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要非我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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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要非我누스 (Flavius Claudius Jovianus, 332年 推定 - 364年 2月 17日 )은 363年 6月 26日 율리아누스 皇帝가 사산조 페르시아 와의 戰爭에서 戰死하자 그의 部下들에 依해 로마 皇帝 로 選出된 軍人이다.

要非我누스의 아버지는 콘스탄티우스 2歲 의 皇室 警備大將이었다. 요費아누스도 일찌기 軍隊에 들어가 皇室의 警護隊에 服務하였고, 율리아누스의 사산조 페르시아 遠征에 함께 하였다. 율리아누스가 退却하다가 結局 戰鬪 中의 負傷으로 죽자 로마 軍團은 처음에는 살루스트를 皇帝로 擁立하려 했으나, 살루스트가 끝내 固辭하자 요비아누스를 皇帝로 擁立했다. 要非我누스는 當時 거의 無名이었고 알려진 業績도 없었기에 그의 選出은 偶然이나 失手로 看做된다. 一說에 따르면 兵士들이 율리아누스의 이름을 외친 것이 訛傳되어 요비아누스로 잘못 불렸다고 한다.

一旦 皇帝가 된 以後 要非我누스는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停戰協定을 끝내야 했다. 로마軍의 安全한 退却을 위해 갈레리우스 皇帝 以後 收復했던 티그리스江 東쪽의 모든 로마 地域을 사산조에 讓步했고, 基督敎 王인 아르샤크 1世가 支配하는 아르메니아 王國의 中立을 保障해야 했다. 아르메니아는 傳統的으로 로마의 屬國이었으나 이제 사산조와 로마의 紛爭時에 中立을 지켜야 했다. 이와 같은 協定 條件은 로마에게는 屈辱的인 條件이었으나, 要非我누스는 自身의 在位의 安定을 위해 하루라도 빨리 콘스탄티노폴리스 로 돌아가야 했다.

要非我누스는 基督敎人 이었기에 以前 皇帝 율리아누스의 모든 反基督敎的인 措置를 取消하고, 다시 親基督敎政策을 폈다. 要非我누스의 짧은 治世에 基督敎 의 많은 權利들이 認定되었고, 라바룸 은 다시 로마軍段의 象徵이 되었다. 모든 宗敎的 寬容 措置가 다시 廢棄되었다.

364年 2月 17日 小아시아 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오는 길에 要非我누스는 非티니아 갈라티아 의 國境 地域에 있던 다다스타나에서 죽었다. 아마도 毒버섯이나 暖房을 위해 피운 불에 依한 一酸化炭素 中毒으로 죽은 것으로 보인다. 要非我누스의 뒤를 이어 발렌티니아누스 1歲 가 皇帝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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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部 링크 [ 編輯 ]


前任
율리아누스
第50代 로마 皇帝
363年 - 364年
後任
발렌티니아누스 1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