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濟 復興運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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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濟 復興運動
百濟復興運動
날짜 7世紀
主要事件
原因 백제의 滅亡

百濟 復興運動 (百濟復興運動)은 百濟 660年 에 敗亡한 後 流民들이 展開한 鬪爭 運動이다.

槪要 [ 編輯 ]

660年 新羅 가 百濟를 征服하자 唐나라 는 熊津都督府를 設置했으며, 의자왕 唐나라 로 끌고 갔다. 그러자 흑치상지 任存城 을 據點으로 遺民을 糾合했으며, 王族 福信 (福信)과 僧侶 道琛 (道琛)은 走流性 (周留城)에 雄據하고 661年 에 兵士를 이끌고 羅唐聯合軍을 攻擊하기도 했고, 一時的으로 20餘 城을 回復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로부터 王子 부여풍 (豊)을 맞아다가 急하게 王으로 삼았으며, 泗沘城 · 熊津城 等을 包圍하면서 당군의 食糧을 掠奪하는 일을 벌였다. 그러나 곧 復申이 陶枕을 殺害하고, 부여풍이 復申을 다시 殺害하는 內紛이 생겨 瓦解되었다. 백제 王族인 부여융 唐나라 將軍에 任命되어 唐나라로 끌려간 遺民을 統治했고, 663年 8月 白江 戰鬪 에서 百濟 復興軍을 救援하러 온 倭船 400隻을 沈沒시키며 百濟 復興運動을 討伐하였다. 以後 663年 9月 唐나라 의 援兵을 얻은 聯合軍이 走流性 을 陷落하였고, 664年 에는 지수신 이 지키고 있던 任存城 이 陷落되었다. 664年 4月에 泗沘城 에서 일어난 叛亂까지 鎭壓되면서 3年 만에 復興 勢力은 全滅하였다.

부여융의 孫子인 부여경이 唐나라 則天武后 臺에 帶方郡王으로 任命된 것을 끝으로 滅亡한 백제 王族은 8世紀 初에 消滅되었다.

한便 《舊唐書》는 建安城이 渤海 에게 吸收된 것을 百濟의 完全한 敗亡이라고 보고있는데, 이는 建安城으로 避難한 少數의 流民까지 念頭에 둔 것이다.

같이 보기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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