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陣營에 착 붙으면 出世길 열리는 ‘이 便한’ 世上|新東亞

陣營에 착 붙으면 出世길 열리는 ‘이 便한’ 世上

[奉達號 便宜店 칼럼]眞짜 ‘守舊’는 누구인가… 運動圈의 ‘까房卷’ 有效期間

  • 奉達號 便宜店主

    入力 2021-07-27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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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光州 카페 社長에게 “너는 어느 쪽(陳永)이냐?”

    • 린치, 解明, 反駁 그리고 背後 캐기

    • X世代의 奇異한 運動圈 負債감과 自我陶醉

    • 公安機關 怯 안 내던 1990年代 學生運動

    • 客觀的 ‘歷史’가 된 神話的 世界觀

    • “過去 걔들이 걔들”이라는 怪異한 論理

    • 旣得權 勢力의 돈키호테 症候群

    1993년 5월 29일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소속 대학생 5만여 명이 서울 안암동 고려대에서 출범식을 마친 뒤 서울 도심으로 진출해 가두시위를 벌였다. [동아DB]

    1993年 5月 29日 韓國大學總學生會聯合(한총련) 所屬 大學生 5萬餘 名이 서울 안암동 고려대에서 出帆式을 마친 뒤 서울 都心으로 進出해 街頭示威를 벌였다. [東亞DB]

    光州에서 카페를 運營하는 自營業者 배훈천 氏가 어느 集會에 參席해 文在寅 政府의 經濟政策을 批判하는 內容의 演說을 했다가 苦楚를 겪었다. 言論이 이를 報道하자 親與(親與) 性向 媒體들이 光州 카페 社長의 ‘숨은 正體’를 云云하며 單純 自營業者가 아니라고 主張했다. 曺國 前 法務部 長官이 이런 記事를 共有하자 電話와 인터넷을 통한 集團 린치가 始作됐다. 結局 裵氏는 카페 營業用 電話를 끊어야 할 程度로 시달렸고 家族과 職員들이 不安에 떨었다고 한다. 우리 社會의 이런 風景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 이제는 새삼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程度다.

    每日 몰려가 린치를 加하고, 解明하고, 反駁하고, ‘저의’를 疑心하고, 過去를 캐고, 背後와 背景을 살피고, 周邊을 探問하고, “너는 어느 쪽(陳永)이냐?” 묻는다. 政治·社會的인 問題나 放送 演藝界 事件은 그렇다 치자. 搜査를 통해 法理와 證據를 다퉈야 할 刑事事件이나 個人的인 訟事에까지 그렇게 한다. 그것을 一種의 正義나 參與라 생각하는 것 같고, 거기에 네티즌 搜査隊라는 이름까지 붙여 行爲를 正當化한다.

    그리하여 勿論 眞實이 드러나는 境遇도 있지만 多數 輿論에 屈服해 于先 謝過부터 하는 境遇도 있고, 엉뚱한 사람이 被害를 보거나, 때로는 抑鬱함을 呼訴하다 極端的 選擇을 하는 境遇마저 있다. 이것도 數年間 우리 周圍에 되풀이돼 온 典型이다. 이러한 行爲들로 인해 우리 社會가 얻는 利益이 클까, 損失이 클까? 設令 共同體의 利益이 훨씬 크고 個人의 損害는 極히 一部라 한들, 百番 讓步해 그렇다 한들, 그것을 ‘甘受해야 한다’는 態度는 果然 옳은 것일까? ‘1萬 名의 公益 앞에 1名쯤이야’ 하는 이런 思考方式은 歷史冊 어딘가에서 確實히 들어본 카랑카랑한 목소리다. 하나는 全體를 위하여, 全體는 하나를 위하여! 歷史는 늘 이렇게 背景만 달리해 反復되고 流典하는구나 하는 얕은 懷疑感마저 갖는다.

    전남대 運動圈이라는 理由만으로…

    광주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자영업자 배훈천 씨(왼쪽)가 7월 2일 자신의 카페에서 정세균 전 국무총리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배씨는 한 집회에 참석해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가 고초를 겪었다. [뉴스1]

    光州에서 카페를 運營하는 自營業者 배훈천 氏(왼쪽)가 7月 2日 自身의 카페에서 정세균 前 國務總理와 對話를 나누고 있다. 裵氏는 한 集會에 參席해 文在寅 政府의 經濟政策을 批判하는 內容의 演說을 했다가 苦楚를 겪었다. [뉴스1]

    배훈천 氏의 演說에 對해 어느 인터넷 媒體에 ‘公開 便紙’라는 副題를 단 批判 칼럼이 실렸다. 光州 살레시오高 敎師라고 自身을 밝힌 서부원 氏의 寄稿文으로, 題目은 ‘그땐 盧武鉉 탓이라더니, 이젠 모든 게 文在寅 탓’이었다. 裵氏의 演說 內容에 나 亦是 全的으로 同意하는 것은 아니고, 徐氏의 칼럼에도 고개를 끄덕인 대목이 있다.

    그런데 徐氏의 칼럼 가운데 “전남대 出身 運動圈이라는 理由 하나만으로 社長님의 主張에 同意하진 못해도 認定할 순 있습니다”라는 대목에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裵氏는 전남대를 卒業했고, 在學 時節 學生運動에 加擔한 적이 있다고 自身을 밝힌 바 있다. 이에 徐氏는 “전남대 出身 運動圈이라는 理由 하나만으로” 그의 主張을 ‘(同意할 수 없어도) 認定할 수 있다’는 態度를 取한다. 이런 思考方式은 大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글을 쓴 徐氏조차 壅塞했는지 “누군가는 얼토당토않다고 나무랄 테지만”이라고 但書를 달았지만, 事實 이런 事故官은 우리 社會 一角에 적지 않게 擴散해 있다. 아니, 특정한 世帶나 集團이 일부러 ‘擴散시키려’ 努力하고 있다고 表現하는 쪽이 適切할 것이다.



    果然 運動圈 出身이라는 理由만으로 많은 것을 一旦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일까? 甚至於 徐氏는 “적어도 運動圈이라면 ‘까房卷(까임방지卷)’을 認定합니다”라고까지 말한다. 學生運動을 하지 않았던 사람, 或은 學生運動을 批判하거나 對蹠點에 섰던 사람은 運動圈 出身을 批判할 資格이 없다는 말로도 들린다. 實際 徐氏는 “(運動圈 出身들이) 고단한 世上살이에 ‘初心’을 잃었다고 해도 敢히 손가락질하진 못한다”면서 “政治權의 ‘86世代’ 運動圈들이 旣得權層으로 轉落했다는 非難이 쏟아지지만, 軍事獨裁政權의 後身인 守舊勢力들과 어찌 比較하겠습니까”라고 主張한다. 그러니까 ‘나도 나쁘지만, 너는 더 나쁜 놈’式 論理라고 要約한다면 지나친 解釋일까. 緋緞 運動圈 論爭뿐 아니라, 이런 思考方式 亦是 우리 社會에 적지 않게 蔓延해 있다.

    이미 다 지난 ‘革命’을 붙잡고

    話題를 돌려, 남우세스럽지만 個人的인 이야기를 하자면, 筆者는 15年 程度 社會運動을 했다. 그中 7年은 北韓 體制를 信奉하는 從北(從北) 運動圈으로 살았고, 나머지 8年 程度는 北韓民主化運動을 했다.

    가끔 原稿 請託을 받거나 言論 인터뷰를 할 때 “전남대학교 總學生會長 出身”이라거나 “主思派 地下組織 出身”이라고 紹介할 때 부끄럽기만 하다. 내가 總學生會長을 해봤자 1年이고, 地下組織 生活을 해봤자 5年 남짓이다. 勿論 言論社에서는 칼럼이나 記事의 訴求力을 높이기 위해 그렇게 하겠지만, 經歷보다 內容으로 勝負(?)할 수는 없는 것일까 自責感을 갖는다. 內容보다 亦是 ‘어떤 사람인가’에 먼저 關心을 갖는 社會的 視線 때문이겠지만.

    가끔 이렇게 批判하는 말도 듣는다. “主體思想을 信奉하다가 轉向해 ‘고작’ 選擇한 것이 北韓民主化運動이었어?” “北韓을 民主化한다고? 그게 可能하기나 해?” 이렇게 批判하시는 말씀. 勿論 거기에 대꾸하듯 一一이 答辯할 생각은 없고, 各自의 생각이니 尊重한다. 그런데 이것을 먼저 말씀드리자. 무언가의 ‘可能性’을 念頭에 두고 社會運動을 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必要하고 切迫한 일이어서 꼭 해야 한다면 하는 것이지, 可能하니까 하고, 不可能할 것 같으니까 지레 抛棄했다면, 우리 社會의 民主化도 果然 可能했을까? 1980年 5月 光州의 市民軍이 어떤 ‘可能性’을 念頭에 두고 끝까지 盜聽을 지켰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 하나 이것도 이야기하자. 南韓을 民主化하겠다고 學生運動을 할 때, 其實 1990年代 學生運動은 民主化運動이 아니라 ‘온 社會의 主體思想化’ 運動에 가까웠지만, 나는 그때 ‘목숨을 건다’는 두려움을 크게 느껴보지 않았다. 學生運動을 하다가 失踪되거나 變死體로 發見된 사람도 있었고, 스스로 죽음으로 抗拒한 同僚도 있었고, 搜査機關에서 拷問이나 苛酷行爲를 當한 先輩도 一部 있었지만, 大體로 大學街는 ‘解放 天國’ 水準이었다. 이따금 校內 押收搜索이 있었으나 大槪 미리 알고 避身했고, 學生會室에는 時局事件 手配者들이 自然스럽게 드나들었고, 오히려 常住하며 宿食했다. 文件이나 大字報, 油印物도 거의 制約 없이 만들었다. ‘一部’ 學生들의 非難이 若干 두렵기는 했으나 敢히(!) 運動圈에 公開的으로 對敵하는 學內 輿論이 1990年代 中盤까지는 없었고, 公安機關이나 政權은 全혀 무섭지도 않았다.

    公安機關에 逮捕되는 일은, 그리하여 運動 經歷이 斷絶되거나 組織이 드러나 活動에 被害를 줄까 걱정했던 것이지, 生命에 威脅을 느껴 두려워했던 것은 아니었다. 拘置所나 矯導所마저 1990年代에는 解放 天國이었다. 監獄에 갔다 出所한 先後輩가 있어 ‘歡迎式’에 參席하면, 劣惡한 受刑 環境에 엄청나게 苦生한 이야기보다, 거기에서도 時局事犯들끼리 獄中 鬪爭을 하며 다양한 冊을 읽고, 出所해 더 熱心히 鬪爭해야겠다고 覺悟를 단단히 다졌다는 痛快한 武勇談이 더 많았다. 甚至於 軍服務를 回避하기 위해 일부러 붙잡혀 實刑을 살기도 했으니까(군대 問題를 整理한다는 뜻에서 그것을 ‘整理鬪爭’이라 했다. 運動圈 核心은 監獄에 가거나 身分이 드러나면 안 되니까, 整理鬪爭은 主로 中間級 運動圈이 擇하는 方式이었다).

    그 時節 우리가 정작 무서워한 對象은 公安機關이 아니라 ‘엄마 아빠’ 아니었을까. 父母의 反對를 除外하고 運動에 制約이나 걸림돌이란 別로 없었다. 1980年代 初盤이라면 모르겠으되, 1980年代 中盤부터 1990年代 中盤까지 學生運動의 風景은 率直히 그랬다. 客觀的 事情이 그러한데 “이 목숨 다 바쳐 鬪爭하리라” 노래하면서 마치 來日 죽을 勇士처럼 두 주먹 불끈 쥐고 每日 悲壯한 노래를 불렀으니(그것도 校內 잔디밭에서 막걸리 마시고 춤추면서), 돌아보면 우리 X世代는 좀 虛張聲勢한 구석이 많았다. 이미 다 지난 ‘革命’을 붙잡고.

    ‘목숨 걸어야’ 했던 北韓民主化運動

    1987년 5월 11일 광주 전남대에서 ‘호남 학생연합건설준비위’ 발족식을 치른 5개대 학생대표들과 전남대생 700여 명이 교내 시위를 하고 있다. [동아DB]

    1987年 5月 11日 光州 전남대에서 ‘湖南 學生聯合建設準備위’ 發足式을 치른 5個大 學生代表들과 전남대生 700餘 名이 校內 示威를 하고 있다. [東亞DB]

    한便 北韓民主化運動을 할 때는 時時刻刻 生命의 威脅을 느꼈다. 正말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緊張感으로 살았다. 北韓民主化運動은 南韓, 海外, 그리고 北韓 內部에서의 運動으로 나뉘는데, 北韓 內部로 들어갈 수는 없으니 亦是 우리 南韓 사람들이 選擇할 수 있는 現場은 南韓과 海外가 된다. 南韓에서 하는 일은 北韓의 劣惡한 人權 狀況을 國內外에 알리면서 關心과 支援을 呼訴하는 일이고, 海外는 主로 中國에 運動家들을 派遣하는 方式으로 活動이 이루어졌다. 中國에서 여러 僞裝 身分으로 生活하면서 脫北者들을 接觸해, 그들이 北韓에 돌아가 祕密裏에 民主化運動을 準備할 수 있도록 돕거나,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北韓 內部 民主化運動家들을 찾아 交流하는 일이었다.

    北韓 內部 運動家들이야 말 그대로, 글字 획 하나 틀림없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自身뿐 아니라 一家親戚 모두의 生命을 擔保로 맡기는 일이다. 이건 굳이 說明하지 않아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에 反해 南韓은 가장 安全한 곳이지만, 여기서도 “죽여버리겠다”는 테러와 脅迫을 隨時로 當했다. 김정일의 妻조카 이한영은 北韓 로열 패밀리의 祕密을 公開했다는 理由로 南韓에서 대낮에 北韓 工作員에게 拳銃 被殺됐고, 내가 일했던 北韓民主化運動 團體에 食칼과 피, 죽은 쥐가 들어 있는 箱子가 配達되기도 했다. 北韓民主化運動家를 毒殺하라는 命令을 받고 南派된 間諜이 逮捕된 일도 있었다. 南韓 內 從北 團體의 숱한 非難과 脅迫은 말할 것도 없고.

    筆者는 北韓 內部 民主化運動 組織을 支援하는 目的으로 海外에 派遣된 적은 없지만, 그렇게 中國에 派遣된 運動家 여럿과는 親分을 갖고 있었다. 中國에서 그들의 活動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南韓에서는 些少한 테러나 脅迫 水準이지만, 中國 邊方에서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더라도 正말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들이 保安을 維持하거나 地下組織을 構築해 나가는 方式은 1970~80年代 우리나라 民主化運動 程度는 未安하게도 名銜조차 내밀지 못할 水準이었다. 1990年代 學生運動이야, 다시 말하지만 그건 그냥 解放區였고.

    勳章처럼 내세워 우려먹고 또 우려먹다

    2019년 10월 12일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일대에서 열린 ‘제9차 사법 적폐 청산을 위한 검찰개혁 촛불 문화제’. [송은석 동아일보 기자]

    2019年 10月 12日 서울 瑞草區 大檢察廳 一帶에서 열린 ‘第9次 司法 積弊 淸算을 위한 檢察改革 촛불 文化祭’. [송은석 동아일보 記者]

    1980~90年代 우리나라 學生運動 一切를 否定하거나, 運動에 參與한 사람들을 人格的으로 貶毁할 생각은 全혀 없다. 내가 쓴 글이 그렇게 誤用될 때, 가끔 씁쓸한 感情을 갖기도 한다. 그런데 勿論 責任은 筆者에게 있지만, ‘지나친 運動圈 偶像化는 이젠 좀 그만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자꾸 擧論하게 된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이야기하자면, “運動圈이라는 理由 하나만으로 認定할 순 있다”는 留意 思考方式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궁금하다. 이른바 그 ‘까임방지卷’의 有效期間은 都大體 언제까地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그토록 憎惡했던 지난날 ‘反共 旣得權 勢力’의 態度와 果然 무엇이 다른지 묻는 것이다.
    나는 社會運動을 했으나 그것을 理由로 내가 어떤 ‘까房卷’을 갖는다고 생각지 않는다. 앞서 紹介한 것처럼 그래봤자 기껏 15年이다. 쪼개서 이야기하면 7年, 8年이다. 人生이라는 기나긴 旅程에서 7年이나 8年은 正말 눈 깜짝할 時間이다. 어디 내세울 만한 그런 時間이 아니다. 많은 것을 抛棄하고 스스로 犧牲하긴 했으나 내가 選擇한 길이니 거기에 一抹의 後悔나 未練, 報償을 바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기껏 (正말 기껏) 2~3年, 或은 4~5年 大學時節에 ‘잠깐’ 學生運動을 했던 사람들이 平生 그것을 勳章처럼 내세워 우려먹고 또 우려먹으며 살고 있으니 가당찮고 가소로운 것이다.

    勿論 그것은 그들의 일이니, 世上은 元來 騙取子(騙取者)의 몫이라 생각하면서, 그렇게 살라고 내버려 둘 일이다. 하지만 問題는 그들이 客觀的 ‘歷史’까지 바꾸려고 하는 點에 있다. 그 時代를 經驗하지 않은 後代의 思考의 뿌리까지 바꾸려 試圖한다. 只今 一部 10~20代의 이야기를 들어보면(혹은 30~40代 年齡層까지도), 1980~90年代 運動圈들이 숨도 쉬기 힘든 獨裁 治下에서, 끽 소리만 해도 잡혀가던 파쇼의 그늘 아래, 목숨 걸고 鬪爭한 줄 안다. 一種의 神話的 世界觀으로 그런 風景을 그려나간다. 하지만 ‘應答하라 1988’ 같은 드라마에도 언뜻 보이듯, 그 時代에도 사람은 살았고, 생각은 다양했다.

    催淚彈이 道路 위를 나뒹굴고 校內에 戰鬪警察이 몽둥이를 들고 闌入하는 渦中에도, 누군가는 돌을 던졌고 누군가는 圖書館으로 갔다. 나는 ‘돌은 던진’ 同志들만 正義라고 생각지 않는다. 한때는 나도 그런 偏狹한 생각을 가진 적이 있지만, 世上을 살며 다양한 사람을 만나 보니 누구나 나름의 意識을 갖고 自己 人生의 主人으로 살았다는 當然한 眞理를 깨닫는 中이다. 그러한 ‘個人’의 조각이 모이고 모여 世上을 이루고 歷史를 만든 것이지 어느 특정한 集團만 歷史를 만들었다 생각지 않는다. 學生運動 모두를 親北이나 從北, 或은 左翼이라 罵倒할 수 없듯, 그 時代에 나름대로 ‘이건 아니야’라고 생각하며 自身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을 “軍事獨裁政權의 後身인 守舊勢力”(살레시오高 서부원 敎師의 表現)이라 생각지 않는다.

    이야기하자면 더욱 具體的인 論證과 說明이 必要하겠지만 1987年 6月 抗爭이 어디 學生運動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일인가(이건 事實 論證도 必要 없는 일이다). 그리고 1987年 以後 ‘民族’과 ‘階級’을 앞세운 學生運動은 우리 社會의 民主的인 發展에 果然 어떤 寄與를 했는가. 寄與도 했지만 害惡도 있었고, 只今 우리 社會가 돌아가는 것을 보면 어쩌면 害惡이 더 큰 側面마저 있다. 世上이 모두 그런 것 아닐까. 音이 있으면 羊이 있고, 우리는 各各의 役割을 正當하게 評價하며 共和(共和)를 이루어나가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벌써 30年, 40年이 지난 일이다. 우리가 그토록 맞서 싸웠던 勢力은 歷史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제는 ‘우리’가 主流이자 主役인 時代가 됐다. 나는 그 무슨 “獨裁政權의 後身”들이 남아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獨裁의 그늘 아래 만들어진 成長과 繁榮의 꿀물을 가장 먼저 들이마시면서 자라나, 大學에 들어가서는 ‘反帝反파쇼民衆革命’을 꿈꾸다, 只今은 그것을 民主化運動으로 자랑하는 사람들이 執權黨 黨首, 國會議員, 長官, 國務總理 그리고 大統領까지 됐다. 只今은 우리 社會의 어엿한 支配權力을 形成하고 있다. 그때의 ‘파쇼 傀儡徒黨 놈들’은 여러 番 물갈이를 거듭해 痕跡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過去에 걔들이 걔들”이라는 怪異한 論理는 都大體 언제까지 써먹으려는 것일까? 緣坐制를 反對한다는 사람들이 이런 일엔 왜 자꾸 封建的 ‘後身’이란 用語를 强調하는 것일까?

    흥미로운 點은 이쪽도 저쪽도 아닌 中間에 있었던 사람들이 異常한(?) 負債感을 느낀다는 事實이다. 서부원 敎師도 “集會에 參與해 팔뚝질하며 口號를 따라 외치는 게 全部”라고 自身의 過去를 回顧한다. 謙遜한 것은 좋으나, 누구나 時代的 狀況에서 自己 나름의 最善을 다한 것이다. 거기에 어떠한 負債 意識을 가질 必要도 없다. 게다가 그런 負債감으로 특정한 勢力을 批判하지 않거나 甚至於 ‘까防權을 갖는다’고까지 생각하는 건, 꽤 危險한 發想이다.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건데, 大體 왜 그래야 하는가?

    “新色깔論은 너무 하지 않습니까”

    좀 逆겨운 사람들은 여기에 便乘하고 寄生하는 사람들이다. 나름의 人生 歷程이야 있을 것이고 쉬이 他人의 人生을 裁斷하고 싶지는 않지만, 기나긴 人生에 기껏 몇 年 程度의 經驗이다. 게다가 이른바 學生運動 經歷者 中에는 오히려 核心 運動圈이 아니었기 때문에 監獄에 간 사람도 있고, 學生運動 期間 내내 總學生會長님, 議長님, 委員長님 等으로 優待받는 環境에만 익숙하다 政治權으로 直行한 사람도 있다. 그 中間에 社會生活의 經驗이란 日淺하다. 그들은 只今도 議員님, 長官님, 總理님, 代表님으로 平生 꽃길을 걷는다.

    여기까지도 그러려니 하지만, 없는 經歷 만들어서 ‘民主化 行世’ 하는 사람들을 보면 씁쓸한 微笑를 짓게 된다. 示威隊 꽁무니에서 步道블록을 깼든, 地下組織 核心 指導者였든 모두가 所重한 經驗과 役割을 한 것이지만, 運動圈 經歷을 誇張되게 앞세우는 사람들을 보면 속으로 그냥 웃는다. 自己 出世길 探索하며 부지런히 눈 굴리다가 어느 陣營에 착 달라붙으면 그다음 出世길이 활짝 열리는 ‘이 便한’ 世上이 됐다.

    그래도 ‘그때 그 世上’보다는 只今 이 世上이 낫지 않으냐 우기면 할 말이 없다만, “이런 世上에 同意하지 않으면 背信者나 守舊勢力으로 罵倒하는 神(新)色깔論은 너무 하지 않습니까” 하는 一介 自營業者의 조그만 抗辯으로 갈음하련다. 자꾸 ‘往年에 내가 말이야’를 들먹이는 사람이야말로 果然 ‘守舊’ 아닐까? 그런 意味에서 보면 筆者도 必是 守舊인데, ‘旣得權 守舊’만큼은 되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努力할 따름이다.

    亦是 가장 큰 問題는 旣得權을 누리고 있으면서 旣得權이 없다고 생각하는, 甚至於 自己들이 아직도 旣得權에 맞서 싸우고 있다고 深刻하게 錯覺하는, 그 대단한 돈키호테 症候群에 있지 않을까? 오늘도 曺國 前 長官은 페이스북에 ‘竹槍’을 올렸다.

    #運動圈 #X世代 #民主化 #陣營論理 #偶像化 #新東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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