景福宮 資善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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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年의 모습 (文化財廳)

資善堂 (資善堂)은 朝鮮 時代 世子와 世子嬪이 居處하던 景福宮 안의 建物이다. 朝鮮 文宗 이 世子 때에 居處한 곳이다.

景福宮이 創建되었을 때는 東宮이 宮闕 밖에 있었다. 그래서 世子가 王室 어른을 찾아 問安하거나 經書 工夫를 할 때 一一이 宮을 오가야하는 不便함이 있었다.

太祖의 世子 이방석 은 1次 王子의 亂 때 被殺되고, 이어 世子가 된 永安軍은 거의 곧바로 正宗으로 卽位했다. 定宗의 世子였던 靖安軍 은 開京의 東宮을 利用했고, 亦是 얼마 지나지않아 太宗으로 王位에 올랐다. 太宗은 漢陽으로 돌아왔지만 昌德宮에 主로 머물렀고, 世子였던 讓寧大君 忠寧大君 은 어디서 居住했는 지 不分明하나 分明 景福宮 一帶에서 머물지는 않았다. 그리고 太宗의 뒤를 이은 世宗이 景福宮을 主로 利用하면서 在位 9年 뒤인 1427年에서야 비로소 景福宮 안에 제대로 東宮을 지었다. 이 때 資善堂度 建立되었다.

東宮으로 지었으나 草創期엔 임금이 이 곳에서 政事를 보기도 하였다. 文宗은 世子 時節을 大部分 이 곳에서 보냈으며 文宗의 아내 현덕왕후 가 世子嬪 時節 이 곳에서 端宗을 낳고 얼마 뒤 殞命하였다. 文宗 卽位 後엔 端宗이 머물렀다.

1462年(世祖 8)에는 確實한 理由는 모르나, 東宮을 옮겼고 이 때 資善堂度 이건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옛 東宮 자리에는 藝文館 의 冊 一部를 옮겨 保管하였다.

1543年(中宗 38) 1月에 火災로 불탔다. 以後 東宮 再建을 위해 資材들度 마련하였으나 1550年(明宗 5) 頃에 기와를 人守宮 建立과 宗廟 補修 等에 使用하였다.

그래도 1553年(明宗 8)에 消失된 景福宮의 內戰을 다음 해에 다시 지을 때, 東宮度 넓혀 重建하였다는 記錄을 보아 그 사이에 復舊한 듯하다. 이 때 上樑文을 當時 大提學이던 退溪 李滉 이 지었다.

1592年(宣祖 25) 壬辰倭亂 때 景福宮의 다른 建物들과 함께 불 타 없어지고 270年 間 버려진 채 放置되었다가 1866年(高宗 3) 景福宮 重建 때 다시 지어졌다. 日帝强占期인 1915年에 日本人 오쿠라 기하치로 (大倉喜八郞)에게 拂下되어 日本으로 헐려가, 도쿄의 오쿠라 호텔 에서 ‘朝鮮觀(朝鮮館)’이라는 이름의 別채가 되었다가, 1923年 關東大地震 으로 消失되었다. 景福宮 內 旣存의 자선당 자리엔 朝鮮總督府博物館 이 들어섰다.

文化財 還收 經緯 [ 編輯 ]

자선당은 日帝强占期 때 日本人 建築家에 依해 撤去되어 日本으로 옮겨져 오쿠라 호텔에서 ‘朝鮮觀’이라는 이름으로 있다가 1923年 關東大地震 때 小室 되었다.

以後 자선당의 基壇과 주춧돌은 불에 그을린 채 放置되다가 1993年 當時 김정동 敎授가 찾아내어 多方面의 努力 끝에 三星의 新羅호텔 이 오쿠라호텔과 姊妹關係라는 因緣으로 110t 分量의 유구석 288個를 返還받아 寄贈되었다. 景福宮 復元 事業 때 다시 세울 자선당의 基壇으로 活用할 計劃이었으나, 火災로 損傷을 입어 푸석해진 石材는 結局 使用되지 못하였다.

資善堂 遺構 [ 編輯 ]

資善堂 遺構는 元來 資善堂 復元 때 活用하려 했지만, 損傷이 너무 甚해 景福宮 건청궁과 녹산 사이에 놓아 保存하고 있다. 한동안 非公開였으나 2012年 11月부터 開放하여 볼 수 있다.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