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 少年 事件
은 1991年 3月 26日에
大邱廣域市
達西區
에 살던 5名의
城西初等學校
學生이
도롱뇽
알을 주우러 간다며 집을 나선 뒤 失踪된 事件으로
[1]
이춘재 連鎖 殺人 事件
,
이형호 誘拐 殺害 事件
과 함께 3代
未濟 事件
中 하나이며
도롱뇽
알을 주우러 간다는 말이
개구리
를 잡으러 간다고 歪曲된 것이 初期에 널리 퍼지면서 "개구리 少年"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2]
事件 發生日인
1991年
3月 26日
은
5·16 軍士 政變
以後 中斷된
地方自治制
가 30年 만에 復活하여 基礎議會 議員을 뽑는
時·郡·區議會 議員 選擧
일로
臨時 公休日
이었다.
[3]
事件
[
編輯
]
5名의 初等學校 學生이 그것도 같은 날 同時에 失踪된 이 事件은 當時 相當한 波長을 일으켰고 事件 發生 2年 後인
1993年
에는
KBS 1TV
의
事件 25時
와
SBS
의
그것이 알고 싶다
를 통해 深層的으로 放映되면서 全國的인 關心을 불러일으켰다.
特히 公衆電話 카드, 葉書 等은 勿論이고 甚至於는 어린이 漫畫 비디오테이프 等까지 大大的으로 캠페인이 展開되면서 男女老少 大部分이 이 事件에 對해 認知할 程度였고 當時 政府는 警察과 軍人 等을 35萬名 投入하여 現場 周邊을 샅샅이 뒤졌음에도 不拘하고
[4]
뚜렷한 成果 없이
未濟 事件
으로 묻히는 듯하다가 事件 發生 11年 6個月만인
2002年
9月 26日
에
城山高等學校
新築工事場 뒤쪽의 臥龍山 中턱에서 아이들의 遺骨이 發見되었으나
[5]
끝내 아이들의 死亡 原因조차 제대로 糾明하지 못한 채
2006年
3月 25日
24時에
公訴時效
15年이 滿了되면서 未濟事件으로 남았으며
[2]
當時 搜索한 警察과 軍人 等 35萬名은 確實하게 搜索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公訴時效 滿了 以後에도 犯人을 찾기 위하여 刑事들이 개구리 少年 事件을 擔當하는
大邱城西警察署
와
大邱廣域市警察廳
未濟事件搜査팀이 構成되어 있다.
死亡 兒童 名單
[
編輯
]
다섯 아이들은 다음과 같다.(나이는 1991年 失踪 當時의 나이이다.)
[6]
[7]
- 우철원 (禹哲元, 1979年生, 6學年, B型+)
保護者:
우종우, 장명자
- 조호연 (趙浩衍, 1980年生, 5學年, B型+)
保護者:
조남환, 김순녀
- 김영규 (金榮圭, 1981年生, 4學年, B型+)
保護者:
김현도
[8]
, 최경희
- 박찬인 (朴燦印, 1982年生, 3學年, B型+)
保護者:
박건서
[9]
, 김임자
- 김종식 (金鍾植, 1983年生, 3學年, O型+)
保護者:
김철규
[10]
, 허도선
生存 兒童 名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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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生存 아이는 다음과 같다.
- 金泰龍 (1982年生, 事件 當時 初等學校 3學年)
(그는 어머니가 ‘너무 멀리 나가서 놀지 말라’고 했던 말이 생각나 산 正門까지만 아이들을 쫓아가고 아침밥도 먹을 兼 돌아갔다고 한다.
[11]
)
事件에 對한 論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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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遺骨 發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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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年 9月 26日에
臥龍山
에서
도토리
를 줍던 한 市民이
遺骨
을 發見하였고, 警察은 遺骨들이 한군데 엉켜 있었고 現場에 구덩이의 痕跡이 없는 點으로 보아 體溫이 떨어져 死亡한 것으로 보인다고 主張했다.
[5]
하지만 遺骨 鑑識을 맡은 경북대 法醫學팀은
頭蓋骨
損傷 痕跡 等을 根據로 아이들이
他殺
되었다고 主張했다.
[2]
하지만 犯人은 끝내 찾지 못하고 2006年 3月 25日子로
公訴時效
가 滿了되어 搜査가 終結되었다.
[2]
銃擊에 依한 他殺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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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두닦이 일을 했던 한 아무개氏(43·大邱 達西區)가
2002年
9月 28日
大邱警察廳에 "
2002年
7月에 30∼35歲의 男子 1名이
口頭
를 닦으면서, ‘軍生活 當時 어린이 5名을 銃으로 쏴 죽였다’는 말을 했다"는 提報를 했다.
[12]
[13]
이에 對해 軍 關係者는 “軍部隊에서 射擊은 적어도 10∼20名이 團體로 實施하고 있다”면서 “더군다나 이들 人員이 誤發에 依해 事故가 났다면 10餘年 동안 그 事實이 묻혀 있을 수 있겠느냐”며 可能性을
否認
했다.
[12]
未洽한 搜査
[
編輯
]
헛所聞들
[
編輯
]
1992年
8月
에
警察
에서는 "失踪 少年들이 慶北漆谷郡 某 集團 居住地 建物 地下에 暗埋葬 돼 있다."라는 申告를 듣고
한센病
患者村을 搜査하였다.
[14]
이에 一部 住民들이 取材를 위해 訪問한 幹部 2名을 包含한 記者 12名을 監禁했다가 밤 늦게 풀어주는 騷動이 있었다.
[15]
1996年
1月
에는 警察이 아이들을 김종식 君의 아버지가 죽여
집
에 묻었다는 韓國科學技術硏究院 프로파일러인 김가원 氏의 固執센 主張이 있다면서 김종식 君 아버지의 집
마당
,
化粧室
,
구들장
을 任意로 發掘해 物議를 일으켰다.
[16]
警察의 잘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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編輯
]
아이들의
遺骨
을 發掘할 때도 遺骨을 分析하여 死因을 밝혀낼
法醫學者
의 도움 없이 性急하게 作業을 進行하여 現場을 毁損하는 等 失踪과 關聯된 重要한 情報를 놓쳤다는 非難도 받았었다.
[17]
特히
2002年
에
遺骨
이 發見되었을 當時 警察은 遺骨들이 한데 엉켜 있었고 現場에 구덩이의 痕跡이 없는 點으로 미뤄 어린이들이 추운 날씨에 길을 잃고 헤매다 서로 부둥켜안고 있다가 體溫이 떨어져 숨졌을 것이라 主張했다.
[5]
그러나 遺骨 鑑識을 맡은 경북대 法醫學팀은 頭蓋骨 損傷 痕跡 等을 根據로 아이들이 他殺되었다고 主張했다.
[2]
같은 學校에 當時 初等學校 4學年 함승훈 軍은 아이들을 보지는 못했지만, 重要한 證言을 남겼다. 臥龍山 바로 밑 軍人 아파트에서 살고 있던 그는 이날 다른 무리의 洞네 兄들과 함께 도롱뇽 알을 찾으러 臥龍山 溪谷에 갔다가 兄들과 떨어져 혼자 臥龍山 中턱에 있는 무덤가 近處까지 올라갔는데,
그때 山 위쪽에서 10秒쯤 間隔으로 날카롭고 多急한 悲鳴소리를 두 次例 들었다, 이때가 點心 먹기 直前이었으니까, 11時 30分쯤 되었을 것"이라고 陳述했다. 成人이 된 함 氏는 SBS와의 인터뷰에서, "두 番 다시 듣고 싶지 않은 끔찍한 소리였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警察은 默殺했다.
事件 當日인 1991年 3月 26日 西區 중리동에 位置해 있던 家畜 屠殺場(現 퀸스로드 쇼핑몰) 隣近 버스 停留場에서 아이들이 버스를 같이 타는 걸 目擊했다는 女性의 提報가 있었으나, 警察은 默殺되었다.
永久 未解決 事件
[
編輯
]
이 事件은
이형호 君 誘拐 殺害事件
과 함께 證據不足으로 永久
未解決 事件
이 된 代表的인 事件 中 하나다.
[2]
하지만
이춘재 連鎖 殺人 事件
은
2019年
9月 18日
眞犯으로 特定된 容疑者가 나왔고, 2019年
10月 1日
容疑者인
이춘재
가 모든 犯行을 是認하고, DNA 檢證까지 마치면서 事件이 終結되었다.
[18]
조호연 軍의 집에 貰를 들어 살고 있던 靑年이 아이들에게 '시끄러우니까 나가서 놀라'라고 핀잔을 줬다. 事件이 일어난 後, 이 靑年은 인터뷰에서 나 때문에 아이들이 죽었다며 눈물을 흘리면서 自責했다고 傳해진다.
大衆文化 ·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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編輯
]
- 遺骨 發見 以前 (1991年 3月 ~ 2002年 9月 24日)
- 遺骨 發見 後 (2002年 9月 26日 ~ 搜査 終了까지)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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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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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年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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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年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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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年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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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年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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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年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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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年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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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年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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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年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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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年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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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年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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