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기 (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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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기
金萬基
朝鮮 의 兵曹判書
在任 1673年 ~ 1674年
賃金 朝鮮 顯宗
朝鮮 의 禮曹判書
在任 1674年~1675年
賃金 朝鮮 顯宗
朝鮮 肅宗
身上情報
出生日 1633年 2月 2日 ( 1633-02-02 )
死亡日 1687年 3月 15日 ( 1687-03-15 ) (54歲)
國籍 朝鮮
經歷 禮曹參判
黨派 西人 後裔 性向 老論 勢力
父母 김익겸 (簿), 해평 尹氏 否認(某)
兄弟姊妹 김만중 (아우)
配偶者 서원夫婦인 淸州 韓氏
子女 김진구(長男)
김진규(次男)
인경왕후 광산 金氏 (딸)
김진서(三南)
親姻戚 김춘택(親孫)
김익희 (異腹 摘出 伯父)
김익훈 (異腹 庶孼 叔父)
學問 活動
分野 性理學
徐薰 輔國崇祿大夫

김만기 (金萬基, 1633年 2月 2日 ( 1633-02-02 ) ~ 1687年 3月 15日 ( 1687-03-15 ) )는 朝鮮 時代 中後期의 文人· 文身 官僚 出身이자 戚臣이다. 兵曹判書 等을 거쳐 禮曹判書 等을 지낸 그는 인경왕후 의 親庭아버지로 肅宗 의 匠人이다. 字는 영숙(永叔), 號는 徐碩(瑞石)·정관재(靜觀齋), 本館 鑛山 (光山)이다. 九雲夢 을 지은 西浦 萬衆 은 그의 아우이며, 益勳 은 그의 배다른 庶孼 叔父이다. 김익희 , 송시열 의 文人이다. 黨色으로는 西人 黨員이었다가 西人 분당 時 老論 에 加擔하였다.

1652年 (孝宗 2) 生員·進士試 양시에 壯元으로 合格한 뒤, 1653年 別試文科에 及第하여 官職에 올랐으며, 1659年 孝宗 이 죽고 服喪問題로 第1次 禮訟 論爭이 發生하자, 송시열 , 송준길 , 김수항 을 따라 朞年服說을 支持하였다. 1666年 (玄宗 7) 全羅道 都事로 任命되었다가 司諫院 大司諫 , 承政院 左承旨 等을 歷任했다. 1671年(玄宗 13) 딸 인경왕후가 世子嬪으로 揀擇되어 國魂을 하고, 1674年 사위 肅宗이 王으로 卽位하면서 輔國崇祿大夫 영돈녕府使로 昇進하고 광성府院君에 封爵되었다.

1671年 禮曹 參判 으로 昇進한 뒤 承文院 製造, 五衛都摠府 副摠管, 觀象監 製造, 兵曹 參判 等을 거쳐 1672年 成均館 大司成 과 副提學으로 塡補되었다가 弘文館 藝文館 洋館의 大提學 을 兼職하고, 知成均館事, 同知經筵事에 同知義禁府事를 兼職했다. 1673年 兵曹 板書 , 春秋館 知事, 禮曹判書 로 옮겨 正憲大夫 로 昇進하고, 1674年 保國, 敦寧府 領事가 되었으며 2次 禮訟 論爭 때에는 3年服說을 主張하였다. 五衛都摠府 都摠管, 扈衛大將 , 典牲署 製造를 歷任했다. 1680年 김석주 , 김익훈 等과 함께 남인 打倒에 앞장섰다. 1680年 허영 , 허새 의 獄事를 다스린 功勞로 分忠孝의병기협모 保社功臣 1等館에 책록되고 風程度감 都提調를 歷任했다. 事後 不祧之典 을 받고 1719年 (肅宗 45) 玄宗의 卯正에 配享되었다.

生涯 [ 編輯 ]

初期 活動 [ 編輯 ]

曾祖父는 刑曹參判을 지내고 議政府 領議政 追贈 된 문원공 沙溪 김장생 이며, 할아버지는 增 議政府領議政 허주 김반이高, 아버지는 生員 增 議政府領議政 光源府院君 김익겸 이다. 어머니는 綸旨의 딸 해평 尹氏 夫人이다. 동생은 西浦 김만중 이다. 그밖에 광남 김익훈 이 그의 異腹 鉏叔父(배다른 庶孼 叔父)였고, 愼獨齋 金集 은 그의 從祖父였다. 그의 아버지 益兼 [1] 先生은 丙子胡亂 때 殉節하였고 홀어머니(未亡人 해평 尹氏 否認)와 遺腹子 동생 김만중 과 함께 어렵게 자랐다. 後日 그가 일찍 죽자 西浦 金萬重은 어머니 해평尹氏를 直接 奉養하기도 했다. 本貫은 鑛山으로 司馬榜目, 門過放牧 中의 一部 寫本에는 그의 本貫을 鑛山의 別稱인 光州 로도 記述한다. 그의 집안은 西人 黨員으로 김만기度 곧 西人 의 黨員이 된다. 後에 西人이 老論 少論 으로 갈라지자 大體로 그의 後孫들은 老論 에 加擔한다.

그 뒤 배다른 百部 김익희 (金益熙)의 門下에서 漢學을 修學하다가, 曾祖父 沙溪 김장생 과 從祖父 愼獨齋 金集 의 門下生인 尤庵 송시열 의 文人으로 受學하였다. 郡守 를 지낸 한流量(韓有良)의 딸 서원夫婦인 韓氏 (西原府夫人 韓氏)와 結婚하여 김진구(金鎭龜), 김진규(金鎭圭), 김진서(金鎭瑞), 인경왕후 等의 子女를 두었다. 孝宗 4年(1652年) 生員試와 進士試 양시에 모두 壯元으로 及第하였다.

官僚 生活 [ 編輯 ]

1653年 別試文科에 乙과 3人으로 及第하여 承文院 에 補任되었다. 그 뒤 장예원 州서, 承文院 州서, 侍講院 說書 等을 歷任하고 禮曹, 兵曹 佐郞 司憲府 地平 等을 지냈다. 司諫院 정언, 弘文館 副修撰, 副校理에 任命되었다. 1657年 (孝宗 8) 敎理(校理)로 在職 中 글을 올려 五禮의 (五禮儀)』의 服喪第(服喪制) 等 잘못된 것을 改正하기를 請하였다. 官僚生活 初盤 金萬基는 文章力과 재주를 인정받아 孝宗 은 "나와 더불어 일을 함께 할 者는 그 누구인가? 法度에 맞게 指摘하여 引導해 줄 字는 卿 等 若干의 사람뿐이다."라고 指稱하기도 했다. 1659年 孝宗 이 北伐을 準備하다가 그해 5月 갑자기 昇遐하자, 孝宗의 繼母인 自意對比의 服喪問題 로 論難이 일자 송시열, 송준길 等의 朞年說을 支持하였다. 以後 西人 으로 活動하며, 3年雪을 主張하는 윤선도 (尹善道), 尹鑴 남인 을 攻擊했다. 以後 흥문館 應敎, 司憲府 執義, 司諫院 司諫 等을 지냈다.

1660年(玄宗 4) 修撰 이 되었다. 1661年 應敎, 私服市井, 成均館 四星, 議政府 死因, 通政大夫로 勝者하여 承政院 同副承旨 等을 거쳐 右副承旨가 되었고 1666年(玄宗 8) 全羅道 道士로 任命되었다가 다시 特別히 全羅道 觀察使로 任命되었으나 鞭毛를 떠나 멀리 갈 수 없다고 辭讓하니 司諫院 大司諫 에 特別히 除授되었고 곧 右承旨 를 거쳐서 承政院 左承旨 로 옮겼다. 1667年 禮曹 參議 에 昇進되었으나 곧 辭職하고 그 後 光州府尹에 除授되어 善政을 베풀었다. 以後 1669年 에는 다시 弘文館 副提學 을 거쳐서 吏曹參議가 되었다.

인경왕후 入宮 以後 [ 編輯 ]

1671年(玄宗 13) 딸이 世子嬪이 되었고, 以後 嘉善大夫 禮曹參判으로 昇進, 承文院 提調, 都摠府 副摠管, 觀象監 製造를 겸했다가 兵曹參判으로 옮겼다. 1672年 成均館 大司成 이 되고 곧 副提學 으로 塡補되었다가 好調參判 을 거쳐서 弘文館 藝文館 洋館의 大提學 , 知成均館事, 同志 競演 社에 同志 義禁府 紗를 兼任했다. 1673年 영릉(寧陵)을 옮길 때 山陵都監(山陵都監)의 堂上官이 되었으며, 그것에 이어 [1] 다시 服喪問題가 發生하자 1674年 7月에 兵曹判書(兵曹判書)로서 다시 自意對比의 複製에 對하여 上疏(上疏)를 올려 3年喪을 主張하였다. 그 해 兵曹 板書 에 지 春秋館 紗를 겸했다.

1674年(玄宗 16) 禮曹判書로 옮겨 正憲大夫 로 昇進되고 이듬해(肅宗 1) 肅宗 이 卽位하자 國舅로서 輔國崇祿大夫 영돈녕府使 , 광성府院君(光城府院君)에 冊封되었고, 五衛都摠府 都摠管, 扈衛大將, 典牲署 製造를 겸했다. 以後 摠戎使(摠戎使)를 겸하여 秉權(兵權)을 掌握하였으며, 이로 因해 戚臣이 軍事力을 손에 넣었다며 남인 들의 攻擊과 批判을 받기도 하였다. 그 後 김수항 (金壽恒) 等의 薦擧로 大提學 을 지냈으며 1680年(肅宗 7) 庚申大黜陟 訓鍊大將 으로 끝까지 南人과 맞섰으며, 以後 叔父 김익훈 , 肅宗의 外堂叔人 淸聲府院君 김석주 와 共謀하여 逆謀를 捏造하였다.

한便 國舅가 된 後 士禍의 兆朕이 發生했지만 그때마다 忠誠과 智慧를 發揮하여 國政을 便安케하고, 여러 벼슬에 任命되었지만 勳業을 이룬뒤에는 그때그때 벼슬을 헌신짝같이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니 선비들이 山岳같이 우러러 보았다. 國舅의 地位에 있음에도 奢侈하지 않고 豪奢를 부리지 않고 恒常 儉素하였으며, 禮法대로 生活하였으므로 그의 스승 中의 한사람인 尤庵 송시열 은 그를 極讚하였다.

生涯 後半 [ 編輯 ]

같은 해, 許積(許積)의 庶子 許堅(許堅)과 宗室인 복창군 ·복선군(福善君)·복평군(福平君) 等의 逆謀를 막은 功을 세워 분충효의병기협모보사공신 1等館에 책록되었고 [1] , 1686年(肅宗 13) 風程度감(豊呈都監) 都提調를 지냈다. 1689年 己巳換局 으로 南人이 다시 政權을 잡으면서 罷職 되었다가 뒤에 復職되었다. 1685年 (肅宗 11) 스승 송시열 等과 함께 曾祖父 沙溪 김장생 의 美刊行 著述, 詩文 等을 모아 沙溪遺稿 27卷(附錄 3卷 包含)을 刊行하였다. [2]

經書, 詐欺 諸家書에도 達通하였다. 또한 그는 法度를 따라 行하여 한 字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고, 衣服 또한 禮法(禮法)대로 옷을 입고 華麗하게 꾸미지 않았다 한다. 광산 金氏 의 族譜를 編纂, 刊行하는데 앞장섰으며 그가 刊行한 族譜를 서석보(瑞石譜)라 부른다. 著書로는 詩文 等을 모은 《서석문집》 18卷을 남겼다. 作品으로는 死六臣 階伯 等을 配享한 衷曲서원 의 遺墟碑 글씨 等이 있다.

事後 [ 編輯 ]

죽은 뒤 京畿道 시흥군 대야미리(現 軍浦市 대야미桐) 산 1-12番地에 安葬되었다.

敬慕再(敬慕齋)에 祭享되었고, 1719年 (肅宗 45) 玄宗의 卯正에 配享되었다. 墓碑銘과 神道碑 門은 1687年 스승인 尤庵 송시열 이 지었고, 글씨는 김진규가 썼다. [3] 그밖에 肅宗이 直接 써 준 어필鼻紋(御筆碑)李 1699年 (肅宗 25)에 墓所 近處에 세워졌다. 事後 贈職 으로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成均館 觀象監社 追贈 되었다.

1992年 6月 5日 그의 墓所와 碑石, 神道碑 京畿道 記念物 第131號로 指定되었다.

著書 [ 編輯 ]

  • 《서석문집》 18卷

家族 關係 [ 編輯 ]

  • 曾祖父 : 김장생 (金長生)
    • 從祖父 : 金集
    • 할아버지 : 金泮(金槃)
      • 伯父 : 김익희 (金益熙)
      • 叔父 : 김익훈 (金益勳)
      • 아버지 : 김익겸(金益兼)
      • 어머니 : 해평尹氏
        • 동생 : 西浦 김만중 (金萬重)
        • 祭需 : 沿岸李氏 - 이은상 (李殷相, 이단상 의 從兄)의 딸
        • 否認 : 서원夫婦인(西原府夫人) 淸州 韓氏(淸州 韓氏)
          • 長男 : 김진구(金鎭龜, 1651年 1704年 )
          • 子婦 : 이광직 (李光?)의 딸
            • 孫子 : 김춘택 (金春澤)
            • 孫子 : 김보택(金普澤)
            • 孫子 : 김운택(金雲澤)
            • 孫子 : 김민택(金民澤)
            • 孫子 : 김조택(金祖澤)
            • 孫子 : 김복택(金福澤)
            • 孫子 : 김정택(金廷澤)
            • 孫子 : 김연택(金延澤)
          • 次男 : 김진규(金鎭圭, 1658年 ~ 1716年 )
            • 孫子 : 김성택(金星澤)
            • 孫子 : 김양택(金陽澤)
          • 長女 : 인경왕후 金氏 - 肅宗 의 元妃
          • 三南 : 김진서(金鎭瑞, 1663 ~ ?)
          • 次女 : 김한혜(金漢惠, 1668 ~ ?) - 정형진(鄭滎振)에게 出家
          • 三女 : 김복혜(金福惠, 1673 ~ ?) - 沿岸 李氏 이주신(李舟臣)에게 出家
          • 사남 : 김진부(金鎭符, 1676 ~ ?)
            • 孫子 : 김연택(金延澤) - 生父 : 김진구
      • 丈人 : 恨流浪(韓有良)
      • 査頓 : 문정공 이단상

기타 [ 編輯 ]

그의 스승 中 한사람인 尤庵 송시열 은 曾祖父 沙溪 김장생 과 從祖父 愼獨齋 金集 (1573年)金集 의 門下에서 修學하였다. 金萬基는 叔父 김익희의 문하 外에 다시 尤庵 송시열 의 門下에서 受學하였고, 그의 아들 김진규(金鎭圭) 等도 尤庵 송시열 의 門下에서 數學한다.

같이 보기 [ 編輯 ]

金萬基를 演技한 俳優 [ 編輯 ]

各州 [ 編輯 ]

  1. 김만기 - Daum 百科事典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 이 中 一部는 1627年에 編纂한 四季文集에도 重複 收錄된 것들도 存在한다.
  3. 神道碑는 1703年에 다시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