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안
(李根安, 1938年 3月 21日
(
1938-03-21
)
~ )은 大韓民國의 公安 警察, 前職 牧師였다. 朴正熙 維新 政權 및 전두환 政權에서 拷問技術者가 되어서 여러 民主化 運動家들을 拷問했다.
學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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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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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8年
에서부터
1962年
까지
大韓民國 空軍
에서 服務하였고 그 後
大韓民國 警察
巡警
에 任命되었다. 假名은 金哲秀이고, 別稱은 朴中領, 불곰, 半달곰이다.
1970年代
後半부터
1988年
까지 對共, 防諜, 公安 分野 搜査 擔當官으로 活動하였다.
1970年
7月
서울警察學校 武術敎官으로 發令받았다가
1972年
8月
警察廳
治安局
對共分室
刑事
로 發令받으면서 以後
1987年
까지 京畿道地方警察廳 等에서 對共, 强力係, 殺人事件, 防諜 專門 搜査官 等을 맡았다. 한때
華城 連鎖 殺人 事件
容疑者를 찾지 못하자 그를
華城警察署
로 發令냈지만 容疑者를 잡지 못하고, 5共 淸算으로 그의 拷問行爲에 對한 陳述이 쏟아져 나오면서
1988年
3月
退任하였다. 警察 在職 中 수많은 野黨 人士와 學生 運動家들을 苛酷하게 拷問하여,
拷問 技術者
라고 불렸다.
1979年
남민전 事件
과 1981年 전노련 事件을 搜査하기 위해 不法 逮捕를 敢行하였다.
以後 不法 逮捕 및 拷問을 試圖한 嫌疑로 手配되었고, 以後 約 10年間 逃避生活을 하다
1999年
檢察에 自首함으로써 拘束되어 이듬해 裁判 結果 懲役 7年과 資格 停止 7年 刑을 言渡받았다. 그 뒤
2006年 11月
에 出監하였다.
[1]
[2]
[3]
出監 後
2008年
에
牧師
按手를 받고 改新敎 牧師가 되었으나 牧師로 說敎를 하면서 "차라리 拷問은 藝術이었다"라는 等의 妄言을 하면서 及其也 牧師로서의 行跡과 김근태에 對한 拷問 等의 責任 關聯 論難이 불거지면서 結局 牧師 資格이 剝奪되었다.
初期 活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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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先代가 居住하던 곳과 그의 出生地는
京畿道
楊州郡
주내면(現
京畿道
楊州市
양주동
)이지만
韓國 戰爭
이 勃發하자 家族과 함께 南下하여
大戰
에 定着하였다. 한때 그의 故鄕이
京畿道
平澤郡
고덕면
이라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幼年 時節
誘導
와
跆拳道
,
合氣道
等을 배웠으며, 警察 人事記錄카드에 依하면 그의 主特技는
合氣道
라 한다.
大戰
에서 幼年期를 보낸 뒤 初等學校를 거쳐
1954年
2月
大戰
한밭中學校
를 卒業하고 그해
3月
高等學校를 서울
경동高等學校
로 進學하여
서울
로 上京하여 生活했다. 高等學校 在學 中 길에서 强盜를 보고 追擊하여, 맨손으로 칼을 든 强盜를 制壓하여 警察에 引繼하였다. 後에 空軍에 入隊할 때 이 點을 높이 評價받았고, 이는 警察 入門 契機가 되었다.
1957年
2月
서울
경동高等學校
를 卒業하고
1958年
10月 1日
大韓民國 空軍
에 入隊하여
空軍敎育司令部
基本軍事訓鍊團
을 修了한 뒤, 空軍憲兵에서 敎育 및 總務擔當 補職으로 服務하다
1962年
9月 30日
空軍
中尉
로 轉役하였다.
1960年
代 初,
忠淸南道
公州郡
出身의 夫人 신옥영을 만나 結婚하였다.
[4]
結婚 初期에는 從業員 2~3名을 두는 等 美容室을 제법 크게 運營하기도 했지만 巡警으로 警察에 投身한 李氏가 高速昇進을 하면서 生活에 安定을 찾자 美容室을 그만뒀다.
[4]
1970年
7月
警察 公務員에 採用, 巡警으로 任用되었다. 바로 서울警察學校 武術遙遠 敎官으로 發令되었다. 軍人 出身으로 警察 在職 中
朴中領
이라는 別名과
불곰
,
半달곰
이라는 別名을 얻었다. 警察 在職 中 詐欺꾼, 賭博事犯, 痲藥事犯 等을 여러 名 檢擧하여 實績을 쌓고 能力을 認定받았다.
警察官 時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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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朴正熙 政權 時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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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2年
8月
警察廳
治安局
對共分室
刑事
로 發令되었고, 强力係 刑事 等을 거쳐
1973年
2月
間諜, 强盜, 깡牌 等의 檢擧 有功으로
警長
으로 特進하였다.
1974年
7月
京畿道警察廳
對共分室로 發令받았으며
京畿道地方警察廳
對共專門 搜査官,
强力犯罪
搜査官,
殺人
專擔 搜査官, 防諜專門 搜査官 等으로 活動하였다.
1976年
8月
警査
로 昇進하고,
1970年
代 後半
京畿道警察廳
對共分室長으로 昇進했다. 對共分室長 在職 中 在野 人士 및 學生運動圈 等을 顧問하였고,
1979年
3月
經緯
로 昇進했다. 그러나
1979年
間諜 容疑者가
現代重工業
에 入社瑕疵, 現代重工業에
金哲秀
라는 假名으로 僞裝 就業하기도 했다. 以後 身分을 숨기고 7個月間 현대중공업에서 勞動者로 生活하며 容疑者의 動態를 把握하여 檢擧했다. 1979年 10月,
남민전 事件
을 搜査하였고 그 關聯者들을 檢擧하였다.
그는 間諜 容疑者와 野黨 人士, 民主化 運動家들을 監視, 不法 逮捕하기 위해 엿장수, 月賦策장사, 강냉이 장수 等으로 變裝하여 活動하였다.
1979年
經緯
로 昇進,
治安本部
서울 남영동 對共分室로 發令받았다.
1979年
誠實 勤務로 靑龍奉仕賞과 勤政勳章 等을 받았다. 그 後
京畿道 警察廳
公安分室長으로 赴任하여, 京畿道 警察廳 公安分室長으로 있으면서
김근태
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手配 後 不法 逮捕하였다. 犯人 取調 過程에서 拷問이 있었다고 傳해지는데, 關節 빼기, 볼펜心 꽂기 等의 拷問 技術로 사람들을 拷問하여
拷問 技術者
로 불렸다.
全斗煥 政權 時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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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年
9月
全斗煥이 執權하자 그해
9月 1日
部로 旣存의 軍人 將校 및 警察官들을 大大的으로 豫編, 解任시켰지만 그는 强力犯罪 및 間諜 檢擧, 運動圈 檢擧 能力을 認定받아 解任되지 않고 繼續 留任되었다.
1981年
부림 事件
, 전노련 事件을 搜査하여 그 關聯者들을 全員 逮捕하기도 하였다.
特히,
1985年
에
김근태
前
열린우리당
議長을 拷問했던 嫌疑는
1999年
檢察 調査에서 自首 以後 一部 認定하였다.
[5]
그 外에도
1983年
함주명 造作 間諜事件에 關聯된 사람들에게 拷問하였다는 證言도 있다.
[6]
2003年
3月 31日
에는
1984年
間諜造作事件에 間諜으로 몰렸던 前職 豫備役 軍人 出身 이장형 等이 法廷에서 抑鬱함을 呼訴하기도 했다.
[7]
[8]
그 外에 反帝同盟 事件 疑惑도 받아왔다.
[9]
1986年
10月 23日
警察의 날
에 大統領
全斗煥
으로부터
玉條勤政勳章
을 받았다.
1986年
부터
京畿道
華城郡
의 各處에서
華城 連鎖 殺人 事件
이 發生하였으나 警察이 容疑者의 正體를 찾아내지 못하자, 當時 內務部는 이근안을
華城警察署
로 發令하여 殺人者를 잡게 하였다.
退任 以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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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一角에서 그의 拷問行爲에 對한 疑惑이 提起되어 오다가
6.29 宣言
後,
第5共和國
이 崩壞되고, 收監된 一部 野黨 人士와 學生 運動家들이 釋放되면서 그의 拷問 行爲를 主張했다. 以後 그에게 고문당했다는 人士들의 證言과 目擊談이 社會的으로 浮刻되면서 批判을 받았다.
1988年
3月
華城警察署에 辭職書를 내고 스스로 警察官職을 辭退했다. 그런데
1988年
12月 退職 以後, 여러次例 公訴가 提起되어 警察은 그를 公開 手配하였다. 그러나 10年 10個月 동안, 집 近處 倉庫 뒤에 隱身하고 있다가
[10]
1999年
10月 28日
水原地方檢察廳 城南支廳에 自首
[5]
[11]
하였고, 1999年 11月에 拘束 起訴되었다.
[12]
2000年 9月, 大法院에서 懲役 7年
[12]
과 資格 停止 7年이 確定되었다.
[11]
이에, 그는 謝過文을 發表하였는데, 政治人 김근태는 그의 謝過를 받아들여 獄中에 收監된 그를 面會하기도 했다. 그 後
2005年
10月
法務部에서 假釋放 不適格 決定을 받았다.
[12]
收監 生活 中 그는 自身이 拷問했던 사람들 中의 한사람인 김근태에게 謝過하였으나, 김근태는 "李 前 警監이 제게 ‘눈을 감을 때까지 容恕를 빈다’고 했지만, ‘이 兩班이 眞心으로 말하는 것일까, 그런데 왜 눈물을 안 흘리는 것이지?’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며 當時를 回顧했다. 김근태는 "이제 두려움은 많이 가셨지만 1980年代 中盤에 無慘하게 짓밟혔던 惡夢이 되살아 났다. 面會가 끝난 後 돌아와서 이근안 前 警監의 容恕를 빌고 싶다는 이야기가 眞心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골똘히 하면서 조금 괴로웠다"라며 이근안의 沙果에 對해 그 眞意를 疑心하였다.
[12]
驪州矯導所
[13]
에서 服役을 하였고,
2006年
11月 7日
午前 0時 25分 頃에 京畿道 驪州郡 가남면(現.驪州市 街남邑) 驪州矯導所에서 7年의 刑期를 마치고 出所하였다.
[12]
이근안은 出所 當時 "社會에 物議를 일으켜 罪悚하다. 그 時代엔 愛國인 줄 알고 했는데 只今 보니 逆賊이다. 世上事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라고 出所의 變을 代身했다.
[14]
하지만
11月 16日
午前, 民家協과 유가협 會員 20餘 名이 서울特別市 서대문구 警察廳 民願室에서 그와 關聯하여, 警察의 謝罪 및 徹底한 眞相調査를 主張하며 警察廳長 面談을 要求하며 抗議 示威를 벌이기도 하였다.
[12]
한便, 本人(이근안)을 모델로 한 MBC 特輯드라마 <絃樂 6重奏>가
1995年
6.25 特輯劇으로 編成될 豫定이었는데
[15]
製作費 問題 때문에 演出者 고석만 PD(當時 短幕劇 팀長)가 MBC에 支援을 要請했지만 거절당한 데다 MBC가 警察과의 關係 弱化를 念慮하여 製作을 달갑지 않게 여겼고 이 過程에서 演出者가
1995年
3月 29日
MBC에 辭表를 提出한 後 프리랜서를 宣言하여
[16]
編成이 霧散됐으며 고석만 PD는 <絃樂 6重奏>의 製作과 關聯한 MBC와의 摩擦 外에도
[17]
1994年
10月
"坪프로듀서로 일하고 싶다"며 當時 맡고 있던 短幕劇 責任PD(綜合病院 全員日記 等等) 補職 辭退意思를 밝혔지만 MBC 側의 反對로 霧散되자 프리랜서를
[18]
宣言했다.
受刑 生活과 宗敎人으로 變身
[
編輯
]
2005年
6月
, 이근안은 獄中에서 通信 過程으로 神學校에 入學했다.
[19]
收監 當時, 이근안은 神學 工夫에 熱中했었는데 한 때 模範囚로 指目되기도 했다. 矯導所에서 韓國矯正宣敎會를 통해 改新敎를 接한 이근안은 出所한 다음 銃身디지털神學에서 神學을 工夫하였고, 傳道師 時節에는 信仰 干證 集會에 參與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2008年 10月 30日,
大韓예수敎長老會
(合同改革) 傘下 한 分派의 牧師 任職式에서 牧師 按手를 받고 正式 牧師가 되었다.
[19]
[20]
論難과 牧師 免職
[
編輯
]
日베貯藏所
,
디씨인사이드
등에서는 이근안을 愛國者로 稱頌하였고, 이근안은 牧師 活動 中 自身의 拷問 活動이 "愛國", "藝術"이라고 主張하는 等 論難을 빚었다. 이근안이 所屬된 大韓예수敎長老會 合同改革總會는 結局
2012年
1月 14日
牧師職에서 免職하는 決定을 내렸다.
[21]
2012年 12月14日 著書(《拷問技術者 이근안의 告白》) 出版 記念會에서는 "過去를 悔改하며, (拷問) 行爲 自體가 잘못이었다"면서도 自敍傳에 謝罪한다는 內容이 없다는 指摘에 李氏는 "全般的으로 다 悔改를 하는 것이지 한 건 한 件에 對해서 말하기는…"이라고 '謝罪' '謝過' 代身 '悔改'라는 말을 使用했다.
[22]
以後 2013年 1月7日子
서울新聞
과 인터뷰에서는 "잘못을 깨닫기까지 時間이 걸린 것은 事實이다. 間諜을 掃蕩하며 功績을 쌓고 國家에서 愛國者라고 치켜세우다 한瞬間에 逃亡者 身世에 ‘씹다 버린 껌’이 되니 처음에는 분한 마음도 들었다. 나라를 위해서만 일했는데 時代가 바뀌었다고 이런 取扱을 받나 싶어 抑鬱하기도 했다"며 "내가 拷問한 사람들뿐 아니라 그 家族들에게도 罪人이라 생각한다. 一一이 찾아가 謝罪할 勇氣가 없었을 뿐이다. 敎人으로서 懺悔, 悔改라는 單語를 많이 使用했는데 謝過라는 意味다"라고 말했다.
[23]
家族 關係
[
編輯
]
이근안을 演技한 俳優
[
編輯
]
著書
[
編輯
]
關聯 記事
[
編輯
]
參考 資料
[
編輯
]
各州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