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陣營 論理에 ‘人間’은 없다|신동아

陣營 論理에 ‘人間’은 없다

[황승경의 Into the Arte] 映畫 ‘將校와 스파이’

  • 황승경 公演칼럼니스트·公演藝術學 博士

    lunapiena7@naver.com

    入力 2022-05-06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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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라가 두 陣營으로 쪼개졌다. 灰色 없이 나뉜 黑과 白은 各自의 正義(正義)를 부르짖으며 相對를 詰難한다. 어느 것이 眞正한 正義인지는 알 수 없다. 오직 自身이 그렇다고 여기는 것을 믿을 뿐. 盲信되는 定義(正義) 앞에 ‘人間’의 正義(定義)란 沙漠 위 蜃氣樓와 같이 虛無하다.
    프랑스군 최초 유대인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앞줄 안경 쓴 사람)는 ‘파나마 스캔들’을 덮기 위한 정치적 희생양이 됐다. [찬란]

    프랑스軍 最初 유대人 將校 알프레드 드레퓌스(앞줄 眼鏡 쓴 사람)는 ‘파나마 스캔들’을 덮기 위한 政治的 犧牲羊이 됐다. [燦爛]

    20代 大統領選擧 投票率은 77.1%다. 흔히 막장 드라마를 ‘辱하면서 본다’고 한다. ‘非好感 大選’이라는 비웃음을 사면서도 國民의 關心은 뜨거웠다. 大統領職 引受 期間을 거친 後 새로운 政權이 出帆한다.

    政治史를 곱씹어 봤다. 只今과 같은 時期엔 恒常 煽動家가 登場했다. 相對 候補 支持者의 아픈 感情을 刺戟하는 煽動은 國民을 분열시키는 惡(惡)이다. 가장 많이 引用되는 事例로 에밀 졸라(1840~1902)의 글 ‘나는 告發한다(J'accuse!)’를 꼽을 수 있다. ‘나는 告發한다’는 政治 局面 轉換을 위한 犧牲羊으로서 終身刑을 宣告받은 유대人 알프레드 드레퓌스(1859~1935)의 抑鬱함을 世上에 알린 公開 告發狀이다.

    作家이자 저널리스트인 에밀 졸라의 文學作品은 여러 次例 映畫化됐지만 그의 告發狀을 深度 있게 다룬 映畫는 ‘에밀 졸라의 生涯’(1937)와 ‘將校와 스파이’(2019) 程度다. ‘에밀 졸라의 生涯’가 作家의 人生에 焦點을 맞췄다면 ‘將校와 스파이’는 內部 告發人 조르주 피카드 中領의 視角을 中心으로 映畫가 展開된다.

    ‘將校와 스파이’는 프랑스人 로만 폴란스키(89) 監督의 作品이다. 그의 삶은 그야말로 ‘波瀾萬丈’하다. 獨逸軍 致賀 게토(유대人 居住地域)에서 千辛萬苦 끝에 脫出하는 等 酷毒한 어린 時節을 보냈다. 사랑하는 사람을 犯罪로 잃은 被害 遺家族이다. 그의 아내 샤론 테이트는 찰스 맨슨을 追從하는 狂信徒들에 依해 殘酷하게 殺害됐다. 그렇다고 同情의 視線으로 바라볼 人物은 아니다. 1974年 술과 藥물을 利用해 13歲 少女를 性暴行한 嫌疑로 裁判을 받는 途中 프랑스로 逃避한 未成年者 性犯罪者다.

    ‘드레퓌스 事件’만큼 論難 많은 映畫

    영화 ‘장교와 스파이’ 포스터 [찬란]

    映畫 ‘將校와 스파이’ 포스터 [燦爛]

    神奇하게도 過去 그에 對한 映畫界의 視角은 好意的이었다. 2002年 그의 映畫 ‘피아니스트’가 아카데미賞 3冠王에 오를 때 누구도 異見을 달지 않았다. 2009年 스위스 취리히 空港에서 ‘未成年者 强姦嫌疑’로 逮捕돼 10個月間 現地에서 家宅年金 當했을 땐 더했다. 틸다 스윈튼, 모니카 벨루치 等 ‘女俳優’들이 釋放을 歎願하기까지 했다.



    2017年 ‘미투 運動’이 流行하고 나서야 그에 對한 擁護論이 힘을 잃기 始作했다. ‘죽기 前에 歷史의 그림자를 스크린에 담겠다’는 老監督의 勞苦(勞苦)가 老慾(老慾)으로 비쳤다. 여기저기에서 쏟아지는 非難의 화살로 映畫 製作에 難航을 겪었다. 아내 에마뉘엘 자이그너(56)를 出演시키고 本人도 端役을 맡는 熱情을 보였지만 評價는 非難 一色이었다.

    2020年 세자르 映畫祭와 베니스 國際映畫祭에서 ‘將校와 스파이’는 ‘映畫는 映畫로만 봐야 한다’는 見解와 ‘藝術家의 倫理意識도 重要하다’는 意見을 尖銳하게 對立시켰다. 세자르 映畫祭에서 끝내 폴란스키에게 監督賞이 授與되자 多數 映畫人은 固城을 지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122年이라는 間隙이 있지만 映畫 속 드레퓌스 事件처럼 映畫도 論難의 中心에 섰다.

    黑幕은 ‘嫌惡’를 利用한다

    로로르 신문 1면에 게재된 ‘나는 고발한다(J'accuse!)’는 드레퓌스, 피카르 등 ‘드레퓌스 사건’ 관련 인물을 정치 공방 한가운데 서게 했다.  [찬란]

    輅路르 新聞 1面에 揭載된 ‘나는 告發한다(J'accuse!)’는 드레퓌스, 피카르 等 ‘드레퓌스 事件’ 關聯 人物을 政治 攻防 한가운데 서게 했다. [燦爛]

    프랑스人은 歷史의 페이지에 ‘프랑스革命’을 남긴 民族이다. 그만큼 醫師와 感情을 表現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152年 前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1870年 보불戰爭 敗戰으로 프랑스軍이 본 被害는 莫大했다. 死傷者만 30餘萬 名에 이르렀고 獨逸로 移送된 戰爭捕虜는 50餘萬 名에 達했다.

    經濟도 崩壞됐다. 重工業이 發達해 노른자 땅이었던 알자스-로렌 地域이 프랑크푸르트 終戰條約으로 獨逸에 넘어갔다. 戰爭賠償金으로 無慮 國內總生産(GDP)의 4分의 1을 獨逸에 支拂해야 했다. 알퐁스 도데(1840~1897)의 短篇小說 ‘마지막 授業’이 바로 이 時期 獨逸語를 國語로 배워야만 하는 알자스 地域 少年의 마지막 國語(프랑스語) 授業에 關한 이야기다. 이때부터 第2次 世界大戰이 끝날 때까지 프랑스人에게 獨逸이란 不俱戴天(不俱戴天)의 怨讐였다.

    曺國이 獨逸에 一方的으로 敗北한 데서 온 恥辱은 프랑스人의 가슴에 敗北 意識과 暴力性을 싹트게 했다. 이는 프랑스人의 均衡 잡힌 批判意識을 漸次 약화시켰다. 1892年 暴露된 最惡의 政經癒着 스캔들, 이른바 ‘파나마 스캔들’李 惡循環을 더했다. 이는 프랑스에서 反유대主義 思想이 觸發한 契機다.

    파나마 스캔들의 內容은 大略 다음과 같다. 유대人 金融資本으로 設立된 프랑스 民間會社가 中央아메리카의 超大型 工事를 受注했다. 이는 곧 全 國民的 關心事로 떠올랐지만 豫想치 못한 自然災害가 잇달아 터지며 工事는 中斷됐고 會社는 破産했다. 그사이 會社 幹部들에게 매수당한 政治人들은 法案을 통과시켰고 無慮 6番이나 債券을 發行했다. 눈덩이처럼 켜져버린 損失은 80萬 名이 넘는 被害者에게 轉嫁됐다. 被害 金額을 오늘날 價値로 換算하면 12兆5000億 원 水準이다.

    알뜰살뜰 모은 財産을 잃은 庶民들의 鬱憤은 하늘을 찔렀다. 全方位로 恣行된 賂物 收受에 旣成 政治人이 떼로 拘束됐다. 惡化一路로 치달은 政局의 混亂은 極에 達했다. 政府는 事態를 진정시킬 무언가가 切實했다.

    19世紀 中盤 프랑스엔 新聞·雜誌社가 幾何級數的으로 생겨났다. 그中 新聞에 登場하는 캐리커처(對象物의 否定的인 面을 强調하거나 일부러 誇張해 우스꽝스럽게 描寫한 것)가 最高의 人氣를 謳歌했다. 少數者, 特히 파나마 스캔들 以後 유대人을 겨냥한 수많은 ‘嫌惡 캐리커처’ 가 霎時間에 퍼졌다. 大衆은 濾過 없이 이를 받아들였고 거리낌 없이 歡呼했다. 유대人은 金融 權力을 利用해 온갖 奸計와 術數를 부리는 族屬으로 여겨졌다. 이들에 對한 社會的 嫌惡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헤게모니 위한 犧牲羊 드레퓌스

    피카르 중령은 ‘드레퓌스 사건’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찬란]

    피카르 中領은 ‘드레퓌스 事件’의 眞實을 알리기 위해 孤軍奮鬪한다. [燦爛]

    映畫 內容을 살펴보자. 1894年 12月 프랑스의 알프레드 드레퓌스 大尉(루이 가렐)는 獨逸 大使館에 軍事 情報를 넘겼다(반역죄)는 理由로 終身刑을 宣告받는다. 裁判部는 드레퓌스의 筆跡에서 알파벳 26個 中 團地 2個만이 流出 文件의 그것과 類似함에도 ‘筆跡을 模寫했다’는 荒唐한 論理를 받아들였다. 드레퓌스 大尉는 南아메리카 기아나 앞바다에 位置한 惡魔의 섬에서 服役한다. 이곳은 1973年 映畫 ‘빠삐용’의 背景인 惡名 높은 要塞다.

    한便 參謀本部 情報部에 赴任한 조르주 피카르 中領(場 뒤자르댕)은 內部諜者 索出 作業을 進行하던 中 에스테라地 少領의 筆跡이 드레퓌스 文件의 筆跡과 같음을 發見한다. 眞犯이 에스테라地 少領임을 알게 된 것. 피카르는 이를 上部에 報告하지만 모두 默殺된다. 軍部는 主張을 굽히지 않는 피카르를 튀니지의 閑職으로 左遷하고 그와 內緣關係에 있던 모니에 否認(에마뉘엘 자이그너)의 安危까지 威脅하며 입막음을 試圖한다.

    드레퓌스는 프랑스軍 最初의 유대人 將校로서 충성스러운 愛國者였다. 映畫에서는 省略됐지만 알자스 地域에서 태어난 드레퓌스는 보불戰爭을 겪으며 祖國을 지킬 軍人이 되려고 마음먹었다. 이때 그의 나이 10歲다. 드레퓌스의 兄과 夫人은 組織的인 救命運動을 펼치며 에스테라地 少領과 眞犯의 筆體가 言論에 公開될 수 있도록 努力했다. 같은 筆體를 두고 드레퓌스波와 反(反)드레퓌스파는 各自 다르게 解釋하며 한 치의 讓步도 하지 않았다.

    드레퓌스波와 反드레퓌스파는 모든 媒體를 動員해 嫌惡를 담은 이미지와 文句를 주고받으며 國民을 분열시켰다. 드레퓌스와 그의 支持者들을 ??탐욕스러운 반인반수(半人半獸)로 描寫한 이미지를 실은 諷刺 技士가 파리에 뿌려지면 1週日 後에는 同一한 이미지와 文句로 軍部와 反유대主義者들을 嘲弄하는 批判 記事가 뿌려졌다. 어느새 드레퓌스는 國家 分裂의 象徵이 됐다.

    暫時 피카르 中領에게로 視線을 옮겨보자. 그가 튀니지로 轉出돼 떠나기 前의 일이다. 피카르 中領은 知人이었던 辯護士 루이 레블르(마티유 아말릭)를 찾아 萬若 自身에게 變故가 생기면 드레퓌스는 眞犯이 아니라는 事實을 政治權에 밝혀달라고 付託했다. 眞實을 깨닫고 激忿한 레블르는 피카르와의 約束을 저버리고 周邊 知識人에게 軍部의 蠻行을 暴露했다.

    드레퓌스가 ‘드레퓌스 事件’ 助演이 돼버린 아이러니

    ‘드레퓌스 사건’의 진실이 밝혀졌지만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진 못했다. ‘드레퓌스 사건’에 드레퓌스는 소외됐다. [찬란]

    ‘드레퓌스 事件’의 眞實이 밝혀졌지만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진 못했다. ‘드레퓌스 事件’에 드레퓌스는 疏外됐다. [燦爛]

    이들 中 言論인 조르주 클레망소(제라르 遮日로우)와 小說家 에밀 졸라(앙드레 마르콩)가 있었다. 1898年 에밀 졸라는 ‘나는 告發한다’를 ‘輅路르(L'Aurore)’ 新聞 1面에 大門짝만 하게 發表한다. 元來 졸라는 ‘大統領께 告하는 便紙’로 多少 부드럽게 題目을 지었는데, 編輯長 클레망소가 더 攻擊的인 것으로 變更했다. 記事는 대단한 反響을 일으켰지만 그만큼 後暴風도 컸다. 陸軍 將星, 長官, 筆跡 專門家, 裁判官을 告發한 졸라는 프랑스 政府로부터 名譽毁損으로 被訴돼 裁判을 받아야 했다. 懲役 1年에 罰金 3000프랑이 宣告됐다. 목숨을 威脅하는 脅迫도 이어졌다. 結局 졸라는 프랑스를 떠나 亡命길에 오른다.

    軍部는 ‘힘으로 찍어 누르는’ 方式을 選擇한다. 이 모든 事案의 根源으로 피카르 中領을 指目하고 그를 逮捕한다. 再審 要請으로 온 나라가 들썩이자 1899年 6月 軍事法廷은 再審을 決定하지만 組織的인 隱蔽·造作으로 드레퓌스에겐 다시 有罪가 宣告된다. 모든 證據가 眞犯으로 指目하는 에스테라지는 無罪判決을 받았다. 다시금 온 나라가 서로 물어뜯을 듯 鎔鑛爐처럼 들끓었다. 裁判部는 드레퓌스에게 “有罪만 認定하면 卽刻 釋放해 주겠다”고 提案한다. 서 있기도 힘들 程度로 衰弱해진 드레퓌스는 이를 받아들인다. 自身들에게 敵對的인 社會 雰圍氣를 더는 願치 않던 프랑스의 유대人은 반색했지만 드레퓌스派 政治人·知識人은 激怒했다. 드레퓌스가 비록 죽음의 섬에 돌아가서 죽더라도 期約 없는 鬪爭을 正義롭게 이어가기를 主張했다. 그들은 드레퓌스보다는 그들이 盲信하는 ‘理念’을 위해 싸웠기 때문이다.

    變함없이 國家에 충성한 個人의 말로

    1899年 輿論을 先占한 드레퓌스파는 選擧에 勝利한다. 1904年 3月 드레퓌스는 새로운 證據를 모아 最高裁判所에 再審을 請求하고, 1906年 7月 12日 2次 再審에서 無罪가 立證됐다. 피카르와 드레퓌스는 모두 軍에 復職한다. 하지만 피카르만이 穩全히 報償받았다. 그는 곧 准將으로 進級하고 같은 해 國防長官으로 入閣까지 한다. 드레퓌스는 長官이 된 피카르를 찾아가 “나도 잃어버린 12年에 對한 補償을 받게 해달라”며 進級을 要請하지만 피카르는 이를 默殺한다. 이듬해 드레퓌스는 健康 惡化로 復歸 後 채 1年도 되지 않아 除隊하고 만다. ‘將校와 스파이’가 다룬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以後 드레퓌스와 그 家族의 삶은 어땠을까. 오랫동안 겪은 苦楚를 補償받았을까. 1914年 第1次 世界大戰이 勃發하자 드레퓌스는 參戰했다. 유대人이기보다 프랑스人으로 남길 바랐기 때문이다. 崇高한 愛國心으로 모든 論難을 잠재우고자 하는 마음이었으리라. 家族도 一心同體로 그와 함께했다. 看護師였던 아내 루시와 딸 잔느는 軍人病院 自願奉仕로, 아들 피에르는 砲兵將校로 入隊함으로써 祖國을 위해 戰場을 누볐다.

    안타깝게도 드레퓌스 家族의 努力은 커질 대로 커진 反유대主義를 잠재우기엔 力不足이었다. 오히려 그가 照明받으면 받을수록 프랑스 內 反유대主義는 澎湃해져만 갔다. 1935年 그가 世上을 떠나자 全 世界 言論은 그를 기렸다. 追慕의 물결이 커질수록 유대人 嫌惡는 다시 高調됐다.

    1942年 獨逸軍이 파리에 들이닥치자 드레퓌스의 遺族은 南部 프랑스로 避身했다. 73歲 高齡인 루시는 身分을 僞造해 修女院에 隱居하다가 파리가 다시 收復되고서야 故鄕으로 돌아왔다. 피에르의 家族은 美國으로 가는 배에 겨우 몸을 실어 목숨을 건졌지만 잔느의 家族은 뿔뿔이 헤어졌다. 赤十字에서 勤務하던 孫女 마들린은 레지스탕스로 活動하던 中 逮捕됐다.

    當時 獨逸軍은 프랑스 內 유대人 關聯 業務를 샤를 뒤 파티 드 클람에게 一任했다. 그는 ‘나는 告發한다’에서 졸라가 ‘法的 誤謬를 惹起한 惡魔’로 告發한 아르만 뒤 파티 드 클람 中領의 아들이다. 아버지를 쏙 빼닮아 至毒한 反유대主義者였던 그에게선 피도 눈물도 期待할 수 없었다. 드레퓌스가 特別히 귀여워하던 마들린은 蒼蒼한 25歲 나이에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悲慘한 最後를 맞이했다. 反面 샤를은 戰爭 期間 要職을 돌며 乘勝長驅했고, 第2次 世界大戰 後 프랑스의 나치 協助자 大肅淸 時期에도 용케 無罪 釋放되며 살아남았다.

    황승경
    ● 1976年 서울 出生
    ● 이탈리아 레被逮國立音樂院 디플럼, 韓國藝術綜合學校 專門士,
    成均館大 公演藝術學 博士
    ● 國際오페라團 團長
    ● 前 이탈리아 盧베 放送局 리포터, 月刊 ‘英카페’ 編輯長
    ● 著書 : ‘3S 보컬트레이닝’ ‘無限한 想像과 놀이의 變奏’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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