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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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훈
金益勳
김익훈의 묘소
김익훈의 墓所
朝鮮 忠淸道 兵馬節度使
在任 1687年 9月 初旬~1689年 2月 말순
賃金 朝鮮 肅宗
이름
無宿(懋叔)
광남(光南)
시호 충헌(忠獻)
身上情報
出生日 1619年
居住地 朝鮮 漢城府
死亡日 1689年 (享年 71歲)
國籍 朝鮮
經歷 漢城府 庶尹
黨派 西人 後裔 性向 老論 勢力
父母 金泮 (簿)
扶餘 金氏 側室 (生母)
區 安東 金氏 否認(嫡母)
演算 徐氏 否認(界嫡母)
咸陽 呂氏 側室 (庶母)
兄弟姊妹 김익희 (異腹 嫡兄)
김익겸 (異腹 嫡兄)
김익경 (同腹 아우)
配偶者 情實 新 安東 金氏 否認
妾室 區 安東 金氏 側室
子女 3男
(적長男 김만채, 서차남 김만게, 적三南 김만선)
親姻戚 金集 (親中部)
김장생 (親祖父)
김만기 (親家 배다른 조카)
김만중 (親家 배다른 조카)
인경왕후 (親家 배다른 從孫女)
김춘택 (親家 배다른 從曾孫)
軍事 經歷
服務 조선국 官軍
服務期間 1648年~1683年
最終階級 조선국 御營大將
指揮 조선국 忠淸道 兵馬節度使
徐薰 吏曹判書

김익훈 (金益勳, 1619年 ~ 1689年 )은 忠淸道 兵馬節度使 等을 지낸 朝鮮 의 外戚 戚臣이며 文身( 文臣 官僚 軍人 政治人 出身)이다. 肅宗 의 整備 인경왕후 의 배다른 庶孼 從祖父이다. 本館 鑛山 , 者(字)는 無宿(懋叔)이고 號(號)는 광남(光南)이다.

음보 (蔭補)로 出仕하여 副摠管 等을 거쳐 兵馬節度使 等을 지내고 保社功臣 2等으로 광남群(光南君)에 烽軍 되었다. 西人 重鎭이자 戚臣 系列의 政治人으로 남인 을 攻擊하였으며, 1680年(肅宗 6) 복창군 · 복선군 (福善君)· 복평군 (福平君) 等이 許堅(許堅)과 謀逆을 꾀한다는 告變으로 庚申大黜陟 을 일으켜 김석주 와 더불어 남인 들을 몰아내는 데 積極 加擔하였다. 許堅의 非理와 腐敗行爲 情報를 入手하여 事件을 擴大, 肅宗의 外堂叔 金錫胄와 함께 逆謀 事件을 捏造하여 南人들을 一望 打診하려다가 西人이 老論 , 少論 으로 分黨되는 原因을 提供하였다. 諡號는 충헌(忠獻)이다.

김장생 의 孫子이자 金集 의 조카이며, 송시열 의 文人이다.

生涯 [ 編輯 ]

生涯 初期 [ 編輯 ]

할아버지 沙溪 金長生
西人 禮學의 宗祖였다.

광남 金益勳은 1619年 김장생 의 孫子이자 參判 을 지내고 議政府 領議政 에 追贈된 金泮 庶孼 出生 아들(庶子)이다. 禮學者이자 北伐論 者이며 孝宗 민회빈 姜氏 의 사면 復權을 主張하던 愼獨齋 金集 의 조카였다. 인경왕후 의 祖父이자 丙子胡亂 때의 殉節新 김익겸 (金益兼)은 그의 兄이며, 인경왕후의 親庭아버지인 김만기 九雲夢 , 謝氏南征記 의 著者 김만중 兄弟들은 그의 조카였다.

尤庵 宋時烈 의 門下에서 受學하였는데, 宋時烈은 李珥 와 親할아버지 김장생, 둘째 叔父 金集의 學脈을 繼承한 西人의 學者이며 性理學 , 禮學 의 權威者였다. 宋時烈의 門下에서 受學한 그는 人組 丙子胡亂 이 發生하자 江華島 로 避難갔다가, 女眞族 을 避해 다른 곳으로 移動하였다.

政治 活動 [ 編輯 ]

官僚 生活 [ 編輯 ]

그 뒤 1648年(仁祖 26) 음보 로 出仕하여 蔭職으로 義禁府 道士 에 祭需되고 司饔院 職場 을 거쳐 典牲署 主婦, 1652年 (孝宗 3) 司僕寺 主婦를 지냈다. 以後 司僕寺판관, 湖西 嶺南 漸摩 等 여러 官職을 지내고 顯宗 禁府都事 , 南原 府使 , 司僕寺의 添丁(僉正), 內乘(內乘)을 겸했고 將星府使로 就任, 善政을 베풀어 去思碑(去思碑)가 세워졌다.

以後 工曹正郞, 漢城府 庶尹, 軍器寺 添丁, 사도市政 等을 지내고 水原 府使로 나갔다. 1653年 內乘, 1660年 南原府使를 지냈다. 다시 內職으로 돌아와 掌樂院正, 돈녕부道程을 거쳐 外職人 南原府使, 水原防禦使, 光州防禦使(廣州防禦使), 忠淸道 兵馬節度使 를 지냈다. 이 期間 中 宋時烈과 송준길 의 禮論을 問題삼아 宗統과 嫡統으로 兩分하려 한다는 윤선도 , 許穆 等을 批判, 攻擊하였다.

1678年 (肅宗 4年)에는 光州 府尹(廣州府尹)으로 赴任하였으나 南人의 彈劾을 當했다. 御營大將에 任命되었다가 全羅兵士로 任命되었으나 또 反對派의 反對로 1680年(肅宗 7) 다시 光州府尹에 任命되었다가 漢城府 右尹 兼 副摠管 이 되었다.

男인 除去 祈禱 [ 編輯 ]

식암 김석주
그와 함께 南人 除去 工作을 主導하였다.

그 後 刑曹 參判, 御營大將 (御營大將) 等의 要職을 歷任하면서, 勳戚勢力의 一員으로서 宋時烈 等과의 協力關係를 바탕으로 힘을 얻어 兵權을 掌握하고 政局을 主導하였다. 1675年 조카 金萬基의 딸이었던 世子嬪 金氏가 肅宗 의 卽位와 함께 中殿 이 되면서 王妃의 從祖父인 金益勳은 軍權과 兵權을 掌握했다. [1] 이어 咸鏡南道 兵馬節度使 로 나갔다. 그러나 그해 곧 南人이 執權하면서 그해 11月 彈劾을 받고 罷職당하였다.

그러나 南人 홍우원 , 許穆, 北人 尹鑴 等이 禮訟을 빌미로 宋時烈을 死刑시키려 하자 그는 김석주 와 謀議하여 南人을 一網打盡할 計劃을 樹立한다.

1680年 (肅宗 6) 金錫胄와 함께, 南人과 王族 복창군 · 복선군 · 복평군 等이 許堅 과 謀逆을 꾀한다는 告變을 하였다. 이로써 1680年 (肅宗 6年) 庚申大黜陟 을 일으켜 尹鑴, 許穆, 허적 等 南人을 政界에서 逐出하는데 主導的 役割을 遂行하였으며, 南人의 逆謀를 未然에 防止한 功勞가 印章되어 保社功臣 (保社功臣) 2等에 錄勳되고, 광남群(光南君)에 책록되었다. 漢城府 左尹, 刑曹參判에 任命되고, 以後 光州 府尹·刑曹 參判·다시 御營大將 等을 지냈다. [1] 1681年 (肅宗 7) 京畿 摠戎使 에 兼任되었다가 御營大將을 거쳐 1687年(肅宗 14) 初 副摠管, 同年 가을에 忠淸道 兵馬節度使 에 除授되었다.

老少 盆唐과 己巳換局 [ 編輯 ]

그러나 그는 庚申大黜陟으로 南人을 肅淸한 것에 滿足하지 못하고, 南人을 撲滅할 計劃을 세운다. 1682年 (肅宗 8年) 봄, 그는 對備 金氏 의 四寸인 金錫胄 等과 함께 南人을 打倒할 目的으로 허새 (許璽), 虛榮(許瑛), 유명견(柳命堅) 等에게 反逆을 하도록 計略을 꾸民뒤 西人으로 南人 오정위 의 庶女를 妾으로 둔 김환 을 시켜서 情報를 빼내오게 했다. 그러나 西人 內部의 少壯派인 한태동(韓泰東)·조지겸(趙持謙) 等이 이를 反對하여 西人 內部에서도 論難이 發生했고, 그를 驛處罰하라는 彈劾 輿論이 나타났다.

金益勳이 南人을 苛酷하게 處罰하면서 이에 反撥하던 西人 少壯派 박태유(朴泰維)는 그가 南人을 無慈悲하게 肅淸한 데 反撥, 苛酷하고 方法이 끔찍하다며 이를 批判, 彈劾하다가 巨濟縣令(巨濟縣令)으로 左遷되었다. 그밖에도 申玩 等 다른 西人 少壯派들 亦是 김익훈을 批判하였다.

그런데 허새의 獄事 等이 김익훈과 金錫胄가 擴大시킨 것으로 밝혀지면서 西人 內部에서는 論難이 벌어졌다. 黨은 다르지만 虛僞 捏造로 相對方을 抹殺하려 해서는 안된다는 輿論이 나오면서 以後 김익훈 處罰을 놓고 西人에서도 意見이 갈렸다. 이때 宋時烈은 처음에 김익훈의 處罰을 主張하였다가 漢城 으로 上京한 뒤 西人 老壯派의 意見을 듣고 意見을 旋回, 李太祖 의 시호 追施 問題 等 다른 問題를 擧論하다가 結局 處罰을 反對하여 庶人은 老論 , 少論 으로 分黨하게 되었다. 그는 以後 嘉善大夫로 昇進, 漢城府右尹이 되고 兼 副摠管이 되었다.

허영 허새의 獄事로 保社功臣에 책록되고 광남軍에 封爵되었다. 1681年 左尹, 刑曹參判 兼 副摠管 摠戎使, 1682年 兼 技保摠戎使가 되었다가 御營大將이 되었다. 1689年 그의 스승 宋時烈, 김수항 等이 肅宗의 王子 균(後日의 警鐘 )의 世子 정호를 反對하다가 己巳換局 이 發生한다.

肅宗 15年(1689) 後宮 張氏 가 王子를 낳음으로써 9年 만에 再執權한 南人들은 過去事 淸算에 나섰다. 男인 허새·虛榮 等을 逆謀로 告變해 죽게 만든 壬戌告變의 企劃者 金錫胄는 肅宗 10年(1684) 이미 死亡했으므로 金益勳이 主要 對象이었다. 南人들은 義禁府에 鞠廳을 設置하고 肅宗 15年 2月 25日 金益勳 等 6人을 逮捕해 投獄했다. 이 날짜 『肅宗實錄』은 “한手만(韓壽萬)은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고 傳하고 있다. 한手만은 김익훈의 使嗾로 前 兵士(兵使) 김환 等과 함께 허새 等을 告變한 旗牌官(旗牌官:軍營의 將校)이었다. 高邊子 이회는 허새가 火藥과 火田(火箭:불화살)을 주었다고 陳述하다가 다섯 次例의 酷毒한 刑訊(刑訊:兄丈을 치며 묻는 것) 끝에 “金益勳이 銀 100兩을 주어 火藥과 火田을 샀다”고 實吐했다. 김환도 다섯 次例의 刑訊 끝에 ‘金益勳이 綱常(江上)에다 집을 사서 주면서 사람들을 譏察(譏察)하게 했다”고 自白했다. [2]

金益勳은 죽은 金錫胄에게 政治工作의 責任을 全部 떠넘겼으나 끝내 裝荷(杖下)에서 물고(物故)당했다. [2] 그는 공信號를 빼앗기고 平安北道 江界 로 流配되었다. 以後 無辜한 사람을 많이 죽였다는 罪名으로 押送되어 秋菊, 그해 3月 男인 刑官으로부터 張型과 顧問을 연이어 當하다가 刑問을 받던 中 죽었다. 當時 그의 享年 70歲였다.

事後 [ 編輯 ]

아들 김만채 等은 그의 아들이라는 理由로 流配되었고, 屍身은 가까운 親知들에 依해 장사하고 京畿道 廣州郡 퇴촌면 무수리에 安葬되었다. 墓(墓)는 처음 臨時로 故障(藁葬)하였다가, 復官된 뒤 競技도 廣州郡 퇴촌면 번천리에 장사했다가, 뒤에 京畿道 光州市 퇴촌면 무수리 산 4-3番地에 移葬되었다.

事後 1694年 (肅宗 20) 甲戌換局 으로 南人이 失脚하면서 右承旨 김만채 가 아버지의 抑鬱함을 하소연하여 復權되고 李朝 板書 (吏曺判書)가 追贈 되었다. 그러나 警鐘이 卽位한 뒤 少論 이 執權하면서 다시 追奪되었다. 1720年 (景宗 卽位年) 다시 孫子 김진상 (金鎭商)李 祖父의 抑鬱함을 上疏했다가 그해 가을 全羅 監査(全羅監司) 韓紙 (韓祉) 等이 反論을 提起하는 等 論爭거리가 되기도 했으나, 곧 묻혀졌다. 以後 英祖 때인 1760年 最終 復權되었다.

1871年(高宗 8年) 3月 충헌공(忠獻公)의 諡號가 내려졌다.

家計 [ 編輯 ]

  • 할아버지 : 김장생
  • 아버지 : 金泮
  • 義母(嫡母) : 金氏, 첨秋(僉樞) 김진려(金進礪)의 딸(1590~1611)
    • 異服兄 : 김익렬(金益烈)
    • 異服兄 : 김익희 (金益熙)
  • 義母(界嫡母) : 演算 徐氏(徐氏), 增 參判 西周(徐澍)의 딸(1596~1637)
  • 庶母 : 아버지 金半의 첩
  • 生母  : 아버지 金半의 첩
  • 否認 : 新 安東 金氏 (安東 金氏, ? ~ 1676年 ) - 金言의 딸
  • 側室 : 區 安東 金氏 妾室
    • 둘째아들(庶子) : 김만게(金萬?)
  • 丈人 : 金言 - 新 安東 金氏 後孫

기타 [ 編輯 ]

허영 허새의 獄事 가 擴大된 事件이라는 것이 알려지자 西人 儒生들은 事態를 擴大시킨 김익훈과 김석주 의 處罰을 願하였다. 그러나 上京한 宋時烈이 當初 約束을 뒤집고 김익훈과 金錫胄의 便을 들면서 失望한 西人 儒生들은 윤선거 와 尹拯의 便으로 돌아서게 된다.

그의 8代孫 김영현의 딸은 獨立運動家 兼 政治人 서재필 의 夫人이었다.

김익훈을 演技한 俳優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

  • 肅宗實錄
  • 燃藜室記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