慶州 皇龍寺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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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州 皇龍寺지
(慶州 皇龍寺址)
(Hwangnyongsa Temple Site, Gyeongju)
대한민국의 기 大韓民國 私的
種目 私的 第6號
( 1963年 1月 21日 指定)
面積 380,087m 2
時代 新羅
所有 國有 , 事由
位置
경주 황룡사지은(는) 대한민국 안에 위치해 있다
경주 황룡사지
慶州 皇龍寺지
慶州 皇龍寺지(大韓民國)
住所 慶尙北道 慶州市 구황동 320-1
座標 北緯 35° 50′ 13″ 東京 129° 13′ 57″  /  北緯 35.83694° 東京 129.23250°  / 35.83694; 129.23250
情報 文化財廳 國家文化遺産포털 情報

皇龍寺 (皇龍寺)는 慶尙北道 慶州市 에 있었던 査察 로서, 慶州에서 가장 컸던 寺刹로 알려져 있으나, [1] 現在는 터만 남아 있다. 皇龍寺는 9層 木塔과 丈六三尊佛像(丈六三尊佛像)과 더불어 新羅 삼보 (三寶)의 하나로 有名하였다. [1] [2] 新羅의 寺刹로 553年 (眞興王 14年) 氣孔이 始作 [3] 되어 569年 에 담牆까지 完工되었다고 여겨지나, 566年 (眞興王 27年) 一旦 竣工되었다가 645年 (善德女王 14年)에 完成되었다는 說도 있다. [1] 高麗 高宗 25年( 1238年 ) [4] 몽골 帝國 의 侵入으로 消失되었다. [1] 現在 그 터인 黃龍四肢 (皇龍寺址) [5] 史跡 第6號 로 指定되어 있다.

皇龍寺 [ 編輯 ]

皇龍寺에 關한 記錄은 《 三國史記 》에서 어느 寺刹보다도 越等히 많이 볼 수 있다. [2] 于先 記錄에 나타난바 各種 建築의 沿革을 보면 다음과 같다. [2] 이에 따르면 진흥왕 創建 以來 선덕여왕 代의 9層塔 의 完成까지는 90年의 長時日이 經過되고 있다. [2]

  1. 眞興王 14年(553) 創建
  2. 眞興王 27年(566) 一次 工事完成
  3. 진흥왕 30年(569) 周圍장우 (周圍墻宇) 完成
  4. 眞興王 35年(574) 丈六三尊佛像 (丈六三尊佛像, 높이가 一章 六戚이 되는 三尊佛像) 造成
  5. 眞平王 6年(584) 金堂 造成
  6. 善德女王 14年(645) 9層塔 造成
  7. 景德王 13年(754) 種 造成(造成)

皇龍寺는 國家的 大刹로서 진평왕 天賜玉帶 (天賜玉帶)와 더불어 皇龍寺의 9層 木塔 丈六三尊佛像 (丈六三尊佛像)은 新羅의 3褓로 崇仰을 받아왔다. [2] 國家的인 行事나 憂患이 있을 때는 皇龍寺에서 高僧을 請하여 百高座 (百高座)를 設置하였고 王이 親行禮佛한 場所로는 皇龍寺 以外의 곳에서 禮佛을 했다는 記錄이 없다. [2]

王朝가 바뀌어 高麗朝 에 이르러서도 光宗 5年(954)때에 벼락으로 木塔이 消滅하자 60餘年이 지난 1012年 다시 再建을 始作하여 9年만에 完工했고 定宗 2年(1035), 顯宗 1年(1095)에 補修工事 3年(1012)에 兆幽宮 (朝遊宮)을 헐어서 9層塔 을 修理하는 等 保護에 힘썼으나 高宗 25年(1238) 蒙古의 난 으로 말미암아 回診되고 말았다. [2]

남겨진 절터에 依하여 皇龍寺의 規模를 推定할 때, 境內는 藥 2萬坪으로 推定되며 남에서부터 中門 (中門), , 金堂 , 講堂 (講堂)이 南北線上에 서고, 救黨 中門 을 連結하여 東西로 回廊 을 돌려 內定 金堂 救黨 을 두는 一塔式(一塔式) 嘉藍制度 (伽藍制度)로서 皇龍寺地(皇龍寺址)는 그 절터 痕跡이 가장 뚜렷하게 남아 있는 절터이다. [2]

回廊 으로 形成되는 內定 (內庭)에는 金堂 左右와 中門 左右에 各各 建物자리가 있고 의 基壇 4面에는 階段을 設置하였으며, 1976年 以來 繼續되고 있는 發掘 調査의 結果 全面 10間, 側面 4間의 큰 講堂 자리가 비로소 밝혀졌다. [2]

周圍에는 많은 附屬建物이 있었으리라고 推測되며 發掘에 따라 續續 밝혀지고 있는데, 國家的 大刹에 부끄럽지 않는 代皇龍寺의 모습이 次次 드러나고 있다. [2]

"鐵盤以上(鐵盤已上)"이라는 表現을 보면 相輪 (相輪)은 金屬製이었을 것이다. [2] 탑지 北쪽에는 金堂址 가 있어 正面 9間, 側面 4間의 大建物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그 中央에는 巨大한 石造 佛臺座 (佛臺座) 3期가 있어 丈六三尊佛像 (丈六三尊佛像)이 이곳에 安置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2] 率居 (率居)의 노송도度 이곳에 있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2]

그 北方에는 正面 10間, 側面 4間의 大邱當 이 있었으니 只今도 2  · 3個를 除外하고는 礎石이 原形대로 남아 있고, 바닥에는 釜田 (敷塼)李 中央에서 東으로 치우쳐서 石造가 남아 있다. [2] 또한 東西 兩側에는 回廊址 (廻廊址)가 있어 高新羅氣의 大刹의 面貌를 如實히 보여주고 있다. [2]

皇龍寺 9層 木塔 [ 編輯 ]

皇龍寺 9層 木塔 模型

皇龍寺 9層 木塔은 新羅를 中心으로 三國을 統一하고자 하는 그 時代의 懇切한 所願이 表現으로 된 것이다.

新羅 선덕여왕 때인 643年, 慈藏 律師 가 黨에서 歸國하여 皇龍寺에 塔을 세울 뜻을 선덕여왕 에게 아뢰니 善德女王이 君臣에게 議論하였는데, 臣下들이 “백제에서 工場(工匠)을 請한 然後에야 바야흐로 可能할 것입니다”라고 하여 이에 寶物과 緋緞을 가지고서 백제에게 請하였다. 工場 아비지 가 命을 받고 와서 木材와 石材를 經營하였고 離間(伊干) 김용춘 이 主管하여 所長(小匠) 200名을 이끌었다. 工場은 이에 마음을 고쳐먹고 그 塔을 完成하였다. [6] 그런 만큼 이러한 所願과 抱負가 이 塔에 反映되었다. [6]

規模가 장대무卑下였는데 9層까지 높이는 탑지(塔誌) 記錄 當時의 唐尺 (唐尺)으로 따진다 하더라도 約 53.45m, 相輪部(上輪部)까지 合하면 約 66.70m나 되는 巨大한 것이고, 造營(造營) 當時의 脊髓人 同位隻 (東魏尺)으로 따진다면 80m 以上으로 그보다 더 높은 超大型 建築物이었다. [6] 또한 皇龍寺 9層塔을 만들어낸 意志와 力量을, 三國 가운데 가장 弱小國이었던 新羅 가 韓半島를 統一한 原動力 가운데 하나로 보는 視角도 있다. [6]

그 後, 皇龍寺 9層 木塔은 高麗 때 몽골 의 侵入으로 불타버렸고 現在는 塔의 礎石(礎石)만이 남아 있다. [6] 中央의 心礎石(心礎石)에서 1964年 12月에 盜難當하였던 金銅舍利函 (金銅舍利函)李 1972年 10月 28日 國立博物館에서 처음으로 公開된 적이 있다. [6] 이 舍利函의 3面에 걸쳐 塔의 造成 記錄이 새겨져 있는데 新羅 경문왕 (景文王) 11年(871)에 塔을 重修하면서 塔의 造成과 中搜 事緣을 적은 것이다. [6] 그 內容은 大體로 三國遺事 의 記錄과 類似하지만 當時의 確實한 名門(銘文)에 依하여 皇龍寺의 尉官(偉觀)을 再確認할 수 있게 되었다. [6] 이 木塔의 모습을 陰刻으로 디자인한 慶州타워 가 2007年에 完工되었고, 이 木塔의 모습을 본따서 만든 中道타워 가 2016年에 完工되었다.

皇龍寺터 [ 編輯 ]

皇龍寺 9層木塔을 爲始한 皇龍寺 터 槪略度 皇龍寺 復元 前景 皇龍寺 9層木塔 復元도

寫眞 [ 編輯 ]

關聯 作品 [ 編輯 ]

  • 《悲願의 塔》(2012, 학산문화사) - 전혜진 글, 최미애 그림으로 皇龍寺 9層 木塔의 建立을 素材로 하는 漫畫이다. 前3卷.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韓國史 > 古代社會의 發展 > 三國의 成立과 發展 > 古代文化의 發展 > 皇龍寺 , 《 글로벌 世界 大百科事典
  2. 韓國美術 > 韓國美術의 흐름 > 古新羅의 美術 > 古新羅의 建築 > 黃龍四肢 , 《 글로벌 世界 大百科事典
  3. 김부식 (1145). 〈 本紀 卷4 진흥왕 〉. 《 三國史記 》. 十四年 春二月 王命所司 築新宮於月城東 黃龍見其地 王疑之 改爲佛寺 賜號曰皇龍 (14年 봄 2月에 王이 擔當 官廳에 命하여 粤省 東쪽에 새 宮闕을 짓게 하였는데, 黃龍(黃龍)이 그 곳에서 나타났으므로 王이 異常하게 여겨 [計劃을] 바꿔 절로 만들고 이름을 皇龍寺(皇龍寺)라 하였다. )  
  4. 文化財廳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5. (黃龍四肢 → 慶州 皇龍寺지)으로 名稱變更되었다.(2011.07.28 考試)
  6. 宗敎·哲學 > 韓國의 宗敎 > 韓國의 佛敎 > 韓國佛敎의 文化 > 皇龍寺 9層塔 , 《 글로벌 世界 大百科事典

參考 文獻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