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이언 킹 날카로운 발톱 세우나|주간동아

週刊東亞 670

..

라이언 킹 날카로운 발톱 세우나

이동국, 全北 현대로 移籍 … ‘復活의 노래’

  • 이영미 日曜新聞 記者 bom@ilyo.co.kr

    入力 2009-01-13 16:00:00

  • 글字크기 설정 닫기
    한때 ‘라이언 킹’으로 불리며 蹴球代表팀 스트라이커 系譜를 이었던 이동국(30)李 最近 全北 현대로 移籍했다. 契約 期間 2年에 年俸과 各種 옵션을 包含해서 6億원 程度의 몸값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동국은 지난해까지 城南 일화 所屬이었다. 프리미어리그 미들즈브러에서 오랫동안 벤치워머 身世로 머물다 지난해 7月30日 城南과 1年5個月 契約을 맺었다. 그러나 K리그로 유턴한 뒤 復歸 첫 시즌 13競技에 나섰지만 2골 2도움으로 不振했다. 結局 지난 年末 城南 일화로부터 放出 通報를 받은 이동국은 J리그 감바 오사카로 떠난 조재진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全北 현대와 손잡았다.

    K리그 殘留를 選擇했지만 이동국의 ‘오늘’은 以前의 名聲이 無色할 만큼 초라하다. 더욱이 그의 蹴球人生이 波瀾萬丈, 迂餘曲折의 連續이었던 만큼 只今 그의 行步는 ‘밝고 맑음’이라기보다는 잔뜩 흐리고 우중충한 날씨에 比喩할 수 있겠다.

    浦項 出身인 이동국은 2001年 獨逸 베르더 브레멘 6個月 賃貸 時節과 軍 服務팀 光州 常務 時節을 除外하곤 줄곧 ‘浦項맨’으로 活躍했다. 2002年과 2006年 월드컵을 앞두고 代表팀 脫落과 무릎 負傷 等으로 거푸 쓴盞을 맛본 그는 切齒腐心 끝에 2007年 初 프리미어리그에 進出하게 된다.

    이동국의 유럽 進出은 박지성 이영표와는 또 다른 意味를 갖는 것이었다. 박지성과 이영표가 네덜란드를 거쳐 잉글랜드로 向한 데 비해, 이동국은 K리그에서의 活躍을 바탕으로 빅리그에 進出한 첫 케이스였기 때문이다.



    最高의 攻擊手, 波瀾萬丈 蹴球人生

    꿈을 이루기 위해 이동국은 많은 것을 抛棄해야 했다. 韓國 最高 攻擊手라는 自尊心을 버리고 入團 테스트에 應했고, 목돈 代身 푼돈을 擇했다. 當時 이동국은 “어렵게 進出한 만큼 끝이 아니라 또 다른 始作이라 생각하고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겠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挑戰은 1年5個月 만에 失敗로 끝나고 말았다.

    이동국은 K리그 復歸를 推進하면서 城南 일화와 大田 시티즌, 兩쪽 球團에 移籍 問議를 한 것으로 밝혀졌다. 大田에는 6個月 後 J리그 進出을 자유롭게 한다는 條件을 내걸었고, 大戰 側은 K리그 所屬 다른 팀으로의 移籍만 아니라면 ‘오케이’라는 答을 傳했다.

    성남과도 協商을 벌이며 約 20萬 달러의 바이아웃 金額을 提示했고 城南도 이를 받아들였다. 두 팀을 놓고 苦悶하던 이동국은 城南 入團을 決心하는데, 問題는 當時 司令塔을 맡고 있던 김학범 監督이 이동국의 迎入을 反對했다는 事實이다.

    城南의 한 關係者는 “처음엔 金 監督이 이동국의 迎入을 反對했다. 그러나 球團 高位 關係者들의 입김이 剛했고 元來 ‘한 放’이 있는 船首旗 때문에 金 監督도 나중엔 球團의 提案을 受諾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說明한다.

    그러나 城南 유니폼을 입은 이동국은 決코 幸福하지 못했다. 잉글랜드에서 K리그로 復歸하는 過程에서 오랜 時間 運動을 하지 않아 競技 感覺이 떨어진 데다, ‘한 放’을 期待했던 코칭 스태프의 信賴를 잃으면서 ‘賤덕꾸러기’로 轉落하고 말았다. 한 蹴球 關係者에 따르면 “이동국은 城南의 成績 不振을 自身과 連結짓는 一角의 視線에 對해 宏壯히 서운해했다. 왜 自身이 ‘銃알받이’가 돼야 하느냐고 不滿을 吐露한 적도 있었다”고 말한다.

    城南은 시즌이 끝나면서 이동국과의 訣別을 決定했다고 한다. 그러나 金 監督의 뒤를 이어 신태용 監督代行이 赴任하자마자 이동국을 내칠 境遇 申 監督代行에게 負擔이 갈 것을 念慮, 12月31日을 ‘D데이’로 定한 後 記者들에게는 이동국의 退出과 關聯해 엠바고(報道 自制)를 걸어놨다는 後聞이다.

    城南으로부터 訣別 通報를 받은 이동국은 進路 問題를 놓고 또다시 苦悶에 빠졌다. 中東이나 러시아클럽 等으로부터 ‘러브콜’은 있었지만 冬季訓鍊의 重要性을 뼈저리게 느꼈던 만큼 올 시즌에는 팀의 冬季訓鍊부터 參加해 몸 만들기를 希望했다. 그때 連絡을 해온 팀이 全北 현대였다.

    남아共 월드컵 合流도 可能?

    巷間에는 이동국의 全北行을 두고 스타 마케팅의 一環이 아니냐며 否定的인 視角을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지난해 조재진이라는 大型 스트라이커를 迎入해 效果를 본 全北 處地에선 이동국만 한 代案이 없다고 判斷했고, 이동국도 自身을 必要로 하는 팀을 마다할 理由가 없었다.

    이동국의 한 側近은 “스타 마케팅이라고 非難받을 理由는 없다. 지난 시즌에는 워낙 몸狀態가 좋지 않아 제대로 된 플레이를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나 冬季訓鍊부터 着實히 消化해 나간다면 올 시즌 이동국의 眞價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라고 解明했다.

    高宗秀 안정환과 트로이카 體制를 이루며 1990年代 後半부터 2000年代 初盤을 주름잡았던 이동국. 비슷한 時期에 스타플레이어로 活躍한 때문인지 세 名의 人生逆轉은 色깔만 다를 뿐 事緣이 많다는 點에서 비슷하다.

    한때 自殺까지 생각했다가 大田에서 새로운 人生을 開拓하려 했던 高宗秀는 最近 所屬팀으로부터 放出 通報를 받았고, ‘저니맨’의 典型을 보여주는 안정환은 釜山 殘留와 美國 進出이라는 두 가지 選擇을 놓고 苦悶 中이다. 이동국 또한 만만치 않은 히스토리를 갖고 있는데, 決定的일 때 不運했던 選手라는 點에서 高宗秀 안정환과는 다르다.

    이동국은 安貞桓이 2002年 월드컵 以後 엄청난 스타로 떠오르는 걸 지켜보며 아픔을 느껴야 했다. 더욱이 안정환과는 월드컵을 前後로 ‘身分’李 極과 極으로 갈리는 바람에 以後 代表팀에서 다시 만났을 때 서먹했던 記憶을 떠올린 적이 있다.

    하지만 常務 除隊 後 當時 親庭팀 浦項에서 제대로 된 플레이를 펼치며 ‘亦是 이동국’이란 讚辭를 받게 됐을 때 이동국은 “率直히 월드컵 以後엔 내가 작아 보였다. 그러나 只今은 달라졌다. 自信感을 되찾았기 때문이다”라고 털어놨다.

    이동국의 側近은 이동국이 2009年을 復活의 해로 삼고 있다고 傳했다. 浦項의 最前方 攻擊을 이끌며 復活의 노래를 부르던 그때처럼, 새로운 둥지에서 새로운 覺悟와 挑戰精神으로 ‘라이언 킹’의 威力을 보여주겠다는 覺悟도 덧붙였다.

    萬若 이동국이 K리그에서 復活한다면 恨으로 點綴된 2010 남아공월드컵 代表팀 合流도 ‘있을 수 없는 일’만은 아니다. 누구보다 이동국의 復活을 바라는 사람이 허정무 監督이기 때문이다.



    댓글 0
    닫기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