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抗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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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抗爭
날짜 1964年 6月 3日
地域 大韓民國 全域
原因 朴正熙 政府의 韓日協商 試圖
目的 韓日協商 反對
種類 抗議 , 示威
結果 戒嚴令 宣布, 韓日基本條約 通過
示威 當事者
示威 參加者
朴正熙 政府
主要 人物
參與 人員
3萬名 以上
死傷者
逮捕自首 1,120名

6·3 抗爭 (六三抗爭) 또는 6·3 示威 (六三示威), 韓日協商 反對 運動 (韓日協商反對運動)은 1964年 6月 朴正熙 政權 의 韓日協商에 反對하여 일으킨 運動이었다. 1964年 6月 3日 朴正熙 政府가 戒嚴令 을 宣布하여 當時 絶頂에 이른 韓日國交正常化會談 反對 示威를 武力으로 鎭壓하였다. 6月 3日 저녁 10時 [1] 에 宣布한 戒嚴은 7月 29日 해지되었다.

原因 [ 編輯 ]

政府가 韓日 交涉을 祕密裏에 推進, 早速妥結하려는 움직임이 1964年 劈頭부터 表面化되었다. 곧 도쿄 에서 政治協商을 하겠다고 서둘렀고 2月이 되자 政府와 與黨은 3月 中 對日(對日) 交涉의 基本 方針을 밀고 나가겠다는 決定을 發表 [2] 하였다. 1964年 2月 22日 민정당에서는 黨論으로 確定된 韓日 交涉에 關한 代案(代案)을 發表했다. 朴正熙 政權은 一般 輿論의 趨勢를 無視한 채 3億 달러의 請求權 補償으로 滿足하면서 韓國 漁民들의 生命線인 '平和線'(平和線)을 日本에게 내주기로 作定하고 있었다. [2] 는 것이다. 朴正熙 政府 日本 과의 協商을 서두르자 在野 勢力이 總蹶起하여 救國의 烽火를 들어야 한다는 데 意見을 모으고 準備作業에 들어갔다.

1964年 3月 政府는 3月 5日 政府와 與黨 連席會議를 열고 3月 10日부터 農商會談, 12日부터 本會談, 4月에 外相(外相)會談을 開催한다는 韓日 協商 스케줄을 發表하였다. [2] 3月 6日 民政黨, 민주당, 自民黨, 國民의黨 等 在野의 모든 野黨과 社會 [2] , 宗敎, 文化團體 代表 等 著名 人士 200名이 主軸이 되어 '대일屈辱外交反對 汎國民 鬪爭委員會'를 結成하였다. [2] 3月 9日 서울 鍾路禮式場에서는 各界 政治人, 在野 人士 等이 모여 救國宣言을 採擇하고 反對鬪爭에 戰力으로 總蹶起할 것을 다짐했다. 鬪爭委員會 議長의 責任을 맡은 尹潽善은 救國宣言文을 朗讀하였다. [2] 장택상 은 韓日會談을 한·日 合邦 에 比喩하였다. 장택상 한·日 合邦 은 저들의 뜻대로 될 理가 없다. [3] 고 批判하였다.

서울大 斷食籠城과 示威의 導火線 [ 編輯 ]

윤보선
(6.3 示威를 督勵하였다.)

5月 30日 서울大學校 文理大生들이 校庭에서 自由爭取蹶起大會를 열어 韓日會談 聲討와 朴正熙 政權 聲討式을 한 다음 斷食籠城에 들어갔다. 이는 6.3抗爭의 直接的인 契機가 되었다. [4] 學生會丈人 金德龍 (金德龍, 後日 國會議員)은 "오늘의 斷食鬪爭은 來日의 피의 鬪爭이 될 指導 모른다"는 宣言文을 朗讀하고 斷食籠城에 들어갔다. [4]

윤보선 서울大 文理科 學生會長 金德龍 의 宣言文을 悲壯한 宣言文 [2] 이라며 禮讚하였다. 時間이 흐를수록 斷食籠城에 參與하는 學生들 數가 漸漸 늘어갔다. 無抵抗的人 學生들의 籠城 現場에는 敎授들과 市民들이 줄을 이어 찾아와 그들을 激勵하고 먹을 것을 놓고 갔다. [2] 윤보선 함석헌 은 함께 籠城現場을 찾아갔다. 尹潽善은 이를 두고 政治的인 目的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子息 같은 學生들의 애처로움을 慰勞해 주기 위한 마음이 더 컸던 것이다 [4] 라고 하였다. 斷食하다 지쳐 쓰러진 學生들은 들것에 실려 서울대 文理大 앞에 있는 서울대 醫大로 옮겨졌다. 醫大生과 看護學科 學生들은 交代로 徹夜를 하면서 斷食學生들을 보살펴주기 위해 待機하고 있었다. 現場에서 目擊한 尹潽善은 그들 醫大生, 看護學科 學生들도 斷食籠城에 參與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4] 고 보았다. 各地의 大學에서는 棺을 準備하여 韓日協商을 無理하게 推進하려는 朴正熙 , 金鍾泌 에 對한 糾彈聲明과 民族的 民主主義 葬禮式, 民主的 民族主義 葬禮式을 열기도 했다.

그 밖에 市民社會團體와 윤보선, 장택상 , 박순천 等을 中心으로 構成된 '대일屈辱外交反對鬪爭委員會' 等도 時局宣言文을 發表하고 韓日協商 反對 또는 韓日協商 條件 再修正을 要求하였다.

結果 [ 編輯 ]

街頭行進에 나서는 示威隊
鎭壓에 나선 警察

서울대 文理大에서의 斷食籠城은 다른 學生들을 刺戟하였다. 서울 市內의 各 大學生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朴正熙 政權 打倒를 외치며 示威를 벌이기 始作했다. 6月 2日 高麗大 , 서울大 法大, 서울大 相對生 들이 街頭로 進出하여 데모를 主導하자 서울의 各 大學生들이 이에 呼應하여 곳곳에서 示威 抗爭이 벌어졌다. [4] 6月 初 共和黨 金鍾泌 議長이 韓日國交正常化會談 을 위해 日本으로 건너가자 6月 3日 正午를 期해 學生들은 거리 示威를 벌였다. 6月 3日 正午, 一齊히 거리로 쏟아져 나온 서울 市內 1萬 2000名의 學生들은 到處에서 警察과 衝突, 流血劇을 벌이면서 都心으로 進出하였다. 윤보선 은 이를 마치 4·19 學生義擧 當時를 聯想케 했다 [4] 고 描寫하였다. 大學生 7~8000名이 中央廳 앞으로 몰려들면서 세종로 一帶는 無秩序 [4] 와 混亂에 빠졌다. 中央廳 앞의 바리케이트는 이미 무너졌고 警察은 靑瓦臺로 올라가는 통의동 앞에 沮止線을 만들어놓았다. [5]

몇몇 大學生들은 大學에서 朴正熙, 金鍾泌, 民生苦(民生苦) 火刑式과 日本 首相 이케다 하야토 (池田勇人) 火刑式, 그리고 五一六(吳一陸) 被告에 對한 模擬 裁判을 열고 朴政權을 聲討하였다. [5] 서울대학교 文理大 學生들은 6月 3日 午後 4時 頃에 校門을 나섰다. 一部 學生들은 徒步 移動 中 지쳤고, 지친 學生들은 들 것에 태우고 示威에 突入했는데 맨 앞의 들 것에는 송철원이 누워 있었다. 이들은 데모 學生들과 鳶島(沿道) 市民들의 拍手를 받으며 中央廳 앞에 到着, 데모대의 맨 앞에 섰다가 警察의 催淚彈 攻勢에 밀려 學校로 撤收하고 말았다. [5] 이 示威는 6.3 抗爭을 일으킨 示威의 始發點 [5] 이었다.

高麗大學校 總學生會長 職務代行이던 法大 學生會長 김재하를 委員長으로, 副委員長 이경우(法大), 박정훈(政經大), 李明博 (相對) 等의 主導下에 , 延世大 , 서울大 生과 함께 서울 18個 大學 1萬5千餘 名 等 總 3萬 名 假量이 거리로 몰려나와 激烈한 示威를 벌이고 國會議事堂 을 占領하기까지 했다. 學生들의 데모가 激烈해지자 朴正熙 政權은 6月 3日 밤 9時 40分에 宣布하기로 한 戒嚴令을 午後 8時로 溯及하여 서울市 全域에 對해 戒嚴令을 宣布하였다.

戒嚴令 宣布 以後로 大學 休校와 言論 彈壓 [ 編輯 ]

윤보선 , 장택상 , 유진오 , 장준하 等에 依해 主導되는 韓日 屈辱外交 反對 鬪爭委員會 는 學生들의 韓日會談 反對鬪爭을 支援, 고무, 督勵하였다. 朴正熙 政府는 인혁당 韓日協定 反對 이슈를 煽動하여 背後 操縱함으로써 大韓民國 政府 顚覆을 企圖한 叛亂 事件으로 規定하고, 6月 3日 午後 6時 30分 非常戒嚴令 을 宣布하고 示威 禁止와 鎭壓, 言論檢閱, 大學休校 等 主動者 檢擧에 突入했으며, 이 措置로 示威의 主動人物과 背後勢力으로 指目된 學生과 政治人, 言論人 等 1千120名이 檢擧되고 李明博 , 李在五 , 孫鶴圭 , 金德龍 , 현승일 , 李境遇 等 348名은 內亂 및 騷擾罪로 西大門 刑務所 에서 6個月間 服役하게 된다. [6] 高麗大學校 商科大學 學生會長이던 李明博은 이명백으로 이름이 잘못 알려져 危機를 謀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집안까지 警察이 浸透하고 搜査網이 좁혀 오자 스스로 自首하게 된다.

朴正熙 는 放送談話를 통해 6.3 示威를 "野黨 政治人들의 煽動이며 學生들은 學校로 돌아가 工夫에 邁進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윤보선 은 "難局의 打開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政治哲學이 要求된다. 政局混亂이 一部의 政治人, 言論, 學生에게 그 責任이 있다고 할 程度로 朴正熙 氏는 判斷能力이 흐리고 政治哲學이 없었던 것일까? 그의 發言은 大多數 識者層을 비롯한 愛國 國民들에게 너무나 深刻한 衝擊을 주었다"고 反駁하였다. [5]

6月 6日 戒嚴令이 宣布한지 3日 뒤, 武裝軍人들이 深夜에 學生들에게 好意的이던 東亞日報 社에 侵入下 [5] 與 威脅 恐喝한 事件이 發生했다. [7] 이는 當時 동아일보가 親민주黨, 親臣民棠谿 言論이었다는 點 때문이었다. 윤보선 은 이를 두고 '言論에 對한 重大한 挑戰이요, 彈壓이며 나아가 言論 그 自體를 抹殺하려는 獨裁의 極致 [7] '라고 非難하였다. 서울 市內에 警察과 戒嚴軍 이 投入되어 7月 28日 示威는 鎭壓되었고 이튿날인 29日 戒嚴令은 解除되었다.

評價 [ 編輯 ]

한便 강원용 牧師의 境遇, 美國 朴正熙 政權을 붕괴시키기 위해 6·3 抗爭을 더욱 부채질하고 擴散시켰다는 疑惑을 提起하기도 했다. [8]

參考 資料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京鄕新聞 1964年6月4日子.저녁 10時에 宣布했고, 저녁 8時로 溯及 發效시켰음.일부 著述에는 저녁 9時40分이나 9時50分에 宣布했다는 內容도 있음.
  2. 윤보선, 《외로운 選擇의 나날들:윤보선回顧錄》 (동아일보사, 1991) 280페이지
  3. 장택상 《大韓民國 建國과 나:滄浪 장택상 自敍傳》(장병혜·장병초 便, 滄浪장택상記念事業會, 1992) 146페이지
  4. 윤보선, 《외로운 選擇의 나날들:윤보선回顧錄》 (동아일보사, 1991) 290페이지
  5. 윤보선, 《외로운 選擇의 나날들:윤보선回顧錄》 (동아일보사, 1991) 291페이지
  6. '古代 데모事件 槪要' 속 相對生 李明博 - 聯合뉴스 2007.12.20
  7. 윤보선, 《외로운 選擇의 나날들:윤보선回顧錄》 (동아일보사, 1991) 292페이지
  8. 강원용 牧師의 體驗 韓國 現代史 ③ - 新東亞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