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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美國版 自然人’이다”|신동아

“나는 ‘美國版 自然人’이다”

궁상맞아 보이나요? 이보다 더 幸福할 순 없어요!

  • 美國 시애틀=김선우·박혜윤

    wildwildthing@naver.com

    入力 2021-06-15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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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美國 시골 生活, 現實이 되다

    • 우물물 길어 먹고 淨化槽 쓰는 單層 組立式 住宅

    • 봄에는 쐐기풀科 고사리, 여름에는 野生 블랙베리 收穫

    • 인터넷 解止하고 찾아온 평화로운 삶

    • 農夫, 라이프가드, 專業主婦 그리고 作家

    • 밀 갈아 빵 굽고, 파스타 국수까지 直接 반죽해서 뽑아내

    • 變化가 두려운 理由는 旣存의 내 것을 잃을 거라는 不安 때문

    筆者 김선우와 박혜윤은 2001年 동아일보에 記者로 入社한 後 夫婦의 緣을 맺은 특별한 사이다. 아내 박혜윤은 첫아이를 낳은 뒤 2005年 退社했고, 男便 김선우는 아내 박혜윤이 첫아이와 함께 美國 留學을 떠나자 5年餘 기러기 아빠 生活을 하다가 2013年 退社한 後 美國으로 건너가 完全體 家族으로 結合해 現在까지 美國 시애틀 隣近에서 살고 있다. 우물물을 길어다 먹고, 下水道가 아닌 淨化槽를 쓰는 美國 시골 奧地에서 美國版 自然人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김선우·박혜윤 夫婦가 그들만의 남다른 삶의 이야기를 傳해왔다. 박혜윤은 6月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숲속의 資本主義者>를 冊으로 펴냈다.  [편집자 週]

    집 근처 한 농장 앞에 선 김선우 씨. [김선우·박혜윤 제공]

    집 近處 한 農場 앞에 선 김선우 氏. [김선우·박혜윤 提供]

    “우리 시골 가서 살자.”

    2005年, 結婚한 지 2年쯤 됐을 때였다. 아내가 爆彈 提議를 했다. 스콧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 夫婦의 ‘조화로운 삶’을 읽고 나서였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며 넘겼다. 나는 괜찮은 職場에 다니고 있었고 첫딸은 돌이 다 돼가고 있었다. 아내는 첫째를 키우겠다며 會社를 막 그만둔 狀況이었다. 일이야 나 혼자 해도 상관없지만 다 그만두고 시골 가서 살자는 얘기는 하루하루 精神없이 바쁘게 사는 職場人에게는 그저 浪漫的인 얘기일 뿐이었다. 現實感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로부터 10年이 지난 2015年 우리는 美國 시애틀에서 北쪽으로 車로 1時間 程度 걸리는 시골로 移徙를 왔다. 아내 박혜윤에게는 ‘꿈은 이루어진다’였을 테고, 나 김선우에게는 ‘絶對 아니라고 말하지 말라(Never say never)’는 敎訓이 됐다. 시골에서 사는 게 現實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거짓말같이 뚱딴지(돼지감자)도 심었다.

    기러기 男便의 ‘번아웃’

    “우리 시골 가서 살자”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던 提案을 實行에 옮기게 된 理由부터 說明해야 할 것 같다.



    얘기를 꺼내자마자 男便에게 面駁을 當한 아내는 事實 다른 꿍꿍이셈이 있었다.

    “나 美國 가서 工夫할 거야.”

    ‘나 XX할 巨野!’式의 宣言을 워낙 잘하는 사람인지라 別로 귀담아듣지 않았다. 저러다 말겠지 싶었다. 그런데 아내는 애를 업고 美國 大學院 入學에 必要한 GRE 工夫를 했다. 英語 單語를 毒하게 외우고 願書를 쓰는 걸 보니 살짝 怯이 났다. 애가 잠든 어느 날 밤 물어봤다.

    “眞짜 가려고?”

    “응.”

    “애는?”

    “데리고 가야지.”

    “애 데리고 혼자 무슨 工夫야?”

    “於此彼 얼굴도 잘 못 보고 사는데 뭘.”

    빨리 退勤해 봐야 밤 10時, 11時였던 時節이다. 日曜日에도 隔週로 出勤했다. 얼굴을 잘 못 보고 산다는 건 事實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라고? 아내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을 데리고 도망가는 것만 같았다.

    以後 나는 5年 동안 기러기 生活을 했다. 中間에 休職하고 아내가 다니는 大學에 가서 工夫한 期間을 除外하고 萬으로 5年이다. 아내와 딸은 여름放學과 겨울放學 때는 無條件 韓國에 와서 지냈고, 나는 休暇 때는 美國行 飛行機를 탔다. 쌓이는 건 航空 마일리지뿐이었다. 만나면 반갑다고 뽀뽀뽀라고 했던가. 그 渦中에 둘째 딸도 태어났다. 첫째와 아내는 美國에서, 나는 둘째와 서울의 父母님 宅에서 社는 21世紀 異常한 家族의 標本이 됐다.

    事實 옆에서 잔소리하거나 바가지 긁는 사람도 없고, 둘째는 父母님이 키워주고, 기러기 生活은 커리어에 專念하기엔 그리 나쁘지 않은 옵션이긴 했다. 會社는 나의 全部가 됐다. 나 나름대로 熱心히 일했다. 大學院 博士課程에도 登錄해 工夫도 했다. 하지만 決코 持續 可能한 삶의 方式은 아니었다. 기러기 生活이 오래되자 내가 무슨 富貴榮華를 누리겠다고 이렇게 사는지 모르겠다는 自愧感이 들기 始作했다. 一種의 번아웃이었던 셈이다. 기러기 生活 5年 만에 그렇게 若干은 衝動的으로 辭表를 냈다. 아무런 計劃 없이 둘째를 데리고 美國行 飛行機에 올랐다. 2013年의 일이다.

    시골에서 산다는 건…

    고사리를 삶은 뒤 말리는 건 매년 봄 연례행사다. [김선우·박혜윤 제공]

    고사리를 삶은 뒤 말리는 건 每年 봄 年例行事다. [김선우·박혜윤 提供]

    美國에서 살다 보면 무슨 일이라도 하게 되겠지 싶었다.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말로 記事를 쓰던 新聞記者가 美國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經歷이 曖昧해서 그런지 스타벅스 賣場 職員으로도 뽑아주지 않았다. 創業이나 自營業은 두려웠다. 12年 동안의 職場 生活은 안 그래도 不足한 企業家 精神을 바닥內 버렸다.

    그때 시골 가서 살자는 아내의 말이 생각났다. 첫째가 學校를 가면 어린 둘째를 車에 태우고 땅을 보러 다녔다. 얼마나 돌아다녔는지 둘째는 車 뒷座席에서 멀미를 하곤 했다. 그러기를 6個月餘. 작은 내가 흐르고 鬱蒼한 숲이 있는 땅을 發見했다. 땅은 좋았지만 집은 그저 그랬다. 電氣는 連結돼 있지만 물은 우물물을 쓰고 下水道가 아닌 淨化槽를 쓰는 작은 單層 組立式 住宅이었다.

    시골 땅과 집을 사기 前에 해야 하는 건 願하는 삶의 方式이 어떠한지 시시콜콜 具體的으로 생각해 보는 거다. 사고팔기 쉬우며 時勢差益을 얻기 쉬운 곳을 찾는다면 돈이 많아야 한다. 돈이 그렇게 많지도 않았지만, 더 重要한 건 美國에서는 비싼 不動産을 사면 保有稅, 維持費 等이 너무 높았다. 하지만 내가 只今 當場 願하고, 내가 누리고자 하는 것을 明確하게 알면, 딱 그 價値에 合當한 市場價格의 物件을 찾는 일은 比較的 쉬워진다.

    이 過程을 통해 우리는 써본 적이 없는 腦의 한 部分이 깨어나는 經驗을 했다. 바로 使用價値. 勿論 이 말의 뜻은 알았다. 하지만 그게 ‘나’에게 얼마나 重要한 것인지는 몰랐다. 내가 都大體 무엇을 願하는지를 細密하게 알면 알수록 돈이든 時間이든 집이든 뭐든 더 많은 價値가 생긴다는 것 말이다. 우리는 땅이 집보다 더 重要하다고 생각했고, 땅에서 뭔가 할 수 있기를 바랐다. 집은 살 수 있을 程度로만 손을 봤다. 페인트도 直接 사서 漆했다. 그렇게 2015年 여름 우리는 넓은 땅에 組立式 住宅이 있는 시골로 移徙를 왔다.

    願하는 것을 알아가는 건 한 番에 끝나는 일은 아니다. 過程일 뿐이다. 元來 計劃은 農事를 짓는 것이었다. 移徙하기 前에 農場에서 인턴으로 일하면서 農事를 배웠다. 農事의 技術만 배운 건 아니었다. 農事는 머리가 아닌 몸으로 한다는 事實도 배웠다. 平生을 都市의 아스팔트 바닥에서 살던 사람이 40歲가 넘어서 몸으로 農事를 배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허리를 펴기가 어려웠다. 손목은 걸핏하면 아팠다. 그래도 移徙한 後 맞은 첫봄에 블루베리 苗木과 沙果나무를 비롯한 과일나무를 싶었다.

    하지만 바로 큰 難關이 닥쳤으니, 바로 사슴!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이 아름다운 生命體에 對해, 世上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意圖的인 殺意를 느꼈다. 사슴들이 블루베리 苗木이나 沙果나무들, 菜蔬 作物을 焦土化했다. 正確하게 새筍만 먹어치운다. 100그루도 넘게 심었는데 어림도 없었다. 周邊에서는 어떻게 할까. 藥을 치고, 울타리를 두르고, 極端的으로는 사냥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낯설었던 건 그토록 克明한 憎惡와 敵意였다. 都市 出身의 우리는 시골 生活의 勞動보다 所有 觀念이 더 컸다. 내 땅, 내가 심은 걸 침해당하는 것을 正말이지 참을 수가 없었다. 都市 깍쟁이가 이런 거구나. 自然과 어울려 산다는 것은 불쌍한 動物에게 먹이를 주고 自然의 아름다움에 驚歎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熾烈하게 내 먹을 것을 지켜내는 熱情이었다. 우리에게는 그런 熱情이 없었다. 人間이 農事를 지어서 蕃盛한 그 本能을 이렇게 만났다. 그래서 本格的인 農事는 안 짓기로 했다.

    代身 우리도 사슴을 본받기로 했다. 農事는 텃밭 水準으로만 짓고 代身 野生으로 자라는 作物들을 採集하기로 했다. 봄에는 쐐기풀科 고사리를 따고 여름에는 野生 블랙베리를 收穫한다. 삶아서 말리거나 冷凍시켜 1年 내내 먹는다. 그리고 野生 植物에 對해 工夫한다.

    그러다가 내 먹을 것을 빼앗아 먹는 사슴에게 느꼈던 불타는 敵意만큼 强烈한 또 다른 本能을 만났다. 自然에서 野生으로 자란 植物과 과일을 따고 있으면 그야말로 없던 힘도 마구 솟아난다. 이 비슷한 欲望을 어디서 느껴봤는데… 세일 品目을 잘 찾을 때 느꼈던 쇼핑의 緊張과 快感! 바로 그거였다. 잘 익은 과일, 順한 맛을 保障하는 植物의 色깔을 찾는다. 그것을 찾으려면 가시를 避하기도 해야 하고, 잘 살펴봐야 한다. 이런저런 障礙를 被害 收穫을 하면 말 그대로 時間을 잊는다. 農場에 가서 과일 따기 體驗도 해봤지만 이 快感은 次元이 다르다. 遠視 祖上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깊은 本能을 또 이렇게 만났다. 게다가 우리가 심지도 않고 管理도 안 했는데, 空짜로 자란 雜草들 아닌가. 사슴이 먹고 우리가 먹어도 넘쳐났다.

    인터넷 없이 살기

    시골에 移徙 와서 가장 놀랐던 건 인터넷 서비스業體가 衛星 인터넷 말고는 없다는 點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느려터진 衛星 인터넷을 月 10萬 원씩 주고 使用했다. 말이 衛星 인터넷이지 速度는 體感上 電話 모뎀 水準이었다. 畵面이 로드되는 데만 몇 分이 걸렸다. 衛星 인터넷을 1年 程度 使用한 뒤 인터넷을 없애보기로 했다. 車 타고 15分 程度 가면 있는 洞네 圖書館에서 인터넷을 使用하면 되니까.

    實驗的으로 인터넷 모뎀 電源을 끄고 산 지 約 한 달 만에 인터넷을 解止했다. 若干 슬프긴 했지만 事實 시원섭섭했다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虛費하는 時間이 너무 많았다. 인터넷을 끄고 하루 동안 利用하지 않다가 洞네 圖書館에 가서 실컷 利用해 보니, 한 時間이면 充分했다. 以後엔 그냥 習慣的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나를 發見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집에서는 느린 인터넷이라도 틈만 나면 쳐다보는 게 日常이었다. 따지고 보면 하지 않아도 사는 데 아무런 支障이 없는 일들이다.

    시골로 移徙 온 뒤 카페인도 끊고 술도 끊어보니 人間은 適應의 動物이다. 없으면 죽을 것 같았던 것들이 眞짜로 없어져도 絶對로 죽지 않았다. 없으면 죽을 것 같다는 건 그냥 防禦機制일 뿐이었다. 韓國에 있을 때는 잠자는 時間을 除外한 깨어 있는 모든 時間에 情報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스마트폰부터 確認했고 자기 前엔 쓸데없는 유튜브 動映像 같은 걸 봤더랬다. 甚至於 밥을 먹을 때도 혼자서 먹으면 누군가와 카카오톡을 하거나 페이스북을 하면서 먹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런 情報의 흐름이 갑자기 끊기자 日常이 매우 한가롭고 여유로워 졌다. 하루에 한 時間 程度 集中的으로 인터넷을 하며 情報를 받아들이고 나머지 時間에는 農事를 짓든, 멍을 때리든, 잠을 자든, 冊을 읽으니 무척 평화로운 삶이 찾아왔다. 어쩌면 스트레스가 없어서 刺戟이 必要 없어진 건지도 모르겠다.

    4가지 職業

    이렇게 살면 4人 家族의 生活은 어떻게 維持할까. 나는 職業이 4個다. 하나씩 살펴보자.

    1) 農夫 : 제대로 農事를 짓지는 않지만 봄에는 고사리와 쐐기풀을 따서 나물을 만든다. 여름에는 블랙베리를 收穫하고 라벤더를 말린다. 이 밖에 케일, 토마토, 호박, 깻잎, 마늘, 파 等 닥치는 대로 심어서 먹는다. 그러니 어쩌면 農夫라기보다는 野生 食用 먹을거리 採集者라고 하는 게 더 正確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儼然한 일이다. 적지 않은 時間을 投資해야 하니까. 收穫한 뒤에 말리고 整理하는 것도 큰 일이다. 들어오는 돈은 없지만 代身 食料品費를 大幅 아낄 수 있다. 人間關係 品位 維持費도 充當된다. 野生 먹을거리를 손질해서 膳物하면 비싼 物件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2) 라이프가드 : 洞네 水泳場에서 水泳하고 싶었지만 여기에 내는 돈이 아까워 아예 일하면서 空짜로 水泳하는 方法을 擇했다. 4日 授業을 듣고, 水營 試驗을 通過하고, 心肺蘇生術과 構造 實習을 한 뒤 資格證을 땄다. 딱 재미있을 程度만 일한다. 一週日에 서너 番, 한 番에 네다섯 時間만 일한다. 平均 一週日에 15時間 程度다. 일한 다음에는 꼭 水泳을 40分 程度 하고 退勤한다. 美國의 最低賃金 水準이라 別 거 아닌 것 같지만 이 일이 慇懃히 生活에 規則性을 附與하고 삶에 活力을 준다.

    3) 專業主婦 : 아내가 먹는 것과 關聯된 일을 도맡아 하긴 하지만 以外의 집안 일 大部分은 내가 한다. 아이들도 많이 도와준다. 化粧室 淸掃는 애들이 主로 한다. 勿論 이로 인한 輸入은 없다. 하지만 配管이나 電氣 等 專門的인 部分을 除外하고는 집 管理를 外注 주는 일은 거의 없다. 요즘엔 유튜브가 워낙 좋아서 배우기도 쉽다. 人件費가 비싼 美國에선 돈을 比較的 많이 아낄 수 있다.

    4) 作家 : 2, 3個 인터넷 媒體에 글을 쓰고 飜譯을 한다. 아내와 e메일 購讀 서비스도 運營한다. 많은 돈을 벌지는 못하지만 가장 많은 時間을 들이는 일이다. 글을 쓰려면 많이 읽어야 하고 또 글을 쓰는 時間도 必要하니까. 하지만 아마도 가장 즐겁게 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前職 記者라 아직도 取材를 해서 글을 쓰는 게 더 便하긴 하다.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들으면서 取材할 때는 궁금한 걸 直接 물어볼 수 있지만 只今은 主로 글을 읽고 2次 加工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궁금한 걸 물어볼 수 없다. 하지만 神奇하게도 글을 읽고 글을 쓰는 只今의 方式에 고마움을 느낀다. 궁금한 걸 물어볼 수 없기 때문에 더 熱心히 읽고 더 熱心히 생각하게 됐기 때문이다. 생각을 熾烈하게 하다 보면 全體 그림이 그려질 때가 있다. 그땐 正말 글 쓰는 게 재미있어진다.

    즐겁게 하는 일의 에너지

    수영장에서 라이프가드로 일하고 있는 김선우 씨. [김선우·박혜윤 제공]

    水泳場에서 라이프가드로 일하고 있는 김선우 氏. [김선우·박혜윤 提供]

    내 안의 認定欲求는 글로 解決한다. 인터넷에 쓰는 글에는 惡플이 달리는 境遇도 있지만 가끔은 좋은 反應도 온다. 처음엔 惡플 하나 때문에 心臟이 벌렁거렸는데, 只今은 마음을 갈고닦아 ‘善플’만 報告 ‘自뻑’하는 멘털을 獲得했다. 周邊에 비슷한 사람들에 둘려 싸여 살 때는 몰랐던 精神狀態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있으면 確實히 마음이 便하기는 하다. 말도 잘 통하고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方向을 잡는 것도 쉽다. 하지만 나쁜 點도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그렇게 살다 보면 내가 딱히 잘났다거나 특별한 存在라고 느끼기는 쉽지 않다. 좋아하는 先後輩, 이웃 親戚들인데도 隱然中에 비슷한 사람들이니 競爭心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는 외따로 떨어져 있어서 내가 잘 살고 있는지 어떤지 不確實하고, 사람들이 그립기도 하지만, 以前에는 한 番도 느껴보지 못한 便安함이 있다. 나는 그냥 固有한 나라는 느낌이 그것이다. 發展하지 않는 懶怠함일까? 그런 不安함이 들기도 하지만, 萬若 그렇다 하더라도 亦是 人生은 長短點이 各各 따로 있는 셈 치기로 했다.

    20餘 年 前 누군가가 “넌 20年 뒤엔 職業을 5個 가질 거야”라고 말했다면 코웃음을 쳤을 거다. 只今 現在 내가 아는 사람 大部分은 職業이 하나다. 勿論 이 5가지 職業을 營爲하려면 慇懃히 바쁘다. 하지만 하나의 職業을 가진 사람보다는 훨씬 덜 바쁠 거다. 왜냐하면 재미있는 만큼만 하기 때문이다. 住宅 賃貸 管理는 맘대로 안 되긴 하지만 그 같은 큰일은 1年에 몇 番 없다.

    이렇게 살면서 깨달은 건 ‘즐겁게 하는 일의 엄청남’이다. 農事짓는 거나 글을 쓰는 거나 라이프가드 일이나 즐거운 만큼만 하다 보면 일 하나하나에 集中하고 氣分 좋게 할 수 있다. 事實 職場을 다니다 보면 아무리 좋아하는 일을 하더라도 組織에 屬해 있기 때문에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하고, 일이 힘들어질 때도 있다. 하지만 내가 處한 狀況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다른 일로 바빠서 글 마감을 못 할 것 같으면 編輯者에게 이番 週는 쉬어 가겠다고 미리 알려주고 그 回次 原稿料를 抛棄하면 끝이다.

    自足하는 삶

    김선우·박혜윤 부부는 스마트폰 대신 구식 폴더폰을 쓴다. [김선우·박혜윤 제공]

    김선우·박혜윤 夫婦는 스마트폰 代身 舊式 폴더폰을 쓴다. [김선우·박혜윤 提供]

    收入이 많지 않은 우리가 즐겁게 살 수 있는 理由는 單純하다. 버는 것보다 덜 쓰기 때문이다. 于先 아이들 敎育費는 쓰지 않는다. 가르칠 것이 있으면 우리 夫婦가 直接 가르치자고 마음먹었는데, 막상 그럴 일은 別로 없다. 애들이 天才라서가 아니라 學校 成績이 그렇게 重要한지 잘 모르겠다는 마음가짐 때문이다. 支出을 줄이기 위해 直接 된醬을 담그고, 밀을 갈아 빵을 굽고, 파스타 국수까지 直接 반죽해서 뽑는다. 뭐든지 直接 만든다. 커튼도 남는 천을 잘라 붙여 만든다.

    자질구레하게 집 고치는 일도 直接 한다. 便器 交替, 빗물 홈桶 設置 方法을 배운 것은 꽤나 뿌듯하다. 洗劑나 비누는 直接 만들어 쓴다. 머리 손질도 直接 한다. 車는 한 臺뿐이며 옷이나 物件은 거의 사지 않는다. 살 일이 있으면 中古가게에서 산다. 처음에는 남이 입던 옷을 어떻게 입고, 남이 쓰던 그릇을 어떻게 쓰냐고 생각했다. 그러면 食堂 가서 밥도 먹지 말아야 한다. 잘 빨고 깨끗이 씻어서 쓰면 된다. 銀行 빚은 없다.

    銀行 빚과 인터넷, TV 外에도 우리 집엔 없는 게 많다. 스마트폰, 전자레인지, 電氣밥솥, 다리미도 없다. 전자레인지나 밥솥으로 하는 일은 우리에게 많은 時間으로 때운다. 會社를 안 나가니 다리미질이 必要한 옷은 다 없앴다.

    이곳에 오래 살다 보니 親舊도 생겼다. 코로나 以後에는 자주 못 보지만 한 달에 한두 番 만나면 밤늦도록 얘기꽃을 피운다. 人間關係가 많지 않다 보니 한番 만나면 熱과 誠을 다해 떠든다. 所重한 因緣이다. 亦是 모두들 우리가 살아왔던 方式과는 共通點이 거의 없는 神奇한 사람들이다. 그들을 보면서 刺戟을 받기도 한다. 사람들은 各自 다른 方式으로 熱心히 살아가는구나. 熱心히 사는 方式이 이토록 다양한지 예전에는 몰랐다. 옛날에는 낯선 사람을 만나면, 마음속으로 ‘옳지 않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只今은 우리도 누군가에게 엄청나게 神奇한 사람이라는 것을 經驗하면서 나와 다른 사람에게도 나 自身에게도 많이 너그러워졌다.

    아이들 敎育費를 들이지 않는 代身, 아이들이 日常에서 發生한 問題를 스스로 解決하는 方法을 찾는 過程에 함께한다. 人形을 갖고 싶으면 만들라고 한다. 圖書館에서 冊을 빌려주고, 유튜브를 보여주면서 스스로 뜨개질하는 方法을 익힌다. 材料를 購入하는 곳과 必要한 材料의 리스트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初等學校 때부터 이런 經驗을 한 高等學生 딸은 인터넷 쇼핑몰을 만들어서 小小하게 人形을 만들어 팔고 있다.

    이쯤 되면 뭔 窮狀이냐고 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實際 삶의 滿足度는 매우 높다. 아무래도 그 理由는 時間에 있는 것 같다. 처음에는 남아도는 時間이 詛呪처럼 느껴졌다. 맨날 ‘오늘은 뭐하지?’ 그렇게 하루를 始作했다가, ‘오늘도 한 일이 하나도 없네’로 하루를 마감했다. 하지만 이제는 하루의 時間을 ‘成就와 業績’으로 채우는 代身 좀 더 좋은 ‘關係’를 만들어나가기로 마음을 바꿨다.

    그러다 보니 家族關係가 第一 좋아졌다. 世上 모두가 家族이 가장 所重하다고 한다. 그걸 머리로는 理解하지만 시골로 오기 前에는 家族과의 關係로 時間을 채우는 方法에 對해 잘 몰랐다. 家族과 함께 쌓는 日常으로 삶을 채울 수 있다는 事實도 잘 몰랐다. 時間은 돈을 벌거나 더 높은 成就를 위해 채우고, 그 돈으로 家族을 위한다고 생각했다.

    只今은 하루 大部分의 時間을 딸 둘을 包含한 네 家族이 함께 밥을 해서 먹고, 수다를 떨고, 집안일을 한다. 이렇게 살면서 우리 家族 4名은 運命 共同體로 거듭났다. 外部의 因緣이 많지 않으니 內部的인 結束이 다져진다고 해야 할까. 4名이 서로 눈치 보느라 바쁘다. 서로 잘 보여야 生存이 可能하니까. 가끔은 地球에 單 4名만 남은 氣分이다.

    運命 共同體로 거듭난 家族

    김선우·박혜윤 부부 집에서 바라다보이는 창밖 풍경. [김선우·박혜윤 제공]

    김선우·박혜윤 夫婦 집에서 바라다보이는 窓밖 風景. [김선우·박혜윤 提供]

    正確하게 말하면, 우리 家族이 和氣靄靄하게 지내는 게 아니다. 오히려 우리 家族은 대단히 느슨해졌다. 4人 核家族에서 想定하는 돈 벌어오는 父母, 工夫해서 앞으로 社會에서 돈 벌 準備를 하는 그런 家族의 役割을 버렸다는 뜻이다. 家族이 서로에게 幸福을 求하지 않고, 義務도 없고, 더 나아지고, 더 채우고, 더 좋은 무엇이 돼야 한다는 期待 없이 우리의 關係는 저절로 오래 持續될 거라는 利害만으로 家族이 支撐할 수 있는지 그걸 알아보고 싶었다.

    家族이라는 構造와 形態를 維持하기 위한 目的이 아니라, 그냥 現在의 나로서 充分한 關係들이 可能할까 그게 궁금했다. 그래서 記念日이나 生日, 各種 祝賀 行事는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아이라고 해서 學校 工夫를 熱心히 해야 할 義務도 없고, 어른이라고 해서 돈을 벌어 家族을 扶養해야 할 義務가 있는 것도 아니다. 工夫를 하고 돈을 버는 것은 家族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理由가 있으면 足하다.

    우리 家族이 함께하는 時間 中 가장 幸福에 가까운 時間이라면, 居室에 모두 모여 서로 自己 일에 沒頭해 있을 때다. 때로 思春期 큰아이는 혼잣말로 宿題나 學校에 對한 不平을 중얼거리기도 한다. 둘째도 마음에 드는 冊이 없다며 갑자기 혼자서 性質을 부리기도 한다. 父母인 우리도 各自 돈 받고 義務的으로 글을 써야 하기도 하고, 스스로 내켜서 雜글을 쓰기도 한다. 뭘 쓰는지는 서로 모른다. 힘들게 돈 버는 아빠를 優待하는 雰圍氣는 없다. 아이들도 工夫를 핑계로 家事勞動에서 免除되지 않는다. 工夫는 各自 自己 選擇일 뿐이기에. 따라서 함께 사는 사람으로서 해야 할 義務가 恒常 優先한다. 우리 家族은 착한 行動과 나쁜 行動, 義務를 區分하지 않는다. 남을 해치는 일이 아닌 以上, 그 사람 自體인 것으로, 그리고 各自 自己가 하고 싶다고 스스로 定한 일을 해내는 것으로 充分하다.

    우리의 家族關係는 따지고 보면 冷靜한 便에 가깝다. 우리는 그게 좋다. 人間은 根本的으로 외롭고 不安한 存在다. 이 根源的인 人間의 條件을 잊거나 克服하기 위해 여러 社會 制度와 組織이 存在한다. 우리는 서로의 외로움을 달래주거나 幸福을 줄 수 없지만, 代身 各自의 외로움·不安·不足함을 서로 認定해 준다. 只今까지는 家族의 目的이 더 많은 財産을 모으고, 더 競爭力 있는 能力을 키우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더 發展하지 않고 只今 그대로여도 괜찮다”고 서로에게 말해 주는, 이런 ‘關係’를 基盤으로 한 家族도 괜찮을 것 같다.

    우리가 美國 시골에 살면서 發見한 事實은 새로운 나라, 새로운 環境이 얼마나 더 좋은지, 或은 더 나쁜지가 아니었다. 한 마디로 要約하자면 우리가 깨달은 點은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同時에 사람은 아주 쉽게 바뀔 수 있다’는 點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우리가 얼마나 韓國的이며, 얼마나 都市的인 사람들인지 發見했다. 以前에는 의식하지도 못하던 것들이다. 意識도 못 하던 事實에 對한 새로운 認識, 바로 그것이 變化의 出發이었다. 變化라고 해서 우리의 타고난 本性, 지나온 過去의 習慣이나 趣向을 버리는 게 아니었다. 變化가 두려운 理由는 내가 가진 旣存의 것들이 사라질 거라는 不安함에 있다. 多幸히도 사람은 變하지 않는다. 하지만 適應하고야 만다. 그것도 내가 只今까지 意識도 하지 못하고 지나온 ‘나의 것’들을 통해서 말이다.

    우리는 이제 다시 都市에 살면 더 기쁘게 都市를 즐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或은 더 깊은 시골이나 더욱 낯선 나라에 가도 거기만의 즐거움을 찾아낼 것이다. 내가 願하는 것, 내가 즐기고 누리는 것들을 正直하게 發見하면서.

    #自然人 #美國시골 #新東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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