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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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렬
尹英烈
別名 者는 白熊(白熊), 號는 硏究 또는 경재
出生日 1854年 4月 15日
出生地 朝鮮 忠淸道 牙山郡 둔포면
死亡日 1939年 11月 4日 ( 1939-11-04 ) (85歲)
死亡地 日帝强占期 京畿道 京城府 에서 兵士
本館 해평 (海平)
父母 윤취동 (簿), 高齡 申氏 否認(某)
配偶者 한진숙(本部인)
子女 膝下 9男 3女
親戚 祖父 윤득실
조某 南陽 洪氏
宗敎 儒敎 改新敎 (監理會)
服務 大韓帝國 陸軍
服務期間 1897年 ~ 1907年
最終階級 大韓帝國 陸軍 參謀長
指揮 參謀長
主要 參戰 東學 農民 戰爭 討伐, 滿洲族 ·마적 討伐
기타 履歷 司憲府監察, 安城郡守, 南浦郡守, 內務參議, 江界府使, 南浦郡守, 집砲棺, 資憲大夫
웹사이트 해평 尹氏 홈페이지

윤영렬 (尹英烈, 1854年 4月 15日 ~ 1939年 11月 4日 )은 大韓帝國 의 軍人 兼 政治가 이다. 윤치소 의 아버지이며 大韓民國 4代 大統領인 윤보선 의 할아버지이다.

履歷 [ 編輯 ]

윤근수 , 윤두수 兄弟의 後孫으로 朝鮮 後記 지 中樞府 紗를 지낸 윤취동 의 아들이며 軍部大臣을 지낸 윤웅렬 의 동생이다. 獨立運動家였다가 親日派로 變節한 윤치호 , 軍醫官 윤치왕 , 外交官 윤치창 의 叔父이며, 大韓民國 第1代 內務部 長官을 지낸 윤치영 의 아버지이자 第4代 大統領 윤보선 , 京畿道知事 를 지낸 윤원선 의 할아버지이다.

흥선大院君 에게 拔擢, 武官으로 出仕하였다. 無關 在職 中 1878年 (高宗 15年) 正式으로 武科 (武科)에 及第하여 地方官을 轉轉하였으며, 1890年 平安北道 江界防禦使로 나갔다가 1893年 內務參議(內務參議)를 거쳐 다시 司憲府 監察이 되었다. 1894年 10月 에는 牙山의 선비 조중석(趙重錫)과 함께 章程 300名을 모아 天安郡 목천면에 出沒한 盜賊을 討伐하였다. 以後 江界府使를 거쳐 安城郡守, 연기郡守 等을 歷任했다.

東學 農民 運動 當時 忠淸南道 地域의 東學 農民軍 討伐에 出征하였으며, 京畿道 安城郡 의 郡守가 解決하지 못하는 强盜 마장군과 滿洲 에서 쳐들어온 馬賊을 討伐, 掃蕩했다. 大韓帝國 에서는 陸軍 參將 資憲大夫 를 지냈고, 日帝强占期 에는 公職에서 隱退하고 餘生을 보냈다. 者는 白熊(白熊), 白熊(白雄), 號는 硏究(蓮龜), 또는 경재(敬齎). 本貫은 해평 (海平)이다.

生涯 [ 編輯 ]

生涯 初期 [ 編輯 ]

윤웅렬 (왼便 담배 피우는 이)

윤영렬은 1854年 [1] 陰曆 4月 15日 中樞府 知事를 지낸 해평 尹氏 윤취동 (尹聚東)과 그의 두 番째 夫人 [2] 人 安東金氏의 둘째 아들로 忠淸南道 牙山郡 둔포면에서 태어났다. [3] 그의 出生年代는 普通 1854年 으로 보나, 一說에 依하면 1843年 生이라는 說도 있다. 어려서부터 氣力이 强健하여 兄 윤웅렬 과 함께 두 兄弟가 天下壯士라는 소리를 들었다. 위로는 누이가 몇 名 있었는데, 그 中 한名은 溫陽 에 사는 二元詩에게 시집갔고, 後日 小說家 兼 作家인 이어령 의 塵外曾祖母가 된다. 누나 中 溫陽으로 시집간 尹氏夫人은 한글과 漢學 實力에도 뛰어났는데, 後날 男동생인 윤영렬의 治績을 담은 回顧錄인 《윤상공 선정록》을 出刊하기도 했다. 또다른 누나들 中 한名은 牙山에 사는 全州李氏 이인서에게 시집갔다.

아버지 윤취동 은 첫 夫人에게서 아들이 없었고, 再娶 夫人을 얻었지만 딸만 몇名 두었고, 나이 40이 넘도록 아들이 없었다. 아버지 吹動은 웅달山에 祈禱를 하고 난 뒤 아들을 受胎했다 하여 長男의 이름을 雄烈이라 지었고, 뒤에 그의 이름은 兄 윤웅렬 과 짝을 맞추기 위해(영웅)으로 英烈로 지어졌다. 윤웅렬 의 동생으로 9歲 때 父親을 여의었다.

그의 家計는 宣祖 때의 兄弟 政丞 윤두수 , 윤근수 兄弟의 後孫으로 7代祖 尹昕(尹昕)李 禮曹判書를 지내고 6代祖 尹趣旨(尹就之)는 副司直을 지냈으나 曾祖父 代에 鄕班으로 沒落하였다. 5代祖 輪彩는 世子翊衛司 死語 를 지내고 事後 李朝 參判 追贈 되었으며, 高祖父 尹歲兼 敦寧府 冬至使 를 지냈으며, 再從祖父 윤득우 兵曹 參判 光州 府尹 을 지냈으나 少論 신치운 의 文人이라 하여 順坦치 않은 官僚生活을 보냈다. 曾祖父 綸綍 은 官職이 없이 生活하다가 집터가 水原 行宮으로 編入되면서 잠깐 郎廳職을 지냈다. 後에 그의 아버지 윤취동 이 抑鬱함을 上疏하여 好調 參議 追贈 되었다. 할아버지 윤득실 通德郞 을 지냈지만 夭折했고, 天安郡 으로 分家한 아버지 윤취동은 할아버지의 넷째 아들이었다.

官僚 生活 初盤 [ 編輯 ]

어려서 아버지 윤취동 을 여의었지만 아버지 윤취동은 官職生活 外에 自力으로 牙山郡 신항리의 農土를 얻은 뒤 萬石꾼 大地主가 되어 加勢를 일으켰으므로 그는 어렵지 않은 少年期와 靑年期를 보냈다. 丈人인 한치원 (韓致元)에게 글을 배워 簡單한 글과 古典에 對한 知識이 있었다. 後날 조카인 윤치호 는 그가 學識이 不足했다 하였지만 그는 어린 윤보선 윤치영 에게 三國志 에 나오는 關羽 운장을 說明하며 그와 같은 사람이 되도록 勸告하였다. 글을 잘 지었던 丈人 한치원 은 그에게 '體火災上樑文(?華齋上樑文)' 等의 글을 지어 膳物로 奉呈하였다.

丈人 한치원 에게서 글을 배우다가 兄 윤웅렬 의 周旋으로 박규수 , 姜瑋 의 門下에도 出入하며 글을 배웠다. 일찍이 흥선大院君 에게 拔擢되어 官職에 나가 軍官(軍官)으로 活動하다가 1878年 (高宗 15年) 武科 (武科)에 及第하여 朝鮮 에서 司憲府 監察 을 지냈다. 1881年 (高宗 19年) 1月 6품으로 昇進하였고, 6月 20日 奎章閣 檢書官 에 任命되었다. 1882年 1月 王世子인 順從과 世子嬪 순명효황후의 家禮가 決定되자, 奎章閣 檢書官으로 嘉禮都監 別看役(別看役)을 兼任하였다.

1882年 3月 3日 副司果, 以後 尙衣院 別除를 거쳐 12月 8日 禁府都事가 되었다. 12月 15日 司憲府監察이 되었다가 1883年 1月 27日 奎章閣 檢書官 , 6月 4日 掌樂院 主婦, 12月 27日 司憲府監察이 되었다. 1884年 8月 16日 副司果, 9月 10日 宗簿寺 仁義가 되었다.

1890年 平安北道 江界 防禦使 로 나갔다가 1891年 8月 10日 副護軍, 1893年 內務 參議 (內務參議)를 거쳐 다시 司憲府 監察 이 되었다.

東學農民軍 및 盜賊 討伐 [ 編輯 ]

東學 農民軍 討伐 [ 編輯 ]

東學 農民 運動 當時 東學 農民軍의 沙鉢通文(檄文)

1894年 10月 윤영렬은 牙山 (牙山)에 사는 조중석 (趙重錫)과 함께 章程 300名을 모아 天安郡 목천면에 出沒한 盜賊을 討伐하였다. 以後 東學 農民 運動 의 討伐에 參與한다.

1894年 東學 農民 運動 當時 조중양 과 함께 討伐軍에 別軍官으로 差出되었다. [4] 別軍官으로 差出된 그는 官軍 外에도 檄文을 돌려 義兵을 募集하였다. 이어 官軍과 義兵 兵力을 이끌고 忠淸南道 牙山 天安 一帶의 東學 農民軍 討伐에 參與하였으며, 아들 윤치소 亦是 倡義하여 東學軍 討伐에 出征하였다. 300名의 兵士를 募集한 그는 政府軍에 加擔해 赫赫한 功을 세웠다. 그는 山積 掃蕩, 盜賊 逮捕의 達人이었다. [5] 1895年 陰曆 9月 乙未事變 이 發生하자 官職을 辭退하고 故鄕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復職했다.

한便 조카 윤치호 상하이 亡命 中 東學 農民 運動의 消息을 接하고 이를 積極 支持하여 話題가 되었다. 윤치호 1894年 2月 , 傷害 YMCA의 朝鮮問題에 關한 演說에서 그는 "平和的 또는 暴力的 內部革命만이 朝鮮의 唯一한 救濟策이다."라고 主張했고, 同年 5月 東學黨의 蜂起가 三男地方에 蔓延되고 있다는 消息을 듣고, "惡으로 물들고 피로 얼룩진 政府를 때려부스는 일이라면 어떠한 일도 歡迎하고 또 歡迎한다."라고 主張했다. [6] 尹致昊의 東學 農民 革命 支持 宣言이 알려지자 처음에 이들은 唐慌해하였으나, 이내 平靜心을 찾고 동비 討伐을 繼續한다.

以後 沿岸 府使 [7] 를 거쳐 求한 말에 江界 府使 兼 防禦使와 京畿道 安城郡守 兼 三男 討捕使 (三南討捕使)를 지냈다. [8]

盜賊, 마적 討伐 [ 編輯 ]

1895年 3月 4日 江界府使를 거쳐 9月 2日 沿岸 郡守(延安郡守)로 發令되었다가 11月 29日 辭退하였다. 1896年 4月 18日 安城郡守 에 任命되었다. 1897年 12月 26日 安城郡守 在職 中 陸軍 部位에 兼任되었다.

安城郡守 在職 中 마장군이라는 盜賊을 討伐하기도 했다. 그가 安城郡 으로 赴任했을 때는 安城과 近處 驪州, 利川까지 盜賊의 무리가 횡횡하였고 그 中에서도 마장군의 무리가 가장 强力하였다. 그러나 歷代 郡守들은 이들 盜賊을 제대로 掃蕩하지 못해 罷免되거나 移任되었다.

官軍이 없어서 郡守는 마장군의 脅迫 便紙를 받고 逃走했다. [9] 윤영렬은 赴任하자마자 近代的 治安 制度와 巡檢 制度를 導入했으며, 民兵隊를 組織해 盜賊 討伐에 나섰다. 討伐은 銃擊戰까지 벌이는 熾烈한 亂鬪였고 抵抗도 대단했다. [9] 윤영렬은 兵士를 募集하고 兵士들의 祿俸과 褒賞, 그리고 奴婢나 下層民에게는 免賤하여 平民이 될 수 있는 機會를 條件으로 提示했다. 安城 周邊의 盜賊들은 무리가 强盛해서 그 數가 8,000에 이른다고 主張하며 윤영렬에게 公開的으로 竹山 五峯山에서 決鬪를 벌이자는 傳喝을 보낼 程度였고, 논두렁에 숨어서 윤영렬을 狙擊한 事件도 있었다. [9] 또한 윤영렬의 討伐隊가 駐屯하던 幕舍에 刺客을 침투시켰으나 재빨리 避身하였다.

1898年 10月 그는 盜賊의 우두머리인 마장군에게 投降을 勸告했다. 1898年 12月 9日 者 "雜보"의 內容은 安城郡 의 마장군이라는 不汗黨 怪獸의 官軍에 對한 挑戰을 安城郡守이던 윤영렬이 曉諭한 글을 前載한 것이다. [10] 그러나 마장군은 듣지 않았고, 그는 直接 官軍을 이끌고 直接 討伐에 나서, 보개산 에 올라 마장군의 根據地를 掃蕩했다. 이 過程에서 盜賊이 쏜 銃에 맞고 쓰러지기도 했으나 奇跡的으로 일어나 盜賊 掃蕩을 指揮하였다. 滿洲 에서 京畿道 까지 쳐내려온 滿洲族 馬賊團 安城郡 들판에서 銃擊戰을 벌이기도 했다. 滿洲族 마적 은 새벽에 윤영렬이 잠자던 幕舍에 刺客으로 쳐들어왔지만 敏捷하게 避身하여 生命을 건졌다. 滿洲族 馬賊들을 制壓하자 이들은 다시는 쳐들어오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되돌아갔다.

安城郡守 在職 中 [ 編輯 ]

安城 郡守 在職 中 윤영렬은 凶年 疾病 을 理由로 租稅 減免을 京畿道 觀察使 와 調整에 여러番 建議하여 租稅를 減免받았다. 當時 朝鮮 社會는 官僚의 能力을 稅金 徵收 能力으로 成跡을 매겼다. 郡縣의 事情을 無視한 채 얼마 未納이면 處罰, 或은 罷免이라는 機械的인 規定까지 만들어서 運營했다. [9] 間或 巨物級 人士가 守令으로 오면 調整에 上疏해서 租稅를 蕩減하거나 猶豫하는 것이 可能했지만, 그렇지 않으면 百姓들에게 긁어서 바치거나, 出世를 抛棄하고 辭職 또는 파면당하거나 둘 中 하나를 擇해야 했다. [11]

윤영렬은 難堪한 狀況에서 以前의 郡守들이 解決하지 못한 驛屯土(驛屯土)의 밀린 稅金을 거두어 納付하는 한便, 安城郡 戶布의 折半을 蕩減받고, 義兵들이 官廳 書類를 모두 불에 태워 밀린 稅金의 納付가 어렵다고 하소연해서 稅金 蕩減을 받아내기도 했다. [11] 自己 弘報에도 能力이 있어서 安城 에만 善政碑 를 네 個나 세웠다. [11] 元來 地方官은 赴任 任期가 3年 以上을 넘을 수 없었으나, 그는 特別히 安城郡守 로 7年 동안 再任하였다. 그의 마장군 討伐은 有名稅를 타게 되었으나 지나친 名聲을 부담스러워한 그는 移任하면서 住民들에게 自身의 善政碑 는 세우지 말 것을 勸告했다. 그러나 住民들은 그의 善政碑 를 세웠고, 善政碑는 現在 安城市 安城公園에 現存하고 있다.

大韓帝國 時節 [ 編輯 ]

1927年 5月 16日 윤영렬과 한진숙의 回婚禮式 寫眞
長男 윤치오

1898年 (光武 1年) 大韓帝國 樹立 以後 陸軍 部位 를 지내기도 했다. 1902年 연기郡守(燕岐郡守)로 나갔다가 다시 中樞院議官으로 되돌아왔고, 이어 陸軍 正위로 昇進하였다. 한便 1900年代 以後 조카 윤치호 의 顚倒로 基督敎 로 改宗하고 以後 그의 家族들은 基督敎 信者가 되었다.

1902年 1月 28日 忠淸南道 延期 郡守로 나갔다가 1904年 1月 11日 陸軍 步兵 定位(陸軍步兵正尉)로 돌아왔으며 다시 2月 19日 南浦 郡守 (藍浦郡守)로 赴任했다가 3月 22日 依願免職하였다. 同年 4月 집砲棺(?捕官)으로 任命되어 湖西와 湖南의 盜賊을 討伐하는데 派遣되었다. 4月 25日 恩津 郡守로 任命되었으나 9月 2日 依願免職하였다. 1905年 3月 9日 陸軍 步兵 參領(陸軍步兵參領), 11月 9日 陸軍 步兵 富寧, 1906年 4月 嘉善大夫로 昇進했다.

1906年 (光武 9年) 4月 濬源殿(濬源殿)을 改修하는데 參與한 功勞로 嘉義大夫 로 昇進하고, 1906年 5月 29日 陸軍 步兵 精靈(陸軍步兵正領)을 거쳐 同年 9月 2日 陸軍 參將 (陸軍參將)으로 昇進했다. 이어 警務使(警務使)에 任命되었으나, 9月 3日 總理大臣 이완용 이 補職 없는 將校들을 모두 解任할 것을 請하여 解任되었다. 1907年 (隆熙 1年)에는 記號興學會 (畿湖興學會)에 加入하여 活動하였다.

1910年 7月 23日 다시 資憲大夫 로 昇進하였다. 1910年 (隆熙 4年) 10月 韓日合邦 이 되자 官爵을 辭退하였다. 그는 朝鮮總督府 가 주는 自作 作爲와 恩賜金度 拒絶하고 忠淸南道 牙山郡 둔포로 내려가 蟄居하였다. 以後 글쓰기 等으로 消日하였다.

生涯 後半 [ 編輯 ]

隱退와 萬年 [ 編輯 ]

그는 長壽하여 1920年代에 回婚禮를 올렸다 한다. [12] 日帝强占期 내내 多福한 삶을 살았다. [13]

윤영렬의 一代記를 적은 윤상공 선정록
(그의 누나 尹氏夫人이 지었다.)

1931年 에는 忠武公 李舜臣 墓所 周邊 位土가 日本人 에게 賣却當할 危機에 處하자, 遺跡地 保存運動에 參與하여 誠金을 여러 番 寄託하기도 했다. 또한 해평尹氏 門中 會議에서 文章(宗親會長)에 選出되기도 했다.

그러나 晩年에는 經濟的인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조카 윤치호 (尹致昊)에 依하면 그의 둘째아들 치소는 地主로서 엄청난 富를 蓄積했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三寸은 가난뱅이로 죽었을 것 [14] 이라고 指摘했다. 韓日 合邦 以後 一切의 公職을 맡지 않았기에 그는 死後에도 親日派로 몰리지는 않았다.

그의 조카인 윤치창 서울 鍾路區 에 豪華로운 別莊을 마련하여 親舊와 知人, 親戚들을 招請했다. 다들 윤치창 의 華麗한 別莊을 보고 무척 부러워하였지만 윤영렬만 홀로 이를 念慮하였다.

痔瘡이가 三寸, 四寸들(윤치성, 윤치병, 윤치명)과 그 아내들까지 洋風(西洋式) 집에 招待를 했다. 내 아내와 나, 그리고 名姬 또한 招待받았다.

食事 後 三寸(윤영렬)은 痔瘡이가 輸入에 비해 너무 지나치게 奢侈한 집들을 所有하고 있는 데 對해 아주 賢明한 忠告를 하셨다. "넌 이 집이 네게 너무 過할 程度로 좋다고 생각지 않니?"라고 三寸은 물으셨다. 痔瘡이는 그렇다고 對答할 수 밖에 없었다.
 
— 尹致昊日記 1938年 5月 12日子

윤영렬은 윤치창 에게 "너는 이 집이 네게 너무 過할 程度로 좋아고 생각하지 않느냐"며 홀로 念慮하였다. 얼마 뒤 윤치창은 兄 윤치왕 의 約束어음을 背書해주었다가 엄청난 빚을 지고, 債務를 辨濟하기 위해 집과 別莊을 모두 賣却해야 했다.

最後 [ 編輯 ]

1939年 11月 4日 午後 4時 [13] 忠淸南道 牙山郡 둔포면 自宅에서 病으로 死亡했다. 當時 그의 나이는 享年 86歲였다.

事後 墓所는 兄 윤웅렬 의 墓 [15] 近處인 京畿道 平澤市 팽성읍 객사리 뒤便 부용산에 埋葬되었다.

後에 刑 윤웅렬 의 墓는 牙山 석곡리로 弛張되고, 객사리 부용산에는 윤영렬과 그의 夫人 한진숙 內外의 墓와 後孫들의 墓가 造成되었다. 또한 그의 曾孫 物理學者 윤창구 의 墓는 윤영렬의 墓所 北東便에 造成된다.

事後 [ 編輯 ]

墓所는 京畿道 平澤市 팽성읍 객사리 [16] 마을 뒤便 부용산에 安葬되어 있다.

조카 윤치호 는 그가 學識이 없다고 指摘했다. 윤치호에 依하면 '그는 學校에서 敎育을 받은 적도 없었고, 順 漢文 으로 便紙를 쓸 수도 없었다. 그는 읽을 줄도 몰랐다. [13] '고 指摘했다. 윤치호 에 依하면 三寸은 글을 모르고 知識에는 門外漢이었지만 事物을 判斷하는 能力, 수腕力은 좋았다고 記錄하였다.

그에게는 妾이 1名 있었는데 事理分別力이 없었다고 한다. [14] 윤치호 에 依하면 그가 事理分別力이 없는 妾을 두지만 않았더라면, 적어도 10~15年은 더 살수 있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14] 그밖에도 윤영렬은 신덕경, 腸福籤 等의 妾을 두었다. 本妻 한진숙 蘇生 長男 윤치오 도 큰 빚을 져 被訴당하기도 했다. 한便 윤치호에 依하면 手腕에 밝은 둘째 아들 윤치소 가 財力을 모았으므로 그가 末年에 거지가 되는 일은 謀免하였다 한다. [14] 조카 윤치호 의 顚倒로 敎會에 다니면서 基督敎 信者로 改宗하게 되었다.

家族 關係 [ 編輯 ]

윤취동
(尹取東)
1798~1863
尹氏
(尹氏)
1835~1920
磻溪 윤웅렬
(磻溪 尹雄烈)
1840~1911
윤웅렬 家計도
硏究 윤영렬
(蓮龜 尹英烈)
1854~1939
한진숙
(韓鎭淑)
1851~1938
동암 윤치오
(東庵 尹致旿)
1869~1950
동야 윤치소
(東野 尹致昭)
1871~1944
惡緣 윤치성
(岳淵 尹致晟)
1875~1936
澗松 윤치병
(澗松 尹致昞)
1880~1940
南江 윤치명
(南岡 尹致明)
1885~1944
동산 윤치영
(東山 尹致暎)
1898~1996
潤滑란
(尹活蘭)
1884~1967
尹老德
(尹老德)
1889~1979
이름 未詳

기타 [ 編輯 ]

윤영렬은 本部인 淸州韓氏에게서 얻은 6男 2女 外에도 다른 消失에게서 3男 2女를 더 두었다. 消失에게서 얻은 맏딸은 一山 金斗萬 의 丈母가 된다.

評價 [ 編輯 ]

조카 佐翁 윤치호 에 依하면 그는 學識은 없었지만 勇敢하고 正直하며 성실한 사람이었다 한다. 또한 正確한 判斷力을 가진 點을 높이 評價했다. 조카 윤치호 는 '그는 朝鮮에서 가장 福 많은 사람이었다. 86年 동안 不幸이나 苦痛을 겪은 적이 單 한番도 없었다. [13] "고 評했다.

윤치호에 依하면 그는 '事理 分別을 잘 하고 停職 [13] '했으며 '가장 賢明하고 勇敢한 사람 中 하나 [14] '라고 했다.

기타 [ 編輯 ]

朝鮮 末期에 衣冠을 지낸 윤영렬 은 同名異人이다.

庶子, 庶女 [ 編輯 ]

第2共和國 의 大統領인 孫子 윤보선 (오른쪽에서 두 番째)

윤영렬은 10男 5女를 두었는데, 아들 中 한名은 어려서 死亡했다. 한便 조카 윤치호 는 1939年 11月 4日子의 自身의 日記에서 叔母(淸州韓氏 한진숙)에게 5男 2女를 두었다 [14] 고 記錄하기도 했다. 따라서 그의 딸 3名과 아들 3名은 妾에게서 낳은 庶子, 庶女들로 推定된다.

이는 아들 윤치영 이나 孫子 윤보선 은 言及하지 않았으나 조카인 윤치호 가 自身의 日記에서 '叔父의 어리석은 첩' 때문에 叔父의 健康에 害를 준 것을 叱咤하는 部分을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

윤상공 선정록 [ 編輯 ]

그의 누나 中 溫陽 으로 시집간 누나 尹氏夫人은 男동생인 윤영렬의 治績을 담은 《윤상공 선정록》을 親히 짓기도 했다. 後日 윤상공 선정록은 여러 寫本이 配布되었는데, 孫女이자 윤치성 의 딸인 윤화순 이 베낀 筆寫本 等이 現在 傳한다. 윤상공 선정록은 1983年 螢雪出版社에서 한글로 飜譯되어 出刊되기도 했다.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資料 [ 編輯 ]

  • 尹氏夫人, 《윤상공 선정록高》 (螢雪出版社, 1983)
  • 윤치호, 《尹致昊 日記:1916~1943》 (김상태 便역, 역사비평사, 2001)
  • 윤치영, 《윤치영의 20世紀:東山回顧錄》 (삼성출판사, 1991)
  • 윤보선, 《救國의 가시밭길》 (韓國政經社, 1967)
  • 윤보선, 《외로운 選擇의 나날들》 (동아일보사, 1991)
  • 이어령, 《想像力의 거미줄》 (생각의 나무, 2001)
  • 任用한, 《亂世에 길을 찾다》 (施工社, 2009)

各州 [ 編輯 ]

  1. 一說에는 1843年生이라는 說도 있다.
  2. 첫 夫人인 高齡申氏에게서는 아들이 없었다.
  3. 그러나 兄인 尹雄烈을 낳을 當時 安東金氏의 나이가 40代였다는 點으로 볼때 다른 夫人의 蘇生일 可能性도 있다.
  4. 한국역사연구회, 《1894年 農民戰爭硏究 4》 (역사비평사, 1995) 268페이지
  5. 任用한, 《亂世에 길을 묻다》 (施工社, 2009) 314
  6. 유영렬, 《開化期의 윤치호 硏究》 (한길사, 1985) 94페이지
  7. 鄭雲鉉, 《나는 皇國臣民이로소이다-새로 밝혀 쓰는 親日人物社》 (蓋馬高原, 1999) 160페이지
  8. "帝國의 忠犬 윤치영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9. 任用한, 《亂世에 길을 묻다》 (施工社, 2009) 315
  10. 김윤규, 《開化期 단형敍事文學의 理解》 (국학자료원, 2000) 132페이지
  11. 任用한, 《亂世에 길을 묻다》 (施工社, 2009) 316
  12. 中外日報 1927年 5月 16日子
  13. 윤치호, 《尹致昊 日記 (1916-1943)》 (김상태 便 飜譯, 역사비평사, 2001) 616페이지
  14. 윤치호, 《尹致昊 日記 (1916-1943)》 (김상태 便 飜譯, 역사비평사, 2001) 617페이지
  15. 엔싸이버 百科檢索 - 윤웅렬墓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16. 大韓民國 第4代 大統領 尹潽善과의 만남 忠南道정신문 2010年 3月 18日子
  17. 윤웅렬 의 消失
  18. 國民步 第41號, 1914年 1月 7日子 記事
  19. “安東敎會 90年史” (PDF) . 2016年 4月 15日에 原本 文書 (PDF) 에서 保存된 文書 . 2016年 4月 2日에 確認함 .  
  20. 윤치영 《윤치영의 20世紀:東山回顧錄》 (삼성출판사, 1991) 40페이지
  21. 윤치영 은 그의 回顧錄에서 다섯째 兄님과 13年 差異라고 하였다.
  22. 尹致昊日記-한 知識人의 內面世界를 통해 본 植民地 時期(尹致昊, 역사비평사, 2002.05)
  23. “신호철의 韓國社會혼맥 :: 네이버 카페” . 2016年 4月 15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22年 2月 18日에 確認함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