하였는데, 이 社布袋가 向後 間島 地域 義兵運動의 한 基盤이 되었다.
間島管理師로 在職 中이던
1904年
러日 戰爭
이 勃發하자 그는
러시아
軍隊와 連帶하여
咸鏡北道
地域에서 日本軍과 交戰했다. 러日 戰爭이 日本의 勝利로 끝나자
1906年
李範允은 自身을 따르는 사람들을 이끌고 러시아領으로 亡命했다.
獨立 運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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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地域에 이미 移民해 와 있었던 拒否
崔在亨
의 도움으로 義兵 部隊(
연추義兵部隊
)가 組織되었으며, 러시아製 武器로 武裝할 수 있었다. 義兵 支援을 위한
洞議會
(總長 崔在亨)와
창의회
를 結成하고 연추義兵部隊 總督에 就任했다.
安重根
과
엄의섭
等이 參加한 연추義兵部隊는 러시아領에 머물면서 數 次例 國內에 進入하여 많은 戰果를 올렸다.
1909年
安重根의
이토 히로부미
狙擊 以後 그는
유인석
의
13道義軍
(十三道義軍, 도총재 유인석)에 參加했다. 義兵將 出身들이 中心이 된 13道義軍에는
안창호
와
李甲
等 啓蒙 運動 系列의 人士들도 參加하여 聯合組織의 性格을 띠고 있었다. 李範允이 倡義軍 總裁를 맡은 이 組織과
韓日 倂合 條約
無效를 主張하는
聲明會
(聲明會)는 러시아 政府에 依해 解體되었다. 李範允은 러시아 當局에 逮捕되어 7個月間 類型 生活을 했다.
1911年
沿海州
로 돌아와
洪範圖
,
이상설
等 이 地域의 獨立 運動家들과
勸業會
(會長 崔在亨)를 組織해 얼마後부터 總裁를 맡았고, 《[[권업新聞|
권업新聞
(
英語版
)
]]》도 發行했다.
最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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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義軍府
와
大韓獨立軍團
의 總裁,
新民府
의 參議院 院長으로 推戴되는 等 北間島와 沿海州 地域 武裝 獨立 運動을 進行하다가
1940年
京城府
에서 病死했다.
事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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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族 關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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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아버지: 이인달(李寅達)
- 아버지:
이경하
(李景夏)
- 異腹 兄님:
이범진
(李範晋)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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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 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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