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龍洙
(金龍樹, 579年 以前 ~ 646年 以後
[1]
) 또는
김용춘
(金龍春)은
新羅
의 追尊王으로,
진지왕
의 아들이자,
태종무열왕
金春秋
의 아버지이다.
[2]
진평왕
,
선덕여왕
時期에 中央 政界에서 活躍하였으며,
태종무열왕
이 卽位한 以後 문흥葛文王(文興葛文王, 용춘角干문흥葛文王, 용춘濁문흥葛文王)으로 推尊되었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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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춘은
진지왕
과
指導部인
(知道夫人) 朴氏의 아들로
진지왕
이
579年
에 죽은 뒤에 王位 繼承權에서 멀어졌다.
[3]
용춘의 아들 春秋의 境遇
眞骨
의 身分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용춘의 身分은 正確하게 알 수 없다. 三國遺事의 記錄처럼
진지왕
이 廢位된 것이 맞다면 용춘의 身分이 聖骨에서 族江(族降)되었을 可能性이 크다. 夫人은
진평왕
의 딸인
千名公州
로
602年
에 아들 春秋를 낳았다.
622年
(
진평왕
44年)에
伊飡
(伊飡)의 官等에 있었으며, 內省사신(內省私臣)에 任命되었다.
629年
에는 大將軍이 되어
김서현
,
김유신
을 部長으로 이끌고 出陣,
浪費性
(娘臂城)을 陷落시켰으며,
635年
(
선덕여왕
4年)에는 주현(州縣)을 돌아보며 慰問하였다.
645年
에는 皇龍寺區層木塔 建築을 主管하였고, 以後에는 더 以上 記錄에 나타나지 않는다. 아들 春秋가 王位에 卽位한
654年
에 문흥葛文王으로 推尊되었다.
한便 學界에서
魏書
로 疑心받고 있는 《
花郞世紀
》에는 용춘과 用水를 兄弟로 記錄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용춘은 용수의 동생으로, 용수가 夭折한 뒤 용수와 結婚한
千名公州
를 다시 맞아들였으며, 용수의 아들인 春秋를 아들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皇龍寺9層木塔擦柱本紀’에 따르면 皇龍寺區層木塔을 建築할 當時인
645年
卿까지 용수의 이름이 나타나고 있어 용수가 夭折하였다는 《
花郞世紀
》의 記錄과 正面으로 背馳된다.
[4]
《
花郞世紀
》는 용춘의 一部 行跡도 記錄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용춘은 13代
風月主
를 歷任하였으며
선덕여왕
의 府君이 되었으나 子息이 없어 辭任하였다고 한다.
家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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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曾祖父 :
입종갈문왕
- 祖父 :
진흥왕
(眞興王, 534~576, 在位:540~576)
- 조某 :
사도王后
(思道王后, ? ~ 614)
- 父王 :
진지왕
(眞智王, ? ~579, 在位:576~579)
- 外祖父 :
기오공
(起烏公)
- 母后 :
指導部인
(知道夫人)
김용수가 登場한 作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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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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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父親 眞智王이 579年에 死亡했다. 645年 建立된 皇龍寺 9層木塔의 建立 責任者였다. 아들 태종무열왕이 654年 卽位한 後 문흥王으로 推尊되었다.
- ↑
《三國史記》 新羅本紀 태종무열왕 元年(654), "태종무열왕이 卽位하였다. 이름은 춘추이며, 眞智王의 아들 伊飡 용춘(用水라고도 한다)의 아들이다(太宗武烈王立 諱春秋 眞智王子伊?龍春【一云龍樹】之子也)."
- ↑
三國遺事에는 眞智王이 廢位되었다고 記錄되어 있어 三國史記와 差異가 있다.
《三國遺事》 기이 第1 桃花女비형랑, "第 25代 四輪王의 諡號는 眞智王으로 性은 金氏高 王妃는 기오공의 딸 指導夫人이다. 대건 8年 病身에 王位에 올랐다. 古本에는 11年 己亥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 나라를 다스린 지 4年에 淫亂하고 政事가 어지럽자 나랏사람들이 廢位시켰다(第二十五 舍輪王 諡眞智大王 姓金氏 妃起烏公之女 知刀夫人 大建八年丙申卽位 古本云十一年己亥 誤矣 御國四年 政亂荒? 國人廢之)."
- ↑
韓國金石文 綜合映像情報시스템 皇龍寺9層木塔擦柱本紀
- ↑
一然
, 《三國遺事》 (1281)
〈기이〉 太宗春秋공條
“第29代 太宗大王의 이름은 춘추이며 姓은 金氏이다. 用水 (또는 용춘이라고도 한다) 角干으로 追封된 문흥대王의 아들이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