吳世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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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世勳
오세훈(2023년)
吳世勳(2023年)
大韓民國 의 第33·34代 서울特別市葬
任期 2006年 7月 1日~2011年 8月 26日
前任 李明博
後任 朴元淳

大韓民國 의 第38·39代 서울特別市葬
任期 2021年 4月 8日~
前任 朴元淳

身上情報
出生日 1961年 1月 4日 ( 1961-01-04 ) (63歲)
出生地 서울特別市 城東區 聖水洞
居住地 서울特別市 廣津區 자양동
國籍 大韓民國
學歷 高麗大學校 大學院 法學博士
經歷 淑明女子大學校 法學科 兼任敎授
第16代 國會議員 (서울 江南區 을 )
한나라黨 院內副總務
한나라黨 最高委員
한나라黨 靑年委員會 委員長
第33·34代 서울特別市葬
한양대학교 公共政策大學院 特任敎授
高麗大學校 技術經營專門大學院 碩座敎授
法務法人 大陸아주 顧問辯護士
共生硏究所 所長
바른政黨 最高委員
自由韓國黨 國家未來비전特別委員長
自由韓國黨 廣津區 을 黨協委員長
正當 國民의힘
本館 海州
兄弟姊妹 오세현(女同生)
配偶者 송현옥
子女 2女
宗敎 天主敎 (洗禮名: 스테파노)
署名
웹사이트 블로그
吳世勳 - 페이스북
吳世勳 - 인스타그램
유튜브
軍事 經歷
服務 陸軍 中尉 轉役( 國軍保安司令部 情報處 公報政訓將校)

吳世勳 (吳世勳, 1961年 1月 4日 ~)은 大韓民國 辯護士 出身 政治人 이다. 第16代 國會議員을 歷任했고, 제33·34·38·39대 서울特別市葬 이다.

本貫은 海州 이며 서울 出生이다. 司法硏修院 을 16期로 修了한 後 民主社會를 위한 辯護士 모임 環境運動聯合 에서 活動하면서 辯護士 로 放送에 出演하다가 16代 總選 江南區 을 에서 한나라黨 候補로 出馬하여 當選되었다. 第16代 國會議員 任期 4年 連續 市民團體 主管 國政監査 優秀委員으로 選定되었고, 政治改革特委 幹事를 맡아 깨끗하고 透明한 選擧를 目的으로 하는 政治資金法 改正을 主導했다. [1]

2006年 서울特別市葬 에 當選되어 創意 是正과 디자인 서울 乙 主要 政策으로 推進하면서, 淸廉度 向上, 江南北 均衡發展, 福祉 政策 希望드림 프로젝트 , 大氣環境 改善 等에 注力하였고, 茶山 콜 센터 長期傳貰住宅 시프트 , 分讓 原價 公開, 分讓價 上限制, 住宅 後分煬帝를 導入하였다. [2] [3] 2011年 低所得層을 對象으로 選別的 福祉를 主張하며 서울市 無償 給食 政策 에서 住民投票를 提案하고, 投票率이 未達되자 市長職을 辭退했다.

2021年 서울特別市葬 補闕選擧 에서 當選되어 10年 만에 서울市長으로 復歸했다. 2022年 6月 第8回 全國同時地方選擧 에서 最初의 4線 서울市長으로 當選되었다.

生涯 [ 編輯 ]

幼年期 [ 編輯 ]

1961年 서울 聖水洞 에서 1男 1女 中 長男으로 태어났다. [4] 朝鮮 仁祖 領議政 을 지낸 오윤겸 의 後孫으로 [5] 京畿道 龍仁에서 10代째 살아온 집안이며, 京畿道 利川市 마장麵 회억리에 祖父母와 祖上의 先山을 두고 있다. [6] 어머니는 慶尙北道 尙州市 出身이다.

吳世勳은 어린 時節을 "山꼭대기 洞네에 살면서 호롱불 켜고 우물물 길러 다니면서 學院도 못 다닐 程度로 어려운 집안 形便이었으며, 宿題는 해가 지기 前에 미리 끝내고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라고 回顧했다. [7] 아버지는 不渡 直前의 建設會社에 在職하여 給與는 밀리기가 일쑤였고, 어머니는 副業으로 寢具類를 만들었다. 吳世勳은 카나리아 같은 觀賞用 새를 키워 돈을 벌었다. 初等學校 3學年 때 아버지 會社 事情으로 온 家族이 釜山 광복동으로 移徙하여 事務室 한켠에 臨時로 칸을 막고 다다미를 깔고 지냈다.

對日高等學校 3學年인 1978年 송상호와 짝이 되었다. 송상호는 吳世勳보다 한 學年 위였지만 몸이 좋지 않아 한해 學校를 쉰 뒤 3學年으로 復學했다. 手術 後遺症으로 學校를 자주 빠지던 송상호의 宿題를 위해 그의 집을 자주 들르면서 송상호의 女同生인 송현옥 과 만났다. 그 뒤 송현옥과 같은 大學 커플로 이어지고 後에 結婚하게 된다. 1979年에 高等學校 卒業 後 高麗大學校 英文學科에 志願했으나 落榜하고 韓國外國語大學校 法定學部에 入學하였으며, 그 後 高麗大學校 法대로 編入하였다. [8]

辯護士, 放送人 活動 [ 編輯 ]

1984年 第26回 司法試驗 에 合格하여 司法硏修院 에 16期로 入所하였다. 卒業試驗 途中 點心으로 먹은 콩비지가 頉을 일으켜 病院으로 後送되었고, 該當 試驗은 缺試處理되었다. 이로 인해 서울中央地檢에서 檢査時報로 硏修 中에 司法硏修院에서 留級 決定이 내려져 17期로 修了하였다. [9] 1987年 吳世勳은 司法硏修院生 身分으로, 强姦致傷 嫌疑로 裁判中인 被告人을 無料辯論하게 된다. 李 刑事裁判에서 檢察의 起訴에 對해 無罪를 받아내었다. 吳世勳은 이 事件의 辯論要旨書를 간직하고 後날 放送에서 '내 人生의 沙果나무'라며 紹介했다.

1988年 陸軍 에 入隊하여 保安司令部(現 軍事安保支援司令部 ) 情報處(2處) 公報政訓將校로 服務했고, 中尉로 滿期 轉役했다. 高麗大學校 大學院에서 商法을 專攻하여 1990年 法學 碩士 學位를 받았다.

大韓民國 最初의 日照權 侵害 被害補償 判決 [ 編輯 ]

1991年 辯護士 를 開業했고, 얼마 되지 않아 仁川 산곡동 慶南아파트 住民集團訴訟 事件을 受任하였다. 建設社가 아파트의 間隔을 基準보다 가깝게 지어 햇볕이 들지 않아 正常的 生活이 不可能한 狀況이 發生하였다. 建設社와 補償 協議를 試圖했으나 決裂되었고, 區廳에도 要請했으나 所用이 없었다. 이에 住民들은 서울남부지법에 共同으로 民事訴訟을 提起하게 된다. 當時 憲法35條에 明示된 環境權은 그저 弔問일 뿐 刑事·民事上 判例는 全無하였다. 이에 오세훈 辯護士는 같은 大陸法系 國家인 옆나라 日本의 建築基本法과 判例를 硏究해 辯論資料로 使用하였고, 한국감정원의 感情囑託依賴, 그리고 서울대 建築工學科 김광우 敎授를 鑑定人으로 選任하여 科學的인 被害補償額을 算定하였다. 結局 2年 6個月에 걸친 法廷싸움 끝에 1審에서 裁判部는 住民들의 손을 들어 주고 建設社가 住民들에게 總 13億원을 賠償하라는 判決을 내렸다. [10] [11] 이에 建設社는 代表辯護士로 오성환 前 大法官을 授任하여 서울 高等法院에 抗訴하였으나, 2年 後 서울高等法院 抗訴審에서도 住民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12] 이는 憲法 條文上으로만 存在했던 環境權이 實質的 權利로 認定받은 大韓民國 最初의 事件이었고, 法院은 具體的인 日照權 侵害의 基準을 마련하게 되었다. 當時 建築法施行令 第86條 第2號 (나) 목에 依하면 連續하여 一助를 確保하는 基準을 建築條例에 委任한다고 되어 있었지만, 當時 地方自治團體에는 關聯 條例가 全無하였다. 그리하여 日照權을 侵害받아도 行政機關으로부터 '法的 瑕疵가 없다'고 反問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이 判決을 契機로 '同志일을 基準으로 9時부터 15時까지 6時間동안 日照時間이 2時間 以上 連續으로 確保되어야 한다'는 具體的인 基準이 마련됨에 따라 被害補償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러한 經驗을 바탕으로 韓國土地公法學會 學術저널에 '日照權에 對한 司法的 檢討'라는 題目의 學術論文을 揭載하였다. 本格的으로 吳世勳은 環境 辯護士로 이름을 알리기 始作했다. 1997年 서울市 구로구 再建築現場에서 高層 아파트에 가려 周邊 單獨住宅 居住者들의 日照權이 침해당한 事件이 發生하였을 때도 1審에선 이미 敗訴한 狀況에서 오세훈 辯護士는 2審에서 工事中止 判決을 이끌어냈다. [13]

市民運動과 放送界 進出 [ 編輯 ]

日照權 侵害 訴訟을 進行하며 여러 市民團體와 接觸한 것을 契機로 최열 代表와 環境運動聯合의 創立멤버로 參與했고, 1992年 環境運動聯合 市民相談室 室長이 되어 5年間 無料相談을 進行했다. 그와 同時에 서울地方辯護士會에서 始作한 '刑事當直辯護士'로 活動하였고, 1996年에는 刑事當直辯護士 運營委員으로 活動하였다. 1995年 大韓辯護士協會 環境問題硏究委員會 議員을 歷任했고, 1997年 서울市 綠色市民委員會 監査를 맡았다. 1996年부터 2000年까지 環境運動聯合 法律委員會 委員長 兼 常任執行委員을 지냈으며, 民主社會를 위한 辯護士모임에서 環境委員으로 活動하였다. 그는 環境辯護士로서 自然公園法 立法請願 및 議會立法 發議, [14] , 統合選擧法 第87條의 違憲에 關한 憲法訴願, 고리核發電所 放射能 漏出事故 現場 調査 後 責任者 告訴, [15] 상계燒却場 環境影響評價 造作事件 搜査促求, 패스트푸드店 環境實態 調査에 關한 記者會見, 그린벨트 解除案에 對한 憲法訴願(民辯 環境特委) [16] 等으로 活動하였다.

日照權 訴訟에서 새내기 辯護士가 大企業 辯護人團을 相對로 勝訴한 이 事件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 言論 媒體에 報道되면서 話題가 되었다. 그러던 中 MBC뉴스 孫石熙 아나운서와 인터뷰한 것을 지켜본 放送局 關係者가 吳世勳에게 放送出演을 勸誘하면서 오세훈 辯護士는 배금자 辯護士와 함께 MBC 에서 放映한 《 吳辯護士 배辯護士 》의 進行者가 되었다. [17] 韓國 服裝技術經營協會에서 發表한 洋服이 第一 잘 어울리는 베스트 드레서10에 選定되었고, [18] 씨네2000에서 未婚 女性을 對象으로 設問調査한 '가장 사귀고 싶은 有婦男' 1位에 選定되기도 하였다. [19] 프로그램의 人氣와 더불어, 放送 內容을 隨筆로 엮은 著書 《가끔은 辯護士도 울고 싶다》는 書店 綜合 베스트셀러에 TOP 10에 進入하였다. 吳世勳은 男性 正裝브랜드 '로가디스'의 招待 TV CF모델로도 活動했고, [20] 生命保險協會 TV CF모델로도 活動했다. [21] 1996年 동아일보의 結婚하고 싶은 男性(上) 設問調査에서 俳優 이병헌을 제치고 6位로 調査됐다.

1996年 5月에는 시사저널 編輯諮問委員에 委囑된 뒤, 10月부터 1年間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의 進行을 맡았다. [22] 이 期間 中 利權團體들로부터 懷柔와 脅迫을 받았지만 屈服하지 않고 放送을 進行했다. 이 外에도 《甲論乙駁 東西南北》, 《오늘과 來日》, 《뉴스 따라잡기》 等의 TV 프로그램을 進行하였다. [23]

1996年부터 1997年까지 경원대學校에서 民事訴訟法 講師로 在職하였고, 1997年 9月부터 1998年 2月까지 淑明女子大學校 法學科에서 民事訴訟法의 兼任 敎授로 일했다. 1998年 美國 예일 大學校 (Yale University) Law School에서 Visiting Scholar로 在職 後 1999年 고려대학교 大學院에서 民事訴訟法으로 法學 博士 學位를 받았다. 1999年 李長鎬, 金綺秀와 함께 合同法律事務所를 開業했다. 1999年 3月 다시 淑明女子大學校 法學科 民事訴訟法 兼任敎授로 委囑되었다. 太和基督敎社會福祉館(매맞는 女性의 쉼터)에서 公益辯護士로서 無料法律相談을 하기도 했으며, 2000年부터 다시 環境運動聯合 法律委員長 兼 常任執行委員으로 活動하였다.

第16代 國會議員 [ 編輯 ]

한나라당에서 最初에 서울 送波甲 地域으로 고승덕 辯護士와 함께 擧論되었으나, 結局 서울 江南乙 公薦을 받았다. 選擧期間 中 與黨이나 相對 候補에 對한 誹謗을 自制하는 代身 本人의 長點을 어필하는 포지티브(Positive) 選擧와 低費用 選擧를 위해 努力하였다. [24] 第16代 國會議員 에 當選되어 國會 環境勞動委員會 所屬으로 活動하였고, 國會 運營委員會(兼職) 및 國會豫算決算特別委員會(常設)에서도 活動하였다.

當選되고 얼마 後 美 國務部 招請(International Visitor)으로 元喜龍, 이종걸 議員 等과 함께 美國을 訪問하여 美國 政官界 人士들과의 會談과 함께 美國 共和黨, 民主黨 全黨大會 見學 等을 마치고 돌아왔다. [25]

2000年 7月 3日 後援會 行事에서 環勞委 傘下 被監機關 關聯認들이 參席하여 200萬 원의 後援金을 내자, '被監機關이 後援金을 내는 것이 慣行이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며 "被監機關의 돈은 結局 國民稅金인데 받지 않는 것이 原則 아닌가" 하고 反問했다.' 그 後 오세훈 議員은 200萬 원의 돈封套를 다시 被監機關에 돌려주었다. [26]

2000年 實施된 첫 環勞委 國政監査에서 地下生活 空氣質 問題에 關하여 全國的인 調査가 必要하다고 主張하였다. 이를 위해 直接 汝矣島의 한 建物 地下駐車場에 潛入하여 汚染測定器를 몰래 設置하려다 發覺되었다. 該當 建物은 駐車要員을 3倍로 增員하여 監視했지만 오세훈 議員은 며칠 後 다시 潛入하여 設置에 成功한 後 資料를 獲得하였고 이로 인해 한 新聞에서 '國監스타'로 言及되기도 하였다. [27]

勞動과 環境分野 懸案을 다룬 政策集을 發刊하는 等 [28] 誠實性을 인정받아 4年 連續 市民團體에서 選定하는 國政監査 優秀議員으로 選定되었다. 2003年 某 市民團體의 '16代 國會 議政活動 評價'에서 오세훈 議員은 立法活動分野 優秀議員으로 選定되어 새千年 政治印象을 受賞하였다. [29] 또한 2004年 문화일보의 第16代 議政活動 評價에서 4個部門(政策審議力, 代案提示力, 誠實性, 公正性)에서 모두 10위안에 屬한 것으로 調査되었다. [30] 經營者總聯合會에서는 '勞動界 要求를 一方的으로 受容한 議員'을 選定하여 發表하였는데 그 中 오세훈 議員도 共同 2位로 包含되었다. [31]

國會에서 活動함과 同時에 2001年 國立발레團 運營諮問委員長에 委囑되었고 발레 '海賊', '호두까기 人形' 等의 作品의 解說을 擔當하기도 하였다. [32] 또한 韓國기네스協會는 오세훈 議員을 기네스 政治分野 審議委員으로 選定하였고 오세훈 議員은 이를 受諾해 韓國기네스 政治審議委員으로 活動하였다. [33]

2002年 第一國際法律事務所 및 金長利 法律事務所 에서 辯護士로 勤務했다. 2002年에는 化粧品會社 로레알의 香水 모델로 共同出演했는데, 다같이 모델料로 받은 千萬원을 아름다운재단에 公益寄附하기도 하였다. [34] 2003年 2月 環境財團 136포럼 運營委員에 委囑되었고, 2003年 第20回 코리아 베스트드레서 政治人部門을 受賞하였다.

한나라당 副代辯人을 지내며, 不正選擧眞相特委, 氣候變化對策特委, 亂開發對策特委, 南北關係對策特委, 人事聽聞會法制定特委에서 活動하였다. 南景弼, 鄭柄國, 元喜龍 等의 少壯派 議員들과 '未來를 위한 靑年連帶'(未來連帶)에서 活動하며 2001年에는 共同代表를 歷任하였다. 2001年과 2002年에는 失業對策特委, 豫算決算特委 等에서 活動하였다. 2003年에는 한나라당 院內副總務로 活動하였으며 靑年委員會 委員長, 한나라당 最高委員, 運營委員會 常任運營委員을 兼任하였다. 또한 黨內 '政治改革 및 黨 刷新을 위한 모임' 幹事를 맡았으며, 2004年에는 한나라당 政治改革特委 幹事로 活動하였다.

第17代 大選 6個月 前인 2002年에 오세훈 議員은 政黨의 '帝王的 總裁第' 廢止를 主張했다. [35] 2003年 9月 4日 한나라당이 守舊的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5·6共 勢力의 退陣을 要求했다. [36]

9月 5日 吳世勳은 地區黨 委員長職에서 辭退하겠다고 發表하며 黨內 少壯派 議員들과 함께 오픈 프라이머리를 前提로 한 上向式 公薦과 公薦審査위에 外部人士를 多數 참여시킬 것을 主張했다. [37] 또한 돈 問題로 檢察에 召喚된 임진출,박주천 議員과 關聯하여, 오세훈 議員은 非理 嫌疑를 庇護하는 듯한 印象을 주어서는 안된다며, '政治人들이 理由를 밝히지 않아서 안나간다는 것은 心情的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38]

2003年 10月에는 安風 事件 으로 인해 論難이 일자 "黨에 流入된 100億 원의 追徵 이야기가 나오기 前에 天安硏修院과 中央黨을 賣却해 스스로 갚자"고 主張했다. [39] 5·6共 勇退論을 主張하며 自身도 함께 물러나겠다고 宣言했던 吳世勳은 2004年 1月 6日 "政治改革과 한나라당의 公薦革命에 밑거름"李 되려한다며 17代 總選 不出馬를 宣言한다. [40] 성실한 議政活動과 改革的 이미지, 그리고 大衆的인 認知度와 함께 한나라당의 代表 텃밭인 江南區 乙의 17代 議員 當選은 旣定事實化였다. 그러나 오세훈 議員의 懺悔錄 發表와 [41] 함께 自進 不出馬 宣言을 敢行한 모습에 國民들은 新鮮한 衝擊을 느꼈고, 이에 한나라당의 不出馬 宣言이 急물살을 타게 되었다. [42]

17代 總選 不出馬를 宣言한 後 企業의 政治資金 後援 禁止 等을 骨子로 하는 政治資金法 , 一名 '吳世勳法'을 主導해 通過시켰다. [43]

2004年 3月 9日 議員總會에서 한나라黨 民主黨 과 함께 盧武鉉 大統領의 彈劾 訴追를 發議하였을 때 吳世勳은 少壯派 議員들과 함께 이에 反對하여 署名하지 않았으나, 3月 12日 本會議에서의 票決에 參加했다. [44]

2004年 4月 1日 萬愚節을 맞아 新羅大學校 某 學科에서 評價한 '거짓말 안 하는 政治人'에 吳世勳 한나라당 議員 等을 選定하여 記念牌를 傳達하였다. [45]

吳世勳은 總選 不出馬 宣言 後 2500萬원의 議政活動 殘餘金 中 1500萬원은 環境財團에, 1000萬원은 서울문화財團에 寄附했고, 新聞廣告 收益金 3000萬원을 障礙 兒童과 北韓 어린이들을 위해 社會福祉法人 大韓社會福祉會에 寄託했다. [46]

國會議員 退任 後 [ 編輯 ]

2004年 法務法人 知性 에서 代表辯護士를 歷任했다. 오세훈 辯護士는 中國經濟 專門辯護士로의 計劃을 밝혔다. [47] 그 以後 아파트 管理 프로그램 業體들의 發展을 위한 '韓國 共同住宅 管理協議會'에 顧問辯護士로 推戴되었다. [48] 2004年 장진, 이영재, 송일곤 監督의 映畫 《 1.3.6 》 中 '뫼비우스의 띠'에 特別出演하기도 하였다. 2004年 雪嶽國際트라이애슬론(鐵人 3種) 大會에 參加하여 3時間 25分 14秒에 水營 1.5Km, 사이클 40Km, 마라톤 10Km를 完走하였다. [49] 以後 트라이애슬론 同好會에 加入하여 活動한 後 Tri-A라는 同好會를 創團하여 會長職을 맡을 程度로 熱情的으로 活動하였다. [50] 2005年 統營 國際트라이애슬론 大會에서는 俳優 송일국 , 映畫 《말아톤》의 實際 主人公인 배형진과 팀을 이루어 出戰하였다. [51]

2005年 韓國 女性財團에서 創立한 '未來포럼'에 문국현 유한킴벌리 社長 等과 함께 共同代表로 選出되어 活動하였다. [52] 또한 같은 해에 韓國勞動組合總聯盟 諮問辯護士에 委囑되어 活動하였다. [53] 그리고 大韓社會福祉會 要請으로 因한 '사랑의 寫眞展' 모델料로 받은 3000萬원 全額을 障礙兒와 未婚母를 위해 써달라며 寄託하였다. [54] 2005年 12月에는 '希望遠征隊' 2期 遠征隊員으로, 엄홍길 遠征隊長 및 歌手 안치환 等과 함께 障礙人의 멘討價 되어 함께 킬리만자로 登攀에 나섰다. [55]

國立발레團의 著名人士 招請 발레公演에 招請되어 練習 後 實際 舞臺에 出演하였다. [56] 現代舞踊家 최정자 敎授와 共同으로 舞踊文化포럼을 創立하고 共同代表를 歷任하였다. 釜山 大宇 월드마크 分讓 過程에서 法曹타운이라는 該當 地域의 特性을 考慮하여 吳世勳을 아파트 廣告모델로 起用하였다. [57] 그리고 國會議員 時節 '吳世勳法' 을 통과시키며 얻은 깨끗한 政治 이미지로 靑湖나이스 아이스콤보의 TV廣告를 撮影하였고 '속 보이는 얼음처럼 世上도 透明하게'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58]

2005年 6月 輿論調査 結果 吳世勳은 서울市長 選好 候補 1位로 調査되었다. [59] 11月 2日 吳世勳은 每日經濟와의 인터뷰에서 "最近 出馬하지 않는 쪽으로 기울었다"고 말했다. [60] 그 以後 한나라당에서는 맹형규 , 洪準杓 , 朴振 等의 人事가 繼續 擧論되었으나, 2006年 4月 5日 강금실 前 法務部 長官이 서울市長 選擧 出馬를 宣言하자 狀況이 反轉되었다. 강금실 前 長官이 輿論調査 結果 1位로 나타나자, 한나라당 少壯派들은 積極的으로 吳世勳의 迎入을 主張했다. [61] 結局 2006年 4月 9日 競選 參與를 宣言하고, 4月 25日 輿論調査에서 65.05%의 支持率을 얻으며 總 41%의 得票로 한나라당의 서울市長 候補가 됐다. [62]

2006年 5月 2日 강금실 열린우리당 서울市長 候補로 公薦된 直後 나온 輿論調査에 따르면 吳世勳은 支持率에서 20%p以上 강금실 을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63] 20代 年齡層 支持率에서도 吳世勳은 강금실 을 앞섰다. [63]

오세훈 候補는 世運商街와 東大門 運動場 撤去, 江北 中心의 뉴타운 50곳 建設 等 江北 開發과 輕油버스를 天然가스 버스로 交替하고 오래된 貨物車를 廢棄 誘導한다는 大氣質 改善 公約을 내걸었다. [64] 한便, 오세훈이 辯護士 時節 찍었던 淨水器 CF가 選擧日 90日 前부터 本人이 登場하는 動映像, 寫眞 廣告를 禁止한 選擧法을 違反했다는 理由로 告訴되기도 했다. [65] 5月 21日 오세훈 候補의 遊說를 돕던 朴槿惠 代表가 新村 현대백화점 앞에서 지충호 에게 文具用 칼로 襲擊당했다. [66] 以後 支持率 隔差는 더 벌어지면서 [67] 第4回 地方 選擧에서 吳世勳은 2,409,760票(61.05%)를 得票하며 1,077,890票(27.31%)를 얻은 강금실 을 제치고 서울市長에 當選되었다.

서울市長 4期 [ 編輯 ]

民選 4期 서울市의 비전은 “맑고 魅力 있는 世界都市 서울”이다. 吳世勳 서울市長은 2006年 6月 1日에 최열 環境財團 代表와 제타룡 前 都市鐵道公社 社長을 共同引受委員長으로 發表하면서 本格的으로 서울特別市葬으로서의 職務를 遂行하기 始作했다.

創意 市政 [ 編輯 ]

2006年 7月 서울市 公務員이 業務遂行 中 創意的인 提案을 提出할 수 있는 ' 想像뱅크 '를 開設하였다. 또한 '사이버政策討論房' 活性化로 因해 2008年 UN 公共行政上 優秀賞을 受賞하였다. 이를 발전시켜 一般市民의 意見을 收斂하여 行政 아이디어 및 政策으로 變換하는 市民 政策 提案 窓口인 ' 千萬想像 오아시스 '도 開設하였다. 千萬想像 오아시스 는 또다시 2009年 UN公共行政上 優秀賞을 受賞하였다.

2007年 4月부터 勤務態度가 不良하거나 業務能力이 顯著히 떨어지는 職員을 單純 現場業務에 投入하는 '現場市政推進團'을 推進했다. [68] 公務員들의 反撥이 甚했으나, 서울市 人材開發院을 통한 敎育을 통해 退出公務員을 2007年 102名에서 2010年 24名으로 줄이면서 不良 公務員을 是正했다. 더불어 '常時評價시스템' '成果포인트制' 等 創意的 人事管理 시스템을 構築하여 公共機關 最初로 ISO 9001 國際認證을 받았다.

2009年에는 直接 案內員이 돌아다니며 觀光客의 便宜를 돕는 '움직이는 觀光案內所'를 鳴動과 南大門에 設置하였고, [69] 以後 光化門廣場으로 擴大하였다. 2007年부터 2009年까지 서울市 行政서비스 滿足度는 3年連續 最高値를 更新하였다. [70]

디자인 서울과 都市競爭力 提高 [ 編輯 ]

吳世勳 市場은 “都市가 國家 競爭力을 牽引하는 21世紀에는 서울의 競爭力이 곧 大韓民國의 競爭力”이고, “서울은 이제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 中心의 都市로 거듭나야 한다”고 主張했다. 그 延長線上에서 文化와 디자인을 源泉으로 都市의 附加價値와 競爭力을 높여나가는 文化都市, 디자인都市 戰略, 이른바 ‘컬쳐노믹스’와 ‘디자인노믹스’를 推進하였다.

디자인 서울 은 創意的인 디자인을 통해 都市 브랜드 價値를 높이자는 趣旨에서 推進된 事業이다. [71] 세빛섬 , 東大門 디자인 플라자 等이 디자인 서울 의 一環으로 推進되었다. 2006年부터는 漢江 르네상스 프로젝트 를 始作하여 漢江公園 周邊을 整備하였다. 서울特別市가 '2010 世界디자인首都'로 指定된 것을 契機로 2008年부터는 ' 서울 디자인 올림픽 '을 開催하였다. 2010年 유네스코(UNESCO)로부터 世界 디자인 創意都市로 指定되었다. [72]

中國 社會科學院이 每年 發表하는 世界 主要都市 競爭力 順位에서 2006年 27位였던 서울市가 2010年 9位로 올랐고, [73] 英國系 컨설팅그룹 Z/Yen이 每年 3月과 9月 發表하는 國際金融센터指數(GFCI) 調査에서 서울市의 國際金融 競爭力은 2007年 43位에서 2011年 11位로 上昇했다. [74] 國際協會聯合(UIA)이 發表한 컨벤션 順位에서 서울은 2006年 世界 11位에 不過했으나, 2010年과 2011年에는 5大 都市에 選定되었다.

江南北 隔差 解消 및 均衡 發展 [ 編輯 ]

吳世勳 市長은 財政隔差가 地自體 稅收의 相當 部分을 차지하는 財産稅의 差異에서 起因한다는 點에 注目하여 2008年부터 財産稅의 50%를 特別市稅로 徵收하여 25個 自治區에 均等 配分하는 '財産稅 共同課稅 制度'를 導入하였다. 그 結果, 最大 16.6倍에 이르던 江南北 財産稅 歲入 隔差가 4.7倍로 크게 줄었다. [75] 또한 調整交付金 制度도 大幅 손질하여 가난한 自治區에 더 많은 交付金이 支援될 수 있도록 措置했다. [76]

地方自治團體 最初 特別 訓令 發表 [ 編輯 ]

2008年 서브프라임 모기지 事態로 인한 美國發 金融危機가 全世界를 强打했다. 이에 吳世勳 市長은 2009年 1月 '經濟살리기 및 일자리 創出을 위한 서울市長 特別訓令' 을 發表했다. 이는 16個 地方自治團體 中 最初로 施行되었고, 中小企業 支援 擴大, 일자리 創出 擴大, 公共事業 早期執行 等을 骨子로 總 14個의 政策을 年末까지 施行하였다. [77]

福祉 政策과 120 茶山콜센터 導入 [ 編輯 ]

希望드림 프로젝트 는 低所得層의 自立을 돕는 政策이다. 2007年부터 貯蓄金額만큼을 서울市가 追加로 積立해주는 '希望플러스 通帳'을 運營했다. 低所得層의 목돈마련을 支援하는 '希望플러스 通帳'은 UN 公共行政上 優秀賞을 受賞했다. [78]

2007年 9月에는 서울市와 關聯된 民願을 電話로 解決해 주는 茶山 콜 센터 의 運營을 開始하였다. 自治區가 個別的으로 運營하던 民願시스템과 機關別 ARS番號를 局番없이 120 하나의 番號로 統合하였다. 茶山 콜 센터는 2009年 韓國標準協會로부터 서비스分野 KS標準 對象1號로 指定되었고, 2009年 韓國經濟 主管 顧客感動經營大賞을 受賞하였다. [79]

吳世勳 市長은 學校暴力과 私敎育費 負擔, 學習準備物이 없는 '3無(無) 學校 만들기'에 功을 들여 1102名의 學校 保安官을 國公立 初等學校 551個校에 2名씩 配置하고 市敎育廳과 豫算을 分擔해 學習準備物을 學校에서 代身 準備했다. 서울型어린이집에 豫算을 支援해 民間어린이집 保育料를 國公立어린이집 水準으로 내리고 施設을 改善했으며 所得下位 70% 家口의 嬰幼兒 保育料度 全額 支援했다. [80]

2009年 1月 28日에는 專門相談社가 階層別 專門相談과 就業斡旋 및 創業相談을 進行하는 일자리 플러스 센터 를 設立하였다.

2009年 5月 4日부터 일정한 基準과 條件을 갖춘 어린이집을 서울市長이 公認해 保育料와 保育敎師의 人件費를 國公立 水準으로 낮추고 市價 差額을 支援하는 '서울型 어린이집'을 出帆하였다. [81]

虞犯地帶 CCTV 擴充, 母乳授乳房 擴充, 經歷斷絶女性 就業支援 等 旅行 프로젝트 (女性이 幸福한 서울 프로젝트)로 2010年 UN公共行政上 大賞을 受賞하였다.

長期 傳貰 住宅 시프트 導入과 住宅 政策 [ 編輯 ]

吳世勳 市長은 어릴적 집이 없어 初等學校를 4番이나 바꾸었던 逸話를 紹介하며 住宅政策에 關心을 기울였다. 住宅아파트 分讓原價 公開와 後分讓制 施行, 長期傳貰住宅 시프트 , 휴먼타운과 公共管理者制度 等을 導入하였다.

2006年 은평뉴타운 의 高分讓價가 論難이 되자 吳世勳 市長은 서울市가 建設하는 모든 아파트에 對해 建設 工程이 80% 以上 進行된 以後에 分讓하는 ‘아파트 後分讓制’를 導入하였다. 2007年 新年辭를 통해 “서울市 SH公社가 供給하는 아파트의 50餘 個에 達하는 項目의 分讓原價를 詳細히 公開하고 自治區 分讓承認에 對해서도 새로운 基準을 만들어 分讓價格을 判斷할 根據를 마련하겠다”며 透明한 分讓原價 公開를 闡明했다. 이는 參與政府의 不動産政策 混線과 不動産價格 暴騰 現象에 克明히 對比되어 注目받았고, 이에 經濟正義實踐市民聯合 김헌동 아파트값 거품빼기 運動本部長은 '노무현 大統領보다 吳世勳 市場이 훨씬 월등한 政策을 쓰고 있다'라고 論評하였다. [82]

2007年 中産層과 實需要 無住宅者를 對象으로 傳貰 市勢 80% 以下의 價格에 最長 20年까지 賃貸하는 長期傳貰住宅 ' 시프트 (SHift)'를 推進하였다. [83] 이는 난지공원 復元, 淸溪川 整備와 더불어 都市住居政策의 模範事例로 認定되어 UN-Habitat 特別賞을 受賞하였다.

2010年부터 再開發?再建築 事業의 透明性 確保를 위해 ‘公共管理者制度’와 ‘클린업 시스템’을 導入하였다. 工事費 節減, 事業期間 短縮, 透明性 確保가 容易해져 非理가 줄고 分讓原價가 크게 낮아지는 等 肯定的 效果를 불러왔다. 그 밖에 低所得層으로서 賃貸住宅을 供給받지 못한 待機者와 地下住宅 居住者 等에게도 賃貸料 補助를 支援해주는 ‘住宅바우처’를 擴大하였고, 住居自立을 위해 주춧돌通帳 加入者에게 別途의 加算利子를 支給해주는 ‘주춧돌 프로그램’을 導入하였으며, 低所得層 家口의 住居環境을 업그레이드해 주는 ‘서울型 집修理事業’의 受惠對象度 次上位, 차차上位, 多文化 家庭 等으로 擴大하였다.

親環境 都市와 大氣質 改善 및 綠地 擴充 [ 編輯 ]

吳世勳 市長은 '溫室가스 解決 없이는 未來都市 發展도 없다'며 서울市가 溫室가스를 비롯한 環境問題를 先導的으로 解決해야 한다고 公言하였다. 2006年 C40그룹에 加入하였고, 第3回 C40頂上會議를 서울에서 開催하였다. [84] 吳世勳 市長은 클린턴재단과 氣候變化 이니셔티브, 氣候肯定 開發事業 共同 推進에 關한 MOU를 締結하였고, 클린턴재단에서 推進하는 世界 炭素中立都市 16個 中 하나로 서울 마곡地球를 選定하는 MOU를 締結하였다. [85] 吳世勳 市長은 에코마일리지 導入과 함께 貯炭所 金融商品 開發, 汚染低減裝置를 設置한 親環境 建築物에 地方稅·取得稅 減免 等의 인센티브 導入으로 親環境都市 서울을 만들고자 하였다.

吳世勳은 서울의 深刻한 大氣汚染을 改善하겠다고 밝히며, 大氣汚染과 平均壽命과의 相關關係를 바탕으로 '서울市民 여러분, 잃어버린 3年을 돌려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지난 16代 國會에서 吳世勳 市長은 環境勞動委員會 議員으로서 '首都圈 大氣環境 改善에 關한 특별법'을 代表發議하였는데, 이 法의 施行日이 偶然히도 吳世勳 市長의 就任日 直後였다. 이로 인해 이 公約은 一瀉千里로 進行되었다.

任期 中 市內버스와 마을버스 大部分을 天然가스(CNG) 車輛으로 交替하고, 大衆交通 整備로 인하여 大衆交通 利用을 誘導하였다. 또한 새벽 道路 물淸掃 實施 擴大, 中大型 輕油車에 煤煙低減裝置를 附着하는 等 大氣質 改善을 爲한 努力했다. 그 結果 空氣 中 微細먼지 濃度가 2006年 60㎍/m 3 에서 2010年 49㎍/m 3 로 떨어져 1995年 觀測 以來 가장 낮았다. [80]

“綠地 100萬 坪을 追加 造成하겠다”고 公約한 吳世勳 市場은 ‘그린디자인’을 强調했다. 都心 곳곳의 자투리 綠地 空間을 發掘해 旣存 公園과 連結했고 屋上公園과 都市構造物 壁面錄畫, 街路邊 綠地 擴充 等을 통해 在任期間 中 423萬m 2 의 綠地空間을 새로 造成하였다. 서울 西南圈과 東北圈 一帶에 ‘서서울湖水公園’과 ‘北서울 꿈의 숲’, ‘서울窓抱冤’ 等 綠地公園을 造成했고, 漢江邊에서는 시멘트를 걷어낸 뒤 綠地 生態空間으로 만들었다. 城郭을 따라가며 歷史遺跡들을 함께 볼 수 있는 서울城郭길(21km)과 自然生態?文化體驗을 할 수 있는 外事山길(157km)을 連結하는 總 延長 178km의 서울둘레길과 ‘無障礙 숲길(자락길)’을 造成하기도 했다. 어린이大公園을 리모델링한 後 無料 開放하고, 中浪캠핑숲, 暖地漢江公園, 노을公園, 서울大公園, 푸른樹木園 等에 캠핑場을 造成하여 市民들에게 開放하기도 했다.

서울市 歷史上 最初 淸廉度 1位와 組織 改編 [ 編輯 ]

吳世勳 市場은 ‘競爭이 競爭力’이라는 모토 아래 ‘新人事시스템’을 통해 청렴하고 能力 있는 사람은 年次에 相關없이 승진시키는 反面, 腐敗·無能公務員에 對해서는 ‘3%退出制’로 알려져 있는 ‘現場市政支援團’을 통해 再敎育시킴으로써 組織의 緊張을 높이고 內部 紀綱을 確立하는 데 注力했다. 한番의 公金橫領이나 金品·饗應收受만으로도 公職에서 完全 退出되는 ‘원스트라아크 아웃制’를 全國 最初로 實施하는 한便, 이를 自治區와 投資出捐機關은 勿論 補助金 支援施設에까지 擴大 適用하였다. 公職者 非理에 對한 市民과 內部 告發을 活性化하기 위하여 監査官 핫라인 및 클린申告센터를 設置 運營하고, 人事 請託, 利權 介入 等 非代價性 非理 根絶을 위한 高强度 對策을 마련하는 等 淸廉施策도 推進하였다. 그 結果 廣域自治團體에 對한 國民權益委員會의 淸廉度 評價에서 2006年 15位였던 成績이 2008과 2010年에는 1位를 차지하는 成果를 올렸다. [86]

또한 國民權益委員會가 實施하는 '腐敗防止施策 評價'에서 서울市는 市, 道 가운데 唯一하게 最上位인 '매우 優秀' 等級을 받았고, 2008年과 2009年 連續으로 最上位 評價를 받아 2年 連續 1位를 차지하였다. [87]

2010年까지 公務員 定員을 1,300名 줄이고 器具 統廢合을 통해 서울市 組織에 對한 構造調整을 實施했다. 서울市內 518個 洞事務所 中 120餘個를 廢止하는 統廢合 作業을 推進하고, 統廢合으로 確保된 遊休 空間은 公共保育施設, 公共圖書館으로 轉換하였다.

首都圈 大衆交通 統合料金 및 換乘第 實施 [ 編輯 ]

2004年 李明博 前 서울市長의 大衆交通 政策으로 서울市民은 大衆交通 換乘視 無料나 割引된 料金을 適用받게 되었다. 그러나 서울에서 隣近 京畿道로 出退勤을 하는 사람들은 交通制度의 差異 때문에 이러한 惠澤을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 隣近 首都圈으로 通勤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大衆交通 換乘시스템을 서울 隣近 首都圈地域 大衆交通과 서울市 大衆交通에도 椄木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으나 大衆交通 換乘 損失金을 京畿道 및 서울市에서 서로 負擔해야 한다는 點이 걸림돌로 作用하였다. 吳世勳 市長은 大衆交通 利用으로 인한 서울市內 交通混雜 緩和 效果 및 大衆交通 利用 增加로 인한 環境改善 效果는 未來를 豫測하며 巨視的으로 봐야 한다고 主張하였으며, 2007年 1次的으로 버스와 地下鐵에 統合換乘制를 實施하였고, 2008年 2次的으로 廣域버스까지 擴大하였다. [88]

WCIT 最優秀賞 受賞과 世界 都市 電子 政府 協議體 出帆 [ 編輯 ]

서울市는 行政의 迅速性 및 便宜性, 그리고 情報公開를 통한 行政의 透明性을 强調하기 위해 電子政府 事業을 持續的으로 推進하였다. 吳世勳 市場 亦是 '소프트파워 强化'를 내세우며 電子政府 振興을 力點 事業으로 推進하였다. 그 結果 2003年부터 始作된 '世界 100大都市 電子政府 評價'에서 서울市는 4回 連續 1位를 거머쥐었고, 2008年 서울에서 열린 電子政府 포럼에서 '서울 IT宣言'을 發題하고 採擇하였다. 2010年에는 WITSA(世界 情報技術 서비스聯盟)에서 2年에 한番씩 主管하는 WCIT(世界 情報技術 올림픽)에서 서울 모바일포털로 地方自治團體로는 國內 最初로 Excellence Award를 受賞하였다. [89] 같은해 吳世勳 서울市長은 '世界都市 電子政府 協議體(WeGO)'를 設立하여 初代 議長으로서 活動하였다. [90]

서울市長 5期 [ 編輯 ]

2010年 한나라黨 黨內競選에서 羅卿瑗 , 김충환 等의 競爭者를 물리치고, 民選 5期 地方選擧 에서 서울市長 再選에 挑戰했다. [91] 6月 2日에 치뤄진 地方選擧에서 開票 初盤에 韓明淑 候補에게 뒤지다가, 後半 江南 3具의 開票가 始作되면서 逆轉하여 民選 5期 第34代 서울特別市葬으로 再選되었다. [92] [93] 具體的으로 江南區 (+59,206, +25.68%), 瑞草區 (+43,820, +23.66%), 松坡區 (+23,814, +8.19%), 江東區 (+11,097, +5.33%), 龍山區 (+8,579, +8.24%), 陽川區 (+1,078, +0.51%), 永登浦區 (+1,017, +0.57%), 中區 (+238, +0.39%) 等에서 오세훈 候補가 韓明淑 候補에게 앞섰다.

2010年 地方選擧 에서 吳世勳은 韓明淑 에 가까스로 勝利했지만 市議員은 79席을 얻은 민주당에 비해 한나라당은 27席을 얻는데 그쳐 與小野大 構圖를 이루었다. 이에 따라 吳世勳의 市政 運營은 蹉跌을 빚을 것이라는 展望이 나왔다. [94] 2期 任期가 始作된 以後 민주당 所屬 40名의 서울市議員들에게 設問을 한 結果 50%가 '吳世勳 市長은 잘한 것이 없다'고 答辯하였고, 市政 運營 中에 가장 먼저 바꾸어야 할 問題로 '서울廣場 運營 方式'을 꼽았으며 實際로 서울市議會 는 이 部分을 가장 먼저 變更했다. [95] 吳世勳의 議會 出席率은 全國 地自體長 平均 出席率 84.84%보다 3倍假量 낮은 29.72%를 記錄했다. 條例案 處理率도 46.46%로 廣域地自體 平均 89.43%보다도 2倍假量 낮았다. [96]

民選5期 서울市의 비전은 “市民이 幸福한 서울, 世界가 사랑하는 서울”이다.

꼬마버스 타요 [ 編輯 ]

서울市는 2007年부터 大衆交通 브랜드 弘報 및 어린이 交通安全 强化를 위한 애니메이션을 構想했다. (週)아이코닉스, EBS와 3字 파트너쉽을 맺고 開發에 着手하여 2010年 EBS를 통해 《 꼬마버스 타요 》가 放映되기 始作했다. 꼬마버스 타요 의 캐릭터 番號인 120은 茶山콜센터 番號이고, 02番은 서울 市內電話 地域番號이며, 1000番은 서울의 千萬 市民을 意味한다. 國際 漫畫博覽會 出品과 海外에서 프로모션으로 큰 呼應을 얻었다. [97] 2011年 서울市는 어린이들을 對象으로 '타요와 함께하는 어린이 交通安全敎育'을 實施했다. [98] 2014年 實際 打要버스 가 登場했는데, 旋風的인 人氣로 常時 運行 및 路線 擴大가 이루어졌다. [99]

서울 바이오펀드 造成 [ 編輯 ]

吳世勳 市長은 民選 5期 核心 公約으로 GRDP(地域內寵生産) 4萬弗 達成을 내세웠으며, 麻谷地區에 바이오 産業 클러스터를 造成하여 世界 有數의 大學과 企業의 硏究所를 誘致하고, 바이오 벤처 育成을 위한 펀드를 造成하는 計劃을 發表했다. [100] 2011年 吳世勳 市場은 産業通商資源部 및 外國機關과 合作하여 約 700億원 規模의 '서울 글로벌 바이오 펀드'를 造成하였는데, 2015年 投資金을 回收하는 過程에서 429%의 높은 收益率을 記錄하였다. [101]

世界 最初 4年 連續 유엔 公共行政上(UNPSA) 受賞 [ 編輯 ]

2011年 유엔 經濟社會處(UNDESA)는 서울特別市의 '公開稅務法廷'과 '家出危機 10代女性 自立支援' 이 各各 유엔 公共行政上 優秀賞으로 選定되었다고 밝혔다. 2008年 사이버政策討論房(優秀賞), 2009年 阿利水 實時間 水質公開서비스(대상), 千萬想像 오아시스(優秀賞), 2010年 女性이 幸福한 서울 프로젝트(대상), 希望플러스通帳(優秀賞)에 이어 4年 連續으로 受賞하는 世界 最初의 機關으로 이름을 알렸다. 또한 3個年 連續으로 2個 以上의 政策이 受賞하는 新記錄도 達成하였다. [102]

水害 [ 編輯 ]

2011年 7月 서울에 暴雨 가 내려 큰 被害를 입혔는데 吳世勳의 디자인 서울이 原因으로 提起됐다. 빗물을 地下로 보내는 빗물받이가 1m는 돼야 하는데 大部分 40cm이고, 이마저도 管理가 안 돼 汚物이 끼어 惡臭가 나며 디자인에 神經을 쓰다 보니 구멍이 좁아져서 被害를 불렀다는 主張이다. [103] 또한 서울市는 步道블록과 看板에 디자인을 導入한다며 디자인距離와 르네상스距離에 2133億 원을 投入했으나 30곳의 디자인距離 中 26곳은 물 빠짐 機能이 거의 없는 화강板石을 使用한 點도 問題로 指摘됐다. [104] 水害 防止 豫算도 吳世勳의 就任 以來 每年 줄더니 1/10 規模가 됐다는 主張이 나왔다. 이에 서울市는 올해 水害防止 豫算이 3436億으로 2007年에 비해 두 倍 늘었다고 主張했다. 서울市는 民選 1期부터 5期가 始作된 올해까지 風水害 關聯 豫算을 分析한 結果, 特別會計를 包含한 豫算 規模가 每年 持續的으로 增加한 것으로 把握됐다고 反駁했다. 水防關聯 豫算이 一般會計와 特別會計·災難管理基金으로 이뤄져 있는데 이를 다 합친 規模가 아니라 一般會計만 보고 誤解했다는 것이다. 이에 對해 민주당은 "以前까지 水害防止 豫算 項目에 없었던 下水道 特別會計를 이番에 끼워넣었다. 게다가 서울市가 水害防止 豫算에 집어넣은 災難管理基金 項目에 보면 水害防止와 無關한 除雪資材購入·復舊費 等 約 900億원이 包含돼 있어 水害豫算關聯 部分들은 守防豫算으로 보기는 힘들다"고 反駁했다. [105] [106]

無償給食 住民投票 [ 編輯 ]

한나라당 所屬인 吳世勳 서울市長은 疏外 階層을 對象으로 選別的인 無償 給食을 施行 中에 있었으나, 野黨이 多數인 서울市議會 및 곽노현 敎育監은 普遍的 福祉를 위한 全面 無償給食을 主張하였다. 吳世勳 서울市長은 8%에 不過한 無償給食 對象을 30%로 擴大하고, 2014年까지 50%까지 段階的으로 擴大하는 選擇的 福祉를 提示했다. [107] [108] 2011年 1月 6日, 서울市議會는 吳世勳 서울市長과 한나라당의 反對에도 不拘하고 議長 職權으로 午前 0時 30分에 本會議를 열어 민주당 單獨으로 無償給食條例案을 處理하였다. 吳世勳 서울市長은 서울市議會 民主黨 議員들이 單獨으로 處理시킨 無償給食條例案에 對해 恐怖를 拒否함과 同時에 法院에 無效訴訟을 내기로 했고, [109] 서울市議會는 吳世勳 서울市長의 恐怖 拒否에 따라 翌日 市議會 議長 職權으로 公布했다. [110] 이에 對해 吳世勳 서울市長銀無償給食 條例案에 對해 無效 訴訟을 提起했다. [111] 論難이 커지자 吳世勳 서울市長은 無償給食과 關聯한 市民들의 意思를 直接 묻기 위해 住民投票를 서울市議會에 提案하였다. 민주당은 全體 無償給食에 들어가는 費用이 1年에 695億원인데, 住民投票를 爲해 182億을 浪費하는건 無理數라고 主張하였다. [112] 그러나 吳世勳 서울市長은 有權者의 判斷費用일 뿐이며 오히려 全面無償給食에는 最小 4000億이 들고 福祉政策은 한番 施行하면 中斷할 수 없는 不可逆性 等을 考慮하면 費用이 더 늘어난다고 主張했다. 또한 大衆迎合主義 政治를 넘어서야 眞正한 民主主義가 成長할 수 있다며 住民投票의 推進은 充分한 價値가 있다고 反駁했다. [113] 吳世勳 서울市長은 無償給食 住民投票를 사흘 앞두고 失敗할 境遇 辭退하겠다고 말했다. 吳 市長은 記者會見에서 "아무리 險難해도 이番 住民投票를 통해 大韓民國 福祉 方向을 定立하지 않으면 우리 서울의 未來가, 大韓民國의 未來가 이대로 주저앉아 버릴 수도 있다"고 强調했다. [114]

2011年 8月 24日 住民投票 의 最終 投票率은 25.7%로 投票函을 開封할 수 있는 投票率 33.3%에 未達하였다. 吳世勳 서울市長의 下位 50% 支援 政策은 廢棄되고 곽노현 과 서울市敎育廳이 推進하는 全面 無償給食이 施行되었으며 吳世勳 서울市長은 8月 26日 辭退했다.

서울市長 辭退 以後 [ 編輯 ]

2012年 配偶者, 두 딸과 함께 英國 으로 留學을 갔다. 配偶者 송현옥은 世宗大學校 敎授로 安息年을 申請하여 英國으로 간 것이었다. [115] 킹스칼리지 런던(KCL) 의 公共政策大學院에서 硏究院 生活을 하였으며, 그 後 中國 상하이 의 푸단대學校 中級語學過程에 登錄하여 工夫했다.

2013年 歸國 以後 法務法人 大陸亞洲에서 國際業務, 國家契約, 民事訴訟 擔當 顧問辯護士로 일했다. [116] 2013年 한양대학교 公共政策大學院 特任敎授에 任用됐다. [117]

2013年 12月 KOICA 페루 의 中長期諮問團 都市行政分野 募集公告에 支援하여, 6個月間 페루의 리마 市廳에서 都市行政分野 諮問을 擔當하였다. 2014年 6月에 韓國에 歸國하였고, 같은달 KOICA 르완다 中長期諮問團 都市行政分野 募集公告에 支援했으며, 르완다 키갈리 市廳에 派遣되어 中長期諮問團 活動을 遂行하였다. [118]

2015年 1月 歸國한 뒤 大學 特講 等을 進行하였고, 法務法人 大陸아주 의 顧問辯護士로 活動했다. 4月에 치뤄진 再補選 選擧에서 冠岳乙 選擧區에 出馬한 새누리당 吳晨煥 候補의 共同選對委員長을 맡았고, 開票 結果 관악에서 27年만에 새누리당 候補가 當選되었다. [119]

2015年 4月 高麗大學校 技術經營專門大學院 夕座敎授에 任用됐다. [120] 高麗大學校 技術經營大學院의 '未來사이테크 포럼'의 代表를 맡아 未來新技術 關聯 세미나를 開催했다. [121] [122]

2015年 5月 李完九 國務總理가 辭退하자 後任으로 오세훈이 擧論되었고, 朴槿惠 大統領이 '큰일 하실 분에게 國務總理 자리는 맞지 않다'고 言及했다는 所聞이 政治權에 傳해졌다. [123] 이에 吳世勳은 인터뷰에서 擧論만으로도 榮光이라는 立場을 밝혔다. [124] 以後 自身의 블로그에 連載하던 '페루 리마 日記'와 '르완다 키갈리 日記'를 다듬어 《吳世勳, 길을 떠나 다시 배우다》를 出刊하였다. [125]

2016年 第20代 國會議員 選擧 에서 서울 鍾路區 出馬를 宣言하고, 朴振 前 鍾路區 國會議員과 競選에서 競爭하여 公薦되었다. [126] 輿論 調査에서 오세훈이 丁世均을 約 17%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으나 開票 結果 丁世均 이 再選되었다.

20代 總選에서 女同生 오세현(前 KT코퍼레이션 新事業戰略擔當 專務)李 더불어民主黨 比例代表 申請을 했다는 事實이 報道되었다. 서울대학교 컴퓨터工學科 卒業, 함부르크 大學院 博士로 女性 컴퓨터工學道人 오세현은 더불어民主黨의 科學·技術專門家 比例代表를 申請하여 最終 面接까지 進行했지만, 自進撤回함으로써 結局 選拔되지 않았다. [127]

總選 敗北 後 새누리黨이 非常對策委員會 體制로 들어가자, 새누리黨 元裕哲 黨代表 權限代行은 吳世勳에게 革新委員長 자리를 提案했으나 吳世勳은 自肅이 必要하다며 拒絶하였다. [128]

2016年 7月 서울 鍾路區 명륜동에 '共存과 相生을 위한 硏究所'(共生硏究所)를 열었다. [129] 代表的 새누리黨 少壯派이자 區 未來連帶 同志들인 元喜龍 濟州知事, 南景弼 京畿知事와 連帶하며 黨代表 非朴系 候補 單一化에 同參하였다. [130] 2016年 7月 27日 새누리당 代表 候補인 이주영 , 李貞鉉 , 韓善敎 , 金鎔泰 , 鄭柄國 議員이 鍾路 黨員協議會를 찾아 吳世勳을 次期 大權 走者로 추켜세우며 求愛 競爭에 나서기도 했다. [131]

2017年 1月 5日 새누리당을 脫黨하였고, 改革保守新黨에 加入하여 創黨 發起人으로 參與하였다. 1月 9日 바른政黨 倫理TF팀長으로 任命되었고, 政治改革 및 倫理綱領 制定 關聯事項에 對한 全權을 委任받았다. 黨代表 黨員召喚第, 원스트라이크 아웃制, 事務總長職 廢止 等을 實施했다. [132] 2017年 1月 13日 吳世勳은 '새누리당이 私黨化되는 것에 對하여 제대로 목소리조차 내지 못했던 저의 無能과 無責任함을 痛感한다. 國政 運營에서 非正常的인 要素들이 發見될 때에도 제때 指摘하고 바로잡고자 最善의 努力을 다하지 못했던 點을 깊이 反省한다'라고 밝히며 大選 不出馬를 宣言했다. [133]

바른政黨 常任顧問을 지내다가 國民의黨 과의 合黨에 反對하여 2018年 2月 5日 바른政黨을 脫黨하였고, 11月 29日에 自由韓國黨 에 復黨하였다. 2020年 4月 서울 廣津區을 國會議員 候補로 第21代 國會議員選擧 에 出馬하였으나, 더불어民主黨 高旼廷 候補에게 得票率 2.57% 差로 敗北하여 落選하였다.

第38·39代 서울市長 [ 編輯 ]

2021年 서울特別市葬 補闕選擧 黨內 競選에서 羅卿瑗 候補를 제치며 國民의힘 候補로 選出됐고, 3月 23日 輿論調査를 통한 單一化 競選 結果 國民宜當 安哲秀 候補를 누르고 保守 野圈의 單一候補로 選出됐다. 安哲秀 國民의黨 代表와 琴泰燮 前 民主黨 議員이 共同選擧對策委員長을 맡았다. 4月 7日 選擧 結果 得票率 57.5%, 得票數 2,798,788票를 得票하며 39.18%를 得票한 더불어民主黨 朴映宣 候補를 18.32% 隔差로 壓倒하며 제38대 서울市長에 當選되었다. 서울特別市 25個 自治區 모두 오세훈 候補가 勝利했다. [134] 選擧 다음 날인 4月 8日 就任하여 10年만에 서울特別市葬 으로 復歸했다. 2022年 第8回 全國同時地方選擧 에서도 國民의힘 서울特別市葬 候補로 選出되어 59.05% 得票하며 39.23%를 得票한 더불어民主黨 宋永吉 候補를 19.8%포인트 差異로 이기며 最初의 4線 서울特別市葬 으로 當選되었다. [135]

學歷 [ 編輯 ]

名譽 博士 學位 [ 編輯 ]

  • 2008年 카자흐스탄 經濟大學校 名譽經濟學 博士
  • 2009年 몽골國立大學校 名譽法學博士

非學位 修了 [ 編輯 ]

經歷 [ 編輯 ]

  • 1984年: 司法試驗 第26回(司法硏修院 第17期)
  • 1987年: 서울中央地檢 檢査時報
  • 1988年: 保安司令部 (現 國軍防諜司令部 ) 公報政訓將校 服務
  • 1991年: 오세훈 辯護士 事務室 開所
  • 1992年: 環境運動聯合 市民相談室 室長
  • 1994年: MBC 生放送 吳辯護士 배辯護士 -進行
  • 1995年: 大韓辯護士協會 環境問題硏究委員
  • 1996年~2000年 1月: 環境運動聯合 法律委員長 兼 常任執行委員
  • 1996年 5月~2000年 5月: 시사저널 編輯諮問委員
  • 1996年 3月~1997年 2月: 경원대學校 法學科 民事訴訟法 講師
  • 1996年 10月 14日~1997年 9月 29日: 그것이 알고 싶다 - 進行者
  • 1997年~2004年: 民主社會를 위한 辯護士 모임(民辯) 環境委員
  • 1997年 9月~1998年 2月: 淑明女子大學校 法科大學 兼任敎授
  • 1998年 1月~1998年 12月: 美國 例일(Yale)대학교 Law school 交換敎授(Visiting scholar)
  • 1999年: SBS 時事討論 ' 오늘課來日 ' 司會者
  • 1999年 2月 ∼1999年 10月: SBS 甲論乙駁 東西南北 - 進行者
  • 1999年 3月~2000年 2月: 太和基督敎社會福祉館 無料法律相談辯護士
  • 1999年 3月~2000年 2月: 淑明女子大學校 法科大學 兼任敎授
  • 2000年: 한나라黨 4.13總選 選擧對策委員會 副代辯人
  • 2000年 2月~2004年 5月: 環境運動聯合 法律委員長 兼 常任執行委員
  • 2000年 5月~2004年 5月: 第16代 國會議員(環境勞動委員會, 運營委員會 및 豫決特委 兼職)
  • 2001年 6月~2002年 9月: 한나라黨 未來를 위한 靑年連帶 共同代表
  • 2002年: 第一國際法律事務所, 金長利 法律事務所 辯護士
  • 2003年: 한나라당 院內副總務
  • 2003年 1月~2004年 1月: 한나라당 最高委員
  • 2003年 7月~2004年 2月: 한나라당 靑年委員會 委員長
  • 2003年 7月~2004年 1月: 한나라당 常任運營委員會 委員
  • 2004年 1月~2004年 3月: 國會 政治改革 特別委員會 한나라당 幹事
  • 2004年: 한나라당 法律諮問團 및 人權委員會(環境小委 委員長)
  • 2004年: 法務法人 '知性' 代表辯護士
  • 2005年: 舞踊文化포럼 共同代表
  • 2005年 8月~2006年 5月: 韓國勞動組合總聯盟 諮問委員會 辯護士
  • 環境運動聯合 指導委員 및 國政政策諮問委員
  • 2006年 7月~2010年 6月: 第33代 서울特別市葬
  • 2007年 7月~2011年 8月: WK리그 서울市廳 아마조네스 球團主
  • 2008年 經濟協力開發機構(OECD) 長官會議 名譽準備委員長
  • 2010年 7月~2011年 8月: 第34代 서울特別市葬
  • 2010年 世界都市 電子政府 協議體(WeGO) 招待議長
  • 2011年 3月: 第8回 國際障礙人機能올림픽大會 共同委員長
  • 2012年 5月~2012年 10月: 英國 킹스칼리지 런던(KCL) 公共政策大學院 硏究員
  • 2012年 10月~2013年 2月: 中國 상하이 푸단대學校(Fudan University) 中級語學過程 修了
  • 2013年 2月: 法務法人 大陸아주 顧問辯護士
  • 2013年 4月~2013年 12月: 한양대학교 公共政策大學院 特任敎授
  • 2013年 12月~2014年 6月: 韓國國際協力團(KOICA) 中長期諮問團(페루 리마視聽 派遣)
  • 2014年 7月~2015年 1月: 韓國國際協力團(KOICA) 中長期諮問團(르완다 키갈리視聽 派遣)
  • 2015年 4月: 4.29 國會議員 再補闕選擧 서울 관악구(을) 새누리당 吳晨煥 候補 共同 選對委員長
  • 2015年 4月~2016年 1月: 高麗大學校 技術經營專門大學院(MOT) 碩座敎授
  • 2015年 4月~2016年 1月: 高麗大學校 技術經營專門大學院(MOT) 未來사이테크포럼 代表
  • 2016年 3月: 第 20代 國會議員選擧 서울特別市 鍾路區 새누리당 候補
  • 2016年 5月: 共生(共生) 硏究所 設立
  • 2016年 6月~: 共生硏究所 所長
  • 2017年 1月: 바른政黨 倫理TF팀長
  • 2017年 1月~2017年 3月: 바른政黨 最高委員
  • 2017年 9月~2021年 3月: 高麗大學校 技術經營專門大學院(MOT) 碩座敎授
  • 2018年 12月~2019年 2月: 自由韓國黨 國家未來비전特委 委員長
  • 2019年 1月: 自由韓國黨 서울市黨 廣津區(을) 黨協委員長
  • 吳世勳法律事務所 辯護士
  • 2020年 3月~2020年 4月: 未來統合黨 4·15總選 中央選擧對策委員會 서울圈域 選對委員長
  • 2020年 5月~2020年 9月: 未來統合黨 서울市黨 廣津區(을) 黨協委員長
  • 2020年 9月~2021年 4月: 國民의힘 서울市黨 廣津區(을) 黨協委員長
  • 2021年 4月~2022年 6月: 第38代 서울特別市葬
  • 2021年 4月~: 서울市立大學校 運營委員長
  • 2021年 12月~: 社團法人 訓民正音記念事業會 拷問
  • 2022年 7月~: 第39代 서울特別市葬
  • 2023年 2月~: C40都市氣候리더십그룹 副議長 兼 運營委員

所屬 政黨 [ 編輯 ]

所屬 政黨 所屬 期間 備考
한나라黨 2000~2012 政界 入門
새누리黨 2012~2017 黨名 變更
無所屬 2017 朴槿惠-최순실 게이트 로 인한 脫黨
바른政黨 2017~2018 創黨
無所屬 2018 바른未來黨 과 合黨에 反撥하여 脫黨
自由韓國黨 2018~2020 復黨
未來統合黨 2020 合當
國民의힘 2020~ 黨名 變更

歷代 選擧 結果 [ 編輯 ]

實施年度 選擧 臺數 職責 選擧區 正當 得票數 得票率 順位 當落 備考
2000年 總選 16代 國會議員 서울 江南區 을 한나라黨 64,516票
59.39%
1位 初選
2006年 地方 選擧 33代 市場 서울特別市 한나라黨 2,409,760票
61.05%
1位 初選 , 民選 4期
2010年 地方 選擧 34代 市場 서울特別市 한나라黨 2,086,127票
47.43%
1位 再選 , 民選 5期
2016年 總選 20代 國會議員 서울 鍾路區 새누리黨 33,490票
39.72%
2位 落選
2020年 總選 21代 國會議員 서울 廣津區 을 未來統合黨 51,464票
47.80%
2位 落選
2021年 4·7 再補選 38代 市場 서울特別市 國民의힘 2,798,778票
57.50%
1位 3選 , 民選 7期
2022年 地方 選擧 39代 市場 서울特別市 國民의힘 2,608,277票
59.05%
1位 4選 , 民選 8期

出演作 [ 編輯 ]

TV 放送 [ 編輯 ]

映畫 [ 編輯 ]

CF, 廣告 [ 編輯 ]

  • 三星物産 로가디스
  • 生命保險協會
  • 靑湖나이스 아이스콤보

家族 [ 編輯 ]

  • 할아버지: 오영근(1909年~1992年)
    • 아버지: 오범환(1935年~2019年)
    • 어머니: 死文化

賞勳 [ 編輯 ]

  • 2000年 市民團體選定 國政監査 優秀議員
  • 2001年 市民團體選定 國政監査 優秀議員
  • 2002年 市民團體選定 國政監査 優秀議員
  • 2003年 市民團體選定 國政監査 優秀議員
  • 2003年 第 20回 코리아 베스트드레서 政治人部門
  • 2007年 올해의 브랜드 對象 CEO特別賞
  • 2008年 國際존타클럽(Zonta International Club) 존타의 親舊 上
  • 2008年 韓國經濟新聞 글로벌리더 對象 - 未來經營部門
  • 2008年 第1回 大韓民國을 이끄는 21世紀 經營리더 對象 創造經營 部門
  • 2008年 UN 公共行政上 優秀賞 (사이버政策討論房)
  • 2008年 2008 뉴거버넌스 리더쉽 메달 垂訓(政策革新部門)
  • 2008年 第 6回 Forbes 經營品質 對象(公共革新部門)
  • 2009年 서울 석세스 어워드 2009 政治部門 廣域團體長上
  • 2009年 UN 公共行政上 優秀賞 (千萬想像 오아시스)
  • 2009年 UN 公共行政上 對象 (阿利水 實時間 水質公開 서비스)
  • 2009年 7月 行政安全部 市道公務員敎育機關 創意深化過程 最優秀賞
  • 2010年 UN-HABITAT 特別賞 (長期賃貸傳貰住宅 Shift 等)
  • 2010年 UN 公共行政上 優秀賞 (希望플러스 通帳)
  • 2010年 UN 公共行政上 對象 (女性이 幸福한 서울 프로젝트)
  • 2010年 UN 公共行政上 優秀賞(家出危機 10代女性 自立支援, 公開稅務法廷)
  • 2015年 11月 KBC 목민自治對象 廣域團體長上
  • 2015年 大韓民國家族지킴이 大韓民國 實踐對象 國威宣揚部門

著書 [ 編輯 ]

  • 가끔은 辯護士도 울고싶다, (서울: 명진출판, 1995), ISBN   978-89-7677-030-1
  • 美國 民事裁判의 虛와 實, (서울: 박영사, 2000), ISBN   978-89-10-50707-9
  • 우리는 失敗에서 希望을 본다, (서울: 민음사, 2005), ISBN   978-89-8273-930-9
  • 시프트(SHIFT): 생각의 프레임을 轉換하라, (서울: 리더스北, 2009), ISBN   978-89-01-09783-1
  • 서울은 不可能이 없는 都市다 : 서울市長 오세훈이 보내는 블로그 레터 (서울: 21世紀북스, 2010), ISBN   978-89-509-2285-6
  • 午後의 서울 散策, (서울: 미디어월, 2011) ISBN   978-89-647-1040-1
  • 吳世勳, 길을 떠나 다시 배우다: 르완다 키갈리 日記, (서울: 알에이치코리아, 2015.4) ISBN   978-89-255-5608-6
  • 吳世勳, 길을 떠나 다시 배우다: 페루 리마 日記, (서울: 알에이치코리아, 2015.4) ISBN   978-89-255-5607-9
  • 吳世勳, 왜 只今 國民을 위한 改憲인가? (서울: 씨앤북스, 2016.7) ISBN   979-11-954-3722-1
  • 吳世勳, 왜 只今 共存과 相生인가? (서울: 씨앤북스, 2016.9) ISBN   979-11-954-3723-8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吳世勳 서울市長- ‘시프트’ 建設 强力 推進 100代1 人氣” . 文化日報. 2010年 6月 3日.  
  2. [1]
  3. [2]
  4. 권대열 (2006年 5月 11日). “5·31 最大關心 서울市長 候補 얘기 吳世勳” . 《朝鮮日報》. 2011年 10月 12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0年 6月 3日에 確認함 .  
  5. “[SPECIAL REPORT 說의 品格 01] 名門 宗家의 설엔 특별한 것이 있다” . 週刊東亞. 2010年 2月 17日.  
  6. “吳世勳 서울市長 祖父母 ‘樹木葬’ 利川 先山, 特戰司 移轉 敷地 包含” . 서울新聞. 2009年 3月 27日.  
  7. 吳世勳(2009), 『시프트(SHIFT): 생각의 프레임을 轉換하라』, 서울 : 리더스北
  8. “강금실-오세훈 候補 스토리” . 《코리안위클리》. 2006年 5月 18日.  
  9. “硏修院 時節 에피소드” .  
  10. “日照權도 國民의 基本權, 保護마땅” .  
  11. “서울地法 南部支院 1994.2.23. 宣告 91加合23326 第3民事部判決 : 抗訴” .  
  12. “서울高法 1996. 3. 29. 宣告 94나11806 判決:確定” .  
  13. “檢察, 日照權 侵害한 再開發 高層 아파트 工事 中斷 決定” . 《MBC 뉴스》. 1997年 11月 8日.  
  14. “自然公園法 改正案 發議 豫定 - 환경련 吳世勳 法律相談室長” . 2016年 12月 30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15. “放射能思考 隱蔽事件 糾彈 聲明書 - 오세훈 辯護士” .  
  16. “`그린벨트 解除案'에 對해 릴레이 憲法訴願 - 吳世勳 民辯 環境委員” .  
  17. “吳世勳 서울市長 20年 密着分析” . 週刊東亞. 2009年 12月 10日.  
  18. “<패션> 黃珞周國會議長 等 베스트드레서 10人” .  
  19. “未婚 女性이 가장 사귀고 싶어하는 男子 設問調査 - 씨네 2000” .  
  20. “로가디스CF - 오세훈 辯護士 法廷便” .  
  21. “生命保險協會 TV CF(1996年)” .  
  22. 오세훈 辯護士 그것이 알고 싶다 進行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3. “放送局 밖의 '保釋'을 찾아라 專門職 非放送人 全盛時代” . 東亞日報. 1997年 6月 4日.  
  24. “16代 總選 서울 江南乙 當選者 - 오세훈 前 辯護士” .  
  25. 中央日報. “2000年 美國에서 招請한 人士들은? - 오세훈 議員 等” .  
  26. ' 被監機關 封套 謝絶합니다 ' .  
  27. ' 007 作戰' 彷彿 - 環境委員會 吳世勳 한나라당 議員” . 《東亞日報》.  
  28. ' 工夫해야 제대로 議政活動하죠 ' . 《每日經濟》. 2002年 9月 16日.  
  29. “오세훈 議員 16代 國會 立法活動 優秀議員 - 바른사회 밝은정치 市民聯合” .  
  30. “조순형·吳世勳 4個部門 `톱10`” . 《文化日報》. 2004年 1月 8日.  
  31. “經總, ‘親勞動界 議員’ 23名 發表” .  
  32. “리뷰/ 解說이 있는 발레 ‘海賊’” .  
  33. “오세훈 議員 '韓國기네스協會' 政治分野 審議委員 選定” .  
  34. “오세훈議員 等 30~40代 專門家 廣告모델料 寄附” .  
  35. ' 新鮮한 退場' 오세훈議員의 政治 懺悔錄” . 《中央日報》. 2004年 1月 7日.  
  36. 안수찬. “(한나라당) '5,6共 核心勢力 떠나라 ' . 《SBS 뉴스》.  
  37. 정연욱 (2003年 9月 19日). “한나라 少壯派 黨 刷新 거듭 壓迫” . 《東亞日報》.  
  38. “檢察出席 놓고 漢나라 重鎭 - 所信波 衝突” .  
  39. 안수찬 (2003年 9月 9日). “(秋夕 앞둔 민주-한나라 '집안싸움' 加熱)'5, 6共 論爭 ' . 한겨레新聞.  
  40. 반병희 (2004年 1月 6日). “오세훈議員 “總選 不出馬…政界 떠날것”” . 《東亞日報》.  
  41. “오세훈議員 “先輩들 去就 돌아보길”” . 한겨례신문.  
  42. “不出馬 도미노 - 한나라당 오세훈 議員” .  
  43. “政治資金法 改正案 合意 - 吳世勳 한나라당 議員” .  
  44. 모규엽 (2006年 4月 12日). “吳世勳 “彈劾 贊成 只今도 判斷 옳다고 생각한다”” . 《國民日報》.  
  45. 한겨례신문. “거짓말 안 하는 議員 選定 - 한나라당 오세훈 議員” .  
  46. 박응식 (2005年 3月 11日). “노블리스 오블리제, 그리고 眞正한 自由” . 《머니투데이》.  
  47. “中國서 法律工夫 後 現地進出 國內企業 도울것” .  
  48. “韓國 共同住宅 管理電算協議會 發足 - 오세훈 前 議員” .  
  49. “吳世勳 前議員 鐵人 入門” .  
  50. “[PEOPLE-모임&모임] Tri-A - 吳世勳 會長 인터뷰” .  
  51. “‘말아톤’ 배형진·오세훈 辯護士…統營 國際트라이애슬론 出戰” .  
  52. “韓國女性財團 未來포럼 創立 - 共同代表 오세훈 前 議員” .  
  53. “오세훈辯護士, 韓國勞總 諮問辯護士로 委囑” .  
  54. " 障礙兒 돕기 써달라" 廣告 出演料 선뜻” .  
  55. “障礙人들의 멘討價되어 킬리만자로 登攀 挑戰 - 오세훈 辯護士” .  
  56. “名士들의 발레 出演 - 오세훈 辯護士” .  
  57. “釜山 待遇 '월드마크' 分讓 靑信號 - 오세훈 辯護士” .  
  58. “靑湖나이스 '속 보이는 얼음처럼 ' . 《한국광고총연합회》. 2004年 12月 29日.  
  59. 李承雨 (2005-06-14日). “서울市長 選好候補 1位에 陳正統-오세훈” . 《聯合뉴스》.  
  60. 문수인 (2005-11-03日). “吳世勳 서울市長 안나갈듯” . 《每日經濟》.  
  61. “吳世勳 前 議員 "決斷 쉽지 않다 " .  
  62. “한나라黨 競選 - 政見發表하는 吳世勳 서울市長 候補” .  
  63. 송봉석 (2006-05-03日). “吳世勳 57% 강금실30%...27% 隔差” . 京鄕新聞.  
  64. 조기원 (2006年 6月 5日). “吳世勳 서울市長 當選者 公約實行 準備 着手” . 《한겨레新聞》. 2016年 3月 1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9年 6月 9日에 確認함 .  
  65. 이순혁 (2006年 5月 16日). “오세훈 候補 ‘淨水器 廣告’ 搜査 着手” . 《한겨레新聞》.  
  66. 조현철 (2006年 5月 21日). “(박근혜 代表 被襲) 斷想 오르는 瞬間 기다린 듯…” . 《京鄕新聞》.  
  67. 서울·京畿, 被襲 以後 1·2位 隔差 더 벌어
  68. 이호기 (2007年 3月 3日). “서울市 公務員 '鐵밥桶' 깨지나” . 《韓國經濟》.  
  69. “서울市 ‘움직이는 觀光案內所’ 6個月間 10萬 觀光客 도왔다” . 2009年 8月 19日.  
  70. “서울 民願行政 滿足度 ‘最高’” . 《世界日報》. 2010年 3月 16日.  
  71. “吳世勳 "創意的 디자인으로 '서울' 브랜드 價値 높여야 " . 《뉴시스》. 2007年 4月 23日.  
  72. “유네스코, 디자인 創意都市로 서울市 指定” . 《聯合뉴스》. 2010年 7月 22日.  
  73. 吳世勳 서울市長 "서울 競爭力 위해 테크아트 마케팅 必要" 《아시아經濟》, 2011年 4月 19日
  74. 서울市, 國際金融競爭力 世界 11位 達成 《아시아經濟》, 2011年 9月 26日子
  75. 서울 9月分 財産稅 1兆9千億원…5.5%↑ , 聯合뉴스, 2010.9.13
  76. 江南北 財政 貧富 隔差 확 줄었다 헤럴드 經濟, 2010.3.29
  77. “吳世勳 서울市長 特別訓令 發表” .  
  78. “서울市 '旅行프로젝트' UN公共行政上 對象” . 《吏套뉴스》. 2010年 6月 24日.  
  79. “[顧客感動經營大賞] 서울市‥民願서비스 끝없는 進化 '120 茶山콜센터 ' . 《韓國經濟》. 2009年 1月 1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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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3. 두산百科 - 시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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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5. “서울 마곡地球 溫室가스 제로都市… 美 클린턴재단과 손잡아” . 《國民日報》. 2009年 5月 19日.  
  86. “吳世勳의 힘 '서울市 淸廉度 1位 ' . 《아시아經濟》. 2008年 12月 1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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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8. “서울·京畿 大衆交通 料金制 統合” . 2007年 6月 8日.  
  89. “서울市 모바일포털, 世界 IT올림픽서 受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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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9. “打要버스 '暴風' 人氣, 路線 情報 '찾자' 烈風…어디서 確認할 수 있나요?” . 《이투데이》. 2014年 4月 1日.  
  100. “吳市場 "2020年 1人當 GRDP 4萬달러 目標 " . 《韓國日報》. 2011年 5月 12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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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3. 29.5mm 비에도 '물바다'되는 道路… 빗물받이가 問題였다 朝鮮日報 2011年 8月
  104. 콘크리트 서울’ 물 빠질 곳이 없다 京鄕新聞 2011年 8月
  105. 昨年엔 1492億이라더니 올핸 3436億으로 急增서울市 水害防止 豫算 뻥튀기? 한겨레 2011年 8月
  106. 特別會計·基金 包含하면 水害防止 豫算 오히려 늘어
  107. ‘親環境 無償給食’ 解決幾微 가물가물 2010.10.22 아시아투데이
  108. 追更 編成’ 카드 꺼낸 吳世勳 서울市長 “無償給食 마지노線 50%… 물러설 수 없어”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國民日報 2011年 1月 16日
  109. 서울市 無償給食條例 恐怖 拒否...訴訟 展望 YTN
  110. 서울市議會, 無償給食條例 議長職權 恐怖 쿠키뉴스 2011年 1月 7日
  111. 서울市,無償給食 條例 大法院 提訴 파이넨셜뉴스 2011年 1月 18日
  112. 695億 막으려고 182億 써버린다?... 吳世勳의 ‘無理數’ 헤럴드經濟 2011年 1月 1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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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 “吳世勳 前 市長 技術經營專門大學院 夕座敎授로 任用” . 《고대신문》. 2015年 4月 13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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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 “未來사이테크포럼 本講義 및 質疑應答 映像 리스트” .  
  123. “‘總理 吳世勳’ 推薦에 朴 “큰 일 하실분, 總理 안맞는다”” . 《文化日報》. 2015年 10月 27日.  
  124. “吳世勳 "總理候補 擧論만으로도 榮光 " . 《京鄕新聞》. 2015年 5月 4日.  
  125. “吳世勳, 페루·르완다서 1年間 施政諮問團으로 活動한 經驗談 冊으로 펴내” . 《國民日報》. 2015年 5月 6日.  
  126. “吳世勳 '黨員 30% 競選룰' 받고도 朴振에 勝利” . 프리미엄朝鮮. 2016年 3月 16日. 2016年 3月 19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6年 3月 17日에 確認함 .  
  127. “吳世勳 前 市長 女同生 더민주 比例代表 申請 헤프닝” .  
  128. " 敗將은 말이 없다. 只今은 自肅할 때 " . 《國民日報》. 2015年 5月 13日.  
  129. ' 共·生 硏究所’ 열고 大選 準備 나선 오세훈 前 서울市長” . 《韓國經濟新聞》. 2016年 7月 26日.  
  130. “吳世勳ㆍ南景弼ㆍ元喜龍 “非朴 黨代表”…存在感 誇示” . 《聯合뉴스》. 2016年 7月 20日.  
  131. “與黨權走者들, 吳世勳 鍾路 黨協 訪問해 求愛 競爭” . 《KBS》. 2016年 7月 27日.  
  132. “바른政黨, 닻 올린 政治實驗 - 오세훈 前 서울市長” . 《來日新聞》. 2017年 1月 10日.  
  133. “吳世勳 前 서울市長 大選 不出馬 決定” . 《聯合뉴스》. 2017年 1月 13日.  
  134. 이준서 (2021年 4月 8日). “서울·釜山 與 大慘敗…吳世勳, 25個區 싹쓸이 壓勝” . 《聯合뉴스》. 2021年 4月 7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21年 4月 7日에 確認함 .  
  135. 江은 (2022年 6月 2日). ' 4選 서울市長' 거머쥔 吳世勳, "서울市 歷史가 다시 始作된다 " . 《京鄕新聞》. 2022年 6月 2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24年 2月 17日에 確認함 .  

外部 링크 [ 編輯 ]

前任
(강남구 甲) 瑞祥木
(강남구 을) 홍사덕
第16代 國會議員(서울 江南區 을 )
2000年 5月 30日~2004年 5月 29日
한나라黨
(강남구 甲) 최병렬
後任
(강남구 甲) 李鍾九
(강남구 을) 공성진
前任
李明博
第33·34代 서울特別市葬 (民選)
2006年 7月 1日~2011年 8月 26日
後任
(權限代行) 권영규
(再補闕) 朴元淳
前任
朴元淳
(權限代行) 서정협
第38·39代 서울特別市葬 (民選)
2021年 4月 8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