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운령 眞興王 巡狩碑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마운령 眞興王 巡狩碑
(磨雲嶺 眞興王 巡狩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國寶
1929年 마운령 神社非 發掘時의 모습. 옆에는 當時 京城帝國對 豫科 部長이자 發掘團長이었던 오다 쇼고 .
種目 國寶 第111號
時代 新羅
住所 咸鏡南道 함흥시 동흥산區域 咸興歷史博物館

마운령 眞興王 巡狩碑 (磨雲嶺眞興王巡狩碑)는 咸鏡南道 리원군 의 마운령에 서 있었다. [1]

歷史 [ 編輯 ]

마운령 眞興王 巡狩碑는 16世紀 末에 發見되어 17世紀 한백겸 이 《東國地理志》에 高麗 尹瓘 의 비로 紹介하였으나, 1929年 최남선 이 咸鏡南道 利原郡 마운령 만덕산 山中에 파묻혀 있던 것을 찾아낸 後 眞興王 巡狩碑 라는 事實을 考證하였다. 只今은 함흥시 사포區域 소나무洞에 있는 咸興本宮 뜰안에 옮겨놓았다.

碑石은 花崗石 으로 네모나게 다듬어서 만들었는데 非몸돌의 높이는 1.36m, 너비는 45cm, 두께는 30cm이며, 갓돌은 배집形式으로 되어 있다. 비에는 앞面에 26字씩 10줄, 뒷面에 25字씩 8줄, 모두 415者의 글이 새겨져 있다. 앞에서 10字, 뒤에서 19者가 깎여 없어졌거나 잘 보이지 않는데 “黃草嶺 巡狩碑”에 依하면 앞의 10字 가운데 7者까지는 알 수 있으므로 結局 393字를 읽을 수 있다. 글씨體는 楷書體 이다.

碑文에는 진흥왕 의 業績과, 邊方을 돌아보는 目的, 그리고 비를 세우게 된 緣由 等이 적혀 있고, 마지막 部分에는 王을 따라갔던 사람들의 出身과 벼슬,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비는 只今 있는 眞興王 巡狩碑 가운데서 碑文이 第一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新羅 第24代 王인 眞興王이 568年 8月에 이곳을 돌아보고 간 것을 記念하여 세운 이 비는 當時의 歷史 書藝 , 吏讀 文 硏究에 貴重한 資料가 되고 있다. [1]

背景 [ 編輯 ]

本來 咸鏡南道 利原郡 冬眠 運試算(雲施山, 俗稱 萬德山) 봉우리 아래에 있었다. 只今은 北韓 咸鏡南道 함흥시 사포區域 소나무洞에 位置한 咸興 本宮(本宮) 本館(本館)에 保管되어 있다. 일찍부터 學者들이 注目해 한백겸(韓百謙)·金正喜(金正喜) 等이 言及했으나 뚜렷한 根據를 提示하지는 못했고, 다만 現地에 살던 강필동(姜必東)李 若干의 記錄을 남겼을 뿐이었다.

그러던 中 1929年 9月에 全的(典籍)調査 일로 現地에 出張나가 있던 최남선(崔南善)李 現地 有志들의 協力을 얻어 本格的으로 調査해 學界에 紹介하면서부터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비의 材質은 花崗巖으로 높이 165cm, 너비 65cm, 두께 約 30cm이며, 앞面에는 10行에 行마다 26字, 뒷面에는 8行에 行마다 25字가 各其 새겨져 있다. 磨滅이 比較的 甚하지 않아 大部分의 글字를 判讀할 수 있다. [1]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韓國民族文化大百科》, 韓國學中央硏究院(1998年)

參考 資料 [ 編輯 ]

이 文書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 (現 카카오 )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配布한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의 內容을 基礎로 作成된 글이 包含되어 있습니다.
  • 「古代로부터의 通信」, 眞興王 巡狩碑, 한국역사연구회 古代史 分科 저, 푸른역사(2004年, 230~23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