俄館播遷
(俄館播遷)은
1896年
2月 11日
부터
1897年
2月 20日
까지 1年 9日間
朝鮮
高宗
과
世子
가
景福宮
을 떠나, 漁家를
러시아 帝國
公使館으로 옮겨서 播遷한 事件이다. 러시아에서는 이 事件을
高宗 러시아公館 亡命
(
러시아語
:
Бегство Коджона в русскую миссию
)라고 불렀다.
名稱
[
編輯
]
1864年
朝鮮 高宗
1年 以後
러시아 帝國
을 漢字로 ‘
俄羅斯
’(俄羅斯)로
朝鮮王朝實錄
에 記錄하였다.
[1]
따라서 ‘牙關’(俄館)이란 러시아 大使館을 뜻하며, 當時 日本에서는 러시아를 ‘露西亞’(露西亞)라고도 하기 때문에,
露館播遷
(露館播遷)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朝鮮王朝實錄에 '露西亞'라는 名稱이 登場한 것은
1905年
大韓帝國
光武 9年
9月 5日
露西亞-日本의 講和 條約(
포츠머스 條約
) 記錄이 唯一하며, 러시아 大使館을 ‘노관’(露館)이라고 稱한 것도
1897年
두 次例에 不過하다.
[2]
(俄館은 高宗 때 네 次例, 純種 때 한 次例 登場)
俄館播遷 當時에는 “播遷”이라는 表現을 쓰지 않았고, 나중에 붙인 名稱이다.
進行
[
編輯
]
1895年
10月 8日
乙未事變
으로 朝鮮 國民의 對日 感情이 極度로 惡化되고, 各地에서 義兵이 일어나 全國이 騷亂해지자 러시아 公使 베베르는 公使館 保護라는 名目으로 水兵(水兵) 百名을 서울로 데려왔다. 이에 親러派人
이범진
等은
베베르
와 共謀하여 建陽 1年(
1896年
) 2月 11日에 國王의 居處를 宮闕로부터 漢城府
貞洞
(貞洞, 現在 서울特別市 중구 정동)에 있는 러시아 公使館으로 옮겼다.
[3]
高宗
은 옮긴 當日 內閣總理大臣
김홍집
을 비롯하여,
김윤식
,
유길준
,
어윤중
,
曺喜昖
,
醬粕
,
鄭炳昰
,
김종한
,
허진
,
이범래
,
이진호
를 免職하고, 兪吉濬 等을 逮捕하도록 命하였다. 이어
김병시
를 內閣總理大臣에 命하는 等 內閣 人事를 새로 하였다. 이날 金弘集과
鄭炳昰
가 百姓들에게 殺害되었다
[4]
.
어윤중
은 親日派가 아니었음에도 故鄕으로 몸을 避하기 위하여 京畿道 龍仁에 到着할 當時 예전
山訟
問題로 다툰 바 있는 庭園로의 머슴들에 依해
[5]
殺害되었고, 유길준·조희연 等은 日本으로 亡命하였다. 그리고,
이범진
·
이완용
等의 親러 內閣이 組織되었다.
[3]
그러나 러시아 帝國은
1896年
5月
니콜라이 2歲
의 皇帝 戴冠式 以後에 日本 帝國과 가까워지며,
야마가타-로바노프 協定
을 맺는다. 또한 러시아 帝國은 慶源과 鏡城의 採掘權과
鴨綠江
,
豆滿江
및
鬱陵島
의 採伐權과 같은 各種 利權을 要求하였다. 이에
1897年
2月 18日
, 宮으로 돌아갈 것을 命한 高宗은 이틀 뒤인
2月 20日
에
德壽宮
으로 還宮하였다. 이때, 高宗이 다른 나라의 公館에 避身하여 다른 나라 軍隊의 保護를 받고 있으니, 朝鮮의 自主權이 甚하게 毁損된다. 그리고 그 以後 러시아의 干涉이 심해지게 된다.
評價
[
編輯
]
國王이 러시아 公使館에 滯留하고 있는 1年間 모든 政治는 러시아의 手中에 있었으며, 當時 度支部 顧問 알렉세예프(Alexeev)는 事實上 財務長官이나 마찬가지였다. 한便, 俄館播遷 以後 많은 利權이 러시아를 爲始한 列强의 손에 넘어가 버렸다.
[3]
러시아公使館으로 옮긴 後에 王은 비로소 君主權을 回復한다. 以前까진 日本이 日本式 제대로 內閣이라는 것을 만들어 親日的 人士를 總理大臣이 되도록 하여 그가 日本公使館의 指示를 받아 國事를 決定하도록 했다. 王은 1年 동안 러시아公使館에 머물면서 빼앗겼던 君主權을 回復하고 王政을 原狀으로 돌렸다. 그리고 나라를 한 等級 昇格시켜 帝國으로서 再出發하는 機會를 만들었다. 皇帝는 光武라는 年號를 使用하고 近代化事業을 積極的으로 推進해 나갔다.
[6]
俄館播遷에 對해서는 日本 勢力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던 그의 意圖를 봐야 한다는 評價도 있지만, 自主的이지 못한 外勢 志向의 行動이라는 評價가 主를 이룬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