皇龍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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皇龍寺 (同音異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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皇龍寺
(皇龍寺)는
慶尙北道
慶州市
에 있었던
査察
로서, 慶州에서 가장 컸던 寺刹로 알려져 있으나,
[1]
現在는 터만 남아 있다. 皇龍寺는 9層 木塔과 丈六三尊佛像(丈六三尊佛像)과 더불어
新羅
삼보
(三寶)의 하나로 有名하였다.
[1]
[2]
新羅의 寺刹로
553年
(眞興王 14年) 氣孔이 始作
[3]
되어
569年
에 담牆까지 完工되었다고 여겨지나,
566年
(眞興王 27年) 一旦 竣工되었다가
645年
(善德女王 14年)에 完成되었다는 說도 있다.
[1]
高麗 高宗
25年(
1238年
)
[4]
에
몽골 帝國
의 侵入으로 消失되었다.
[1]
現在 그 터인
黃龍四肢
(皇龍寺址)
[5]
가
史跡 第6號
로 指定되어 있다.
皇龍寺
[
編輯
]
皇龍寺에 關한 記錄은 《
三國史記
》에서 어느 寺刹보다도 越等히 많이 볼 수 있다.
[2]
于先 記錄에 나타난바 各種 建築의 沿革을 보면 다음과 같다.
[2]
이에 따르면
진흥왕
創建 以來
선덕여왕
代의
9層塔
의 完成까지는 90年의 長時日이 經過되고 있다.
[2]
- 眞興王 14年(553) 創建
- 眞興王 27年(566) 一次 工事完成
- 진흥왕 30年(569)
周圍장우
(周圍墻宇) 完成
- 眞興王 35年(574)
丈六三尊佛像
(丈六三尊佛像, 높이가 一章 六戚이 되는 三尊佛像) 造成
- 眞平王 6年(584)
金堂
造成
- 善德女王 14年(645)
9層塔
造成
- 景德王 13年(754) 種 造成(造成)
皇龍寺는 國家的 大刹로서
진평왕
의
天賜玉帶
(天賜玉帶)와 더불어 皇龍寺의
9層 木塔
과
丈六三尊佛像
(丈六三尊佛像)은 新羅의 3褓로 崇仰을 받아왔다.
[2]
國家的인 行事나 憂患이 있을 때는 皇龍寺에서 高僧을 請하여
百高座
(百高座)를 設置하였고 王이 親行禮佛한 場所로는 皇龍寺 以外의 곳에서 禮佛을 했다는 記錄이 없다.
[2]
王朝가 바뀌어
高麗朝
에 이르러서도
光宗
5年(954)때에 벼락으로 木塔이 消滅하자 60餘年이 지난 1012年 다시 再建을 始作하여 9年만에 完工했고
定宗
2年(1035),
顯宗
1年(1095)에 補修工事 3年(1012)에
兆幽宮
(朝遊宮)을 헐어서
9層塔
을 修理하는 等 保護에 힘썼으나 高宗 25年(1238)
蒙古의 난
으로 말미암아 回診되고 말았다.
[2]
남겨진 절터에 依하여 皇龍寺의 規模를 推定할 때, 境內는 藥 2萬坪으로 推定되며 남에서부터
中門
(中門),
塔
,
金堂
,
講堂
(講堂)이 南北線上에 서고,
救黨
과
中門
을 連結하여 東西로
回廊
을 돌려
內定
에
金堂
과
救黨
을 두는 一塔式(一塔式)
嘉藍制度
(伽藍制度)로서 皇龍寺地(皇龍寺址)는 그 절터 痕跡이 가장 뚜렷하게 남아 있는 절터이다.
[2]
回廊
으로 形成되는
內定
(內庭)에는
金堂
左右와 中門 左右에 各各 建物자리가 있고
塔
의 基壇 4面에는 階段을 設置하였으며, 1976年 以來 繼續되고 있는 發掘 調査의 結果 全面 10間, 側面 4間의 큰
講堂
자리가 비로소 밝혀졌다.
[2]
周圍에는 많은 附屬建物이 있었으리라고 推測되며 發掘에 따라 續續 밝혀지고 있는데, 國家的 大刹에 부끄럽지 않는 代皇龍寺의 모습이 次次 드러나고 있다.
[2]
"鐵盤以上(鐵盤已上)"이라는 表現을 보면
相輪
(相輪)은 金屬製이었을 것이다.
[2]
탑지 北쪽에는
金堂址
가 있어 正面 9間, 側面 4間의 大建物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그 中央에는 巨大한 石造
佛臺座
(佛臺座) 3期가 있어
丈六三尊佛像
(丈六三尊佛像)이 이곳에 安置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2]
또
率居
(率居)의 노송도度 이곳에 있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2]
그 北方에는 正面 10間, 側面 4間의
大邱當
이 있었으니 只今도 2
·
3個를 除外하고는 礎石이 原形대로 남아 있고, 바닥에는
釜田
(敷塼)李 中央에서 東으로 치우쳐서 石造가 남아 있다.
[2]
또한 東西 兩側에는
回廊址
(廻廊址)가 있어 高新羅氣의 大刹의 面貌를 如實히 보여주고 있다.
[2]
皇龍寺 9層 木塔
[
編輯
]
皇龍寺 9層 木塔은 新羅를 中心으로 三國을 統一하고자 하는 그 時代의 懇切한 所願이 表現으로 된 것이다.
新羅
선덕여왕
때인 643年,
慈藏 律師
가 黨에서 歸國하여 皇龍寺에 塔을 세울 뜻을
선덕여왕
에게 아뢰니 善德女王이 君臣에게 議論하였는데, 臣下들이 “백제에서 工場(工匠)을 請한 然後에야 바야흐로 可能할 것입니다”라고 하여 이에 寶物과 緋緞을 가지고서 백제에게 請하였다. 工場
아비지
가 命을 받고 와서 木材와 石材를 經營하였고 離間(伊干)
김용춘
이 主管하여 所長(小匠) 200名을 이끌었다. 工場은 이에 마음을 고쳐먹고 그 塔을 完成하였다.
[6]
그런 만큼 이러한 所願과 抱負가 이 塔에 反映되었다.
[6]
規模가 장대무卑下였는데 9層까지 높이는 탑지(塔誌) 記錄 當時의
唐尺
(唐尺)으로 따진다 하더라도 約 53.45m, 相輪部(上輪部)까지 合하면 約 66.70m나 되는 巨大한 것이고, 造營(造營) 當時의 脊髓人
同位隻
(東魏尺)으로 따진다면 80m 以上으로 그보다 더 높은 超大型 建築物이었다.
[6]
또한 皇龍寺 9層塔을 만들어낸 意志와 力量을, 三國 가운데 가장 弱小國이었던
新羅
가 韓半島를 統一한 原動力 가운데 하나로 보는 視角도 있다.
[6]
그 後, 皇龍寺 9層 木塔은 高麗 때
몽골
의 侵入으로 불타버렸고 現在는 塔의 礎石(礎石)만이 남아 있다.
[6]
中央의 心礎石(心礎石)에서 1964年 12月에 盜難當하였던
金銅舍利函
(金銅舍利函)李 1972年 10月 28日 國立博物館에서 처음으로 公開된 적이 있다.
[6]
이 舍利函의 3面에 걸쳐 塔의 造成 記錄이 새겨져 있는데 新羅
경문왕
(景文王) 11年(871)에 塔을 重修하면서 塔의 造成과 中搜 事緣을 적은 것이다.
[6]
그 內容은 大體로
三國遺事
의 記錄과 類似하지만 當時의 確實한 名門(銘文)에 依하여 皇龍寺의 尉官(偉觀)을 再確認할 수 있게 되었다.
[6]
이 木塔의 모습을 陰刻으로 디자인한
慶州타워
가 2007年에 完工되었고, 이 木塔의 모습을 본따서 만든
中道타워
가 2016年에 完工되었다.
皇龍寺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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皇龍寺 9層木塔을 爲始한 皇龍寺 터 槪略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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皇龍寺 復元 前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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皇龍寺 9層木塔 復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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寫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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關聯 作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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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悲願의 塔》(2012, 학산문화사) - 전혜진 글, 최미애 그림으로 皇龍寺 9層 木塔의 建立을 素材로 하는 漫畫이다. 前3卷.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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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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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 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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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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