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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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근 (鄭亨根, 陰曆 1945年 7月 26日 ~ )은 大韓民國 의 檢事 出身 法曹人이며, 第15·16·17代 國會議員을 歷任한 政治人이다. [1] 本貫은 海州 (海州)이며, 慶尙南道 居昌郡 出生이다.

1970年 大學院 在學 中 司法試驗 合格 後 地方檢察廳에서 檢事로 服務하였으며, 釜山地方檢察廳, 江陵地方檢察廳, 水原地方檢察廳, 淸州地方檢察廳, 서울地方檢察廳 等에서 檢事로 活動했다. 1983年 에는 安企部 에 特採되어 安企部 의 對共搜査局長, 第2次長補 等을 歷任했다. 그 뒤 地方自治選擧 時日을 미루자고 한 主張이 問題가 되어 國精院 1次長에 이르러 辭職書를 提出하였다. 1995年 신한국당 釜山北歐委員長이 되고 1996年 신한국당 公薦으로 政界 入門한 以來 한나라黨 에서 活動했으며 내리 3選 議員을 歷任하였다. 安企部 等에서 勤務하는 동안 拷問 電力에 對한 疑惑이 提起되어 있다. 2008年에는 國民健康保險公團 理事長을 歷任했다.

1992年 北韓 조선로동당 의 南派 組織인 조선로동당 南韓支部의 中部支局을 摘發하여 話題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박종철 顧問 致死 事件 에 關聯되었다는 疑惑도 받고 있다. [2] 또한 飜譯文學家로 龜尾의 書籍을 飜譯하여 紹介하기도 했다. 號는 松山(松山).

生涯 [ 編輯 ]

生涯 初盤 [ 編輯 ]

初期 活動 [ 編輯 ]

慶南 居昌郡 마리면 영승리에서 태어났다. 1964年 경남고등학교 를 卒業하고 서울大學校 法科大學 法學科로 進學하여 서울 로 올라왔다.

學窓時節에는 學生運動에 參與하여 서울대학교 總學生會長을 맡기도 했다. 1968年 서울大學校 法科大學 法學科를 卒業하고 大學院에 進學했다. 서울大學校 大學院에 進學하여 法學, 國際法學을 專攻하였으며, 大學院 在學 中 1970年 第12回 司法試驗 에 合格하였고, 서울地方檢察廳 檢事時報를 거쳐 釜山地方檢察廳 檢事가 되었다. 1973年 軍에 入隊하여 陸軍 陸軍 法務官(中尉)로 服務하고 大尉로 豫編하였다.

檢事, 官僚 生活 [ 編輯 ]

1975年 부터 釜山地方檢察廳 檢事가 되고 같은 해 서울大學校 大學院 法學國際法學 碩士를 받았다. 以後 釜山地檢에서 勤務하며 다시 美國 遊學, 1980年 미시간 大學校 大學院 法學刑事法學 碩士를 받았다. 그後 1年間 美國國立消防學校를 修了하고 1981年 에 歸國하였다. 歸國 後 82年 서울地方檢察廳 檢事가 되고 江陵地方檢察廳, 水原地方檢察廳, 春川地方檢察廳, 淸州地方檢察廳, 서울地方檢察廳 等에서 檢事로 勤務했다.

1983年 安企部 對共搜査局 法律擔當官이 되었으며, 1983年 安企部 에 派遣된 뒤 國家安全企劃部 對共搜査局에서 活動한다. 84年 安企部 第1車掌室 法律擔當補佐官이 되고 安企部 對共搜査局에 特採되었으며, 安企部 對共搜査局 在職 時 옮겨 굵직한 對共事件을 處理했다. 安企部에서 勤務하는 동안 拷問을 直接 指示하는 等 强壓的으로 公安事件 을 處理한 經歷이 있다. 이런 理由로 後날 2000年 代에 와서 總選市民連帶 에서 落選 對象者로 指目하기도 했다. 85年 安企部 對共搜査局 搜査2團長, 그後 安企部 1局長과 對共搜査局長을 거쳐 1989年 平和민주당 서경원 國會議員의 無斷 訪北事件의 搜査를 指揮했다. 이때 그는 서경원을 審問했는데 서경원은 金日成 의 손금을 그려왔다며 김일성의 손금을 그려 話題가 되기도 했다. 91年 3月에는 사로맹事件의 搜査를 指揮하였다.

安企部, 國精院 活動 [ 編輯 ]

1988年 6月 安企部 對共搜査局長이 되고 1991年 國家安全企劃部 高等檢察官, 1992年 3月 에는 安企部 對共搜査局長 兼 安企部 第2次長補(搜査次長補)에 任命되었다. 이 무렵 그는 學生運動圈의 利敵行爲를 指摘, 批判했다가 문익환 의 否認 박용길 等에게 告訴당하기도 했다. 그는 當時 박용길 의 辯護士인 千正培 를 直接 相對하였다. 그는 安企部 在職 中에도 大學院 을 다녀 1991年 서울大學校 大學院에서 法學 博士 學位를 받았다.

1992年 에는 大韓民國 內 親北 組織인 南韓조선노동당 을 搜査하여 그해 10月 조선로동당 南韓支部 中部地域黨 細胞들을 一網打盡하기도 했다.( 南韓조선노동당 事件 )

1993年 3月 25日 安企部 職制調整으로 次長補 職이 廢止되면서 對共搜査局長으로 내려앉았다. 그뒤 安企部 1室長(企劃判斷室長)을 거쳐 1994年 12月 安企部 第1次長이 되었다. 그러나 安企部 地方選擧 延期 輿論 調査 波紋 과 關聯, 그가 作成한 地方選擧 延期檢討 文件이 問題가 되자 1995年 2月 24日 辭職書를 提出하였다. [3] 民主黨 은 한便 選擧에 介入했다는 理由로 當時 1局長이던 그와 次長 황창평을 告訴하기도 했다. [4] 95年 8月 신한국당에 入黨하였다.

政治 活動 [ 編輯 ]

政治 活動 初盤 [ 編輯 ]

1995年 11月 신한국당 釜山市 北區地區黨 委員長이 되었다. 1996年 第15代 國會議員 總選擧 에서 釜山 北·講書甲 地域區에 신한국당 公薦으로 出馬, 當選되어 3選 議員을 지냈다. 신한국당 한나라黨 으로 名稱을 바꾸자 그대로 한나라黨 에 줄곧 있었다. 한便으로 그는 北韓 및 從北勢力 等에 對한 批判과 安保 講演 等을 꾸준히 해 왔고, '한총련 事態와 政府와 國民의 對應方案'이라는 論文을 發表하기도 했다. 15代 國會에서는 1996年 4月 國會 法司委員會 委員, 國會 政務委, 保健福祉위, 情報委員會 委員, 國會 豫決審議委員會 委員으로 活躍하였다. 1996年 5月 신한국당 情勢分析委員長이 되었다.

1997年 2月 그는 大韓民國 國內에 間諜이 있다는 主張을 하면서 同時에“황장엽리스트에 김대중氏 周邊 人物이 包含돼있다”고 言及하여 論難이 되기도 했다. 1997年 8月 에는 오익제 越北事件에 對해 새정치국민회의 를 비롯한 野黨의 關與 疑惑을 提起하고 搜査를 促求하기도 했다. 1998年 2月 에는 BBS基金事件關聯 名譽毁損으로 被訴당했으나 無嫌疑處分을 받았다. 1999年 에는 國精院 의 言論對策文件을 暴露하였다. [5] 그러나 國精院 言論對策文件을 暴露하자 그에게는 '죽여버리겠다. 家族들을 沒殺시키겠다'라는 等의 電話脅迫에 시달리기도 했다. [5]

유엔 人權委員會 參席 [ 編輯 ]

유엔 人權委 參席決定과 野黨, 市民團體의 反對 [ 編輯 ]

1999年 4月 17日 부터 4月 23日 유엔 人權委員會 에 參席하였다. 그는 民間團體(NGO) 代表 資格으로 유엔人權委員會 에 參席(4月 17日-23日), 韓國人權狀況에 對한 基調演說을 하였다. [6] 4月 15日 韓國人權團體協議會 (常任代表 임기란, 以下 人權協)는 聲明을 發表, "정형근 議員의 유엔 人權委員會 參席은 人權과 人權運動에 對한 冒瀆이기에 絶對 反對한다"며, "鄭 議員이 過去 잘못에 對한 鄭重한 謝罪와 容恕를 빌어야 함에도 不拘하고 自身이 무슨 人權擁護者나 被害者인 兩 國際社會에 나가 眞實을 糊塗하는 것을 默過할 수 없다"고 反對했다. [7] 그러나 정형근은 出國을 强行하였다.

이에 4月 15日 韓國人權團體協議會 (常任代表 임기란, 以下 人權協)는 聲明을 發表, "정형근 議員의 유엔 人權委員會 參席은 人權과 人權運動에 對한 冒瀆이기에 絶對 反對한다"며, "鄭 議員이 過去 잘못에 對한 鄭重한 謝罪와 容恕를 빌어야 함에도 不拘하고 自身이 무슨 人權擁護者나 被害者인 兩 國際社會에 나가 眞實을 糊塗하는 것을 默過할 수 없다"며 猛非難을 加했다. [6] 人權協은 "그는 決코 人權을 입에 담을 수 없는 人物로 이미 法廷에서 正義의 審判을 받았어야 했다"며 "鄭 議員이 日程대로 유엔 人權委員會에 參席한다면 제네바 現地에서 世界 人權 團體들과 함께 鄭 議員의 基調演說을 行動으로 沮止하고 그가 人權加害者임을 國際社會에 널리 알리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6]

天主敎正義具現司祭團 人權運動舍廊房 等 19個 人權.市民團體들은 4月 16日 午前 서울 鍾路5街 基督敎聯合會館 에서 記者會見을 열어 最近 論難이 되고 있는 한나라당 정형근(鄭亨根) 議員의 제네바 유엔 人權委員會 參席을 實力 沮止키로 했다 [8] 며 정형근의 出國을 막으려 努力했다. 參席者들은 "鄭議員은 過去 公安檢事와 安企部 次長 等으로 在職하면서 박종철 拷問致死事件을 비롯, 各種 公安事件을 造作하고 拷問을 일삼았던 人物"이라면서 "그는 會議參席 代身 自身의 잘못을 眞心으로 反省하고 容恕를 빌어야 한다"고 主張했다. [8]

當時 새정치국민회의 鄭東泳 代辯人의 論評을 통해 "정형근 議員이 代表한다는 NGO는 韓國의 NGO가 아닌 美國 의 民間團體인 國際敎育發展委員會 로 밝혀졌다"며 "정형근 議員은 韓國의 NGO를 代表해서 유엔에 가는 것이 아니라, 美國의 NGO 會員資格으로 유엔에 가는 것"이라고 밝혔다. [6] 국민회의 는 또 "정형근 議員은 只今까지 國際敎育發展委員會에 會員으로 加入한 적도, 活動한 經歷도 없다"며 "敎育과 無關하고 關心조차 없던 사람들이 유엔에 가기 위한 便法으로 會員資格을 急造한 것"이라고 非難했다. [6]

出國 [ 編輯 ]

4月 17日 그는 出國을 强行하고, 이에 對해 野黨과 人權團體들이 强力히 非難하고 나섰다. 鄭議員은 이날 午後 이신범(李信範) 金映宣(金映宣)議員 等 同僚議員 2名과 함께 金浦空港을 통해 유엔 人權委가 열리고 있는 스위스 제네바로 떠났다. [9]

국민회의 정동영(鄭東泳)代辯人은 이날 論評을 통해 "世間의 批判輿論에 귀를 막은 채 政治的 計算에 따라 鄭議員이 出國을 敢行한 것은 그의 個人的 不幸일 뿐아니라, 鄭議員으로 대표되는 한나라당의 人權意識과 良心不良 狀態를 證明해주고 있다"고 猛攻을 퍼부었다. [9] 鄭代辯人은 "鄭議員이 韓國 非政府機構(NGO)代表가 아니라, 美國 NGO代表 資格으로 國際舞臺에 서는 것으로 볼 때 그의 正體性이 의심스러울 뿐아니라, 手段과 方法을 가리지 않고 政府를 欠집내려는 하는 政治的 意圖가 엿보인다"고 非難했다. [9] 자민련 李美卿(李美卿)副代辯人도 論評을 통해 "人權彈壓 前歷 疑惑을 받고 있는 사람이 유엔 人權委에 參席한다면 그 資格과 信賴性을 疑心받을 수 있다"고 非難한 뒤 "鄭議員이 人權委 參席을 위해 出國한 以上 이番 機會에 人權의 眞正한 意味를 되새기는 契機가 되기를 바란다"고 `忠告'했다. [9]

그러나 그는 스위스 제네바 까지 쫓아온 野黨과 學生運動圈 人士들의 反撥과 妨害를 奇跡的으로 따돌리고 人權委員會 會議場에 들어가 金大中 政權의 野黨 彈壓, 道廳 等을 暴露하고 人權 彈壓을 主張하였다.

會議場 參席 [ 編輯 ]

제네바로 날아간 정형근은 "現 政府의 人權 侵害를 告發하겠다며 유엔 人權委에 參席하였다. [10] " 첫날 그는 "유엔 人權委에 參席했으나 정작 아무 發言도 하지 못했다. [10] 當時 정형근은 귝제교육개발협회(IED)의 會員 身分이었다. 한便 民主社會를 위한 辯護士 모임 의 한 關係者는 "이신범 議員이 美國 滯留 當時 參與했던 이 機構에 鄭 議員의 이름을 올려 便法으로 유엔 出入證을 받았다."고 憤痛을 터뜨렸다. [10]

정형근에게 拷問을 當했다고 主張한 방양균과 舌戰하였다. [10] 20~21日 이틀間 會議場에서 마주친 이들은 各國의 人權團體 代表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拷問技術者가 유엔 人權委에 參席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방양균)?". "내가 拷問했다는 證據가 있으면 대라. 當身을 告訴하겠다.(정형근)"며 言聲을 높였다. [10] 그러나 會議長 앞에까지 나타난 市民團體 會員들을 따돌리고 會議場에 들어가는데 成功하였다. 그리고 그는 김대중 政府 의 野黨 彈壓과 盜聽, 査察을 暴露하였다.

정형근의 暴露에 이어 이신범 의 暴露도 있었다. 이신범은 國風과 拷問 論難, 國會 529號室 問題 等 野黨 彈壓 問題를 集中的으로 擧論하였다. [11] 정형근과 이신범의 暴露로 國際社會에서는 大韓民國 의 野黨 彈壓에 對해 疑惑을 提起하기 始作하였고, 韓國의 反美團體들에 對한 美國 , 日本 人士들과 僑胞들의 批判이 쏟아지기 始作했다. 同時에 美國의 人權團體들이 韓國에 關心을 갖고, 北韓 問題에까지 關心을 갖는 契機가 되었다. 한便 정형근은 會議 첫날 人權위 會議場에서 방양균과 입씨름을 벌이다가 다른 參加者들의 눈총을 받기도 했다. [10]

옷 로비 聽聞會 [ 編輯 ]

1998年 11月 한나라黨 企劃委員長이 되었다. 1999年 4月 에는 유엔 人權委員會에 參席, 當時 執權黨인 새정치국민회의 와 김대중 政權이 野黨을 彈壓한다는 主張을 하여 話題가 되었다. 1999年 犯罪申告者保護法의 틀을 作成하고 代表 議員으로 發議하였다. 또한 事件 提報者들에 對한 保護 對策을 國會에 올리기도 했다. 1999年 8月 에는 當時 政官界 人士들의 夫人을 相對로 로비를 한 디자이너들의 옷로비 事件의 聽聞會를 主導하여 聽聞會 스타가 되기도 했다.

'옷로비 事件'에 對한 國會 聽聞會에서는 사직동팀(警察廳 調査課) 調査資料를 引用해 證人訊問을 벌이는 等 情報蒐集力을 보여주었다. [12] 그러나 그는 最近 옷로비 聽聞會 當時 `라스포사가 만든 팸플릿'이라며 A4用紙를 들고 나왔다가 라스포사 社長 정일순氏로부터 `事實이 아니다'라는 抗議를 받았으며 監査院 國政監査에서는 `94年 빠찡꼬 搜査'와 關聯해 監査院 局長의 實名을 擧論했다가 `事實 確認이 안됐으니 없던 것으로 하자'며 質疑를 取消하기도 했다. [12]

한便 聽聞會場에서 앙드레 金 의 本名이 確認되어 爆笑꺼리가 되기도 했다. 앙드레 金이 "앙드레 킴입니다"라고 答辯하자 목요상 法司委員長이 本名을 얘기하라고 말했고, 金氏가 "김봉남입니다"라고 對答하는 瞬間 傍聽席에서는 爆笑가 터졌다. [13]

  • 정형근 委員:김봉남氏!
  • 앙드레 金:예. [13]
  • 정형근 어떻게 해서 앙드레 金 이란 이름을 갖게 되셨습니까?
  • 앙드레 金:制가 60年度부터 디자인 工夫를 하고 있을 때 프랑스 大使館의 外交官께서 世界的인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서는 韓國의 姓은 간직해도 이름은 부르기 쉬운 이름으로 앙드레라고 하면 어떻겠느냐 해서 앙드레 金으로 되었습니다.
  • 정형근:잘 하셨네요. 12月16日 앙드레 金氏가 하고 있는 가게에 연정희氏가 왔지요?
  • 앙드레 金:예. …(中略)…
  • 정형근:같이 간 사람이 밝힌 바에 따르면 검은色 투피스와 브라우스 한 세트, 베이지色 투피스와 브라우스 한 세트, 總 두 세트를 연정희氏가 맞추었는데 한 세트에 200萬원 以上 가는 세트라고 分明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 앙드레 金:그런데 그것은 正말 全혀 아닙니다.
  • 정형근 : 全혀 아닙니까?
  • 앙드레 金 : 예. 그리고 저희 衣裳은 저희 支店의 代理店인 釜山 롯데百貨店에도 있습니다. 그쪽을 체크해 보셔도 아시지만 價格이 다 같습니다.
  • 정형근 : 연정희氏는 어느 程度 단골입니까?
  • 앙드레 金 : 95年度쯤 다녀가시고 그後에 처음 오신 것이고 저희가 뵙기로는 嶺東 세브란스병원에서 1年에 한番씩 하는 筋肉病 患者를 위한 慈善의 밤 行事…. [13]

그는 앙드레 金 에게 앙드레 金이라는 藝名을 갖게 된 經緯를 質問하며 爆笑가 된 聽聞會場을 收拾했다. 그러나 그가 처음 김봉남氏 라고 했을 때 傍聽席은 다시한番 爆笑가 되기도 했다.

송두율 疑惑 暴露 事件 [ 編輯 ]

2003年 10月 에는 송두율 北朝鮮 의 間諜이라는 疑惑을 提起하였다.

이날 午前 質疑者로 나선 정형근 한나라당 議員은 "北核 問題와 關聯 中國 共産黨 의 목소리와 北韓 의 목소리와 一部 運動圈 出身 國會議員의 목소리가 똑같다는 것에 놀랐다"며 "國會議員들이 幸여 個人的으로 北韓에 招請 받아 가는 것은 危險하다"고 運動圈 出身 國會議員에 對한 色깔論을 提起했다. [14] 또한 그는 " 강금실 法務部 長官이 지난 88年 釜山地法 判事 時節, 出版社 社長인 前 男便이 國家保安法 違反으로 拘束되니까 國保法을 廢止해야 한다는 內容의 陳情書를 `判事' 職銜을 달아 提出해 檢察 公安部가 발칵 뒤집혔다"며 "그런 思想을 가진 분이 한총련 手配 解除하고, (송두율 敎授가) 政治局 候補委員이면 어떠냐고 해 檢察이 處理를 못하고 있으므로 姜 長官을 解任 建議해야 한다"고 主張했다. [14]

午後 質疑者로 나선 안영근 統合新黨 議員은 '色깔論'을 들고 나온 鄭 議員과는 달리 '빨간 色眼鏡'을 쓰고 나와 耳目이 集中됐다. 安 議員은 對政府質問에 앞서 "最近 들어 根據 없는 暴露와 '色깔論'에 對해 指摘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門을 연 뒤 한나라당 議員들이 提起한 '統合新黨 創黨 募金說'과 김무성 議員이 提起한 유시민 改革當 議員의 '베이징 北韓 大使館 訪問說'을 批判했다. [14] 또한 그는 "(根據 없는 色깔論을 들고 나와)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데, 事實 無筋으로 밝혀지면 對國民 謝過를 하거나 國會議員을 그만둬야 한다"며 "免責特權의 그늘 아래서 昆蟲처럼 棲息하는 것이 國會의 부끄러운 모습"이라고 聲討했다. [14] 그런 뒤 安 議員은 胡주머니에서 빨간色 色眼鏡을 꺼내들었다. 그는 色眼鏡을 쓰고서 "빨간 色眼鏡을 쓰면 모두 間諜으로 보인다"며 色깔論을 提起한 一部 議員들의 行動에 對해 批判했다.

10月 20日 午前 國會 統一·外交·安保分野 對政府質問에서 정형근 한나라당 議員은 송두율 敎授 事件과 關聯 "송두율氏는 間諜이고 今年 3月에도 平壤에 갔다왔고, 지난 9月 9日에도 김정일에게 忠誠盟誓文을 보냈다"며 宋 敎授가 北韓 勞動黨 政治局 候補委員임을 거듭 强調했다. 이와 함께 그는 州獨逸 北韓利益代表部 總責任者로 美國에 亡命한 김경필의 '對北 報告文'이라는 文件과 "國精院이 갖고 있다"는 디스켓 寫眞을 公開했다. [14]

鄭 議員은 " 김경필 은 지난 97年 2月 22日 北韓 에 보낸 報告文에서 宋氏가 찾아와 ' 황장엽 이 내가 (송두율) 우리 黨 指導機關 成員임을 알고 있는가'라고 물어왔으니 指針을 달라고 했고, 이어 3月 12日 ' 황장엽 이 黨 中央 指導委員 成員임을 모를 것으로 判斷하니 謀略宣傳이라고 剛하게 反駁하라'는 回信을 받았다"고 主張했다. [14] 그는 "김경필은 지난 97年 4月 3日 文件에서는 송두율 이 南北海外學者 統一學術學會 參席 與否를 물은 데 對해 '南朝鮮 傀儡들이 情勢를 긴장시키고 있으니 더 두고보자'는 김정일 委員長의 親筆 指示를 傳達했다고 밝혔다"면서 "그런데도 송두율 이 間諜이 아니라고 생각하느냐"고 강금실 長官을 追窮했다. [14] 그는 "運動圈 出身 議員 혼자 北에 보내지 마라"며 熱辯을 吐했다. 이때 열린우리당 側 議員들과 記者들이 그에게 證據를 提示하라고 하자 그는 디스켓 寫本이 있다며, 디스켓을 종이에 印刷한 寫眞을 公開하여 話題가 됐다.

國家情報院 人事 問題 暴露 [ 編輯 ]

人事 副作用 疑惑 [ 編輯 ]

2005年 7月 정형근은 國家情報院 의 人事에 問題가 있다고 指摘하고, 不當한 人事 措置가 있었다며 疑惑을 提起하였다. 그는“ 法務部 소병철 部長檢査가 DJ 政府 때 이종찬 國精院長과 함께 國精院에 들어가 職員 600名을 짜르는 殺生簿를 만들었다”며 “金 候補者가 이番에 소 檢査를 國精院에 데리고 간다는 所聞도 있다”고도 했다. [15] 이에 對해 소병철 部長檢事는 “完全한 事實 無根”이라고 했다. [15] 金昇圭 候補者도 “소 部長을 데려갈 計劃이 없다”고 했다. 이종찬 前 院長 當時 國精院에 勤務했던 高位 關係者는 “600名은 대충 맞지만, 過去 北風 等 工作政治에 加擔했던 職員들을 國精院 改革 次元에서 물갈이한 것이며 主로 人事擔當들이 했다”고 말했다. [15] 그러나 정형근은 이 主張을 辨明이라며 繼續 疑惑을 提起하였다. 한便 그의 强力한 疑惑 提起로 한때 國精院의 高位 直擬 物望에 올랐던 法務部 一部 檢事들의 國精院 迎入說은 그대로 白紙化되었다.

2005年 7月 鄭 議員은 “解雇된 職員이 國精院을 相對로 提起한 訴訟을 法務法人 화우에 6億원을 주고 맡겼다는데 맞느냐”고도 물었다. [15] 화우는 2004年 盧武鉉 大統領 彈劾審判 때 核心 役割을 했고, 盧 大統領 사위가 勤務하는 等 關心의 焦點이라고 덧붙였다. [15]

特定地域 出身 特惠 疑惑 [ 編輯 ]

2005年 정형근은 當時 國家情報院長 人事聽聞會에서 國家情報院 내 特定地域 人士에 對한 特惠性 人事 疑惑을 提起하였다. 金昇圭 國家情報院 腸 人事聽聞會에서 정형근은 김대중 政府 時節 國精院이 特定地域 出身 受驗生에게 加算點을 준 事實이 뒤늦게 드러났지만, 고영구 院長이 이를 덮었다고도 했다. [15] 金昇圭 候補者와 一部 擔當者들이 反撥하였지만 정형근은 金大中 政權 때 特定地域 出身에게 特惠를 준 것에 對해 繼續 疑惑을 提起하였다.

정형근은 또 고영구 院長의 한 大學 後輩가 政府 部處에서 人事 特惠를 받고 있다고 指摘하기도 했다. [15] 이에 對해 聽聞會場에 陪席한 國精院 關係者는 “그런 일은 없는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15] 그러나 정형근의 疑惑 提起는 4年만에 事實로 確認되었다. 國家情報院 에서 特定地域 出身에게 特惠를 준 것은 後日 國精院 職員 김기삼 의 暴露로 事實로 밝혀졌다.

社會 團體 活動 [ 編輯 ]

2006年 7月 11日 한나라黨 第8次 全黨大會에서 5位로 最高委員에 當選되었다. [16] 17代 國會 在職 中 정형근은 한나라黨 企劃委員會 委員長과 黨務委員會 委員을 맡았으며, 國會 常任委 活動으로는 國會 保健福祉委員會 委員, 國會 情報委員會 委員이 되고 國會 情報委員會에서는 幹事로 選任되었다. 2006年 暫時 한나라黨 最高委員을 지내기도 했다.

2007年 한나라당 大統領選擧對策委員會 副委員長을 맡았다. 그러나 2008年 3月 13日 第18代 總選 한나라당 公薦 審査에서 後輩인 朴敏植 에 밀려 탈락했다. [17] 以後 法務法人(劉) 에이스에서 辯護士로 活動하였다.

2008年 9月 22日 國民健康保險公團 理事長에 就任하였다. 2011年 9月 16日 3年 任期를 마치고 國民健康保險公團 理事長에서 退任하였다. 9月 30日 정관용 敎授와의 對談에서 公共醫療機關 擴充, 公共醫療 保障性 强化와 總額계약제 導入을 主張했다. [18] 2011年 12月 에는 뉴라이트全國聯合 常任議長을 歷任하기도 했다.

賞勳 經歷 [ 編輯 ]

著書 및 曆書 [ 編輯 ]

著書 [ 編輯 ]

  • 《21世紀 東北亞 新國際秩序와 韓半島》 (2007)
  • 《國際테러의 法的 規制에 關한 硏究》(1992)

論文 [ 編輯 ]

  • 한총련 事態와 政府와 國民의 對應方案

飜譯書 [ 編輯 ]

  • 커트 젠트리, 《존 에드거 후버》(前2卷, 정형근 옮김, 고려원, 1992)
  • 《고르바초프, 8月의 쿠데타》(1992)
  • 《보리스 옐친》(1992)
  • 《造作된 神話, 존 에드거 후버》(1995)
  • 《넥스트 워》(1997)

學歷 [ 編輯 ]

家族 關係 [ 編輯 ]

論難과 疑惑 [ 編輯 ]

박종철 事件 關與 論難 [ 編輯 ]

박종철 顧問 致死 事件 에 關聯되었다는 疑惑이 있다. [2] 오마이뉴스 의 取材陣들에 依하면 '정형근 議員이 박종철 事件에 어느程度 介入했는지 잘 모르 [2] '지만, 박종철 事件 隱蔽를 위한 關係機關對策會議에 實務責任者로 關與했다 [2] '는 것이다.

한便 言論인 오연호는 1998年 잡지 月刊 末 지에 '정형근 議員은 박종철 拷問致死 隱蔽造作의 實務總責'이라는 疑惑을 담은 報告書를 發表하기도 했다.

拷問 行爲 [ 編輯 ]

5共 時節 拷問王으로 이근안이 有名했다면 6共 들어서는 정형근이 자주 입에 오르내렸다. 심진구 氏 및 민족민주혁명당 事件 關聯者 허영옥氏 等이 정형근이 拷問現場에서 拷問을 指揮했다는 陳述을 한 바 있다. 또한 民族解放愛國戰線 事件 關聯者 양홍관氏는 2004年 12月 14日 가진 記者 懇談會에서 정형근으로부터 性器 拷問을 當했다고 主張하기도 했다. 2001年 1月 30日 檢察은 이른바 '서경원 議員 密入北 事件'과 關聯 當時 野黨 總裁였던 金大中 前 大統領이 徐氏로부터 北韓 工作金 1萬弗을 받은 事實이 없다고 最終 結論을 내리면서 過去 檢察 搜査 造作되었음을 是認했다. 檢察은 當時 徐氏의 陳述이 搜査 當局의 拷問에 依한 虛僞 自白임을 밝혀냈고 拷問을 指揮한 自家 安企部 對共 搜査局長이었던 정형근임을 밝혔다. [19]

양홍관은 2004年 12月 13日 낮 KBS 라디오 時事프로그램 <라디오 情報센터 朴에스더입니다>에 出演해 정형근 議員을 "막대기를 가지고 제 性器 龜頭를 친다든가 이런 式의 拷問까지 恣行했던 張本人"으로 指目했다. [20] 이에 앞서 양홍관은 이날 午前 SBS 라디오 時事프로그램 <하남신의 SBS 展望臺>와의 인터뷰에서도 "安企部에 들어가면 一旦 옷을 벗기고, 性寄稿文까지 하고 손가락에 막대기를 끼우고 돌렸다"고 主張했다. [20]

정형근은 拷問 嫌疑로 10件 가까히 被訴되었으나 용케 法의 審判을 비켜나갔다. 無慮 23次例의 檢察의 召喚에 不應하였고, 檢察이 緊急 逮捕權을 發動해 逮捕하려 했으나 國會議員 免責權 및 當時 한나라당의 徹底한 庇護아래 召喚이 霧散되었다. [19]

落選團體 組織 [ 編輯 ]

그에 對한 落選運動으로 끝나지 않고 정형근 落選 團體가 組織되기도 했다. 1999年 3月 10日 '拷問國會議員 정형근을 審判하는 市民모임準備委員會'가 結成되고 記者會見을 가졌다. 顧問團에는 이돈명 辯護士, 박용길 , 배은심 유가협 會長, 임기란 民家協 會長 等이, 理事로는 김승훈 新婦, 양묘순 修女, 秦觀 스님, 民族正氣具現回 권중희 會長 等이 參與했다. [21]

拷問을 直接 當했다는 서경원 을 包含, 이돈명 辯護士, 김승훈 神父 等을 中心으로 '拷問國會議員 정형근을 審判하는 모임'이 만들어졌다. 民主勞總은 2004年 12月 16日 에 '國家保安法 撤廢와 拷問背後 眞相糾明을 위한 鬪爭計劃'을 發表하면서 "安企部의 拷問搜査의 背後 操縱者로 指目되고 있는 정형근을 除名시켜야 한다"라고 要求한 뒤 "민주노총 釜山本部를 中心으로 정형근 拘束搜査 促求運動을 展開하겠다"라고 宣言했다. 또한 '國家保安法 撤廢連帶'는 "이미 드러난 정형근 議員의 拷問 加害行爲가 不足하다면 鄭 議員이 具體的으로 行한 拷問 事例를 다시 暴露할 것"이라며 "그가 被害者들에게 무릎꿇고 謝罪하고, 容恕를 求하는 그날까지 그의 過去 拷問行爲를 暴露하는 行爲를 멈추지 않겠다."라고 밝혔다. [21]

言論 亦是 정형근 議員이 關與한 여러 事件에서 "不法의 門턱을 쉽게 드나든 것"에 對한 問題提起와 더불어 "眞率하고 堂堂하게 立場을 밝힐 必要가 있다."고 主張하기도 했다. 2005年 1月 31日 에는 정형근의 選擧區였던 釜山 北區 萬德2洞 그린코리아아파트 앞에서 國家保安法廢止釜山國民連帶가 '정형근에 依한 拷問被害者 證言大會'를 開催했다. [21]

默珠 事件 [ 編輯 ]

2005年 國會議員 在職 當時에 40代 女人과 몇 時間 동안 호텔 房에 있었고 女人의 男便이 찾아와서 다툰것이 言論에 紹介가 되었다. [22] 그 當時 鄭議員이 40代 女人과 만난것은 自身이 注文한 필리핀 산 默珠를 받기 위해서라고 하였고, 네티즌들은 “默珠를 받는데 왜 何必 호텔房에서 몇 時間이나 걸리느냐?”란 疑問을 提起하였고, 정형근 議員은 '默思마'란 別名을 얻게 되었다. [22]

기타 [ 編輯 ]

第34回 司法試驗에 合格하고 司法硏修院을 24期로 修了한 慶熙大學校 出身 同名異人의 辯護士 정형근度 있다.

歷代 選擧 結果 [ 編輯 ]

實施年度 選擧 臺數 職責 選擧區 正當 得票數 得票率 順位 當落 備考
1996年 總選 15代 國會議員 釜山 北區·강서구 甲 신한국당 56,876票
60.08%
1位 初選
2000年 總選 16代 國會議員 釜山 北區·강서구 甲 한나라黨 48,104票
76.56%
1位 再選
2004年 總選 17代 國會議員 釜山 北區·강서구 甲 한나라黨 41,547票
51.15%
1位 3選

各州 [ 編輯 ]

  1. “시사저널 - 安企部 1次長 出身 정형근 議員 “固定 間諜 利用한 테러, 막을 수 없다”” . 2017年 10月 23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7年 6月 10日에 確認함 .  
  2. "한나라당이 政黨民主化하기에 더 適合"
  3. "정형근 1次長 辭表", 한겨레新聞 1995.02.24日子 1面, 政治面
  4. "金悳 前副總理 告發키로 民主黨 '政治關與'嫌疑", 東亞日報 1995.02.23 2面, 政治面
  5. 巨創出身 野黨議員 受難時代 慶南新聞
  6. "정형근! 敢히 人權을 팔아?"
  7. "정형근! 敢히 人權을 팔아?" - UN人權委 參席決定, 人權團體 憤怒
  8. "정형근議員 유엔人權위 參席沮止"-人權.市民團體
  9. 與野 `정형근議員 人權委 參席 强行' 攻防
  10. 康俊晩, 《사람들은 왜 憤怒를 잃었을까》 (人物과사상사, 2000) 148페이지
  11. 康俊晩, 《사람들은 왜 憤怒를 잃었을까》 (人物과사상사, 2000) 149페이지
  12. 정형근 議員 누구인가
  13. 墓碑銘에 뭐라고 쓰겠냐고 물었더니... 오마이뉴스 2010.08.14
  14.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49379
  15. 정형근, 人選過程 손금보듯 暴露 Archived 2013年 12月 3日 - 웨이백 머신 朝鮮日報 2005.07.05
  16. 공희준 (2006年 7月 26日). “只今 한나라당에선 - 한나라당의 새로운 指導部 構成” . 뉴스앤조이 . 2008年 3月 26日에 確認함 .   |題目= 에 지움 文字가 있음(위치 1) ( 도움말 )
  17. 윤종구 (2008年 3月 14日). “한나라,박희태-김무성-정형근-金淇春 脫落” . 東亞日報 . 2008年 3月 26日에 確認함 .   |題目= 에 지움 文字가 있음(위치 1) ( 도움말 )
  18. 정관용 (2011年 10月 1日). “정형근 "保健醫療에선 市場原理보다 公共性이 于先"” . 노컷뉴스 . 2011年 10月 5日에 確認함 .   |題目= 에 지움 文字가 있음(위치 1) ( 도움말 )
  19. 鄭雲鉉,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79080&CMPT_CD=A0271 이근안만 拷問技術者? 정형근 前 議員님, 섭섭하시죠)
  20. 정형근 議員 '性器拷問 疑惑' 提起돼
  21. 朴元淳, 《顧問의 韓國現代史 野蠻時代의 記錄 1:아무도 記錄하지 않는 歷史》 (역사비평사, 2006) 279페이지
  22. 박종찬, ( http://www.hani.co.kr/section-021107000/2005/12/021107000200512290591048.html Archived 2006年 1月 18日 - 웨이백 머신 ‘사마’와 ‘女’의 活躍)

같이 보기 [ 編輯 ]

關聯 著書 [ 編輯 ]

  • 康俊晩, 《사람들은 왜 憤怒를 잃었을까》 (人物과사상사, 2000)
  • 朴元淳, 《顧問의 韓國現代史 野蠻時代의 記錄 1:아무도 記錄하지 않는 歷史》 (역사비평사, 2006)
  • 양홍관, 《生命 꽃 피어나는 消息》 (한길, 2007)
  • 윤창중, 《漫醉한 權力》 (해맞이, 2007)
  • 김환태, 《救國戰線 5》 (글힘, 1999)

關聯 資料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

前任
황창평
第21代 國家安全企劃部 第1次長
1994年 12月 26日 ~ 1995年 2月 23日
後任
오정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